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욕심

by 이재섭 posted Aug 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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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먹고 사는 모든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하나님이 씨앗을 만들었고 그것을 사람이 뿌리지만 그것을 가꾸는 것은 태양과 구름과 바람이다. 하늘 아래 온갖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자라는 것이니 만물을 골고루 나누는 것은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옛날 도적들이 부잣집을 털면서 명분으로 내세운 말이기도 하지만 나눔의 원리를 가장 잘 드러낸 표현이기도 하다. 사람이 막연할 때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하나의 의지본능이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욕이 있다. 그래서 욕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도 하고 파멸의 수렁이란 말도 있다. 욕심은 마음속에 가꾸는 밭과 같아서 잘 다스리면 의욕을 촉진시키지만 과하거나 넘치면 패망과 죽음의 지름길이 된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중 하나가 죽음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골 3:5)고 했고 욕심은 곧 사망에 이른다(약 1:15)고 했다.

흔히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수양(修養)이라는 의미는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품성이나 지식, 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나 그 본질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욕심은 인간을 피폐화시키는 죄의 원흉이요, 죽음의 근원으로 여겼다.
사람이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도 욕심이지만 주어진 조건을 의식하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것도 욕심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이 공기 가운데 살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공기나 물의 고마움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우화적으로 지적했다.

인간세계에는 어디를 막론하고 욕심이 존재한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나, 여야가 무상급식을 놓고 사활을 건 혈전을 벌이는 것, 또 사람이 자신을 위해 더 많은 부를 쌓으려는 것들은 욕심의 전형들이다. 신성해야 할 교회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자리다툼이 그렇고 물질과 권세 앞에 낮아지는 교회의 모습이 그렇다. 성경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길환(기독신문 편집국장)
2011년 08월 16일 (화) 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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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세계나 1등이 되고 싶은 욕망을 지닌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포츠에서 1등의 벽을 넘지 못해 영원한 2등이 되는 예가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저희가 시베리아에서 11년 간 지내는 동안 1등(?)이 되고 싶어 하는 한 젊은이로 인해 오랫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그냥 한 자리에서 모두 만나기만 해도 큰 휴유증이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런 자리를 애써 피해가며 한국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아예 문제 인물로 취급한 탓에-) 고독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이 독보적인 존재인 양 보이려 든 것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탓에 여러 가지 동원시키기까지 했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소속 선교사 편(?)을 들어야 할 지역장이 소속도 아닌 이 자를 두둔하고 나선 것입니다(이 단체에 사직서를 내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가정이 분리된 상태에서 선교가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아이들이 어리고 아직 젊은 편인데 수년 째 가족이 떨어진 채 지내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장기 거주가 가능한 비자를 받았는데 굳이 비자를 핑계로 삼는 것 또한 이해를 어렵게 합니다. 심지어 자녀들이 한국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기까지 하고 있으니 선교사의 삶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욕심에 싸이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법도 원칙도 없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러시아 선교사임에도 러시아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자기 집에 일체 들여보내지 않는 이상한 원칙을 세우더니, 자기 자녀들 또한 러시아 유치원에 보내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진학할 나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고 겸손한 목자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 둘 사람들이 떠나고 공개적인 자리에 무언가 더 할 말도 없는지 침묵으로 일관한 지 여러 달이 흘렀습니다. 지난 4월 말에 셋째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는데 자칫하면 아빠 얼굴도 모른 채 자라날 수도 있습니다. 이 가정에 어떤 문제가 있는 지 관심을 갖고 기도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