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극도로 가난한 시절 음악하는 사람들 특히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1975년 처음으로 교육 전도사로 임명되어 섬기던 작은 교회(방배동 남부성결교회)에 중고 오르간을 하나 구했습니다.
마침 동생 친구 집에 오르간이 있기에 소개해 교회로 가져갔는데 누구도 이 오르간을 반주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단음으로 더듬더듬 반주를 시작했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하고도 반주할 자리를 찾기 어려운 오늘날과 너무도 다른 현실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3년 사역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1년 간 머문 후 가족 모두 시베리아로 향했습니다. 음악의 나라답게 중고 피아노가 너무 싸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 도착 후 형편이 어려웠지만 한국 돈 10만원정도에 중고 피아노 구입이 가능해 보여 용기를 내어 샀습니다. 한국 피아노에 비해 무겁고 운반 또한 어려워 옮기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 가까이 음악학교가 있었는데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씩 수업을 하고 월 만 원 정도한다는 말에 세 자녀 모두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왕 시작한 음악 수업이라 악기를 두 가지씩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음악학교 측에서는 하나의 악기만 선택해야 전문가로 발돋음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꼭 두 가지 악기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허락을 했습니다.
기은이는 기타와 피아노, 찬미와 기성이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부터 찬미로 지어놓고 움악에도 많은 관심을 갖기 바랐던 찬미는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을 방문했다가 단골 헌책방에서 피아노 악보 전집을 발견했습니다. 60권 정도 되는 악보집 가운데 몇 권을 제외하고 모두 있어 싼 값에 샀습니다. 과연 누가 이 악보 연주가 가능할지 알 수 없었지만 믿음을 가지고 샀습니다. 워낙 무거워 러시아로 부쳤습니다. 선편으로 보낼 경우 20kg에 5만원 정도 듭니다. 두 달 가까이 걸려 현지에 도착했습니다.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피아노 전집에 들어있는 곳은 7년 제 음악학교 진도를 모두 마쳐도 연주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시작이 조금 늦은 탓에 피아노는 5년 속성 과정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뜻밖에 기성이가 음악에 두각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학교 피아노 과정 졸업 때 1등 없는 2등(결국 1등인 셈)을 해 우등상을 탔습니다. 이 무렵 피아노 전집 곡을 어느 정도 연주가 가능해 보였습니다. 피아노 악보를 가지고 음악학교를 가면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지도해 주기도 했습니다.
바이올린 과정은 속성이 안 된다고 하여 대학을 진학하고도 계속 다녀 마침내 졸업했습니다. 좋은 음대가 가까이 있었다면 기성이가 음악가로 성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르쿠츠크에 그런 음대가 없어 형을 따라 물리학을 전공하기로했던 것입니다.
러시아를 떠나오기 전에 이 악보 전집을 그동안 자녀들이 다니던 7번 음악학교에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음악학교 교장 선생님은 러시아에서 이 정도 악보를 구입하려면 수 백만원 들여도 어렵다면서 <아주 큰 후원자>라면 너무 감격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토벤 악보는 너무 낡아 안 가지고 왔다고 했더니 수선하면 된다고 마져 갖다 달라고 할 만큼 관심을 보였습니다. 며칠 후 음악학교에서 감사장을 전달했습니다. 음악 선생님들에게도 좋은 연주곡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10년 동안 정들었던 피아노는 제니스 목사에게 기증했습니다. 아마 우솔스카야 교회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피아노 전집 악보를 살 때 우리 가족 누가 과연 이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갔지만 기성이가 어느 정도 소화해 내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때를 따라 도우시고 계심을 자주 느낍니다.
<사진설명> 우솔스카야 교회 방문 때 피아노 반주하는 기성이- 너무 낡아 수리 또는 교체가 필요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