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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왜 주셨을까
초대교회에서 예수의 많은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율법의 준행을 통한 의의 추구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진실로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있을 수 없는 타협으로 여겼다. 바울만큼 헌신적으로 율법을 지켰던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의를 보장해 주기는커녕 그를 죄로 이끌었다. 바울이 교회를 그토록 심하게 핍박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이었다. 그가 교회를 핍박한 열심은 율법에 대한 그의 열심의 한 측면에 불과했다(브루스란 저명한 신학자의 말임).

바울이 율법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났을 때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율법에 대한 태도는 아주 독특해서 당시의 일반적인 랍비의 태도와는 완전히 달랐다고 지적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인 면에서 율법을 폐하였다고 믿었으며 또 그렇게 가르쳤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고 그는 말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과도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율법의 시대(갈 3:19; 롬 5:20)는 새로운 시대로 대치되었는데, 이 새로운 시대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신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고(시편 110:1을 인용한 고전 15:25) 부활 후의 삶에서 영원한 유업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의 보증으로서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의 백성들 안에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점에서 “성령의 시대”라고도 부른다(롬 8:10 이하).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율법을 지킬 수 있고 또 지켜야 할 뿐 아니라 구원의 길로서 지켜야 함을 굳게 믿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와 정반대로 율법은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며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더 하시므로 범죄가 더하게 하여 온전한 구속주 곧 자기들을 대신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켜 주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뿐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갈 3장). 율법 시대에도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구속을 이룬 것은 아니다.

바울은 구약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모든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의 준비라는 진리를 바울은 간파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유대인들) 위하여 저주가 되심으로 그들을 구속하셨다. 이 유대인의 구속은 동시에 그리고 동등한 조건으로 이방인의 구속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든 민족의 대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낮추신 성육신과 고난 속에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죄와 마귀의 세력 아래 있는 이방인들과도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셨다. 특히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들의 대표로서 그들을 대신하셨다(홍인규 교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구속으로 본다(3:13-14, 25, 4:4-5). 그리스도께서는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자기의 백성이 언약법을 위반하여 자초한 저주를 몸소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새 언약 아래서 존재했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3:26-29).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성한다(6:16).

바울이 개신교회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주장되는 것은 그가 그의 서신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즉 이신득의를 강조해서 가르치는 사도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요 그 원리였다. 이에 비해 로마 교회는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한다고 가르쳤다.
이 선행교리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적 은혜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으로 본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바른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은 바울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신학이었다. 특히 바울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해 자세히 룬 바 있다.

바울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구원서정을 포함시키고 종교개혁사의 후손들처럼 구원 서정에 구원사를 포함내지 축소하지 않았다. 바울은 구원사적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고 전개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칭의 교리에 과도히 집착하므로 바울처럼 구원사의 관점에 구원서정을 배치하고 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에 착안하지 못했다. 바울은 구약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모든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의 준비라는 진리를 바울은 간파하였다.

칭의에 대해
초대교회의 율법 이해가 종교개혁에 의해 계승되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교회 선행의 공로 교리에 대항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칭의 교리를 바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 「이신득의」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서을 바로 세우며 그리스도의 공로의 충족성을 재확인하였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그 선물이며, 이에 대해 인간의 협력이 필요치 않음을 밝혔다.

칭의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정 선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 주시는 인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구성되어 있다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칭의가 신자들의 새롭고 영원한 신분에 영향을 끼치는 반면 칭의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무죄하다고 선언하시는 단회적인 선포적 행위이다(필립 입슨, 『칭의론논쟁』(석기산.심호섭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이신칭의에 있어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얻는 빈손과도 같다. 오직 이 믿음으로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믿음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선한 행위를 생산하게 하는 믿음인 것이다(엡 2:10). 이러한 선한 행위들은 그들의 칭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단지 그들의 고백적 믿음이 참되고 진정하다는 것을 보여 줄 뿐이다. .

개혁자들이 회개와 믿음을 동반한 중생의 내적 변화와 의로운 삶의 계속적인 갱신과 성장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잘 알려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화의 삶과 행위를 칭의와 절대로 혼동해서는 안 돤다는 것을 강조했다. 칭의에 대한 종교개혁의 교리에 있어서 한 가지 결정으로 중대한 측면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보통 알려져 있는 것이다(김세윤 교수).

칭의 교리 장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신자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오게 되는 이 축복에 대해 그 고백서는 언급하고 있다(11.1).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순종과 죽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모든 자들의 빚을 완전히 청산하였고, 또한 그들 대신에 적절하고, 실제적이고, 완전한 만족을 자신의 아버지의 공의에 만들어 드렸으며” 그렇게 해서 “순종과 만족은 그들을 위하여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덧붙이고 있다(11.3). 동일한 가르침도 역시 웨스터민스터 대요리문답 20,32,39,70-72 등에 그리고 소요리문답 12,33 등에 나타나고 있다. .
율법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속은 그것의 처벌로부터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의무로부터도 구출됨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바울의 칭의의 교리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인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6조에서는 참 신자들이 율법 아래 살지 않는데, 즉 율법으로써 칭의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의 규칙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합당하게 살도록 지시하고 구속한다고 하였다. 7조에서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의 뜻을 종속시키고 능력있게 하여 울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고 기쁘게 행하게 한다고 진술하므로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고 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을 얽매이지 않으나, 생활의 규칙으로 역사함을 말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최초의 신앙고백서로 1530년에 작성되었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로마서 8:16)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에 감사하고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 분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사진설명>이르쿠츠크 1번 교회에서 설교하는 이 선교사- 찬미 통역에 힘입어 주로 교리적인 설교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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