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와 방 이 재 섭
신혼 초 우리는 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지내야했다. 그러던 중 11평 임대 아파트에 입주할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 가족은 첫 아파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 엄마는 유아 교육을 배운 탓인지 자녀들에게 정리 정돈 교육을 시키려 들었다. 나는 아이 엄마에게 따로 놀 방이 없으니 그냥 마음대로 지내게 내버려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유아용 박사 블록을 팔기 위해 아파트 이집 저집 기웃거리던 사람이 우리 집을 들여다보고 탄성을 질렀다.
“이 집 부모님들 정말 대단하세요. 존경스럽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작은 아파트 안방에서 발 디딜 틈이 없이 널려진 박사 블록 사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여겨 보였던 모양이다. 주로 중고 장난감을 싸게 구입한 것이지만 즐겁게 행복해 보였던 모양이다.
큰 아이는 미취학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엄청난 양의 책을 소화해 내는 터라 책값을 감당할 수 없어 주로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아이가 밤늦도록 책을 읽을 때가 많아 건강이 걱정되기도 하고 불을 켜 둔 채 잠을 잘 수 없어 엄마와 실랑이 하는 날이 많았다. “책 그만보고 잠자라”고 하는 말이 큰 아이에게 자장가처럼 들렸을 것 같다.
하루는 자다가 깨어 보니 큰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살펴보니 화장실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문을 열자 큰 아이가 변기에 걸터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마음 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방을 갖추지 못한 환경을 갖추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마칠 무렵 교내 수학 올림피아드가 있었다. 혼자 만점을 받아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며칠 후 같은 반 엄마들 몇몇이 우리 집으로 견학을 왔다.
“과외는 어디서 하고 있나요?”
“우리는 과외를 시켜 본 적이 없는걸요.”
아이 엄마가 보기에 우리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엄마들 같았다.
“혹시 공부 비결이 따로 있나요?”
“시험 전날 엄마랑 문제집을 풀어봤는데 비슷한 문제가 나왔다나 봐요.”
한 엄마가 불쑥 엉뚱한 질문을 했다.
“용돈을 얼마 주셨나요?”
“1000원 줬는데요.”
“그냥 받던가요.”
“예. 아주 좋아하던걸요.”
자기 같으면 꽤 큰 액수를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떤 엄마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렇게 작은 아파트 구조 처음 봐요.”
서민들이 살고있는 작은 아파트가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다.
얼마 후 우리 가족은 카자흐스탄 선교사로 떠났다. 이번에는 방 문제가 아니라 전기조차 잘 들어오지 않았다. 서울서 태어난 아이들이 촛불 아래에서 지낼 때가 많았다. 유일한 낙인 컴퓨터 게임을 하려 해도 언제 전기가 들어올지 모르는 날이 계속됐다. 난방이 잘 안 들어와 추위에 떨면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패트 병에 뜨거운 물을 넣어 수건으로 감싼 채 아이들 이불 속에 넣기도 했다.
수년 후 사역지를 러시아 시베리아로 옮겼다. 자녀들 모두 러시아에서 성장했는데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적었다.
큰 아이는 16살에 고교를 우등 졸업하고 이르쿠츠크 국립대 물리학부에 지원하기로 했다. 물리학과 교수들이 한국 학생이 러시아 물리학부 수업을 잘 따라갈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더욱이 나이조차 어리다고 생각되었던지 졸업한 학교에 전화를 걸어 제대로 수학했는지 확인까지 하는 것이었다. 큰 아이는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기로 하고 학업에 열중했다.
어느 날 큰 아이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아빠, 제 공부방 좀 만들어주세요.”
러시아 아파트는 대부분 방 2개와 거실 하나 구조로 되어 있었다. 딸에게 방을 하나 내주고 남은 방 하나를 부부가 사용해 온 탓에 남자 아이 둘은 거실에서 지내야 했다. 아무래도 공부에 집중할 환경이 못 되었던 모양이다. 큰 아이 말에 따라 우리가 사용하던 방을 내주고 대신 거실에서 지내기로 했다. 부부가 사용하는 침대 한 편을 박스로 대충 막고 책장 뒤 좁은 공간에 막내 잠자리를 만들었다.
공부방이 생긴 큰 아이는 집요하리만큼 노력했다. 5년제 물리학부를 졸업하기 전에 물리 미제 문제를 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지도교수님은 모처럼 제자다운 제자를 둔 탓인지 큰 아이를 무척 아꼈다. 큰 아이는 물리학부를 수석 졸업한 후 21살에 모스크바 국립대 물리학부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만 25살이 채 못 되어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큰 아이는 귀국 후 국가연구소에 취업이 됐다.
모스크바에 있을 동안 동생 학업을 여러모로 지원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동생의 박사 과정을 뒷바라지했다. 얼마 후 동생 또한 만 25세가 될 무렵 박사 학위를 받아 형제 모두 물리학 박사가 되었다. 동생은 울산과학기술원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열심히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딸아이는 법을 전공한데다 러시아어가 유창해 인정받고 있다.
큰 아이가 조금 더 넓은 아파트로 이전할 수 있도록 지원해 경치 좋은 곳으로 이주했다. 내가 늦은 나이에 박사 학위 과정 수업을 시작하자 장학금까지 부담하고 있다.
큰 아이가 한 교회 다니는 자매와 교제를 갖기로 했다고 알려오더니 해를 넘기지 않고 12월 초 양가 가족만 모여 작은 결혼식을 했다.
(며느리는 생명공학 박사 과정에 진학해 학위 취득을 앞두고 있다. 두 아들이 젊은 나이에 물리학 박사를 받았는데 나와 며느리까지 학위를 취득한다면 4명의 박사를 지닌 가족이 되는 셈이다).
넉넉히 않은 살림살이, 다소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키워온 큰 아이와 모든 자녀들의 수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중구문화원 15회 문예 공모 수필 부문 우수상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