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성도 교수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13:13)
이 시대는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너의 생각대로 하라!”, “너의 판단대로 하라!”, “너의 느낌대로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이로 인해 자기 생각과 판단만 주장하면서 더욱 고집스러워지고 있다. 이런 고집이 굳어지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완고해져간다.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사 48:4)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책망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목이 쇠의 힘줄 같이 교만으로 꼿꼿하고, 이마는 놋같이 딱딱해서 자기 생각만 고집한다.
히브리서 9장 8-12절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며 완고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지 못하였듯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어떻게 완고함을 면할지에 대한 해답은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13:13)고 제시되어 있다.
첫째로 ‘오늘’이라고 일컫는 동안에 ‘매일’ 권면해야 완고하게 되지 않는다. 권면은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하며, 그 날에 필요한 권면은 그 날에 해야 됨을 의미한다. 우리 교회는 ‘매일’ 필요한 권면을 하고 있는가?
둘째로 ‘피차’ 권면하여야 완고하게 되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모든 지체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피차간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지체들은 서로를 통해 도움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으며, 서로의 필요와 강함/약함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피차’ 필요한 권면을 하고 있는가?
셋째로 ‘누구든지’에게 권면하여야 완고하게 되지 않는다. 다른 지체들의 도움이 없이 생존 가능한 지체는 몸된 교회에는 존재할 수 없기에 누구에게나 권면이 필요하다. 특히 지도자에 대한 권면이 없었기에 최근 들어 소위 유명하다는 지도자들이 죄의 유혹에 빠지는 사건들이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우리 교회는 ‘누구든지’에게 필요한 권면을 하고 있는가?
권면은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b)처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해야 하며, 경책과 경계와 권고가 모두 필요하다. 권면에는 격려하기 위한 ‘권고’도 있어야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경계’도 필요하며, 잘못을 책망하는 ‘경책’도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권고’가 없으면 바른 방향이 왜곡되고, ‘경계’가 없으면 죄의 유혹에 빠지고, ‘경책’이 없으면 회한은 있지만 회개가 없다. 사람들에게 부담주기가 싫고, 갈등관계에 역기기도 원치 않고, 다른 사역들로 바쁘다는 이유로 교회가 권면(권고+경계+경책)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죄의 유혹으로 더욱 완고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자들이 잊지말아야할 것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같이 형제의 잘못을 발견하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되, 자신을 살펴보아야한다. 교회는 모든 지체들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권면(권고+경계+경책)을 회복하자!
http://www.godfamily.kr 2011. 01. 16.
*****************************
2011년은 회복의 해
한국이 요즈음 매우 춥다고 합니다. 한국은 습도가 높은 나라여서 기온보다 더 추울 수 있습니다. 가능한 모자를 쓰고 신도 찬바람이 안 들어가는 것으로 신는게 좋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따뜻한 녹차를 즐겨 먹습니다. 이또한 추위를 이기고 몸을 보호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10여년 한 젊은이가 쓸 글에서 진실치 못한 내용이 발견되었습니다. 결코 그래서 안 될 신분임에도- 그래서 바른 글을 쓰도록 충고했지만 나의 말을 듣지 않는 대신 <두고 봅시다> 라는 말을 끝으로 그만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두고 봅시다”란 말의 의미가 뭘까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온 젊은이와 우리 사이를 끊어놓아 고립시키고 그곳도 부족해 갖은 모욕적인 말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땅에 와서 저희 얼굴도 모른 채 아무런 교류가 없이 지내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은 듯-
사람들은 나이든 제가 찾아가 권면하여 관계 회복을 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 주문을 합니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요. 그럼 어디로 찾아가야 하나요. 사는 곳도 모르고- 무작정 찾아가는 것이 능사일지- 사실 메일로 만나자는 말을 수년 간 해 보았지만 한 번도 반응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뱀은 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는데 사람도 똑같은 상황을 두고 두 갈래로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아내가 3년 전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간 사실을 놓고 협력 교회에 보낸 글에는 비자 문제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데 속히 해결되어 같이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정작 한 지역에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 데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자 문제로 지장이 없이-
그래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녀가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어 한국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어린 자녀에게 한국 초등학교만 중요할까요. 아버지와 한 집에 살면서 부모와의 교감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할까요. 더욱이 젊은 부부가 오랫동안 분리해 있는 것이 다른 사람보기에도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똑 같은 말을 하지 않는지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최근 놀라운 일들을 또 발견했습니다. 수년 전 몽골에 있는 신학교에서 헬라어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방학 특강이라 한 주일 동안 종일 강의를 했습니다. 통역도 힘들었겠지만 나름대로 감동을 많이 받았나 봅니다. 특강을 끝내고 헤어지게 되자 통역하던 자매가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하고 아쉬운 말을 남겼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신학교 실무자로 있는 후배 목사가 대단하십니다. 여기 선교사들이 200명 가까이 있지만 아마 목사님처럼 원어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하고 놀라더군요.
그런데 바로 이 신학교와 관련된 자매가 이곳에 온 것 같습니다. 어쩌면 통역하던 자매도 포함되었을 수 있을듯- 자매들을 보내면서 우리에게 인사하라고 하지 않았나 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일 오후마다 바로 위에 말한 자가 있는 곳에서 몽골 모임을 갖는다고 합니다.
두 자매 중 하나는 찬미 후배입니다. 그런데 왠지 대화를 피해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또한 누군가 주문한 탓인지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매들을 보낸 사람과 우리는 소속 단체가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역을 위해 공조 체제를 가질만도한데 왜 이런 방법을 택해야 했을까요. 그냥 수수께끼로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달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완고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 우리네 젊은이를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듭니다. 나이든 사람이 권면해서 하루속히 해결(?)하기 바라는 당부를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점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미 상대의 나이나 신분을 망각한 채 문제인물인 양 몰아세워온 지 오랜 시일이 흘렀습니다. 이제 와서 우리와 만나거나 대화만 해도 사람들이 자기를 이상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끝까지 버티고 있나 봅니다.
벌써 여러 사람이 무언가 문제를 발견하고 하나 둘 곁을 떠난 모양입니다. 자상한 누님처럼 돌봐주던 자매도 떠나게 되어 새로 온 몇몇 학생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 듯- 떠난 사람 가운데 누가 다시 돌아올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완고한 태도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됩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기도 합니다. 거짓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거짓을 단순히 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때 아름다운 만남이 주어지게 됩니다.
2011년 우리 모두 마음 한 편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용서와 화목을 통해 <회복의 해>가로 되었으면 합니다.
<사진설명>- 그리스도 안에서 한 마음으로 찬양을 부르는 이르쿠츠크 1번교회 찬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