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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 중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여유있게 살아갈 기회가 몇 번 있었다.

1954년 여름 부산의 한 피난만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부친의 건강까지 안 좋아 성장기에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끝내 가족해체를 결정한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4학년 중퇴를 

하고 이리저리 유랑하게 되자 어린 내가 서울로 갈 것을 제의했다.

중도에 저금을 해가며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해 지은 판잣집이 사당동 철거촌 입주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 천막교회 성경구락부에 다니면서 신앙과 학습할 기회가 주어졌다

본래 동생을 학교에 보내고자 서울로 가자고 한 것인데 나의 학업도 연장되었던 것이다.

 

1974년 성결교신학교(현 안양 성결대)에 입학해 다니던 중 군에 입대했다

신병 때 구보를 하다가 피가 목으로 올라와서 의무실에 갔더니 바로 후송시켰다

야전병원에 도착하자 결핵 병동으로 보내졌다. 병원에 교회가 있어 올겐 반주를 했다

여러 날 검사를 하더니 결핵이 아닌 게 밝혀졌다.

교회에서 알게 된 간호장교들이 곧 부대로 복귀하게 된 것을 알고 어디 아픈 데가 없냐고 

물었다. 본래 코가 좀 안 좋다고 말했다. 신병이라 부대에 가면 고생한다며 이비인후과 

병동으로 옮겨 주었다이곳에서 입원 중에 하사를 만났다

나와 자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하루는 하사가 진짜 신학교 다니다 온 게 맞냐

고 물었다. 내가 성결교신학교 3학년 다니다가 왔다고 말하자, 자기가 부대에 근무하면서 

신학교 다닌 사병들을 보니 대부분 목에 힘주고 다니더라. 너무 티를 안 내어 신기하다는 것이다

나이도 비슷해 친구가 되었다. 자기 집이 안양이라고 말했다.


야전병원은 입원 의무 기간이 짧다. 간호장교들이 이비인후과는 어차피 큰 병원에서 치료해야 

한다며 후송병원으로 옮겨 주었다. 한동안 서울에 있는 후송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어느 날 전방에서 사고가 발생해 응급 후송 환자가 많이 왔다며 이비인후과 환자는 대부분 원대 

복귀시킨다고 했다. 담당 간호장교가 나를 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하도록 절차를 밟아주었다

그래서 부대를 떠난 지 1년 후에 한 계급 진급까지 해서 본래 자리로 복귀했다.

얼마 후 하사가 전역했다. 나는 휴가 기간 동안 하사였던 친구가 사는 안양 관양동을 방문했다

하루는 나를 데리고 자기 집 뒷산으로 올라갔다. 이 산과 저 앞에 보이는 논이 모두 자기네 거다

부친 장로님은 집 근처에 중고교 설립해 이사장으로 있다고 했다.


자기 여동생과 결혼 약속하면 이층 집을 지어 1층에 가게를 만들고 이층에 살림집을 꾸며 주겠다

그러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다. 여동생 몫 땅도 많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가 결혼하겠다고 동의하면 하루 아침에 부자 대열에 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없다고 거절했다나중에 이 친구네 땅이 평촌 단지에 포함되었다.

 

나는 삼십 대 초에 미혼 목사가 되었다. 성경 원어 수업을 많이 한 탓인지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있었다은사 교수님이 학장으로 있는 신학교에서도 강의하게 되었다.

신학생 자매가 내게 용산에 있는 교회 다니는 자기 사촌오빠를 만나 달라는 것이다

어느 주일 이 교회를 찾아갔다.  주일임에도 본당 공사를 하고 있었다

예배 후 교회 근처 까페에서 사촌 오빠를 만났다그가 내게 뜻밖의 말을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는데 자기 여동생과 결혼하면 교회를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큰 회사에서 이 교회를 지어준다고 들었다. 자신도 그러고 싶었나 보다

자매와 같이 나오면서 이런 말 들으러 이까지 나를 오라 했냐고 말했더니 

죄송해요. 저도 몰랐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군 전역 후 장로교로 옮겨 신학 수업을 했다. 당시 내가 속해 있는 노회는 경기도와 

서울에 걸쳐 있었는데 많지 않았다.  노회의 중심 교회는 비싼 땅에 자리잡고 성도가 400명 

정도 되었다.  어느 날 대선배이신 담임목사님이 내게 헌신예배 설교를 부탁했다

예배 후 사택에서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모님이 유난히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 손을 마주 잡을 뻔했다)목사님 딸인 듯한 자매가 차를 들고 와서 내 앞에 놓고 나갔다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후 선배 목사님이 날 불렀다.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합격됐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물었더니 사위로 결정이 되었다며 축하했다. 설교를 통해 교인들의 동의를 구하고 

목사님 가족과의 만남도 가져 모두 통과되었다는 것이다내가 선뜻 응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자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 하냐며 안타까워 했다.  

**************

 

나는 우리네 나이로 내년에 칠십이 된다. 목사된 지 40년이 거의 다 되어 가도록 아직 자가용을 

가져본 적이 없다. 시베리아에서 오래 살았지만 원주민 마을 순회 선교 갈 때마다 현지인 목사님이 

우리를 실으러 왔다. 넉넉히 않은 생애였지만 스스로 택한 나의 인생 행로이다.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어려운 선교지에서 지냈다. 지금도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중이다.

코로나19로 발이 묶였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까지 겹쳐 선교지로 달려갈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지난 일의 추억은 뒤로 하고, 오랫동안 부자로 살아오신 장로님이 순간적으로 어렵게 되어 내가 

오히려 장로님을 돕느라 힘겨운 실정이다. 

장로님은 자신이 많은 도움을 준 자가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큰 돈을 빌려간 자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이 실망하신 듯 내게 더욱 마음을 쏟았다.

 

목사님 제가 팔십이 되도록 인생 헛살았습니다. 실망이 큽니다. 죽써서 개 줬네요

우리 뒤늦게 만났지만 목사님만이 진정한 제 친구입니다라고 말했다

장로님은 저와 한 몸처럼 생각하신 듯 나에 대한 마음의 부담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기회가 주어지면 한꺼번에 해결하려 한 것 같다.  


지난해 여름에 목사, 조금만 참으세요. 회사가 잘 되고 있어 곧 좋아질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제가 다 해결해 드릴께요. 앞으로 돈이 생기면 우리 반씩 농가씁시다

사무실도 준비할테니 우리 서로 얼굴 보고 지내요하고 말했다.

 

<참고로 장로님이 내게 보낸 톡 내용 몇 곳을 소개한다>.

202259-종일 목사님 생각으로 오고 갔습니다. 태어나 처음 특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목사님으로부터 이 나이에 받는 심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오늘은 지난 세월이 주마등같이 지나고 있습니다.

목사님 모습이 종일 눈과 가슴에 뭉클함으로 지냈습니다.

새벽에 목사님 기도하고 깊은 사랑느낌니다.

829-목사님 지금껏 주신 것 모두잘갚겠읍니다

늘기도해주시고 사랑주심 감사드립니다.


1031일 장로님의 건강이 많이 안 좋다고 하셔서 멀리 자택 근처로 갔다.

허리가 아파서 잠을 못주무신다고 했다. 식당에 같이 같지만 국물만 드셨다

식사를 거의 못하셔서 건강이 많이 걱정되었다. 장로님은 내게 미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빌려간 자들 중 일부만 갚았어도 맘이 편했을 것이다.

나와의 마지막 만남 사흘 후 천국으로 이주하셨다

아름다운 천국에서 잘했다 칭찬받고 잘 계시리라 믿는다

다만 지상에서 해결못하고 떠난 데 대해 안타까워하실 것 같다.

 

10년 넘는 나이 차이에도 친구같이 지냈다

나는 장로님과의 이별로 인해 충격이 크지만 남은 문제가 잘 마무리 되도록 

기도하면서 최선의 방법을 찾고 있다.

(안양에는 더이상 기대를 걸지 않는 게 좋겠다. 그래서 관련 글을 삭제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 없다고 했다. 피할 길을 내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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