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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 이종철 목사

성경본문 : 고전 15:50~15:58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지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정복한 승리자 예수님을 믿고 우리 신앙인들 또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장차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죽음 앞에 절망하는 인간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와 죽음이 쏘는 독침들입니다. 지난 주 내내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은 천안함 침몰로 야기된 46명의 실종자들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실종이 사망으로 바뀔까 두려워하며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은 우리 마음 또한 아프게 하였습니다. 실종자 탐색 과정에서 한 명이 또 죽음에 이르렀고, 그 주변을 수색하던 또 다른 한 어선은 귀환 도중 좌초하여 9명의 생명 또한 사망 또는 실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난 주에는 고 최진실 씨의 동생 최진영 씨 마저 자살하여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정상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운들을 경험했던 두 남매의 비극적 죽음이었기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애달프게 만들었습니다. 우연히 TV에서 최진영 씨의 명패가 포착되었는데 거기에 “聖徒(성도) 최진영”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도 신앙인이었던 듯합니다. 그가 겪었을 인생의 무게와 중압감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기독교가 믿고 있는 부활신앙이 그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누나 최진실 씨의 죽음은 그에게 삶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모습은 단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입술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우리 또한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죽음 앞에 우리는 얼마나 무력한지 모릅니다. 장례식을 치를 때는 그 슬픔과 절망감 때문에 정말 부활을 확신하고 있는 것인지, 또 일상적인 삶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부활신앙이 내 삶을 살아가는 데 도대체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이 죽음의 문제입니다. 종교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떤 식으로든 내어 놓아야 합니다. 각 종교나 사상마다 나름대로의 답들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가 왕자의 길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갔던 이유는 생노병사라는 인간의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석가모니의 한 일화는 불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보여줍니다. 고따미라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큰 부잣집의 안주인이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는데 딱 한 가지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이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소원하다 결국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아들이니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이가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복받친 여인은 죽은 아이를 안고 만나는 사람마다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한 노파가 석가모니에게 찾아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석가모니를 찾아가 죽은 아이를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석가모니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아이를 살려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마을에 내려가 겨자씨 한 줌을 얻어오는데, 그 겨자씨는 이제껏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집의 것을 가져와야 한다.” 석가모니의 말을 듣고 고따미라는 여인은 기뻐하며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겨자씨를 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인은 석가모니가 요구한 그런 겨자씨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온 마을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던 집은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여인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절망과 슬픔을 안고 있으며, 단지 좀 빠르거나 좀 늦거나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죽음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깨닫게 하는 교훈적 도구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달아 그 허무의 인과 관계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게 하는 몽학 선생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죽음들을 목도하며 여러분은 느끼는 바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 변화가 있습니까? 단지 슬퍼하거나 두려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죽음 앞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더 소중하며, 죽음을 넘어 영원한 것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유교에서 바라보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공자의 논어 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자로가 물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 공자의 교훈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알 수 없는 죽음의 문제에 연연하지 말고 삶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유교의 근본 자세입니다. 조상을 섬기고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예의 한 방편일 뿐이지 이것을 조상 귀신을 섬기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민간 신앙이지 정식 유교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런 공자에게도 말년에 죽음이라는 낯선 손님이 한꺼번에 몰아닥쳤습니다. 부인과 자기 아들 이가 죽고, 제자 자로는 위나라 내전에서 전사하였고, 학문의 후계자로 생각하던 안연마저 요절하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쳤도다.”라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현실에서 진리의 길을 가려고 했지만 죽음이라는 거대한 위력 앞에는 절망했던 공자의 모습은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 할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이 있지만 주어진 현실 안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도교에는 장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자기 아내가 죽자 돗자리에 앉아서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웃고 노래하고 있는 장자에게 혜시라는 친구가 평생 같이 살고 아기까지 낳았는데 부인의 죽음에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자 장자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죽을 때 내가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내의 생명과 육체는 원래 없는데서 생겼다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근원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사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멈췄다.” 도교뿐만 아니라 전통적 동양사상은 죽음을 자연의 순환과정으로서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성경 또한 인생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죽는 것은 돌려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죽을 때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현대철학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인간을 정의하기를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절망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죽음은 자기라는 생명에 대한 사형선고입니다. 이런 죽음을 안고 있는 자가 절망하지 않는 것은 비정상적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절망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했는데 가장 위험한 절망은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모르는 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마치 알코올 중독자 같습니다. 술에 취해 있어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제정신 차리는 것이 두렵습니다. 술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이나 이념으로 마치 구원을 받는 것처럼 취해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늘어난 아파트 평수와 배기량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돈 5달러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를 잃은 것에 대해서는 심각해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성경도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죽음과 싸워 이기신 예수

그렇다면 희망은 없는가? 키에르케고르는 신앙에서 그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의 반대는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고 말합니다. 인간 자체 안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죽음에서 교훈을 얻거나, 죽음에 대해 체념하거나, 죽음 앞에 절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서 정면 도전합니다. 창세기로부터 죽음은 인간의 본질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 가운데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우연처럼 들어온 것이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죽음과 정면으로 싸우기 위해서였고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의 부활로만 끝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그를 믿는 자들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를 보면서 우리는 이어서 열릴 풍성한 열매들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믿는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 하는 첫 사건입니다.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15:23) 이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고백할 정도로 실제적인 죽음의 위협들을 경험했지만 그 고난이 그를 좌절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 15장 55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은 어느 인간이 죽음 앞에서 이렇게 담대히 선언할 수 있을까 경탄할 정도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표준새번역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고, 밤을 밝히는 기름처럼 화형을 당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감내했던 것은 바로 이 부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인들이 장례식에서 곡을 해도 시원찮은 데 찬송을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부활의 소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 이유가 장례식에서 찬송을 부르는 신앙인들의 모습이 희한해서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노래하는 그들의 신앙이 너무 대단해보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장례식장에서 전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단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눈물이지, 절망의 눈물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멀리 유학 보내거나 군대에 보낼 때 웁니다.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도 웁니다. 그러므로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인간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이 절망의 눈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곧 다시 부활하여 다시 만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절망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어두움이 우리를 붙드는 손보다 더 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은 힘을 잃었습니다.

부활 신앙의 현재성

문제는 이 부활 신앙이 현재 우리 삶에서도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미래에 있을 부활만 믿고 현재의 삶에서는 죽음 앞에 절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부활신앙이 아닐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정체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기적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는 것과 같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기적은 부활을 미리 보여주는 부활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체하다 4일째 되는 날에 그곳을 방문합니다. 4일이 지났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내가 나는 나사로를 앞에 두고 그의 여동생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11:23) 그러자 마르다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11:24) 마르다의 이 고백은 실상 우리들의 고백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의 재림과 함께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자체로도 대단하다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종말에 대한 믿음조차 확실히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11:25,26) 이 말씀의 강조점은 죽지 않는다, 영원히 산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결코 죽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자도 죽지요. 예수님 말씀의 본질적인 의도는 육신의 죽음이 더 이상 우리의 현재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생의 믿음을 가진 자는 더 이상 죽음이 그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부활을 단지 미래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십니다. 먼 미래의 부활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이 우리 온 현재를 지배하길 원하십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대기업 회장의 아들은 장차 그 기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아들이라는 이유로 그는 지금부터 회장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또 자신 또한 그렇게 믿으며 행세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요청하시는 부활의 현재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부활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사순절이라는 긴 시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이 40일이라는 숫자는 부활절로부터 역순으로 계산하여 얻습니다. 부활이 기준점입니다. 주일은 작은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40일의 숫자 계산에서 빠집니다. 주일은 부활절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주일에는 장례식도 치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성탄절이 아니라 바로 이 부활절로부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날의 크리스마스이브도, 성금요일의 십자가의 수난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구세주라면 우리에게 성인의 한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간이 당하고 있는 절망이라는 고통에서 구원해 낼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비참하게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수석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시 하나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전로마를 뒤집어버렸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믿습니까? 바로 부활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확신하게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는 바로 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이 있고 나서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나 사건이 하나의 줄로 연결됩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생애는 단순히 한 위대한 위인의 삶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충격 앞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되새겨 보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서 창세기가 먼저입니까? 출애굽기가 먼저입니까? 물론 성경 순서나 역사로 보나 창세기가 먼저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가장 먼저는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한 민족을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약속을 하셨는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창세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방이 되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의 가족사가 궁금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기가 창세기보다 먼저요, 부활이 성탄절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태초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빛과 질서와 생명의 충만으로 가득 찬 창조 역사를 보며 이들은 자신들을 애굽의 무의미와 무질서, 고통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처음부터 그대로 재현한 기록이 아닙니다. 부활의 빛에서, 부활의 감격에서, 부활의 그 능력과 은혜를 체험한 자의 눈으로 다시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한 구절 한 구절에는 부활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말씀하지만 그 주된 모티프는 슬픈 애가가 아니라 희망을 담고 있는 복음입니다. 우리는 지난 성 금요일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보냈습니다.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당할 것을 미리 예견하셨습니다. 모든 복음서는 2장이 넘게 길게 예수님의 고뇌에 찬 겟세마네 기도로부터 체포당하심, 제자들의 배반, 심문과 채찍에 맞으심,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조롱을 당하심, 십자가에 높이 달리우시고, 목이 마르고 최후의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아내는 고통을 당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들입니다. 그런데도 성경 기자들은 담담히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고, 또 우리들도 비록 가슴은 아프지만 성금요일 밤을 견디어 냅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기에 예수님의 어떤 고통도 더 이상 절망일 수 없습니다. 비록 부활절과 관련된 말씀들이 성경에 짧게 언급되어 있다할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의 그림자가 전 성경 위에 드리우고 있다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도 이 부활의 빛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그 승리를 알고 게임에 임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녹화방송과 생방송의 차이와 같다 할 것입니다. 생방송은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긴장도 되고 초조합니다.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녹화방송은 그 결과를 알기에 마음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승리로 끝난 경기였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이야기를 거꾸로 돌리며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에게 버림받고, 출세 길에서 한 여인 때문에 좌절하고, 감옥에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힙니다. 이것이 생방송 중이라면 정말 절망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총리입니다.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른 사람의 눈으로 이런 위기들과 굴곡들을 보고 있다면 그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기에 현재의 자기 인생이 더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선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미 승리한 인생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 결과는 승리며 축복이며 영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신앙이라는 것은 그 영광스러운 미래를 미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우리들에게 권고합니다.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견실하고 흔들리지 말라고 합니다. 바람 앞에 선 촛불처럼 흔들리지 말고 견고해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죽음이 쏘는 독침 때문에 위축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부활의 생명력이 우리 삶의 전 영역에 비추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는 다 물러가고 한순간 한순간과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 위에 부활의 기쁨과 능력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따뜻한 봄바람이 대지를 깨우듯 부활의 기운이 우리 민족 위에와 내 인생 위에 불어 얼어붙고 죽었던 것들이 다 살아나는 생명으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는 부활의 빛이 있습니다. 이 빛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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