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의 금반지
나는 스무 살이 될 무렵 내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기를 원했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깊이 알지 못해 아쉽게 생각되었다. 마침 내가 다니던 교회에 밤마다 기도하고 계신 나이든 여신도들이 있었다. 이따금 이분들과 함께 관악산 건너 편 야산에 있는 기도실을 찾아갔다.
아카시 나무 꽃 냄새가 온 산을 메우고 있던 어느 봄날, 친구와 집사, 그리고 권사 네 사람이 한 평 남짓 작은 기도실에 모여 기도했다.
기도를 시작한 지 두 시간 정도 지난 무렵 갑자기 눈앞에 번개 같은 빛이 번쩍 비쳤다. 그 순간 그동안 막힌 담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것을 느꼈다. 새날을 맞은 듯했다. 온몸이 천국 기운에 싸이는 것 같았다.생각지 않았던 은사가 온 몸을 휘몰아쳤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말이 혀를 움직였다. 평소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방언 은사가 임한 것 같았다. 드디어 주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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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금까지 지키고 이끌어 왔다. 나의 빛을 이 어두운 땅에 드러내거라. 내가 너와 언제나 함께 하겠다.”
전 집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이분은 내게 신앙의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산상기도회가 있었던 다음 주,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찾아갔다. 부장 장로가 주일학교 교사로 오라고 몇 차례 부탁해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며 고사했었다. 주일학교 시간에 맞춰 찾아가자 부장 장로가 내가 온 것을 보고 반겼다.
“마침 잘왔네. 나 많이 바쁘니까 주일학교 부장 대리 좀 맡아줘.‘
나는 주일학교 교사를 맡는 동시에 설교까지 해야 했다. 이제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서둘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독교 교육에 관한 책도 많이 구해 읽었다.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이 많지만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거의 매일 철야기도를 했다.
은사에 관심이 많아 성경 가운데 <<고린도전서>>를 수십 번 읽었다. 고전도전서 14장 19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이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어떤 은사보다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됐다.
가을에 접어들자 교육 전도사가 내게 신학을 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본래 나는 자선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신학 수업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이끌고 돌보는 것이 뜻깊은 일이 되리라 생각되었다.
1974년 3월, 교회 전도사가 졸업반으로 있었던 신학교에 입학했다. 힘든 성장기를 보낸 탓인지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학교 교정을 울려 퍼지는 찬송가 소리, 교수들의 강의가 나를 사로 잡았다.
나는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목회자보다 선교가 마음이 끌렸다. 지구본을 이리 저리 돌려보며 어느 나라로 가야 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미지의 땅에 복음을 심기 위해서는 자신이 충실한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선교에 대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
‘분명히 어딘가 복음이 잘 닿지 않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주님, 먼저 한 알의 잘 여문 밀알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혹 자갈 밭에 떨어지더라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2학기가 다가오자 도저히 등록금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좀 무리했나 봐요.아무래도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못내 아쉬우신 듯 안타까워했다. 어머니는 얼마 전에 반지 계를 통해 석 돈 짜리 금반지를 갖게 되었다. 어머니 생애에 처음 금반지를 끼게 되셨을 것이다.
“이 돈으로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겠니?” 하시는 것이었다.
돈을 건네주시는 어머니의 손에 금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나가서 반지를 팔아 돈을 마련해 오신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어머니 고마워요. 나중에 금반지는 꼭 다시 사 드릴께요.’
하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학교에 분납으로 등록을 하고 2학기를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54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고향 산에 묻혔다. 어려서 계모 손에 자라나느라 갖은 구박을 당하셨다. 정신대모집을 피해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한 생을 어렵게 보냈지만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다짐했다. 어머님이 주신 금반지를 생각하면서 더욱 사명감에 싸였다. ‘진정으로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종이 되겠다고- 또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을 주님께 인도하겠노라고- 복음의 불모지를 찾아 어느 곳이든지 나가 선교에 힘쓰겠다고-
신학교 졸업 후 봉제, 전자조립공 등 근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사역했다. 그 후 십수 년 동안 선교사 사역을 감당했다. 세 자녀가 어린 시절부터 선교지에서 자라났다. 이들에게 시베리아가 제 이의 고향과도 같을 것이다.
국내로 돌아와서 한동안 노숙자 교회를 도왔다. 선교지도 계속 관리하면서 돕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힘겹게 돕느라 나의 삶에 무리가 오기도 한다. 내가 어려울 때 선뜻 나를 돕는 자들이 없어 아쉽게 생각된다.
오늘의 내가 있도록 희생해 주신 어머니의 사랑에 다시금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