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누릴 신앙적 기개(요 9:32-33)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2-33)
우리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으로부터 우리가 오늘 섬기는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증언을 듣습니다. 그가 이 증언을 위해 협박과 위협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임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로 인해 그같이 담대한 삶을 살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실상 이 소경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 그대로 창세 이후로 그것은 그 누구도 보거나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일입니다.
치료의 방법 역시 사람들이 선뜻 받아 들일만큼 요란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침을 뱉으셔서 진흙을 이기신 후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이라는 연못에 가서 씻으라 명령하신 것을 따랐더니 나았노라고 증언합니다. 그의 증언은 투박합니다. 삼류 코메디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우스워 보이는 방식의 치료 방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증언이 진실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가 이 증언을 위해 치뤘던 희생입니다. 그는 이웃들 앞에서, 그리고 그렇게 말하기를 금하여 위협하는 유대인들 앞에서조차 그렇게 자신이 나음을 받았노라 증언합니다.
소경은 멸시를 당해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소경된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은 자기가 소경된 것은 그 부모의 죄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잠해야만 했습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했던 사람으로 그는 사람들이 그를 불쌍히 여겨 던져 준 동전으로 먹고 살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그 부모까지 협박하며 예수님이 자신을 낫겼다는 것을 부정하라고 명했던 이들의 거듭된 요청을 받습니다. “굳이 출교를 당하면서까지 예수가 낫겼다고 말할 이유가 어디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눈이 나은 것으로 족하게 여기면 되지 누가 낫겼으면 어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개 거지였던 그는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33)라며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요, 재력가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그는 바리새인들이 “그는 죄인이다”라는 정의 하에 물었어도 그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가져 온 이가 예수님이라고 말하는데 있어 물러서지 않습니다. 자신의 놀라운 변화 앞에 다른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도 두려워 하여 자식에게 답을 돌리려는 지경인데도 그는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시 사형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는 출교의 위협조차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제껏 살아왔던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왕따가 되는 것에 대해서조차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가 체험했던 사실 때문입니다. 진실은 그렇게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우리는 그 변화만으로도 그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 변화는 “아마도”에 목매어 사는 사람들이 결코 누릴 수 없는 확신과 용기를 가지고 살게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같은 변화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담대함에 있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도 내 자신의 변화를 입으로 말하게 되는 것이 주체 할 수 없는 본능이 되어지리만큼 주님으로 인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합니다.
“나 전에 이러이러한 사람이었지만, 나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에 마음 두는 사람이 아닐 만큼 다른 사람이 되었다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내가 전에 빌어 먹기 위해 노심초사 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그러나 나 이제 출교도 두려워 하지 않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네”라는 그 놀라운 삶의 변화가 주로 인해 가능한 것임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요란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 변화는 능력을 지닙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으려고 꾸미지 않아도 그 변화는 오히려 배운 자들과 재력가들을 부끄럽게 합니다.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했어도 그렇게 빛나는 기개를 지니고 사시는 성도님들을 저 역시 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 변화의 감격을 성경내의 그 어떤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통해서도 동일한 고백을 이루실 수 있으십니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한 것과 같이 “하나님 만이 이 일을 내게 이루셨습니다”라는 고백을 이루실 수 있으십니다.
그 고백을 가능케 하는 그 감사와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간절히 구할 때 그 기개와 담대함은 우리들 모두의 것입니다.
하늘 소망교회 김희승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