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후원자와 동역하는 사역이다

by 이재섭 posted May 1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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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년 전 신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평소 사례비를 주기 어려운 작은 교회를 찾아가 봉사하는 대신 아르바이트로 주로 과외지도를 했다. 대개 중학생을 대상으로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중학생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했다. 처음으로 경험삼아 다른 집에 입주해 본 것이었다. 서울에 살 집이 있으면서 굳이 남의 집에서 산다는 것이 좀 어색했다.  
하루는 자정이 다가올  무렵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 나가서 문을 열었더니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전에 있던 가정교사인데 통금이 다 되어 학교 기숙사에 못 가게 되었다며 하룻밤 자고 갈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묵고 있던 방으로 안내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앙인으로 명문대인 S대 사대를 다닌다고 했다. 
사실 그 집은 지내는데 많이 불편하고 대우도 안 좋은 편이었다. 전에 가르치던 가정교사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이때 잠시 가정교사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좋은 친구로 서로 사귐을 갖게 되었다. 후일 청소년 사역과 선교사로 사역하는데 있어서 틈틈이 많은 후원을 보내 주었다. 주님께서 만남을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는 본래 S대 법대로 가려다가 고교 시절 건강이 안 좋아 사대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시가 목표였던 만큼 이를 후회하고 있었다.  워낙 재원이라 학업을 중단하고 몇 개월 다시 입시 준비를 하더니 이듬해 S대 법대에 무난히 합격하여 본격적인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이따금 가족을 위해 남달리 수고하시는 친구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친구 어머니는 신앙이 아주 깊은 분이었다. 자녀들 또한 모두 공부를 잘 했다.
  드디어 S법대 4학년 때 친구는 사법고시를 패스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본래 검사가 되기 원했지만 5공 때라 자칫하다간 공안검사로 신앙인이 감당하기 힘든 과제가 주어질 것이 우려된다며 바로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친구는 영어 실력이 아주 뛰어났던 탓에 국제 변호사 업무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영어권 나라로 가서 현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오랫동안 국외에 살았었다).

별 준비도 없이 가족을 이끌고 시베리아 선교사로 나와 몹시 어려움을 당할 때였다.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1월 중순, 뜻밖의 헌금이 정기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여태까지 이만한 액수의 헌금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이 돈이면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 가족 생활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누굴까. 김 변호가 같은데 송금자 이름이 생소해 언뜻 감이 안 잡혔다. 몇 달 동안 계속 헌금이 오는 것이었다. 한국에 이런 후원자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그래서 김 변호사에게 메일로 조심스럽게 글을 보내 송금자를 알 수 없는 헌금이 오고 있는 내용을 알렸다.
며칠 후 그로부터 답이 왔다. 역시 김 변호사가 보낸 헌금이었다. 거래처 이름으로 보내느라 우리가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감사했다. 아직 한국교회가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후원을 대신 짐을 져 주어서-  
김 변호사는 자기 주위에 우리 후원자를 찾아보았지만 아직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친구가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외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단독 사무실을 운영하느라 어려움을 겪기까지 지속적인 헌금을 보내주어 정말 감사했다. 기독교 정신이 강한 사회주의 나라는 변호사라 해서 특별히 더 많은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며 무리해 가며 후원을 해온 사실을 말할 때 더욱 감격스러웠다.

여름에 비자 연장을 위해 가족이 한국을 방문해야 했다. 한국 경제가 아직 어려울 때라 가족이 한국을 오가는 경비가 쉽게 매워지지 않았다. 러시아 공립학교는 초중고 모두 무상이었는데 그 사이 기은이가 대학생이 되어 등록금까지 감당해야 했다.

부득이 다른 일도 더 볼 겸 혼자 한달 더 한국에 남아 있다가 선교지로 돌아왔다. 매달 가까스로 살아왔는데 가족 비행기표를 신용카드로 구입한 터라 후반기 사역에 무리가 올 것 같아보였다. 러시아가 급속히 임대료를 올려 한달 지출이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선교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대개 사전에 알고 있는 목사님 또는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하거나 교제를 나누는 것이 일종의 후원 교섭이다. 시일이 흐르는 동안 상대방이 먼저 후원을 결정하고 어느 정도 후원비를 보내왔다.

무리해가며 시베리아로 온 이후 힘겨운 살림살이를 하느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정기 후원으로는 무리여서 어떤 헌금이 들어와야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는 인터넷으로 통장을 확인하던 중에 깜짝 놀랐다. 갑자기 잔액이 치솟은 것이었다.
누가 이런 헌금을 보냈을까. 살펴보니 김 변호사였다. 한국에 돌아와 법무법인에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다시 적지 않은 헌금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헌금이 들어옴으로 인해 또다시 어려움을 덜게 되었다. 현지인 교회를 도울 수 있는 힘도 생겼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선교는 후원자와 동역하는 사역이다. 선교사 또한 후원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후원교회 부흥을 위해 목사님의 사역을 위해- 후원자들의 삶과 가정을 위해-
요즘 후원자를 위한 기도 가운데 이런 내용도 들어있다.
<주님 김 변호사님을 크게 쓰시옵소서. 은혜와 복을 많이 내려주셔서 좋은 일 많이 하게 하옵소서>
저희 선교를 후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사진설명- 1985년 10월 15일 동서울노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았다.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시고
나아가 선교사로서 사역하도록 인도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