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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7 04:17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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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ure Guide to Heaven(by Hoseph Alleine, The Banner of Truth)" 의 Chapter1.2의 편역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교리부재의 위기를 생각해 볼 때 1671년에 초판 발행된 이 내용이 얼마나 귀하게 느껴지던지~

'회심'이라 번역되는 Conversion,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repent)데서 그치지 않고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그 전환이 우리로 진정 빛나는 생애를 살게 하기를~

회심(conversion) 2009년 하늘소망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누가 큰 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말한다. 너희들이 돌이켜(converted)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Truly I say to you, unless you are converted and become like children,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마 18:3) 달리 말하면 회심이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회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회심치 않았으면서도 회심에 이른 것처럼 오해하게 하여 천국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마귀의 속임수를 이길 수 있으며, 동시에 회심하였으면서도 회심에 이르지 않은 것인가를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회심에 대한 오해들(mistakes)
마귀는 여러가지 거짓 회심을 가지고 있다. 회심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로 회심했다고 생각케 한다. 다음과 같은 오해들이 그것이다.

1). 회심은 단지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셨느니라”(딤후 2:19)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죄악으로부터 떠나지 않는 사람은 회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고백하지만 행위에 있어서는 그 분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회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역겨운 자요, 불복종하는 자요, 가치 없는 자일 뿐이다(디도서 1:16).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시며 그 삶의 열매가 없는 회심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2). 회심이란 단지 세례를 받음으로 확보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뱃지를 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외적인 세례를 하나님의 은총을 보장하는 회심으로 오해한다. 세례 받을 때 회심한 것이라면 모든 세례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어야 한다. 세례증서는 구원에 있어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회심과 세례가 같은 것이라면 세례증서는 매우 유용할 것이다. 구원 받는 길은 좁은 것이 아니라, 넓은 것일 수 밖에 없다(마 7:13-14) 그것은 들어가기를 애쓰지 않아도 이를 수 있는 길이다(벧전 4:18; 마 11:12; 눅 13:24). 만일 그렇다면 간음자들, 욕하는 사람, 탐욕자, 술취하는 자 역시 하나님의 왕국을 유산으로 받을 것이다(고전 5:11, 6:9,10) 그러나 사도행전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시몬 마구스라는 인물에 관계된 사건들은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3). 회심은 도덕적 의로움을 행하는 것에 있지 않다
아마 우리들 그 누구도 도덕적 의로움에 있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것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았고, 불의를 행하지도 않았으며, 간음을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했고, 또 꼬박꼬박 십일조를 냈다. 그러나 그같이 행했던 그들이 구원을 받았노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마 5:20 ). 바울 역시 회심 전에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로움에 있어 책망할 것이 없었다(빌 3:6). 그러나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 하려고 해도, 하나님은 당신을 죄있다고 정죄하실 것이다. 그것은 그러한 도덕성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천국에 갈 수 있어”라며 스스로의 의로움 안에 머무르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는 인간애를 포함하고, 경건은 도덕성을 포함한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인간애나 도덕성이 회심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다.

4). 회심은 경건의 법칙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경건의 능력은 없으면서도 경건의 모습만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딤후 3:5). 그것은 오래 기도할 수 있고(마 23:14), 금식할 수 있으며, 복음을 기쁘게 들을 수 있으면서도 회심에 이르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막 6:20). 회심자이기 위해서는 교회에 출석하고, 구제하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증거가 있어야 한다.

5). 회심은 교육이나 인간 법들, 혹은 고통에 의해 잠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혹은 고통을 통해, 아니면 자신이 존경하는 어떤 영적 인물에 의해 의로운 길에 몸 담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회심이라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유다 왕 요아스는 그의 아저씨(uncle)였던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었을 때 하나님을 깊이 섬겼다. 그러나 그 영적 스승이 떠났을 때 그는 이내 우상주의로 돌아갔다(왕하 12:2,7,18) 자신이 섬기는 목사와 같은 그 어떤 영적 스승의 개인적 철학을 좆는 것 역시 회심으로 오해될 수 있다.
소결론: 이처럼 회심은 계몽이나, 거짓 확신이나, 미신적 변화나, 부분적 개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주의 도를 버리는 배교자도 한 때 하나님의 따스한 은혜의 빛을 경험할 수 있다(히 6:4). 이방인이었던 총독 펠릭스는 바울을 통해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들은 후 확신 앞에서 떨었다(행 24:25). 헤롯도 한 때 선한 일을 행했다(막 6:20). 그러나 죄의 결과에 대한 확신에 의해 떠는 것과 회심케 하는 은혜에 의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회심치 않은 많은 사람들도 그들의 죄로 인해 양심에 찔림을 받아 괴로워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을 회심을 위한 확신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양심의 찔림이 회심일 수 없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악한 길과 악한 동료들을 멀리하며, 어떤 특별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절제와 공손과 예의바름에 좀 이르렀을 때 자신들을 진정한 회심자라고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명화 된 것과 거룩케 되는 것 사이를 오해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회심에 이르게 하는 시발점일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천국으로부터 멀지 않았다가 다시금 멀어진다. 양심이 그들을 채찍질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들으며, 그들의 즐거운 죄들을 억누른다. 그러나 그러다가 이내 그들은 죄를 짓는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스라엘 처럼 죄로 인한 환난이 끝나면 하나님을 잊는다. 양심은 다시 무디어진다. 인간 스스로 죄를 잊고, 세상의 타락들로부터 도망하려 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그것이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회심의 기초이다. 우리가 납을 아무리 잘생긴 나무나 동물이나 사람의 모양으로 만든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납일 뿐인 것처럼, 인간도 가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 같지만, 그의 육체적 욕망을 지닌 타락한 인간으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뿐이! 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잃어 버린 사람일 뿐이다. 뉘우치고 회심해야 한다(repent and be converted) 우리의 죄를 끊어 버려야 한다. 용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위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자신을 그 분에게 내어 드려야 한다. 거룩함 안에서 그분과 함께 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2. 회심의 본질(The nature of conversion)
회심은 마음과 삶의 전적인 변화에 있다.

1). 회심의 주체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시다.
성경은 회심에 대해 성령의 거룩케 하심(살후 2:13),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이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성부 성자의 역할을 제외시키는 것은 아니다(벧전 1:3, 행 5:31, 사 9:6) 그럼에도 이 회심케 하는 사역은 원리적으로 성령에게 돌려져 있으며, 우리는 “성령에 의해 난 자”(요 3:5-6) 되어진다.
그렇기에 회심은 인간의 힘을 넘어선 것이다(요 1:13).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회심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최종적으로 구원될만큼 회심하기 위해서는 회심을 당신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이요, 새로운 창조이며, 전능자의 사역이시기 때문이다(엡 2:1, 갈 6:15, 엡 2:10; 엡 1:19). 만일 당신이 처음 출생했을 때 지녔던 선한 본질과 온순함과 순수한 성품 보다 더 나은 것을 가지는 변화를 회심했다고 느낀 이후에도 경험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진정한 회심에 이른 것이 아니다. 회심은 초자연적 역사이기 때문이다.

2). 회심의 효력있는 동기(cause)는 내적이며 동시에 외적이다.
가. 회심의 내적인 동기(cause)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행한 의로움의 일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구하신 그분의 은혜에 의한 것”이며 ‘성령의 새롭게 하심에 의한 것’이다(딛 3:5). 우리는 그 분에 의해 선택되었고, 성화로 불려졌다(엡 1:4) 하나님은 혐오할만한 충분한 것들을 우리 가운데서 발견하신다. 또한 그분의 사랑을 일으킬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신다. 그러나 우리를 회심에 이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나. 회심의 외적인 동기는 복되신 예수님의 중재이다.
예수님은 아직 믿지 않는 선택자들을 위해 중재하신다(요 17:20). 모든 회심자는 그 분의 산고(birthpain)의 열매이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모든 고난은 우리를 낳기 위한 산고이다. 그 분은 완성하신 성화를 우리에게 주신다(고전 1:30). 그 분은 그 자신을 거룩케 하셨다. 희생제물로서 구별하셨다. 그래서 우리로 거룩케 하셨다(요 17:19). 만일 당신이 회심한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당신은 당신이 누구에게 속했는가 알게 된다. 이후 사탄이나 죄가 우리를 고소할 수 없다. 그것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회심의 도구는 교회의 사역이며 말씀이다.
가. 회심의 도구는 교회의 사역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해 너희를 낳았다’(고전 4:15)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사람들의 눈을 열기 위해,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사람들이다(행 26:18). 사역자들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보이시기 위해 사용하는 종들이다(행 16:17). 회심은 그들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다.

나. 회심의 진정한 도구는 말씀이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의해 얻어진 존재들이다. 말씀은 눈을 밝게 하며, 영혼을 돌이키게 한다(시 19:7,8). 그것은 우리로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딤후 3:15). 만일 우리가 씻음을 받는다면 그것은 말씀에 의해서이다(엡 5:26).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에 의해 회심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목에 매고, 손에 쓰고, 가슴에 두어야 한다. 그것으로 우리를 인도케 해야 하고, 잘 때 그것으로 지키도록 해야 하며, 깰때 그것으로 당신과 말하도록 해야 한다(잠 6:21-22). 회심치 않은 사람은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그것이 강력하게 선포되는 곳으로 모여야 한다. 말씀 안에서 성령의 오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무릎으로 설교로 다가서야 한다. 설교는 기도와 눈물에 의해 물주고 묵상에 의해 가꾸어지지 않으면 번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회심은 전인적 변화이다.
이 회심의 변화는 전인에게 미친다. 육적이었던 사람은 회심 이후 분명 어떤 좋은 도덕성을 지니게 된다. 그 회심에 의한 도덕성의 변화는 단순히 낡은 빌딩을 보수하는 식이 아니다. 회심은 모두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옷 덧감을 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심과 함께 거룩은 자신을 그 분의 힘과, 원리들과, 행위들로 함께 짜지도록 한다(knited).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직물이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며 새 피조물이다. 모든 것들이 새 것이 된다(고후 5:17). 회심은 깊은 일이며, 마음의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전인에 해당하는 것이며, 마음과 몸의 신체의 일부들과 전 생애의 동작들에 연장되어진다.

가. The mind
회심은 판단의 균형을 뒤집는다(turn). 그래서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이 이전의 모든 육적이고 세상적인 관심들을 능가한다. 그것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한다. 전에는 그 자신 안에서 그 어떤 위험도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어지만 이제는 은혜의 능력에 의해 새롭게 됨이 없이는 그 자신이 잃어 버린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행 2:37). 그는 죄 때문에 그 자신을 혐오하는 존재가 된다(롬 7:15). 그 자신에게서 거의 죄를 보지 못하고, 회개를 위한 그 어떤 문제도 찾지 못했던 이가 그 마음의 썩음을 보며, 그 절망적이고 깊은 오염을 보게 된다. 뿌리와 가지 모두가 썩은 그 자신을 보게 된다(시 14:3; 마 7:17-18) 이제까지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그 어떤 아름다움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다. 모든 것을 팔아 이 밭을 사려 한다. 그리스도는 그가 구하는 진주이다. 그는 이제 새로운 빛, 다른 마음의 사람이며, 다른 판단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
회심은 방법들과 목적에 대한 의지의 경향을 바꾸어 놓는다. 회심은 의지의 경향들을 수정한다. 그 사람은 새로운 목적들과 디자인들을 지니게 된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모든 것 위에 둔다. 그는 이것에서 그 자신을 더 행복한 사람이라 셈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헌신적이고, 그 분에게 영광을 가져 오는 것을 더 행복한 것으로 여긴다.
선택 역시 바뀐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복이라 말한다. 그리고 거룩을 하나님에게로 이끄는 방법들로 말한다. 그는 예수님을 그의 주인으로 선택한다. 그는 단지 폭풍과 같은 고난 때문에 주께 억지로 나아가게 되거나, 그 어떤 필요 때문에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자유롭게 나아간다. 두려움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지옥보다는 그리스도를 택하는 편이 낫겠다는 식으로 택하는 것 아니다. 그가 거룩을 그의 길로 택하는 것은 필요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하나님의 증언들인 말씀은 매임이 아닌 유산일 뿐이다. 짐이 아닌 복일 뿐이다(요일 5:3). 그는 쓴 약을 먹듯이 거룩을 취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이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한다. 보는 것과 마음에 두는 것에 있어 그렇게 한다.
회심은 애정의 성향을 바꾸어 놓는다. 그의 최고의 바람은 금을 좆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좆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은처럼 찾는다. 그는 감추인 보화처럼 그것을 파낸다. 그는 위대하기 보다는 자비롭기를 원한다. 가장 배운 사람이기보다, 유명한 사람이기보다, 번영한 자이기보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육적일 때에는 그는 존중되어지기를, 부요함에 뒹굴거리기를, 즐거움 가운데 수영하기를, 빚이 갚아지는 것에서 행복을 누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어조가 바뀐다. ‘비록 내가 가난하고, 경멸되어진다 해도, 나의 타락이 정복되어진다면, 은혜의 수단을 지녔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졌으면, 내 자신을 복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텐데’라고 말하게 된다. 과연 우리 영혼의 언어는 무엇인지?
그의 즐거움들은 변화된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가운데 그분의 공동체의 즐거움 안에서, 그분의 백성들의 번영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의 관심들 역시 크게 수정된다. 그는 한 때 세상을 위해 마음을 향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외침은 ‘구원 받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할까?”가 된다(행 16:30). 그의 지극한 관심은 어떻게 그의 영혼을 보존할 것인가에 있다. 이전에 그는 그의 저택, 명성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어떤 것도 고통과 가난, 불명예 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것들은 하나님의 불명예와 불쾌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지극히 신중하게 걷고자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잃는 것은 그의 가슴을 찢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그의 유일한 파멸로 본다. 이그나티우스는 “나의 사랑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고 했고, 어거스틴 역시 “나로 당신을 안게 하소서. 오 하늘의 신랑이시여. 나로 당신을 소유하게 하소서”라고 말하였다.
심사숙고 하여 당신의 일반적인 애정의 흐름들에 주의해 보라. 그것들이 모든 다른 관심들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지 물으라. 따스한 사회나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도 갑작스럽고 강한 애정들을 표현하곤 한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분위기 속에서 성화된 이들 조차 자주 애정의 분발 없이 지내곤 한다. 우리는 판단과 의지가 내가 살고 있는 따스한 사회나 가정의 영향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위한 결정인지를 물어야 한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애정을 들여 회심자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을 신실하게 추구한다면, 기대되어지는 만큼 그 변화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변화가 우리의 생명을 건져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확신해도 된다.

나. 몸의 부분들(the members;지체들)
이전에는 죄의 도구들이었던 몸의 부분들이 회심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성전의 기구가 되어진다. 이제 그는 그것들로 성화와 영예를 위한 도구로 삼는다. 성품과 고상함과 절제에 있어 그러하다. 그는 그것들을 주께 드린다.
한 때 방황하였던 눈, 음탕한 눈, 오만했던 눈, 탐심의 눈이었으나, 이제 죄로 인해 우는 눈이 되며 그 분의 말씀을 읽는 눈이 된다. 그는 자비의 목표를 구하며, 그분에 대한 섬김을 위한 기회를 구한다.
귀, 한 때 사탄의 부름에 늘 열려 있던, 늘 더러운 말을 즐겼던 귀, 천박한 말을 맛있게 듣던 귀가 이제 그리스도의 집 문을 향해 밀치며 나아간다. ‘말씀하십시오 주님, 당신의 종이 듣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며 회심자의 귀는 비를 기다리듯이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머리, 세상의 디자인들과 다른 것들로 꽉 찼던 머리는 이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연구로 가득찬다. 그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로부터 도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슴, 더러운 욕망들로 가득했던 그의 가슴은 이제 향을 태워드리는 제단이 되어진다. 신적인 사랑의 불이 계속하여 타오르는 제단이 되어진다. 거기로부터 매일의 기도와 찬양의 제사가 드려지는 제단이 되어진다. 거룩한 바람들과 기도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올려진다.
입, 입은 생명의 우물이 되어진다. 그의 혀는 정제된 은 같고, 그의 입술은 많은 사람들을 부양한다(feed). 은혜의 소금이 그의 말을 맛나게 하듯이, 타락을 질책한다(골 4:6). 그의 더러운 대화, 아첨, 자랑, 욕설, 거짓, 맹세, 험담을 깨끗케 한다. 열린 무덤과 같았던 그의 목구멍은 이제 기도와 거룩한 대화라는 달콤한 숨결을 내 보낸다. 그의 혀는 그의 창조주에 대한 찬양을 위한 은 나팔이다.

다. 삶과 행동(The life and practice)
새 사람은 새로운 길(course)을 걷는다(엡 2:2-3). 그의 대화는 하늘에 있다(빌 3:20).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실 때, 그의 마음에 그의 법을 쓰실 때, 그는 이내 그 분이 율례와 법도를 좆는다. 그의 판단을 지킨다.
죄가 그 안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것이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는 거룩을 향한 그의 열매를 지니고 있다. 그가 많은 오점이 있다 할지라도, 율법과 예수님의 삶은 그가 여전히 그의 삶의 양식(패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는 모든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해 거짓없는 존경을 보낸다. 그가 의도한다 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견고치 못함) 그의 영혼의 짐이며 눈의 먼지와 같아서 적더라도 결코 작지 않은 문제로 여긴다.
신실한 회심자는 교회와 집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기도하는 무릎으로는 성도요, 가게에서는 속이는 장사치인 이중적 사람이 아니다. 그는 율법에 말하지 않는 민트와 박하까지 십일조를 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비와 심판이라는 더 무거운 율법의 문제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경건한 체 하지 않을 것이지만 동시에 도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그의 죄들로부터 돌아서며, 모든 하나님의 법도들을 지킨다. 그것이 완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람과 열심에 있어서만은 신실하게 그 어떤 것도 지키려 한다. 이제 그는 말씀에서 기쁨을 찾고 그 자신을 기도를 향하여 두며, 그의 손을 펴서 배고픈 자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는 의로움에 의해,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보임으로 그의 죄악들을 끊어낸다(단 4:27). 그는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선한 양심의 의도를 지닌다(히 13:18). 싸고 쉬운 의무들만을 지키는 부부적 순종이 아닌, 순종에 의해 철저한 이들이 되고자 한다.

5). 회심은 죄, 사탄,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의 의로움으로부터의 돌이킴이다.
가. 우리는 죄로부터 돌아선다.
회심한 사람은 죄에 대해 적의(enmity)를 지닌다. 대부분 그 자신의 죄이다. 죄는 그의 분노의 대상이다. 그의 죄는 그의 슬픔을 증가시키며, 그를 찌르고 상하게 한다. 그는 그것을 옆구리의 가시로 느끼며 그 눈의 가시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그는 이내 죄를 제거하려 할 것이다. 죄를 제거할 수 있다면 심지어 재난까지도 선택할 것이다. 회심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여 가슴에 품고 기르고 함께 했지만, 회심한 이후 죄는 역겨운 징그러운 것이 되어진다. 구원 받으리만큼 변화된 사람은 죄의 위험 뿐만 아니라, 더러움을 확신한다. 그래서 죄와 전쟁을 벌인다. 그는 너무 자주 좌절되지만 결코 그 동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 무기를 내려 놓지 않으려 한다. 그가 몸에 숨이 붙어 있는 한 그럴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회심하지 않은 것이다. 재갈 물리지 않은 혀, 기호들에 너무 탐닉하는 것, 악한 동료를 지닌 것, 기도와 하나님 말씀에 대해 경시하는 것은 육적인 것이요, 회심의 증거일 수 없기에 당신은 거듭나야하며 변화되어야 한다.

나. 우리는 사탄으로부터 돌이킨다.
회심은 강한 자 마귀를 포박하고, 그의 무장을 해제하며, 그의 유혹들을 내던지게 하여,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전환시킨다. 마귀는 더 이상 죄인이었던 그를 그의 죄된 동료들과, 죄된 게임들, 더러운 즐거움들로 이끌지 못한다. 그는 거짓을 즐기지 않으며, 가족에 대한 의무들을 이행하고자 하며, 적당히 살라는 마귀의 명령에 빠지지 않는다. 또 다른 주인에게 회심했을 때 그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사단은 가끔 그의 발에 덫을 놓을 수 있지만, 그는 더 이상 의도적인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사단의 올무와 미끼에 주의한다.

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돌아선다.
진정한 믿음을 지니기 전에는 그는 세상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는 물질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명성을 우상화 하거나, 하나님 사랑보다 쾌락을 사랑하였다. 그는 하나님께만 돌려져야 하는 자랑과 확신과 애정을 보이는 것들에 두었다. 세상이 인간을 섬겨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이 세상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회심 후, 그는 세상의 것들을 그의 발 아래 두게 된다.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시도록 한다. 그의 즐거움과 만족이 세상에 있었으나 이제 그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구한다. 종교는 더 이상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변덕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의 중심적 관심사이다. 그는 그의 친구와 그의 육체를 즐겁게 하기보다,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리려 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세상을 다 섬기고 날 때 까지 바깥에서 기다리셔야 하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그리스도와 비교하여 그의 부모의 가치관과 심지어 그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진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세상이 당신을 지배해 나가게 하지는 않는지, 그 분 안에서 보다 세상에서 더 진정하 기쁨과 만족을 취하지는 않는지, 세상이 당신의 마음에 있을 때 육체적인 즐거움들로 둘러쌓일 때 더 편안함을 느끼지 않는지’ 물어야 한다. 기도와 묵상, 경배 가운데 참여하는 것에 지고의 가치를 두는 것이야말로 회심한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 건강한 회심은 그리스도께서 지고(supremacy)가 되시는 것이다. 그분의 애정을 가장 값진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의 마음에 조각되는 것이다.

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로움으로부터 돌아선다.
회심전에 사람들은 그 자신의 무화과로 자신들을 가리고자 했다. 그러나 회심 이후 그는 그 자신의 의를 더러운 넝마로 여긴다. 그는 그것을 내어 던진다. 그는 이제 심령이 가난하다. 그의 모든 재고 목록은 “가난하며, 비참하며, 난파되었으며, 소경이며, 헐벗었다”이다. 한 때 그가 우상시했던 스스로의 의로움은 단지 더럽고 상실한(lost) 것이 된다. 그는 모든 의무에 있어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그를 의롭다 하고 그의 행함을 성화케 하기 위해서 주님을 필요로 한다. 그는 그 분 없이 기도할 수 없다. 그 분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회심한 사람은 그 분 없이는 그 자신을 아무 것도 행한 바 없는 자로 자신을 받아 들인다. 그는 마치 나무 뿌리가 견고함과 양분을 위해 땅에 박혀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하고 서있다.

6) 우리의 회심의 대상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진정한 회심자는 그의 모든 충분하고 영원한 복됨으로서 성부,성자, 성령을 받아 들인다. 한 인간은 그의 마음이 진정으로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을 둘 때 비로소 성화되어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십니다”(시 62:2)라는 고백이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법들과 명령들, 그리고 그분의 길을 사랑한다. 그것들을 삶의 지표로 삼는다. 하나님의 판단을 가장 의롭고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 들인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요청들을 자유 가운데 선택한다. 그는 거룩의 미점들(beauties) 안에서 즐거워 한다.

맺음말:
이 회심은 바울과 같이 때로는 갑작스럽고, 단회적이며(singular), 감정적이고, 즉각적인 변화에 의해 이루어졌다(transforming). 동시에 어떤 이들은 예배와 성경공부 교제에 참석하며, 그 과정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조용히 하나님의 왕국에 미끄러져 들어오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둘 다의 방법으로 이 회심을 허락하신다.
이제 당신이 진정 회심한 사람인가 여부를 알고 싶다면, 이제 스스로 물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가? 무엇이 당신의 가장 큰 만족인가?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그 신적인 뛰어남이야말로 구원의 기초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가? 그분의 자비의 창고로 나아가며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그의 안식을 찾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회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내가 어디로 가리이까?’가 회심한 사람의 증거이다. 이것을 심령을 경험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같은 경험은 하나님만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소망교회 김희승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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