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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와 함께”
(마태복음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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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 11:5)
진리의 교과서인 성경은 모두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진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논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두고 예언서에서 강조하는 부분과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첫 주제로 내세운 것이 일치한다면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대상을 가난한 자로 삼으신 점을 주목해 보십시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가난의 문제는 구약 성경 이사야 61장 서두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이사야 61:1).
예수님은 산산수훈에 앞서 팔복음의 첫째 조항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3)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첫번 째 설교로 보고 있는, 누가복음 4:18,19에서도 이사야 61장 1,2절의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본문으로 택하셨습니다.
오늘 소개한 성경에서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고 질문하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의 전도 대상이 곧 가난한 자요 가난이 천국과 복의 문이 된다. 무엇보다 복음 가운데 이 ‘가난’을 이해하는 것이 신자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一. 가난의 의미
예수님이 강조하시고 있는 ‘가난’이 의미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 만일 이것이 물질적인 가난이라면 그 한계가 과연 어느 선이 되어야 할까요.
이말의 나 자신 또는 가난한 이웃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강조한 말씀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여할 할 것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헬라어에서 ‘가난’은 주로 두 개의 단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프토코스’(πτωχός)란 말이다. 이말은 마치가 거지가 구걸을 하기 위해 굽실거리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실제로 이말은 ‘거지’라는 뜻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페네스’(πένης)란 말로 ‘매일의 양식을 추구하는 자’, ‘가난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프토코스’가 절망적이고 절대적 가난이라 할 수 있는데 비해, ‘피네스’는 부족한 사람, 날품팔이 등 상대적인 가난을 뜻합니다. 다만 ‘피네스’는 고린도후서 9장 9절에서 한 차례만 나오고 있습니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노동의 의욕마저 상실한 채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바로 부자 집 쓰레기 통 옆에 누워있던 병든 나사로와 같은 삶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잘 살아가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기적인 태도로 하나의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한 쪽은 과소비로 음식 찌꺼기가 쌓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아로 죽어가기도 합니다. 미국의 어떤 레스토랑은 하룻밤에 뱅글라데시 전가족이 1년 동안 맛볼 수 있는 식량보다 더 많은 식량을 버리고 있다고 합니다.
사이더(R. Sider)라는 사람은 에상하기를 전세계 약 5억의 인구가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또다른 5억의 인구가 실지로 굶주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결코 지구의 양식이 한계에 미쳐서 발생한 일이 아닙니다. 세계의 밑바닥에는 세계의 1/3의 인구가 87%의 식량을 소비하고 나머지 2/3의 인구가 남은 13%의 식량을 소비한다. 실제로 미국인 평균 한 사람은 에디오피아인 평균 한 사람보다 300배나 그 이상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8오늘날 지구상의 기아 문제는 당사국의 정치와 경제가 미비한 것도 원인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가진 자가 가난한 자를 외면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6오고 있는 ‘가난’은 거의 전부 절대적 빈곤을 뜻하는 ‘프토코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이 ‘가난’이 극도로 어려운 사람을 염두에 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절대 절명의 위기라 생각하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내게 은혜가 꼭 필요하다’(프토코스)고 갈구하는 자에게 즉 참으로 영적인 것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천국의 복이 임하게 됨을 보여 주는 말씀들입니다.
물론 복음은 억울하고 소외된 자들이 천국의 복을 누릴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반드시 전도 대상이 가난한 자라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말은 주로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겸비한 자’를 뜻합니다.
욥은 당대의 부자였지만 그 마음이 너무도 겸비하여 결코 물질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바 되었던 것입니다.
선한 부자가 있는가 하면 악한 빈자(貧者)가 있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으면서도 그 마음은 그 어느 부자보다 이기적이고 걍팍하여 진리를 떠난 자에게는 파멸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에 비해 남보다 열심히 일했거나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인정받아 부자가 된 자도 있습니다. 혹 재물이 많은 자라 할지라도 욥처럼 성실한 삶을 살아가며 구제를 좋아하는 자의 삶은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부자는 이웃에 악을 행할 뿐더러 세상을 오염시킨다. 마태복음 19장 16절- 22절에 예수님과 어떤 부자와의 만남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십일조를 내었고 예배도 열2심히 참석했을 뿐더러 스스로 천국을 소유하고 믿고 있었던 그는 예수님 앞에서 당연히 인정받을 줄 알았습니다. 성스러운 십일조를 내고 나머지로 쌓아 두었으니 모두가 깨끗한 돈이라 생각되어 그 나머지를 제 것이라고 움켜쥐고 있었기에 별다른 가책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밖에 그는 여러 가지 율법을 나름대로 철저히 지킨 사실을 내세워 자신의 삶을 합리화시키려 들자, 주님께서는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주관대로 신앙을 유지해 온 탓에 그 마음속에 주님의 자리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끝내 주님의 약속한 복마저 거절한 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가난이란 그 마음 상태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의 좌소가 곧 마음인 만큼 그 마음이 진리를 향해 비워 있을 때 하늘의 참된 것으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약대가 볼 때엔, 바늘 귀(천국)가 너무도 작아 도저히 들어갈 수 없지만 실처럼 겸허한 마음을 가진 자라면 최소한 자기 혼자서는 바늘귀로 출입이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천국의 문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二. 세레요한의 질문
본분을 보고 있으면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모태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게시를 받아 예수님 위에 직접 세례까지 준 장본인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고 질문한 사실은 언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말을 정리해 보면 세레요한은 메시야가 오실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더러 누구냐고 물었을 때 단호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요한 1:20)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이말은 자기 역시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예비자란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은 구약의 인물입니다. 당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메시야의 나타남이 곧 로마에 대한 해방이요 다윗 시대에 버금가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한과 그의 제자 역시 이러한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가운데에도 무언가 획기적인 환경의 변화가 곧 신앙의 댓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간혹있습니다. 입시를 앞두고 열심히 새벽기도를 나가던 어머니가 이제는 기도생활을 게을리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기대한 것처럼 외적인 화려함과 권능을 입고서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사실에 걸려 넘어졌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왕권을 차지할 것으로 믿고 추종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사야 55:8- 11)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이러한 질문이 불신앙적이거나 불경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는 본래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 그냥 성전에 남아 있었더라면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 광야에서 천국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그의 의로운 말로 인해 헤롯의 미움을 사 지금 옥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롭게 광야를 활보하던 세레요한이 뜻하지 않게 옥에 갇혀 있음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 그분이 참 메시야일까 하는 인간적인 의문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레요한은 그리스도가 장차 온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코 예수님이 안일하고 무책임하게 살아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의 주어진 역활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아직 민중 가운데에는 요한의 제자도 많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답한 것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여섯 가지 공개적인 이적과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을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믿어야 할 대상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과 그리스도되심을 믿는 것이 곧 구원과 연결되는 신앙입니다(요한 20;31 참조). 세상에서의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 자신을 아는 것임에도 오늘날 역시 현실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더러 있습니다.
육신의 삶은 잠시 주어진 것인 만큼 조금 더 살아있거나 안정을 취하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더욱 값진 일입니다.
또한 복음은 구약 시대에서처럼 왕이나 국가 중심이 아니라 가난하고 연약한 개인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외진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도 큰 빛이 비추였듯이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까지 이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고난 가운데섣 혹독한 가난을 체험할 무렵 복음이 뿌리를 내렸던 것은 성경에 이름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이 이제 훌륭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한 것으로 간주하고 순교를 통해 그의 영혼을 부르셨습니다. 요한이 옥에 갇히는 순간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 것은 역사적 교차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모든 관심이 이제 예수님으로만 향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를 바라보면서 그분이 그대로 해방을 맞이하셨더라면 어떤 결과를 빚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물론 존경과 반가운 마음이 앞섰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는 오히려 순교가 더욱 값진 것이기에 그를 데려가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찬란한 출옥 성도로 이루어진 교회에 비해, 부족한 대로 다시금 회개하고 역사한 사역자들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져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삶과 그의 비중을 아시고 주위에 엄숙히 선언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레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거이 받을찐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이 사람이니라”(마태 11:11-14 참조).
유대교에서 계속 제사장의 전통을 이어나갈지라도 이미 세례요한이 그 마침이 된 것입니다. 그는 겸손히 주님 아래에서 사역하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높혔던 것입니다.
三 . 하나님의 마음을 갖자
하나님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애’란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란 말은 구약에서 무려 245번 나오는 중요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말은 완전한 번역이 어려우리 만큼 함축성이 깊습니다.
구약에서 ‘헤세드’란 말이 나오는 본문을 보면, 얼마나 감미롭고 은혜가 넘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외스터레이라는 학자는 “이말은 히브리어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가장 위대한 말의 하나이며 영어로는 도저히 올바르게 번역해 낼 수가 없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만 해도 이 ‘헤세드’를 인자, 은혜, 긍휼, 인애, 은총, 선대, 후대, 자비, 우의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말은 주로 ‘호의’와 ‘자선’을 의미합니다. 즉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자비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고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곧 헤세드인 것입니다.
본래 ‘헤세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자발적인 의지의 발로로서 그 자비를 행동으로 나타내시는 것이 헤세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食言)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헤세드는 하나님의 본질적 요소인 것입니다.
나는 이 ‘헤세드’를 이해하려면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모름지기 그 아버지의 성품을 2소유해야 합니다.
이를 신약적으로 이해하면 곧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5)라고 이른 것 같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곧 하나님의 성품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하고 복음을 모르는 이웃을 위해 힘써 생명줄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심이니라”(고린도후서 8:9).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생각한다면 나의 가진 것 모두 드려 그분의 뜻을 이루어도 아깝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 생활도 서로 섬기는 삶이 될 때 이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역을 이르기를,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림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로마서 15:26)고 말한 바 있습니다.
누가 재난을 당했다면 이를 발견한 성도가 힘을 모아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사실 별도의 구제 헌금을 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십일조나 감사 등 공식적인 헌금 외에도 가난한 이웃을 위해 매주 또는 수시로 구제비를 헌납하는 습관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일반 헌금함과 별도로 구제함을 두어 이곳으로 모이는 헌금은 바로 구제를 맡은 부서로 이관되게 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구제부서에서는 구제가 필요한 곳을 찾아 긴밀한 지원을 하므로 공동의 삶을 유지하도록 힘쓰는 것이 초대 기독교의 모습을 재연하는 길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구제는 사랑의 발로이자 기독교 본연의 사명입니다. 무엇보다 가난한 이웃을 전도하는데도 큰 몫을 하게 됩니다. 물론 구제의 우선 순위는 먼저 가족과 친지를 돌아보아야 하며, 다음에는 교회내에 어려운 형제를 도와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친척,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는 벌써 믿음을 버린 사람이고 믿지 않는 자보다도 못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리디아서 6장 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성장학의 세계적인 학자인 맥가브란 박사는 성도의 책임있는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당신의 수입의 십일조를 정직하게 드리라. 이것은 가난한 사람이라도 동참해야 한다. 가난을 스스로 대처하기보다 가난 그대로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
국민이라면 국가에 정직한 마음으로 세금을 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와 이웃을 위해 기꺼이 십일조와 헌금을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거나 마음에 준비가 안된 분은 이때문에 교회 출입에 부담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헌금보다 사람을 더 중요시여기는 분이며, 결코 생활을 위축시켜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이러한 법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복이 되며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맥가브란은 신앙생활을 충실히 해 오신 분은 다음 단계로 일반 국가에서도 누진세를 적용하듯이 수입이 점차 나아지면 25%까지 헌금을 올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부과할 때도 오분지 일을 납부토록 했습니다(창세기 47:24), 실제 오늘날 국세 역시 수입이 중가함에 따라 20% 이상 넘어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웃과 교회 사역을 위해 많은 소득을 올리는 성도가 더 많은 부담을 할 때 그만큼 하나님의 사업 또한 원만히 이루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맥가브란 박사는 특히 나이든 부동산 소유자나 실업가는 유언장을 별도로 하나 작성해 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동안 쌓아 올린 노력의 댓가를 그대로 후손에 물려주기보다는 그 일부를 교회에 헌납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두라는 것입니다. 매가브란은 이 경우 절반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헌금 생활은 하나님의 헤세드와 같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어서 하나님만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온 가족에게도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영적 생활에도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최근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농촌 교회 117개를 표본 조사한 결과 목회자 사례비가 30만원 이하인 경우가 절반이 넘어선다고 합니다. 똑같이 신학수업을 받고 단지 농촌 교회를 지킨다는 것 때문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회를 섬기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농촌 교회의 어려움에 대해 도시 교회로서의 책임이 크다 하겠다 하겠습니다.
선교와 구제의 자세에 대해 고린도후서 8장 12절 이하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익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전 8:12-15).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겸허한 자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가난한 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헤세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부자인 채 자처하면서 가난한 자를 돕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 역시 나의 형제요 동족임을 인정하는 ‘긍휼’(헤세드)을 지닐 때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혹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드리는 제사 즉 예배를 기뻐하지 않을 것임을 성경 가운데 밝히신 바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아직 초신자로서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부담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무리해서 남에게 유익을 주려들다가 자신이 오히려 시험에 빠지게 되면 이는 개인적으로 큰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8:12에서 그 가부간에 분명한 선택을 먼저할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원만히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개인 신앙 관리와 가족 단위로 의견을 일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구제에 억지로 참여한 나머지 자신이 정한 약속을 스스로 어기므로 정죄가 받아 멸망당했습니다(사도행전 5:1-11 참조).
그리스도인은 악한 사람들이 악마적으로 사회를 병들게 한 탓에 황폐한 사회 구조의 개선을 위해 소속한 사회에 참여할 의무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회 전반적인데까지 영향을 미칠 수 없더라도 가족, 친지 , 이웃, 자신이 소속한 교회, 그리고 지방 교회나 선교지를 지원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지닌 자들은 모든 것에 만족하게 됩니다. 따라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이웃을 위해 마음이 열려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아름다운 교통을 돕기 위하여 상호 같은 심정이 되도록 인도하십니다. 물론 구원을 담은 겸허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는데 앞장서게 되겠지만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은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검소한 삶, 낮은데 처할 줄 아는 심정을 가지므로 예수님이 살아가셨던 그 발자취를 따라갑시다.
우리 모두 가난한 이웃을 돌아봅시다.
복음을 모르고 있는 가난한 이웃에게 소망의 삶을 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