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부부의 만남, 부모와 자식의 만남, 학교나 사회 또는 교회를 통한 만남 등 다양한 만남이 있다. 또 만남을 위한 모임이 도처에 있다.
특히 신앙인들끼리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때문에 만남과 교제가 의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이유를 내세워 그리스도인 간의 만남을 가로 막거나 교제를 피해서는 안 된다.
금년 초 우연히 어느 글에서 정월 8일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선교사(또는 크리스챤)들이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지만 누구도 새해가 되었다 해서 전화 한 통 없이 지내온터라 나와는 사실 거리가 먼 이야기다.
결국 나는 이 지역 내에서 선교사의 한 사람도 크리스챤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굳이 나이든 목사를 뺀 채 모임을 가지는 이유는 또 뭘까. 크지 않은 도시에서 어차피 다 모일 수 없다면 그냥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도록 방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왜 이런 결과를 빚게 되었을까. 사실 이와 유사한 일을 몇 번 겪은 적이 있다. 내가 신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돌본 끝에 목사가 된 후배 몇 명이 신학교를 졸업한 어느 날부터 우리와 멀어져 갔다.
나를 만나면 언제나 선배이고 형님뻘 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가운데 최 목사는 야간 신학생 시절에 우리 집에 한동안 데리고 있었다. 심지어 우리가 결혼하고도 한 달 간 함께 살았다(단칸방과 같이 불편한 구조에서 함께 살았다).
나이가 일곱 살 정도 적었는데 졸업 후 어느 날부터 관계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수년 동안 서로 연락 없이 지내오다가 최 목사 가족이 미국으로 이주한다는 말을 듣고 김포 공항에 나가 만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사이가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이 지역 내에서 오래 전부터 나와 서먹한 관계로 돌아선 자는 미국에 간 최 목사보다도 7년 정도 어리다. 따라서 나와는 무려 15년 정도 차이가 난다.
나이든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아끼면 무슨 문제가 발생할까. 좁은 선교지 임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고 있는 이 젊은 친구의 발상이 점차 나와 관계를 어렵게 몰고 갔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데다 여러 형제 중에 막내로 자랐고 목사가 된 지도 얼마 안 됐다.
이 젊은이의 발상이 결국 만남의 장을 흐려놓기 시작했다. 해가 갈수록 점점 태도가 지나쳐 보여 수년 전 한국에 나갔다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위인 목사에게 이런 분위기를 이야기하자 젊은 친구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좁다보니 미국에 간 최 목사 고교와 대학 후배였다. 좀더 알아보니 고향이 같고 같은 교회 출신이라 더 놀랐다. 그래서 미국에 메일을 보내 나도 잘 아는 선배 목사님이니 예를 갖추는 게 어떻겠냐고 후배에게 한 마디 해 달라는 뜻에서 이곳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전혀 다른 답이 왔다. 미국 사람들보니까 남의 일에 간섭 안 하더군요. 하고 나와 교류를 다시 끊고 말았다. 같은 교회 출신이라 성향이 같은 것일까.
한국에 있는 최 목사 형도 목사가 되어 서울에 있는 작은 교회를 맡고 있다. 모두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온 사이이다. 서로 고향 선후배 사이인 것을 알게 되어 이곳도 방문하자 주일학교 선생을 맡기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나를 멀리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나갔다. 하긴 고향이 바뀔 수 없을테니 날 피해서라도 고향 후배를 감싸야 하나보다.
송아지가 자라나면 코뚜레를 매고 망아지가 자라나면 재갈을 물린다. 그리고 멍에를 씌워 주인이 사용하기 쉽도록 만든다. 주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의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도 이런 통제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 온유하고 겸손할 주인께서 쓰기 쉽고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다.
만남은 아름다운 것이다. 만날 수 위한 모임이나 교제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피할 수 없는 대상을 제쳐놓고 자기들 간에 만난다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어떤 조직이나 장소에 들어가다 보면 신고식을 거치는 곳도 있다. 최소한 앞서 와 있는 사람에게 인사 정도는 해야 되지 않을까. 이런 것 마저 생략할 정도라면 나머지 사람들끼리 모임을 갖는 일 또한 하지 말아야 도리가 아닐까.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이 지역은 약 60만 명 정도 살고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버스가 20분도 채 안 되어 시내를 관통할 정도이다. 러시아 내륙 지역이라 아직 한국인들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발생해 아쉽게 생각한다.
오래 전부터 마치 우리가 이 지역에서 불화를 조장하는 인물인 양 소문이 퍼져나갔다. 후배 목사의 소개로 중국의 한 한인교회가 선교사로 영입하려다가 그만 소문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나중에 후배 목사를 만나 물었다. 당시 선교사는 둘뿐이었다. 둘 중 진원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중국에서도 나름대로 현지 진상(?)을 파악을 했다는 것이다. 정작 당사자인 우리를 만난 적이 없어 결국 한쪽 말만 듣게 된 셈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자꾸 말을 만들다 보면 이런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때 후원교회가 주어졌다면 선교가 많이 활성화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 가족을 현지에서 몰아내 보려고 비자 루트를 끊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장기 비자로 전환된 사실도 모르고 3개월에 한번 씩 자녀들이 학업을 중단한 채 몽골을 오가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애써 초청을 해 준 자가 어느 순간 돌변해 우리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어느 새 이 그룹의 일원이 되어 자기 스스로 연락책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 자로 인해 비자 노선까지 바꾸어야 했는데 어느 날 소속 선교회에서 탈퇴하더니 한국에서 교회를 맡아 목회하고 있다고 한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태도에 아연할 따름이다.
우리는 그동안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음에도 화합의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대신 우리가 만남의 자리를 피해 온 것처럼 몰아세워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마치 안쓰러운 대상인 양) 금식 기도까지 했다고 한다. 이 정도 깊은 관심을 보일 정도라면 방문을 하던가 아니면 사람을 모아놓고 정식 초청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먼저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자가 알려와야 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리스도가 하나이듯이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이다. 한 사람(?)의 벽을 넘지 못해 끝내 아무 연락도 없이 새로운 한해를 맞고 있는 이 땅에 온 우리네 크리스챤들이 민족 간의 화합을 위해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하나되는
따스한 바람이
이르쿠츠크 그 땅가운데
외면하여 돌아앉아있는
차가운 심령들 가운데
반복과 아성을 무너뜨리는
능력의 바람으로 일어나길 기도할께요.
주님의 위로하심이
한국인 젊은이들을 통하여
나타나게 하소서
저들을 고치시고
사용하여 주소서 -
이 땅을 염려하는 한 후원자의 글에서-
얼마전 우연히 만난 이방 청년이 소문의 주인공을 만난 자리에서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했다. 차라리 오해라면 풀기가 쉬울 수도 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이런 결과를 유도하고 자신의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집단 이기주의적 발상일 수가 있다. 외진 시베리아 땅에서 이왕 택한 길인만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신앙인이 너무 사람의 벽을 의식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라도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금년은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회개와 부흥 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사방에서 화합과 일치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해가 지나기 전에 이 땅에서도 화합의 장이 마련되기를 기대하여 새해 벽두를 기해 글을 쓴 바 있다.
하지만 1년이 거의 지난 지금까지 누구 하나 연락조차 없이 또 한 해를 보냈다. 결국 성탄 이브가 되도록 코이노니아의 가질 기회가 없었다. 이런 결과를 유도한 A 선교회 Y목사도 한 몫을 했다. 대개 이런 자들이 측근 앞에서는 사랑과 교제를 내세운다, 아이러니한 일이라 생각된다.
성경을 알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다면 책임이 수반된다. 사람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태도를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삶이 아쉽다. 올해도 변함없이 한 해를 보내려는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립보서 2장 12하-14절).
크리스챤은 사랑을 실천할 의무가 있다. 더욱이 선교사라면 이방에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장차 한 천국에서 만날 사이인 만큼 지상에 있을 때 서로 아끼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잘 가르치는 장로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는데 어쩌면 선교사로서나 목회 경력으로보나 가장 연장자일 수 있는 이 선교사에게 아쉬움이 남는 한 해이다.
후원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천사홈 방문자들의 하나된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애써 외면하려드는 멀리서온 크리스챤 젊은이들로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가족 얼굴만 보고 살아가지만 신실한 러시아 목사님들과 동역하고 있어 위로가 됩니다. 물론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계시기에 든든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화합과 일치를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새해에는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만남이 주어지길 소망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
사진설명- 에반젤리칼 교회 102번째 생일 잔치에서 성도들이 즐겁게 교제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