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는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을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5-18)
초대교회 시기에 영지주의자들이라 일컫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라는 단어는 헬라어Gnosis(지식/knowledge)에서 온 것으로 영지주의자들은 다른 철없는 신자들과 달리 자신들이 초자연적이며 신적인 직접 경험에 의한 계시를 지녔다고 스스로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 하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지만 영적 지식이 천박한 사람들, 영적으로 밝은 지식을 얻은 신자들이 그 구분이었습니다.
오늘도 어떤 교회들은 초자연적인 은사를 강조하여, “평범한 그리스도인”과 “이적적인 경험을 체험하기에 충분한 믿음을 지닌 성도”로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당신이 초자연적인 은사를 경험치 못한 것은 구하지 않았거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사람들을 그렇게 분류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눌 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분류 그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 분의 말씀으로서 거듭났기 때문이며, 영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함께 교회를 이루게 하시는 성도들 자체를 자랑하거나 비하하지 않아야 합니다. 해밀톤 목사님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논쟁과 불일치를 누그러뜨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나누고, 내 교회와 다른 교회를 나누며, 내 교단과 다른 교단을 나누는 것그것이 바로 유다서가 경고하였던 영지주의적 이단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교회에 관련해서는 자기 교회와 다른 교회의 수준을 비교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어떤 점에 있어 점에서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요새 늘어나고 있는 독립교회들 이 지닌 위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엄밀히 말하면 다른 교회들과 자신들의 모임을 하나로 인식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태도가 지닌 결정적인 폐해는 그들이 복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교회가 타 교회에 비하여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장점들을 높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불신자들은 결국 온 교회가 공히 지닌 복음의 뛰어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개 교회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관심할 뿐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가치를 겨우 개 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장점 정도로 이해하게 합니다. 그들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들마다 그 머리로 섬기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의 권위를 배우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오늘의 교회가 직면한 위기의 내용입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일심하여 나가고자 하는 의식은 사라지고, 개인의 복과 개교회의 부흥을 목적하여 나가는 한, 온 교회를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하는 대 사명은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바울은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는 이 분류가 성경적인 것임을 명백히 합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복음 전파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이 로마의 시위대들과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밖의 형제들이 더욱 담대하게 용기를 얻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그는 심지어 자신을 시기하여 복음을 전했던 몇 몇의 사람들로도 인하여 기뻐하노라 밝힙니다. 바울은 그들이 시기와 다툼으로(15) 복음을 전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잘 드러날 수 있는 더할 수 없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옥 안의 바울은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그 같은 질투가 작동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most of the brethren”과 “some (of the brethren)” 형제들이 각각의 이유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14, 15)라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을 여전히 형제라 본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가 성도를 대하는 마땅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심지어 교회내의 그 어떤 일로 인해 분쟁이 일어났을 때에 그 일을 세상 법정에 가져 가는 것 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임을 당하라” 합니다.(고전 6:7)
미약한 성도를 대하든지, 그 어떤 미약한 교회를 바라보면서도 이 같은 마음 지닌 사람일 수 때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보냄을 받게 되었을 때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우리 교회가 최고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릅니다” 가 아니라, 그 어떤 다름이라도 넘어설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동료인식이 가능할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을 참 인식한 성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한 그 인식이 가능할 때에야 우리는 또 우리 너머에 있는 이들까지 사람일 수 있게 됩니다(요 10:16).
다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음을 보려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것이 한 자녀 된 우리가 진정 구할 바라 굳게 믿습니다.
하늘소망교회 김희승 목사
사진설명- 같은 꽃이 모이면 보기 좋다. 같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은 더욱 반갑고 힘이 된다.
선교지에 선교를 목적으로 왔다면 서로 교제하고 협력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