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신앙인의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선교를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와 준비를 해 왔습니다.
모세가 일찍부터 자기 민족을 향한 열정이 있었지만 80세에 부름을 받았듯이 저 또한 선교를 놓고 기도를 시작한 지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선교지를 향해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모세와 같이 저희도 모든 일을 뒤로 두고 미처 선교지를 사전 답사할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먼 길을 떠나기로 한 것입니다.
1997년 1월 23일 우리 가족은 선교를 위해 생면 부지의 땅인 카자흐스탄으로 향했습니다. 저와 사라 선교사 그리고 아직 어린 자녀들인 기은(9세), 찬미(7세), 기성(6세)세 자녀를 태운 카자흐스탄 비행기는 너무 작고 오래된 것이어서 멀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염려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목적지까지 바로 날아가지 못하고 중도에 몽고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잠시 내려 기름을 넣고 다시 알마타로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본래 추운 나라로 이주할 때는 봄에 출발하여 점차 겨울에 접어드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정작 선교지를 소개하고 현지까지 안내를 맡은 자가 굳이 1월말까지 현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주장한 탓에 이처럼 모험을 걸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은 선교지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선교 현장에서 체험한 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다 보면 언뜻 이해가안 가는 부분도 있을 줄 압니다. 한국이 아닌 외지에서 제한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라 때로는 일반적인 개념으로 납득이 안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교회와 성도들은 평소 좋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사안을 다루더라도 부정적인 내용의 이야기는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 의사가 환자를 이렇게 다룬다면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때로는 아름다운 몸에 수술 자국을 내서라도 환자를 살려야 하듯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도 보다 분명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헤어지기 앞서 “너희가 검을 가지라”고 하신 것은 비진리나 거짓된 행실에 물들지 말고 주님께 배운 대로 거룩한 지체를 지켜나가라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검을 다룰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인이 당면한 상황들은 전체 선교지에서 볼 때 극히 부분적인 요소일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교 현장에서 직접 부딪친 엄연한 사실들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오늘의 삶과 미래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혹 반복될지 모르는 지난날의 잘못을 시정하고 앞날을 보다 새롭게 이루어 나가기 위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도리어 걸림돌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들이 한국 교회의 방관 속에 잡초마냥 귀한선교지를 잠식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유 1:4) 는 말씀과 같이 혹 아직 어린 영혼들과 불신자가 주를 이루고 있는 선교지에 쓴 뿌리가 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교지 문제라면 당연히 현지이들과 관계된 이야기랑야 할텐데 오히려 같은 한국인의 문제가 표출되고 있음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에서 양분(선교비)을 갉아먹고 정작 사역할 대상을 방해하는 하는 자가 있다면 이또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선교지 일부 실상을 이야기 할 때면 몇 가지 다른 양상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먼저 선교지에 있었던 일 가운데 좋은 이야기만 하라는 <충고>입니다. 사실 선교 훈련을 받을 때도 기존 선교사나 선교지 특성상 뜻밖의 사태가 일어나는 예와 그 대비책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 결과 심한 혼선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듣기에 좋지만 이미 위험에 접어든 환자에게 병이 없다고 하는 의사가 있다면 이는 환자를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없습니다. 설사 신체의 한 부분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의사가 유능한 의사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자기 쪽 사람을 무조건 믿는 태도입니다. 믿음도 좋지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에도 가룟유다가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대로 방치한다면 그 사이 쓴뿌리가 더욱 자리를 잡아가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선교지 모순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한국 교회로 역류해 들어올 까봐 무조건 감추려 드는 태도입니다(마땅히 책임음을 맡은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이는 선교에 동참하고 있는 많은 후원자들의 입장을 무시한데서 기인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사실은 많은 사람의 말이 옳다고 보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가 극소수였습니다. 단지 수의 대소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때로는 여러 사람이 자기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과 이질적인 다른 사람을 고사시키려 들기도 합니다. 이는 이방에서나 있을 법한 일임에도 선교현장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제가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점은 혹 제가 선교지 상황을 브리핑해도 이를 그대로 믿지 않으려 드는 층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던지 안 믿던지 사실 자체가 변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역사의 한 점을 차지했던 일인 만큼 조심스럽게 기록으로 남겨둡니다. 이러한 자료가 선교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 가운데 일반적인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데 이로 인해 한국과 선교지 사이에 커다란 벽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선교 현장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거나 일부에서는 알면서도 사실을 감추어온 탓이라 생각합니다. 자연히 불안감만 더 부추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제 글이 결코 특정된 몇몇 인물들을 비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님을 먼저 밝혀 둡니다. 다만 본인과 가족이 선교 현장에서 당면했던 일들을 기초로 그릇된 토양을 바로 잡고 새로운 것을 심고 건설하기 위한 선교 자료로 제공되길 원합니다.
“참과 거짓이 싸울 때 어느 편에 설 것인가”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이제 우리 모두 진실의 세계를 직시하고 한국 교회 선교지가 아름다운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갖고 위해 기도해야 되리라 믿습니다.
또한 선교지나 그 배후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지라도, 적절한 조언 및 관용과 사랑을 가지고 위해 기도하는 여유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문제의 인물이 끝까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차일피일 미루고 방치하기보다 과감하게 대처할 수 있는 용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누군가 그 일을 대신해서라도 불신으로 얼룩진 땅을 개간하므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방 땅에 생명의 씨앗을 심고 물주고 가꾸는 일이 선교라 생각합니다. 또한 외로이 사역하는 현지 지도자들과 친분을 갖고 격려와 함께 적절한 지원을 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처럼 귀한 사역에 동참함 자들이 동역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힘을 하나라 모아야겠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 많이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설명>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이듬해 선교사 자녀들이 마을 친구와 함께 나들이 갔다.
화려한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전기조차 잘 안 들어오는 땅에서 살아야 했다.
왼쪽부터 기성, 찬미, 친구, 기은(198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