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봉제 공장을 거느린 회사 사목으로 있으면서 근로 청소년들을 돌볼 때 있었던 일이다. 미싱사로 일하는 이십 대 중반의 한 청년(이하 K로 표기)이 눈에 띠었다. K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를 따라 집을 나오게 되었다 한다. 아버지는 부산의 어느 집에 4년 동안 딸을 맡겨 두겠다며 얼마간의 돈까지 받아갔다는 것이다. 집안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에도 큰 딸을 떼어놓으려 들었던 것이다. K는 어린 나이에 식모 생활을 해야 했다. 다행히 주인집에서 고등공민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어 2학년까지 다녔다고 한다.
4년이 되자, 주인집에서 K에게 “넌 이제 자유다. 니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하기에 그곳을 나와 공부할 환경을 찾아 서울로 왔는데 그만 직장에 매여 학업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K는 내게 꼭 검정고시 거쳐 중학교와 고등학교 모두 졸업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중고교 과정 모두 독학을 하고 검정고시를 합격한데다 오랫동안 영어와 수학 등 과외지도를 한 경험이 있어 K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틈틈이 지도했다.
K는 아주 열심히 노력했다. 영어 기초가 좀 있는 편이라 영어교과서 해설 테이프를 구입해 근무 중 리시버를 통해 수업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수학은 그동안 학생을 가르친 경험을 살려 많은 것을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다. 나머지 과목들도 조금씩 수업해 나갔다.
수업을 시작한 지 4개월 후 고입 검정고시가 있어 시험장으로 보냈더니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고등학교 과정은 부득이 학원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서 시간제 근무로 바꾸고 고졸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도록 했다. 놀랍게도 수학 1과목을 빼고 모두 합격했다.
나중에는 좀더 자유로운 곳으로 옮긴다며 근무지를 바꾸더니 한 직장에서 만난 멋진 재단사 총각과 결혼하게 되었다. K는 세상에서 자기 아버지를 제일 싫어하고 제일 이해 못할 대상이라고 말해 왔는데 그 아버지 손을 잡고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결혼식이 끝난 후 K에게 살짝 물어보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시니 이처럼 필요할 때도 있지 않느냐. 이제 그만 이해하렴” 하고 말하자, “듣고 보니 그러네요” 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검정고시란 전과목 모두 합격하지 않으면 그동안 배운 것이 그만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다음 시험 검정고시 일자가 다시 다가왔기에 K에게 전화를 했다.
“행복하게 살고 있니, 고졸 검정고시는 그만 포기했냐?” 라고 묻자, “이미 다 써 먹은걸요.” 말하기에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결혼하기 전에 신랑 될 사람한테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말했거던요.” 라는 것이었다.
“야, 그건 거짓말이 아니냐. 한 과목만 남았고 이번에 40점만 넘으면 합격이 되니까 그냥 한번 시험장에 한번 가 보는 게 어떠냐?” 하고 말했다.
“사실 전 지금 임신 중이예요. 벌써 5개월이 넘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가죠.” 하기에, “검정고시는 나이 많은 사람도 온단다. 아이를 낳으면 시험장에 가는 게 더 어려울 수 있으니 딱 한번만 시험 보렴” 하고 말하자 마지못해 응하는 것이었다.
배정된 시험장이 K집과 반대 방향이라 너무 멀고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시험 당일 길 안내 해주기로 했다. K는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고독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던 그녀가 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야, 애기 숨막히겠다. 아가씨처럼 무슨 청바지냐” 하고 말하자, “아줌마로 보이긴 싫은걸요, 사실 그동안 공부도 안 했어요.” 하며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나온 K는 40점정도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뉴스에 검정고시 수학 출제가 잘못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번 검정고시 수학 문제 중 수학II(검정고시에 출제가 금지되어 있다)에서 4문제가 나와 이 항목은 무조건 정답으로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날 수학 시험에서 60점을 얻어 자신이 소원하던 고졸 학력을 얻게 된 것이다. K의 인생이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을 것 같다. 얼마 후 K는 건강한 아들을 낳아 어엿한 아이 엄마가 되었다. 힘든 시절을 보내었던 소녀가 고교 졸업의 꿈을 이루고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고 있어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