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

by 이재섭 posted Aug 1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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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메워가는 과정은 각자 다르다. 수많은 분노와 희열이 있고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며 어느 때는 한없는 나락에서 허덕이기도 한다. 인생의 말미에서 느끼는 회상은 대부분 뿌듯함보다는 후회와 허탈함이라고 한다.

부끄러움은 양심의 스펙트럼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의 의지대로 안된다는 점에서 양심의 거울이라고도 한다. 거짓말 탐지기는 일종의 부끄러움에 대한 신체적 변화를 체크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솔직함의 표현이다. 부끄러움은 대립과 분쟁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화합과 용서를 이끌어 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을 위축시키는 자괴감을 주기도 하지만 심적 전환을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무참(無慘)이라는 말이 있다. 끔찍하고 참혹하다는 말로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죄를 짓고도 스스로 수치를 느끼지 않는 다는 의미에서 불교 용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을 끔찍한 일로 여긴 것이다. 아마 연쇄 살인범들이 이 같은 범주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끄러움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한다. 다른 생물이나 또는 신의 세계에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천국 역시 고통이 없다면 부끄러움 또한 없을 것이다.

요즘 세상은 천국이 되어가는 것도 아닌데 부끄러움을 상실한 것 같다. 미디어 법을 놓고 벌인 국회의 모습이 그렇고 다문화 시대에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 역시 부끄러운 모습이다.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뻔히 보이는 양심을 팔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교회에 다니면서 점쟁이를 찾는 사람들의 행위도 부끄러운 모습이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은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후회했고 그 부끄러움을 만회하려고 예수님보다도 더 혹독한 죽음을 선택했다. 진정한 부끄러운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인지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싶다

2009년 08월 04일 (화) 기독신문 이길환 편집국장 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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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선교지에 수시로 유행어가 바뀌고 있다. <선교사 간에 불화를 조장하는 사람> <카작에서 어쩌고-> 아직 그 내용을 구체적을 모르고 있다. 미국 가 본 사람하고 안 가본 사람이 말다툼하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더니 카작에 가본 적이 없는 자가 득세(?)한 것일까-

최근에는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주제가 유행 중이다.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 우리와의 접촉을 끊기 위해 만든 말이다. 일단 유행어가 만들어지면 상대를 확인조차 않고 무조건 따르는(?) 우리네 젊은이들의 태도 또한 유행어 제조자 못지 않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애써 강조하는 대상의 신분을 고려해 궁금증을 갖는 젊은이조차 없는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법정에서는 양측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놓고 법의 전문가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한다. 이때 양측에 심문에 따른 변호의 기회를 준다. 얼굴조차 모르는 자들이 덩달아 삼 자에게 <만나서는 안 될 사람> 이라고 강조해 온 사실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말을 시도한 자와 그 대상이 같은 소속이 같다.
15년 정도 나어린 자가 끊임없이 공세를 펴고 있는 상대는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사역하고 있는 교단 파송 선교사다. 이 얼마나 몰상식한 행동인가-
둘다 같은 선교 단체 파송이면 의무적으로 만나야 한다. 하지만 단체 일원이 될 자신이 없어서인지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는 자가 소속 교단 파송 선교사를 가리켜 갖은 험담을 늘어놓선 안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과연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할까. 무조건 동조하는 세력 또한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땅에 온 크리스챤 또한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란 벽을 넘어 최소한 얼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언제가 <부끄러움>당하기 전에 이만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라도 만남의 자리를 가질 용기가 있다면 기꺼이 환영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