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의 온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0)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19:21)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를 소개 받습니다. 그분의 전도 대상은 삭개오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내에서 세금을 대신 걷어서 내는 일에 종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부역자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속국의 사람을 통해서 세금을 입찰하여 돈을 거두었습니다. 정해진 액수가 들어 오기만 하면 그가 얼마를 더 거둘 것인가에 대해 눈감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세리는 이중적으로 비난 받아야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이방을 위해 일하는 자라는 비난과 개인적 수탈로 인한 비난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세리의 장이었습니다. 그는 그 악한 일을 집행하는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야비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야비한 죄를 짓고 있던 삭개오를 찾고자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으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스스로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없으리만큼 자신이 더러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감히 주님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점에 있어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그의 악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공로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청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상실한 자,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잃어 버린 양을 찾아 온 산을 헤매는 목자와 같이 예수님은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만큼 죄인되었던 삭개오를 향해 눈을 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서둘러라,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러야만 하겠다.”
“머물러도 되겠느냐?”가 아니라 “머물러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를 구원해도 되고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잃어 버린 자이기에 다시 찾아야만 하는 영혼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악인인지, 파렴치범인지도 주님에게는 구해내야만 한다는 목적을 막아 설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삭개오가 아직 몰라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았노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회개합니다.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내어 주겠으며 그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는 120%만 돌려 주어도 되는 것인데 그는 400%를 돌려줌으로 그가 이전에 행했던 악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것을 보상하고자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수 없는 비난으로 대했던 공동체의 영향력도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그의 삶의 변화는 무엇에서 오는 것입니까? 구속 받은 기쁨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반절을 날려도, 게다가 손해끼친 사람들에게 돈을 보상해야 하는 것조차도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정도일 만큼 큰 기쁨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목적과 운명을 다시 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바로 상대가 누릴 이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 이 같은 능력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기쁨을 구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막아서며 그는 죄인이라고,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자라고 예수님을 비난해도, 죄인들과 한 패가 되겠느냐고 비난 해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기쁨을 구하는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이유에서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셨습니다.
아주 가끔 저녁 시간에 일산의 테니스장에 들릴 때가 있습니다. 몇몇 회원들 가운데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대하시다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다정하게 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운동 끝난 후 일회용 컵으로 한 잔 정도 막걸리를 마시면서 “곡주 한 잔 정도는 괜찮지요?”라고 물으실만큼 이런 저런 신앙적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성도님이 한의원 원장님 되시는 분의 어깨를 손으로 두르시면서 “원장님 우리 교회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목사님” 하면서 제게 지원 사격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술렁술렁 믿으시다가 대화 교회에 나가신 지 5년 되셨다고 하는 성도님이 다른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 따스한 눈 빛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래 뵙지 못했지만 서로 만났을 때 이전을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했던 원장님에게 좋은 사람들 하고 천국 같이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족을 돕고 형제를 도우며 이 사회를 위한 최고의 일입니다. 사는 날 동안 기쁨을 누리다가 죽어 영생케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가장 역점을 두고 행하신 바에 대해 동일한 역점을 두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Christ-like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용서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해내지 않으면 상대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귀에 납치 되어 토막 나 죽는 것 보다 더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영원한 상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언제 가능합니까?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상대는 우리의 달변에 의해 교회로 향하지 않습니다. 귀찮게 함이나 위협으로도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는 상대가 이렇게 묻게 될 수 있을 때 입니다. “당신은 내 이름을 알 정도니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터인데 나 같은 자의 집에 머물러 입게 될 부정에도 개의치 않으실 만큼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들끼리만 – 왜 나를 아끼시는 것입니까?” 상대가 “어떻게 당신은 화내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까?”라며 우리의 삶을 묻게 될 때 비로소 전도의 문은 열립니다. 그런 물음을 묻게 함에 있어 실패한다면 그는 전도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를 보내노라(요 20:21).” 한 사람의 영원한 목적지를 다시 쓰게 하는 유일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 전도에 우리 삶의 최고의 역량을 기울이므로 우리로 인해 매일 같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늘소망교회 김희승 목사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19:21)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를 소개 받습니다. 그분의 전도 대상은 삭개오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내에서 세금을 대신 걷어서 내는 일에 종사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부역자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속국의 사람을 통해서 세금을 입찰하여 돈을 거두었습니다. 정해진 액수가 들어 오기만 하면 그가 얼마를 더 거둘 것인가에 대해 눈감아 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세리는 이중적으로 비난 받아야 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이방을 위해 일하는 자라는 비난과 개인적 수탈로 인한 비난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세리의 장이었습니다. 그는 그 악한 일을 집행하는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야비한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야비한 죄를 짓고 있던 삭개오를 찾고자 하셨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으신 것입니다. 삭개오는 스스로도 예수님의 부름을 받으리라 기대할 수 없으리만큼 자신이 더러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감히 주님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점에 있어 삭개오가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은 그의 악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공로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청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상실한 자,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잃어 버린 양을 찾아 온 산을 헤매는 목자와 같이 예수님은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만큼 죄인되었던 삭개오를 향해 눈을 드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서둘러라,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머물러야만 하겠다.”
“머물러도 되겠느냐?”가 아니라 “머물러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은 그를 구원해도 되고 구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잃어 버린 자이기에 다시 찾아야만 하는 영혼이었습니다. 그가 지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그가 얼마나 악인인지, 파렴치범인지도 주님에게는 구해내야만 한다는 목적을 막아 설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삭개오가 아직 몰라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았노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회개합니다. 그의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내어 주겠으며 그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나 갚겠다고 합니다. 율법에서는 120%만 돌려 주어도 되는 것인데 그는 400%를 돌려줌으로 그가 이전에 행했던 악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것을 보상하고자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수 없는 비난으로 대했던 공동체의 영향력도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그의 삶의 변화는 무엇에서 오는 것입니까? 구속 받은 기쁨에서 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상대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반절을 날려도, 게다가 손해끼친 사람들에게 돈을 보상해야 하는 것조차도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할 정도일 만큼 큰 기쁨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목적과 운명을 다시 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바로 상대가 누릴 이 기쁨을 위한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 이 같은 능력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기쁨을 구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막아서며 그는 죄인이라고, 구원 받을 가치가 없는 자라고 예수님을 비난해도, 죄인들과 한 패가 되겠느냐고 비난 해도 예수님은 나사로의 기쁨을 구하는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의 이유에서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셨습니다.
아주 가끔 저녁 시간에 일산의 테니스장에 들릴 때가 있습니다. 몇몇 회원들 가운데는 성도님들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조심스럽게 대하시다가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다정하게 대해 주십니다. 그리고 운동 끝난 후 일회용 컵으로 한 잔 정도 막걸리를 마시면서 “곡주 한 잔 정도는 괜찮지요?”라고 물으실만큼 이런 저런 신앙적 교제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성도님이 한의원 원장님 되시는 분의 어깨를 손으로 두르시면서 “원장님 우리 교회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목사님” 하면서 제게 지원 사격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술렁술렁 믿으시다가 대화 교회에 나가신 지 5년 되셨다고 하는 성도님이 다른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 따스한 눈 빛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래 뵙지 못했지만 서로 만났을 때 이전을 기억하고 반갑게 인사했던 원장님에게 좋은 사람들 하고 천국 같이 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족을 돕고 형제를 도우며 이 사회를 위한 최고의 일입니다. 사는 날 동안 기쁨을 누리다가 죽어 영생케 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가장 그리스도를 닮는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가장 역점을 두고 행하신 바에 대해 동일한 역점을 두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Christ-like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용서와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해내지 않으면 상대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귀에 납치 되어 토막 나 죽는 것 보다 더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영원한 상태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언제 가능합니까? 삭개오의 경우와 같이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때입니다. 상대는 우리의 달변에 의해 교회로 향하지 않습니다. 귀찮게 함이나 위협으로도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을 때는 상대가 이렇게 묻게 될 수 있을 때 입니다. “당신은 내 이름을 알 정도니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터인데 나 같은 자의 집에 머물러 입게 될 부정에도 개의치 않으실 만큼 –바리새인은 바리새인들끼리만 – 왜 나를 아끼시는 것입니까?” 상대가 “어떻게 당신은 화내지 않고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까?”라며 우리의 삶을 묻게 될 때 비로소 전도의 문은 열립니다. 그런 물음을 묻게 함에 있어 실패한다면 그는 전도에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를 보내노라(요 20:21).” 한 사람의 영원한 목적지를 다시 쓰게 하는 유일한 메시지를 전하는 이 전도에 우리 삶의 최고의 역량을 기울이므로 우리로 인해 매일 같이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기쁨이 충만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늘소망교회 김희승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