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강해 ( 막 7:7-12)

by 이재섭 posted May 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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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강해
막 7:7-12


기도에 있어 가장 많이 지적되고 책망 받는 부분이 ‘중언부언’이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중언부언은 이미 한 말을 거듭 되풀이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기도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기도가 갖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확인해보라’는 것으로 마태복음 7장은 설명하고 있다. 기도할 수 있는 개념 속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세상식으로 말하면 부자지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응답되고 안되고는 그 이후의 문제요, 중요한 것은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가 신자에게 허락된 것은 그것이 하나의 기술이나 어떤 도구로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떤 자격에 관한 것이다. 신분에 대한 문제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
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여기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는 근거가 나타난다. 우리가 가진 신분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과 그 특권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응답 여하를 떠나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축복인 것이다. 기도는 기술적인 것이나 자격을 떠나서 우리 신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커다란 특권인 것이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
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
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
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성경은 기뻐하거나 감사할 내용을 주지는 않고, 기뻐하고 감사할 것을 명령하셨다. 사실 그것은 어떤 일의 ‘결과’여야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체가 명령문이 아니다. 이 말씀이 종결된 부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며, 기도하게 하며, 감사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살면 그 결과를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그렇게 될 수 있는 신분, 우리의 축복된 위치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만이 아니라 항상 그렇게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뻐할 것을 채워 주신다는 것이다.
일반 종교의 신들은 진노하는 신으로 나타난다. 그 신을 믿는 자는 신의 진노를 삭혀야 한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고 달래는 것이다. 그 신앙의 목적은 신이 가진 능력을 나를 위해서 쓰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신과 신앙의 내용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기에 문제가 생겨진다.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좋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발라 맞추는 기도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자리로부터 돌이켜서 신자의 신자된 특권을 일차적으로 누리는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나타나는 문제를 살펴보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
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
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
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응답 받는 경우보다는 받지 못하는 때가 더 많이 있다. 하나님은 주시기를 기뻐하시는데 우리는 왜 못 받는 것일까?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아는데 왜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반문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많은 기도에 있어서 응답을 받지 못한다. 12절이 결론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답변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지를 야고보서 4장을 통해 살펴보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
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
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
이니라(약 4:1-3)”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는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정욕으로 쓸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잘못 구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구약은 크게 율법서와 선지서로 나뉜다.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은 구약을 지칭하고 좀 더 큰 의미로는 성경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
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여기에서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이 나온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 둘째는 이웃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이고, 이웃을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의 싸움이 갈림길이다. 기도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 정욕대로 구하는 것이고, 이웃을 위한 기도였으면 응답을 받을만한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
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
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약 4:1-2)”
다투고, 싸우고, 욕심내고, 살인하고, 시기하기까지 그들이 얻을 것을 위해서 애를 썼는데 하나도 얻지 못했다. 하나님께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며, 구하여도 받지 못한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눌러서 상대방의 것을 빼앗는 싸움만 있었다. 그런 것은 절대 응답을 받을 수 없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
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
:1-4)”
여기에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이야기다. 하나님을 영적인 차원에서 대접하며, 영적인 문제에서 하나님 앞에 요구할 것이 있는 자리에 가지 않고,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은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빼앗기 위한 자기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신령한 것과 생명에 관한 것이 아니고, 또 자기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으로 얻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것은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그 싸움을 야고보서 2장에서는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돈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신자가 얻어야 하는 것은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 인정받는 것, 영적인 것들은 돈으로 못한다.
그러므로 신앙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를 한다’라는 문제이다. 이 기도가 세상적인 문제를 하나님을 동원하여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얻는 자,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아는 자리에 들어간 자의 당연한 어떤 자세가 문제가 된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그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장 큰 기도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것 같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식으로 거룩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외모로 판단한다. 결국 우리가 갖는 가치의 기준이 세상의 것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표가 된다. 그러니 싸우고 다투게 되고 시기 질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것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것을 얻기 위하여 기도를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것은 어떤 차원에서만 얻어내는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
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
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모든 것은 심는대로 거두게 된다. 육체의 것을 거두기 위해서는 육체의 것을 심어야 한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신령한 것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기 위하여 심어야 한다. 대부분의 신자들도 영생을 거두는 것을 위하여 심지 않는다. 똑같이 썩어질 것을 거두려 한다. 다만 세상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다.
신자에게는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개념이 사실은 세상적이다. 하나님 앞에는 쓰인다는 개념밖에 없다. 드러내서 쓰이는 사람이 있고, 감추어져 쓰이는 사람이 있다. 높임을 받아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고, 낮추어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개념이 있을 뿐이지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의 개념은 없다. 누가 충성했느냐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기도는 분명히 영적인 차원에서의 자세, 원리, 목표와 노력인 것이다. 그것을 세상적인 것을 구하기 위해서 써서는 안된다. 그것이 마태복음 7장 12절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다. ‘주고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을 대접하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자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것이 아닌 자가 기도했다면 정욕으로 쓰려고 혼자 열심을 낸 것이라는 점이 바로 성경의 결론이다.

자료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