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
창세기 41, 37-57
지난 시간 창세기 41장은, 억울하게 감옥생활 하는 요셉을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에 대한 반전으로 시작했습니다. 41, 1절 말씀을 보면,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꾼 사건은, 요셉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창세기 40, 마지막 절 23절에 요셉의 도움으로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요셉을 잊었더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바로 다음, 창세기 41, 절에서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자신이 꾼 두 가지 꿈 때문에 그 마음이 심히 번민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유명한 점술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꾼 꿈을 말하였지만, 그들이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이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만 이 년 동안이나 그리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기다리는 요셉에게 있어서, 만 이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은 요셉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요셉의 인생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요셉의 인생에 개입하시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바로가 꿈을 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을 애굽의 점술가, 모든 현인들조차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번민하는 바로에게 옥에 갇힌 요셉을 보내시게 됩니다. 그것도 술 맡은 관원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깨우시고, 그 마음을 움직이신 겁니다.
요셉이 드디어 바로의 부름을 받습니다.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다 해 줍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가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 왕의 그 말은 들은 요셉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종의 신분이요, 옥에 갇혔던 죄수의 신분인 요셉이 애굽 왕 바로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입니까? 기적 같은 기회니다. 요셉은, 어렵게 찾아온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절박한 상황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높인다고 해서, 바로 왕이 뭐라 하겠습니까? 절박한 상황은 요셉이나 바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바로는 요셉이 뭐라 하든지 요셉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요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요셉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권자로 고백합니다. 16절과 25절 두 번에 걸쳐서 거듭 고백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요셉이 바로에게 이르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 그러면서 말합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요셉은, 바로에게 자기 인생의 주권자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뿐 아니지요. 하나님은 바로 왕의 주권자도 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다스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놀라운 신앙고백이요, 선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습관적으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 중에, 가로챌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2,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고 칭찬하고 축복하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때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때가 있습니다. 삼가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로 기도할 때, 늘 기도하지 않습니까?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 평생, 수고하고 일한 후에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10). 결코 쉽지 않는 신앙입니다.
제가 아직 젊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우리 목회자들이 평생을 목회하고 은퇴하거나 或은 목회한 지 20, 25년 혹은 30년이 되었을 때, 교회에서 성역 몇 주년 기념행사를 합니다. 또 은퇴하거나 원로목사 추대할 때, 祝辭라는 표현도 쓰지만 요즘 보면, 부쩍 찬하사(기릴 贊, 경축하다는 賀, 말씀 辭)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축하(讚賀)라는 말은, 왕(王)이나 신(神)을 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목회자들이 ‘讚賀(축하)’라는 용어 사용하기를 예사롭게 하고 있습니다. 삼가 조심스럽습니다.
목회자들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노회를 가보아도 그럽니다. 연합회장 1년 봉사하고 나면, 당연지사로 공로패를 줍니다. 수고야 두말할 것 없지요.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바른 신앙적인 자세인가?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한 것도,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누군가는 이와 같은 겸양의 신앙의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17, 9말씀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의 주권자 되심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신 주권자도 하나님이시오, 애굽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도 하나님이심을 선포했을 때, 어떤 결과가 요셉에게 주어졌습니까?
본문 38말씀을 보십시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합니다. 바로가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된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도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을 높인 요셉도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요셉을 바로나 그의 모든 신하들 중 그 누구 한 사람도 업수이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그리고는, 바로가 구체적으로 요셉에게 나라의 권좌를 줍니다. “내가 너를 온 애굽 땅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노라.”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웠습니다.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금 사슬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또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요셉은, 명실상부한 애굽의 주권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여 주신 겁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에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성취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41장 후반부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임을 받은 요셉의 삶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 41장에서 그것이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전개될 말씀 속에서 계속해서 점증적으로 드러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지배자가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세상적인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애굽 온 땅의 백성들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을 죽이고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者였습니다. 흉년 든 기근의 때, 모든 백성들을 살리는 자였습니다. 애굽 땅의 백성만 아닙니다. 57말씀을 보십시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늘 그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가? 갈등이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합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권력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 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하셨습니다(마 20, 20-28).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무슨 말씀입니까? 요셉은, 큰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힘과 총리라는 자리를, 백성들을 살피는 데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자리에 앉거나 오르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자마자, 온 애굽 땅을 순찰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길을 열어줘야 올라갑니다.” 그 다음 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상에 가서도 올랐다가 바로 내려와야 합니다.” 정상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곳은, 머물거나 거기서 안주할 곳이 전혀 못 됩니다. 그곳은, 심한 바람이 부는 곳입니다. 극한 추위가 엄습하는 곳입니다. 돌발적인 기상이변이 늘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공을 자기만족이나 지배나, 통치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개혁자 존 칼빈이 직업소명설을 주장했습니다(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이다, 콜링이다. 소명이다) 직업을 가리켜 흔히, 우리는 생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직업이라 합니다(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이 소명이다는 말은, 직업이 생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직업은, 가족들의 생계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돈 때문에 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하신 전영창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직업선택십계명이란 교훈은 유명합니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돈의 노예로 살지 말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로 가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으로 가라(명예를 추구하지 말라). 앞을 다투어 모이는 곳은 절대로 가지 마라(변두리로 가라, 가장자리로 가라).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라(개척자정신으로 일하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주류적인 삶을 추구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변방으로 나아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쉽지 않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지혜가 있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창립자인 빌 게이츠가 34년 만에 하버드 대학을 명예졸업하면서, 한 연설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버드 가족 여러분, 여기 있는 여러분은 전 세계의 훌륭한 두뇌 집단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교직원, 동문, 학생, 하버드의 후원자들은 이곳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하버드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할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하버드의 지성을 사용할 수 있나요?
하버드 학생들은 전 세계의 빈곤, 기아, 깨끗한 물 부족, 학교 밖에 방치된 소녀들,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는 아이들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적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미사여구의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철학을 가지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하버드에 입학했을 때 자랑스러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 운동장에 있는 우리는 재능, 특권, 기회 면에서 축복받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제한이 없습니다. … 저는 졸업생 모두가 심각한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며, 전문가가 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남을 섬기는 지성인이 되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기고백적인 권면입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제도도 만듭니다. 7년 풍년에 곡식을 저장합니다. 7년 흉년에 그것을 내어 베풉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세우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겠습니다(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섬김의 자리로 세우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교자 정릉교회 박은호 목사 http://www.jeongneung.org
창세기 41, 37-57
지난 시간 창세기 41장은, 억울하게 감옥생활 하는 요셉을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에 대한 반전으로 시작했습니다. 41, 1절 말씀을 보면,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애굽 왕 바로가 꿈을 꾼 사건은, 요셉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창세기 40, 마지막 절 23절에 요셉의 도움으로 복직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요셉을 잊었더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바로 다음, 창세기 41, 절에서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자신이 꾼 두 가지 꿈 때문에 그 마음이 심히 번민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유명한 점술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꾼 꿈을 말하였지만, 그들이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의 술 맡은 관원은 요셉이 자기에게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습니다. 만 이 년 동안이나 그리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기다리는 요셉에게 있어서, 만 이 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은 요셉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요셉의 인생이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요셉의 인생에 개입하시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바로가 꿈을 꾼 것입니다. 그런데, 그 꿈을 애굽의 점술가, 모든 현인들조차도 해석하지 못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번민하는 바로에게 옥에 갇힌 요셉을 보내시게 됩니다. 그것도 술 맡은 관원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의 기억을 깨우시고, 그 마음을 움직이신 겁니다.
요셉이 드디어 바로의 부름을 받습니다.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나아갑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가 꾼 꿈 이야기를 다 해 줍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내가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 왕의 그 말은 들은 요셉이 어떻게 행동합니까?
종의 신분이요, 옥에 갇혔던 죄수의 신분인 요셉이 애굽 왕 바로를 만나는 일이 어찌 쉬운 일입니까? 기적 같은 기회니다. 요셉은, 어렵게 찾아온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절박한 상황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높인다고 해서, 바로 왕이 뭐라 하겠습니까? 절박한 상황은 요셉이나 바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바로는 요셉이 뭐라 하든지 요셉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요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요셉은 자기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권자로 고백합니다. 16절과 25절 두 번에 걸쳐서 거듭 고백합니다.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 “요셉이 바로에게 이르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 그러면서 말합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32)
요셉은, 바로에게 자기 인생의 주권자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뿐 아니지요. 하나님은 바로 왕의 주권자도 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다스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증언합니다. 놀라운 신앙고백이요, 선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습관적으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무의식 중에, 가로챌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2, 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사람을 격려하고 칭찬하는 일은 귀한 일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격려하고 칭찬하고 축복하는 일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때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때가 있습니다. 삼가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로 기도할 때, 늘 기도하지 않습니까?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기도합니다.
우리가 한 평생, 수고하고 일한 후에 삼가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으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 10). 결코 쉽지 않는 신앙입니다.
제가 아직 젊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우리 목회자들이 평생을 목회하고 은퇴하거나 或은 목회한 지 20, 25년 혹은 30년이 되었을 때, 교회에서 성역 몇 주년 기념행사를 합니다. 또 은퇴하거나 원로목사 추대할 때, 祝辭라는 표현도 쓰지만 요즘 보면, 부쩍 찬하사(기릴 贊, 경축하다는 賀, 말씀 辭)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축하(讚賀)라는 말은, 왕(王)이나 신(神)을 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 목회자들이 ‘讚賀(축하)’라는 용어 사용하기를 예사롭게 하고 있습니다. 삼가 조심스럽습니다.
목회자들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하다못해, 노회를 가보아도 그럽니다. 연합회장 1년 봉사하고 나면, 당연지사로 공로패를 줍니다. 수고야 두말할 것 없지요.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바른 신앙적인 자세인가? 되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수고한 것도,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누군가는 이와 같은 겸양의 신앙의 전통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누가복음 17, 9말씀입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의 주권자 되심을 높였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신 주권자도 하나님이시오, 애굽을 통치하시는 주권자도 하나님이심을 선포했을 때, 어떤 결과가 요셉에게 주어졌습니까?
본문 38말씀을 보십시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합니다. 바로가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된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도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을 높인 요셉도 존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요셉을 바로나 그의 모든 신하들 중 그 누구 한 사람도 업수이여기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그리고는, 바로가 구체적으로 요셉에게 나라의 권좌를 줍니다. “내가 너를 온 애굽 땅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노라.”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웠습니다.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혔습니다. 금 사슬을 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또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
요셉은, 명실상부한 애굽의 주권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높여 주신 겁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에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성취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창세기 41장 후반부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높임을 받은 요셉의 삶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 41장에서 그것이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전개될 말씀 속에서 계속해서 점증적으로 드러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지배자가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세상적인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애굽 온 땅의 백성들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을 죽이고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者였습니다. 흉년 든 기근의 때, 모든 백성들을 살리는 자였습니다. 애굽 땅의 백성만 아닙니다. 57말씀을 보십시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 늘 그들 가운데 누가 더 높은가? 갈등이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무엇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베대의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말씀합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권력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 누르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 하셨습니다(마 20, 20-28).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무슨 말씀입니까? 요셉은, 큰 권력자가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힘과 총리라는 자리를, 백성들을 살피는 데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자리에 앉거나 오르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자마자, 온 애굽 땅을 순찰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산악인 박영석 대장이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길을 열어줘야 올라갑니다.” 그 다음 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정상에 가서도 올랐다가 바로 내려와야 합니다.” 정상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곳은, 머물거나 거기서 안주할 곳이 전혀 못 됩니다. 그곳은, 심한 바람이 부는 곳입니다. 극한 추위가 엄습하는 곳입니다. 돌발적인 기상이변이 늘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공을 자기만족이나 지배나, 통치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개혁자 존 칼빈이 직업소명설을 주장했습니다(모든 직업은, 하나님께서 주신 천직이다, 콜링이다. 소명이다) 직업을 가리켜 흔히, 우리는 생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을 직업이라 합니다(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이 소명이다는 말은, 직업이 생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직업은, 가족들의 생계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돈 때문에 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하신 전영창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친 직업선택십계명이란 교훈은 유명합니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돈의 노예로 살지 말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하나님의 부르심의 자리로 가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으로 가라(명예를 추구하지 말라). 앞을 다투어 모이는 곳은 절대로 가지 마라(변두리로 가라, 가장자리로 가라). 장래성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라(개척자정신으로 일하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주류적인 삶을 추구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변방으로 나아간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쉽지 않는 교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지혜가 있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창립자인 빌 게이츠가 34년 만에 하버드 대학을 명예졸업하면서, 한 연설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버드 가족 여러분, 여기 있는 여러분은 전 세계의 훌륭한 두뇌 집단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교직원, 동문, 학생, 하버드의 후원자들은 이곳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요? 하버드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할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하버드의 지성을 사용할 수 있나요?
하버드 학생들은 전 세계의 빈곤, 기아, 깨끗한 물 부족, 학교 밖에 방치된 소녀들,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는 아이들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적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미사여구의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철학을 가지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제 어머니는 제가 하버드에 입학했을 때 자랑스러워 하셨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더 많이 하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 운동장에 있는 우리는 재능, 특권, 기회 면에서 축복받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제한이 없습니다. … 저는 졸업생 모두가 심각한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며, 전문가가 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남을 섬기는 지성인이 되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자기고백적인 권면입니다.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제도도 만듭니다. 7년 풍년에 곡식을 저장합니다. 7년 흉년에 그것을 내어 베풉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세우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겠습니다(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섬김의 자리로 세우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설교자 정릉교회 박은호 목사 http://www.jeongneu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