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야, 옛말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도 보지 말라고 했다. 뱁새가 황새 걸음 쫓으려면 가랑이가 찢어진단다. 그만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려무나.”
밤 늦도록 공부하는 나의 모습이 어머니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자주 만류하려 들었다.
“괜찮아요. 엄마, 제가 알아서 잘 할께요.”
어머니의 말에 순종할 수 없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계속했다.
나는 초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마을 입구 길거리에서 헌책을 파는 집사님이 있었다. 대부분 책을 100원에 팔았다. 여기서 필요한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혼자 책을 스승 삼아 공부하는 동안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대부분 암기할 메모지나 책을 갖고 다녔다. 불을 끌 기운만 있어도 그 시간만큼 책을 더 보려 들다 보니 밤새 불이 켜있을 때가 많았다. 가난한 살림에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미리 불을 끄고 자려 드는 부모님과 옥신각신하기도 했다.
어머니 친구가 극장에서 일할 수 있게 주선해 주었지만 무분별하게 지내는 청소년과 어울리고 싶지 않아 그만 두었다. 그래서 학습지 배달을 하기 시작했다. 틈틈이 학생들에게 문제 풀이를 설명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학부모가 다른 학부모들과 상의한 모양이다. 학생 몇몇을 모아놓고 과외선생이 되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친 탓인지 아이들이 잘 따라 주었다. 교회에 나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느 겨울 새벽, 몸 상태가 안 좋았지만 새벽기도회 참석해 기도했다.
“주님, 저는 교회가 좋습니다. 저 교회 밖 세계보다 교회 종지기나 문지기라도 좋으니 교회 안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했다.
훗날 신학 수업을 하게 되면서 성경을 자세히 보다가 이때 기도한 내용과 비슷한 성경 구절을 발견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주님께서는 나를 성전 문지기가 아닌 목사로 그리고 선교사로 부르셨다.
검정고시 합격자 발표 일에 서울시교육위원회를 찾아가자 벽에 내 번호가 보였다. 합격증을 찾아와 어머니에게 보이며 말했다.
“엄마, 이것 보세요. 이게 졸업장과 똑 같은 거예요.”
“장하구나, 난 교복 입은 아이들만 보면 네 생각이 나서 눈길을 피해 왔단다.”
어려서부터 교회 출석했지만 십 대 후반에 들어서자 하나님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었다. 마침 교회에서 밤마다 기도하고 계신 분들이 있었다.
이따금 이분들을 따라 관악산 건너편 야산에 있는 작은 기도실을 찾아갔다. 아카시아 꽃 냄새가 풍기는 5월 어느 날 친구와 집사님 그리고 권사님이 함께 기도 모임을 가졌다.
기도를 시작한 지 약 두 시간 지날 무렵 눈앞에 번개가 번쩍 비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그동안 이해가 잘 안 되던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천국 기운에 싸이는 것 같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은사까지 휘몰아쳤다. 드디어 주님과의 만남이 확실히 이루어진 것이다.
“너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금까지 지키고 이끌어 왔다. 나의 빛을 이 어두운 땅에 드러내거라. 내가 너와 언제나 함께 하겠다.”
기도회를 주관하시던 집사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내게 신앙의 어머니 같은 분이다.
산상기도회가 있었던 다음 주일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했다. 그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오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내게 뚜렷한 믿음이 없어 응하지 않았다.
부장 장로는 내가 주일학교에 관심 갖고 찾아온 것을 알고 바로 교사 겸 부장 대리를 맡겼다. 얼마 안 있어 설교까지 맡았다. 이제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교회에서 자주 철야기도를 했다. 성경과 신앙서적도 많이 읽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이 말씀이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어떤 은사보다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해 가을, 교육 전도사님이 내게 신학을 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래, 신학 수업이 좋겠다.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역시 뜻 깊은 일일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의 부르심과 응답 즉 소명의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목회자의 길보다 선교사가 더욱 마음이 끌렸다. 또 미지의 땅에 복음을 심기 위해서는 자신이 충실한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어딘가 복음이 잘 닿지 않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주님, 먼저 한 알의 잘 여문 밀알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어떤 땅에 심기더라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나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셨다. 후일 카자흐스탄을 거쳐 러시아 시베리아 선교사로 오랫동안 사역했다. 세 자녀 또한 어린 시절부터 선교지에서 성장했다. 지방 도시에서 지내는 동안 자녀들이 비교적 잘 적응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