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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창조에 대한 신학적 이해
Theological Implications of the Creation of Light


조덕영
Duk Young Cho

창조신학연구소
Korea Institute for Creation Theology
Seoul, Korea
EMail: dycho21c@hanmail.net


(Received June 15, 2011,
Accepted July 21, 2011)




[Abstract] This paper deals with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the creation of light. In the first Chapter of the Bible, God(Elohim) is described as creating light by fiat and seeing the light to be good. But light, by definition, is not an entity in its own right. It is the link between two other entities, the communication from its emitter to an observer or recipient. The ancient Hebrews did not differenciate between nature and supernatural light. The term light has been used in spirituality. Spiritual light was a holy thing, the natural symbol for deity. Bible commentators see the presence of light as a metaphor of truth, good and evil, knowledge and ignorance. God is pictured as creating light and being clothed with light.





Ⅰ. 시작하며
Ⅱ. 빛의 창조
Ⅲ. 빛에 대한 주요 신학자들의 이해
Ⅳ. 빛의 연구에 대한 간략사(簡略史)
Ⅴ. 빛에 대한 신학적 이슈
Ⅵ. 빛의 신학적 이해
Ⅶ. 나가면서





Ⅰ. 시작하며

빛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우리 인간은 이 세상의 빛과 함께 살아왔다. 빛은 인간과 생명과 우주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근원적인 물질이다. 빛이 없다면 우리 인류의 모든 유산과 활동과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이 빛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를 살펴보는 것은 신앙과 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신학은 일찍부터 성경의 빛을 주목하고 빛에 담긴 진실과 의미를 탐구하여 왔다. 또한 과학이 발달하면서 빛에 대한 개념은 단순한 성경적, 신앙적 해석을 넘어 그 자체의 물리적 신비에 깊이 접근하게 되었다.

본 논고는 그런 빛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빛의 창조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고 빛에 대해 주요 신학자들은 어떤 접근을 하였는지 간략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연구 성과가 현대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는 지 살펴보고 종합적으로 빛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Ⅱ. 빛의 창조

성경은 빛(רוא, o-r)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빛은 첫째 날 창조되었다(창 1:3-5).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날은 첫째 날이었다. 창조 명령은 6일에 걸쳐 8번 기록되었고 빛 창조는 그 가운데 첫 번째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빛에 대한 가치 평가(4 상반절), 영역 지정(4 후반절), 의미 부여(5 상반절)를 한 것도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었다. 최근 지적 설계 운동(Intelligent Design Movement)을 주도하고 있는 뎀스키(W. A. Dembski)도 빛이 창조되면서 세상은 개념화 될 수 있었고 가치가 적절히 부여되었으며 하나님의 의도가 충만한 장소일 뿐 아니라 그 의도가 이해 가능한 장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뎀스키는 그 이해 가능성의 영역은 과학과 도덕과 미학에 모두 적용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태양을 빛의 근원이라고 여긴다. 태양은 물론 빛이다. 지구 빛의 근원이기도 하다. 창세기는 큰 광명과 작은 광명과 별들이 넷째 날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큰 광명과 작은 광명은 해와 달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즉 성경은 지금 우리가 보는 이들 발광체(發光體)들이 있기 전 이미 빛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태양이 있기 전 빛의 근원은 이미 창조된 것이다. 빛이 태양보다 먼저 나왔다는 성경의 기록은 어떤 다른 고대 문헌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오직 히브리인들만이 가진 계시였다. 플라톤(Platon, BC. 427-347)은 태양을 ‘최고의 선’(the Good)과 연관시키며 필로(Philo, BC. 20- AD. 50경)는 창조주를 빛의 원형(原型)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태초의 빛과 태양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성경은 빛의 창조에서부터 다른 어떤 기원에 대한 설화와도 다른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태양이 있기 전 창조된 빛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어려운 난제이다. 일반적으로 태양이 이미 첫째 날부터 있었다고 보고 다만 넷째 날 보여 지게 되었다는 해석이 있다. 즉 첫째 날 하늘과 땅들이라는 구절 속에 이미 태양과 달과 별들을 포함 시키고 있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넷째 날 창조된 태양과 달보다 먼저 창조된 빛이 있음을 알리므로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빛의 근원은 당연히 해와 달 일 거라고 믿을 지도 모르는 편견과 선입관을 자연스럽게 차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해석이라고 본다. 헨리 모리스(H. M. Morris)는 태양이 있기 전 어떻게 빛이 있었느냐는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보다 먼저 존재한 빛의 근원이 궁창 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성경적으로 보면 첫째 날 분명 무언가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태양은 아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 이것이 단지 히브리 민족의 관습적 해석이었는지 초월적 계시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첫째 날 빛 창조에 대한 입장부터 신학의 관점과 색깔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빛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태양빛이나 달빛이나 첫째 날의 빛이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빛(창 1:3)을 나타내는 히브리어(o-r)는 남성 단수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물도 우리와 달리 물들(םימ, maim)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하는 데 빛을 단수형으로 쓰고 있는 것은 주목해볼만한 특이점이다. 태양빛과 달빛, 별빛 등을 생각한다면 빛의 복수형을 사용했어야 마땅하다. 본래적 빛(단수형)이 먼저요 빛의 발생인들(복수형, ma-or)들이 순차적으로 따라 오는 것이 논리적, 성경적 질서일 것이다. 하나님은 첫째 날 빛의 단수형을 사용하시므로 빛 창조의 절대성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날 창조된 이 빛을 빛의 근원(a source of light)일 거라고 표현한 헨리 모리스는 이 빛은 넷째 날 태양이 창조되면서 두 빛이 본질적으로는 다를 게 없으므로 자연스럽게 태양빛으로 대체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작업 가설(作業假說, working hypothesis) 같은 것이다. 이 태초의 빛(창 1:3)이 무엇이든 간에 과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그 실체와 의미를 추적하기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J. calvin)이나 헨리 모리스 같은 주석가들도 더 깊은 해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이 빛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삼가하고 있다고 본다. 그 실체를 당연히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도 이 빛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결론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이 빛은 온누리에 균등하게 광명을 제공하는 빛은 아니었다. 태양이 낮과 밤을 나누듯 하나님은 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었다. 첫째 날 저녁을 맞기도 전에 빛과 어두움, 밤과 낮은 이미 지구 표면에 동시에 나타났다. 달을 보며 사람들은 달 표면이 밝은 곳과 어두운 곳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인류는 지구에도 그런 구분선이 있다는 것을 겨우 16세기(1542년 경)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인지(認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우주비행사들은 이것을 친히 확인하였다.



Ⅲ. 빛에 대한 주요 신학자들의 이해


1.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철학자들은 빛의 과학적 연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미 빛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신비(빛의 형이상학, metaphysic of light)를 탐구하여 왔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위 디오니시우스, 동방신지학을 완성한 수라와르디를 비롯한 이슬람 신학자들, 베이컨, 칸트 등). 어거스틴도 그 가운데 한명이었다. 그는 본래 마니교도(摩尼敎徒) 였다. 마니교(Manichaeism)는 빛의 왕국이 사방으로 퍼져 어두움의 왕국에 이르렀다는 이원론적 종교였다. 이 때부터 이 지상에서는 선을 대표하는 빛과 악을 대표하는 어두움 사이에 끊임없이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 싸움의 마지막에 비로소 한 예언자가 와서 어두움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이 예언자가 바로 마니였다. 마니는 자칭 세 예수 가운데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온 참 예수라고 자신을 지칭하였다. 이 종교는 '선은 빛이요 악은 그 그림자'라고 보는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를 많이 닮아있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불교, 조로아스터교가 복합된 종교였다.

하지만 회심 이전 숙명론적 마니교의 이원론에 익숙해있던 어거스틴은 회심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빛에 대한 어거스틴의 관심도 당연히 바뀌었다. 그의 창조론과 빛에 대한 관심은 성경의 창조론으로 돌아왔다. 어거스틴은 먼저 태양이 있기 전 밤과 낮이 있었다고 설명하는 창세기 1장 창조 기사의 첫 3일에 주목한다. 지구의 자전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 이 문제에 대해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어거스틴은 솔직하게 그 빛이 어떤 빛이었는지 어떤 운동으로 교차하여 어떤 성격의 아침과 저녁을 만들어 내었는지 인간의 지성으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어거스틴은 이 빛을 물체적 빛을 넘어 거룩한 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약한다. 성경의 빛이 물리적 빛인 동시에 상징적 의미로 쓰여짐을 간파하고 성경 말씀의 다중적(多重的) 의미를 빛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De Genesi ad Litteram)에서도 빛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는데 첫째 날 만들어진 빛은 영적 창조의 형상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거스틴이 보기에 천사들의 집단이었다.


2.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74)

로마 카톨릭 신학을 완성한 신학자로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 빛(lux)은 보게 만드는 것이요 드러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적 존재들에게 있어 빛은 먼저 은유적이며 고유적 의미는 그 다음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 첫 번째 날의 빛은 어거스틴처럼 물리적 실체가 아니었다. 아퀴나스가 볼 때 빛은 첫째 날 창조되었으나 그것은 또한 태양의 실제적 형상이나 자연적 형상이 아니었다. 빛이 물체가 아니라는 개념은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분명 올바른 해석은 아니다. 빛이 열을 내므로 일종의 에너지라는 것은 아퀴나스도 알고 있었으나 빛의 실체적 현상들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물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광명의 장소로서의 ‘최고의 빛나는 하늘(coelum empyreum)'은 보시기에 좋게 창조되었다. 아퀴나스에게 있어 신앙과 이성은 갈등이 있을 수 없었다. 갈등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해 부족에서 발생한 오류 때문이라고 하였다.


3.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창조주이심과 하나님이심은 루터에게 있어 동일한 의미였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분이요 유일한 창조주라는 점에서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전지전능하시고 우리의 구주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렇게 무(無)에서 모든 유(有)를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분이다. 따라서 빛도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였을 뿐 아니라 보존한다. 루터에게 있어 창조는 완결된 행위가 아니라 현재적 실재요 지속적인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세상에 관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창세기 1장에서 그친 게 아니라 계속하여 세상에 머물러 있다. 빛은 그 창조의 섭리와 보존의 중심이다.

하지만 루터의 관심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머물지 않는다. 루터의 신학은 십자가 안에서 더욱 미래로 나아간다. 루터에게는 창조의 빛도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빛은 십자가 안에서 물리적 빛 이상이었다. 창세기 1장 이후 빛의 성경적 의미는 물리적 빛의 의미를 너머 다중적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다. 본래 고대 히브리 사람들은 자연의 빛과 초자연적 빛 자체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빛을 천사라고 하는 알레고리로 해석한 어거스틴의 견해를 받아들인다. 이것을 루터가 빛의 물리적 성질을 무시했다는 식으로 단순히 해석하여 오해하면 안 된다. 현세의 빛은 마지막 날 이루어질 빛에 비하면 겨우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빛의 창조주로서 영원한 빛이요 영광의 빛이요 빛의 빛이신 주님을 앙망한다. 인간은 죽음의 절망 가운데 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 이후에 이루어지는 소망 가운데 산다. 성경은 그것을 빛의 비유로 설명한다. 이렇게 루터는 빛의 물리적 성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나타나는 미래의 영원한 빛을 주목한다. 즉 달빛이 햇빛 같아질 때가 올 것이다(사 30:26). 이것이 신학의 풍성함이요 루터 신학의 묘미이기도 하다.


4.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종교개혁 신학자 칼빈 신학의 해석학적 중심은 간결함과 용이함(brevitas et facilitas)에 있다. 칼빈은 창세기 주석의 빛 해석에 있어서도 이 같은 자신의 해석학적 특성을 간결하고 용이하게 그대로 보여준다. 칼빈은 창세기에 언급된 대로 빛은 마땅히 맨 처음에 창조되어야 했다고 믿었다. 그것을 방편삼아 세상은 아름답게 장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피조물의 구별은 빛으로부터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경 그대로 해와 달보다 먼저 빛이 창조되었음을 인정한다. 모든 도구들은 하나님의 도구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물체인 태양과 달과 별빛에 매달린다. 하지만 개혁주의자 칼빈이 볼 때 해와 달이 없어도 하나님은 우주를 붙드실 수 있는 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당연히 태양과 달에 매달리는 분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에 복종한다. 칼빈은 첫째 날 창조된 빛은 흩어져 없어졌으나 지금은 그 빛이 빛나는 물체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묘사하여 첫째 날 창조된 빛과 넷째 날 창조된 빛 사이의 해석적 조화를 시도한다.

칼빈이 활동한 시대는 근대 과학이 꿈틀대던 시대였다. 하지만 과학의 성과들은 여전히 가변적이었다. 칼빈은 성경적 범위를 벗어나는 과학적 언급에 대해서는 삼간다. 빛과 어둠이 어떻게 낮과 밤을 점유하고 있는 지에 대한 세부적 설명은 칼빈 당시에 꼭 알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알 필요도 없었다. 칼빈은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는 미결의 문제로 남겨 두었다. 검증되지 않은 불필요한 성경 밖 주장들을 함부로 성경에 적용하지 않으려는 칼빈의 성경 자증 원리(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가 여기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5.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바르트는 빛의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로서의 창조의 측면에서 다룬다. 바르트에게 있어 창조는 언약의 외적 증거(Creation as the External Basis of the Covenant)인 동시에 언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심으로써 빛을 창조하였다. 창조주의 인격적 본질은 첫째 날부터 드러난다.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주인의 명령에 존재하게 되었다. 바르트에게 빛은 생명을 뜻하며 하나님의 사역의 표징(sign)이며 은혜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르트는 칼빈이나 다른 주석가들처럼 빛이 첫째 날 창조되었음을 언급한다. 하지만 바르트는 자연으로서의 빛이 아니라 언약에 매달린다. 이것들은 지구라는 언약의 동산에 주어지는 필수불가결한 언약의 파트너이다. 바르트도 창조는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었다. 다만 바르트에게 있어 창세기의 창조 사건들은 다른 사건들과 달리 피조계의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바르트가 보기에 창조는 다른 사건들처럼 기록될 수도 연구될 수도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인간 역사와 자연역사보다 앞서 일어난 창조는 ‘사가(saga)'라고 불려지는 것이 맞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전(前)역사적(Urgeschichte, Pre-historical) 실재에 대한 직관적이고도 시적인 기술이다.

칼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요점이 여기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거스틴과 칼빈과 바르트가 자연신학을 부정한 것은 같았으나 어거스틴과 칼빈이 자연계시에 대해서는 작은 불빛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반면 카르트는 창조를 언약의 외적 근거로 보므로써 자연신학과 더불어 자연 계시의 효용성조차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별되는 로마 카톨릭의 자연신학과 자연 계시와 자연 은총에 긍정적인 에밀 부룬너와 완전히 결별하였다.



Ⅳ. 빛의 연구에 대한 간략사(簡略史)

빛을 인간의 시각에서 과학적으로 보면 ‘눈의 망막을 자극하여 시각을 생기게 하는 전자기파로 빛 또는 가시광’이라 부른다. 파장은 대략 400-750nm의 범위에 있어 빨강에서부터 보라까지 색감을 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감마선에서 전파까지의 전자기파(파장 10-14~155m) 전체로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빛이라 부르는 물질은 극히 좁은 범위를 차지한다. 자외선(1~400nm), 적외선(750nm~1mm)도 넓은 의미에서 빛이라 부르기도 한다.

빛에 대한 연구는 고대 헬라의 철학자인 아르키메데스와 유클리드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빛의 과학적 성격이 알려진 것은 17세기 무렵이었다. 영국의 뉴턴(I. Newton, 1642-1727)은 빛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입자(粒子)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빛의 입자설이다. 같은 시대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호이겐스(Christiaan Huygens, 1629-1695)는 빛의 반사와 굴절을 확인하고 빛은 파동(波動)이라고 설명하였다. 파동은 반사와 굴절을 설명하는 데는 유용하나 빛의 직진성을 설명하는 데는 난관이 따른다. 19세기 들어와 교회의 장로였던 천재 과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자파와 빛의 속도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전자파도 일종의 빛이라는 것을 증명한 중요한 성과였다.

20세기 초 드디어 양자 역학이 성립되면서 빛은 전자파의 일종이며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중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빛이 직진한다는 것도 밝혀졌다. 1676년 덴마크의 뢰머는 목성과 그 위성의 회전주기(回傳週期)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알아내었다. 그는 빛의 속도가 1초에 약 30만 km라고 하였다. 거의 정확한 측정이었다. 그 후 여러 과학자들의 수고와 연구(표 1 참조)로 오늘날 빛은 직진성과 파동, 반사, 굴절, 회절, 산란, 분산, 스펙트럼, 색깔 등 아주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이 알려졌고 정밀한 빛의 속도도 측정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도 빛의 본질적 신비는 과학계 안에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표 1. 빛과 관련된 간략한 주요 과학사 연표


연대
발견 및 주장
과학자
1655
빛의 파동설 주장
C. 호이겐스
1666-1668
빛의 입자설 주장, 빛의 분산 발견 및 반사 망원경 발명
I. 뉴턴
1822
빛의 파동설 완성
A. J. 프레넬
1864
빛의 전자기파설 제창
J. C. 맥스웰
1888
빛의 전자기파 존재 입증
H. R. 헤르츠
1895
X 선 발견
W. K. 뢴트겐
1900
복사론, 양자론 기초 확립
M. K. E. L. 프랑크
1905
광양자가설, 특수상대성이론
A. 아인시타인
1908
빛 간섭 이용한 컬러 사진법 개발
G. 리프만
1923
빛의 입자성 확인
A. H. 콤프턴
1949
홀로그래피 사진법
D. 가보로
1962
반도체 레이저 개발

1986
전자현미경
E. 루스카, G. 비니히, H. 로러
1989
원자분광학 개발
N. F. 램지, H. G. 데멜트, W. 파울





Ⅴ. 빛에 대한 신학적 이슈

1. 빛의 이중성에 대한 신학적 고찰

빛의 과학적 성과를 통해 신학자들이 가질 수 있는 관심은 빛에 담긴 신학적 함축성이다.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은 과학적 성과이나 신학에서도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빛의 이중성은 모순인가 이율배반인가? 모순(矛盾, contradiction)이란 논리학에서 두 개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 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고, 이율배반(二律背反, antinomy)이란 똑같이 정당하게 보이는 2개의 원리나 결론 사이에 실제로든 겉으로든 존재하는 모순을 가리킨다. 한자 그대로 모순은 ‘모든 방패를 뚫는 창’과 ‘모든 창을 막는 방패’처럼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한다. 이율배반은 일종의 역설(paradox)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은 실제 과학적으로 증거 된 실재하는 파동이며 입자이므로 모순은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므로 왜 빛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일까라는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과학이 발달하면서 파동과 입자를 따로 떼어 설명한다면 보통사람들에게도 겨우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 둘을 함께 설명하려면 알면서도 또다시 설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종의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특별히 입자설과 파동설이 완전히 정립되기 전에는 이 두 주장은 서로 모순처럼 보였다. 이걸 해결한 사람들이 바로 과학의 천재들이었다. 17세기 초 케플러와 갈릴레이로부터 시작된 빛 연구(광학, optics)는 17세기 중반 호이겐스의 파동설(1655)과 18세기 초 뉴턴의 입자설(<광학>, 1704)로 발전하고 이 빛의 이중성에 대한 연구는 프레넬(1822)과 푸코(1850)의 파동 연구, 맥스웰의 빛의 전자기파설(1864)과 이를 입증한 헤르츠(1888), 엑스선을 발견한 뢴트겐(1895),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방출되는 광전효과를 발견한 아인슈타인(1905) 등을 거치면서 빛의 이중성이 확인되고 성립되었다.

철학적으로 볼 때 모순으로 보였던 이 문제가 인류 최고의 천재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대략 250년 이상 치열한 논쟁을 거쳐 비로소 (모순이 아닌) 설명은 어려우나 우리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역설적(이율배반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우리들이 이 현상을 알면서도 설명 자체가 어려운 이유이다. 제임스 패커가 빛이 모순이 아니라 이율배반적이라고 하였는 데 그것은 아마 빛의 이런 종합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고 본다.

철학자들은 빛의 이런 과학적 의미가 연구되기 이전부터 이미 빛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신비(빛의 형이상학, metaphysic of light)를 연구하기 시작했다(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위디오니시우스, 어거스틴, 동방신지학을 완성한 수라와르디를 비롯한 이슬람 신학자들, 베이컨, 칸트, 그로스테스테 등). 성경은 빛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소개하는 동시에 하나님 자신으로 비유한다(요한복음 1장 참조).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다시피 빛이 하나님의 참 본질은 아니다. 그러니 이것도 어떤 면에서 역설적 비유이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빈번히 이런 역설적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현상은 분명 있으나 설명이 쉽지 않은(이율배반적 역설로 보이는) 딜레마는 우리 주위에 허다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지를 다루는 신정론(神正論)이라든가 만일 우주비행사가 빛의 속도로 시리우스 별을 여행하고 돌아오면 지구는 18년이 흘러갔으나 우주비행사들의 나이는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다. 빛의 속도로 북극성을 다녀오면 우주비행사들과 지구의 역사는 서로 2천년이나 어긋나버린다. 빛의 세계 안에서 시간 계산이란 부질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본질이 삼위일체 하나님임을 기독교인들은 예배 때마다 고백한다. 하지만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빛의 이중성처럼 설명이 쉽지 않다. 이런 것들은 모순이 아니고 모두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모순이 아니므로 설명을 해야 될 텐데 설명이 쉽지 않으니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인간 해석의 이런 미숙성은 놀랍게도 성경에도 나온다. 일종의 거짓말쟁이 역설이다. 사도바울은 디도서(1:12)에서 “그레데인(人)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의 이 인용문은 그레데의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글로 알려져 있다. 선지자 자신이 그레데인이므로 이 경우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장이’라는 말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간에 모순을 낳으므로 이율배반적(역설)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사도 바울은 이율배반적 언어를 무심결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이런 미숙함을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있다. 빛의 이중성도 결국 삼위일체의 신비처럼 우리 인간 위치의 제한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계시라고 보여진다.


2. 빛의 속도와 우주 연대 논쟁

빛의 속도는 생각보다 일찍 밝혀졌다. 빛의 속도를 알려면 빛이 어느 두 지점 사이를 지나는 시간을 계산해 내면 된다. 그러나 빛이 너무 빠르므로 이 방법으로 측정하기란 불가능하다. 1676년 덴마크의 뢰머는 목성의 위성 이오가 지구에서 관측했을 때 목성의 그림자 속에서 들어가는 현상을 발견하였다. 이에 그 시간을 예측하였으나 예측한 시간보다 약 22분(실제로는 16분 36초) 늦게 위성이 목성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 것을 알았다(1000 초 정도). 이것은 빛이 지구에 오는 동안 지구가 공전하여 생기는 거리(지구가 목성과 가까워 질때의 거리와 멀어질 때의 거리 차이)의 차이 때문이라고 예측하고 최초로 광속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였다. 측정 속도는 2.10×10^8 m/s(현재의 측정값에 비해 30% 오차)였다. 즉 뢰머는 목성과 그 위성의 회전의 회전 주기(回轉週期)를 이용하여 빛의 속도를 알아낸 것이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지구상의 광원(光源)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측정한 끝에 빛의 속도는 매초 약 299,790km임을 밝혀내었다.

이 빛의 속도로 진공 속을 1년 동안 간 거리를 1광년(光年, light year)이라 한다. 이 속도로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항성인 켄타우르스 알파(α)성까지는 4.3광년, 은하계의 지름은 약 10만 광년, 북극성은 약 1천 광년 떨어진 거리에 존재하고 망원경이 촬영 가능한 가장 먼 거리인 은하계 외의 천체는 수십억 광년의 거리에 있다. 이를 통해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나이를 산출한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하나님께서 언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은 모든 사람의 궁금증이다. 기원전 4천년 전후였다는 주장으로부터 150억 년 전에 우주는 빅뱅(Big Bang)으로 시작되었다는 견해에까지 우주의 시작 연대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지구의 연대만 해도 크리스천 과학자였던 로드 캘빈(Kelvin, 1862)은 2천 5백만 년이라는 주장을 폈고 그 후(1897) 캘빈은 지구의 나이가 4천만년쯤 되었다고 수정하여 왔다. 레이레히(Rayleigh, 1921)는 10억 년이라고 발표했고 그 뒤 홀름즈(A, Holmes, 1956)가 45억 년이란 주장을 펴면서 지구의 나이가 45억년이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처럼 굳어져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물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지구와 우주의 연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근본주의적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동안 사람들은 지구와 우주가 오래되었다, 또는 젊다는 다양한 증거들을 제시하여 왔다. 하지만 서로 견해가 다른 상대방을 설득하지 못한 상태로 젊은 지구 젊은 우주와 오래된 지구 오래된 우주에 대한 주장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려왔다는 것은 이 문제가 쉽사리 답을 제공할 만한 문제가 아님을 직감할 수 있게 한다.

그런 가운데 동아 사이언스(2000. 9)가 흥미있는 기사 하나를 제공했던 적이 있다. 빛의 속도가 과거와 현재가 다르다는 한 과학자의 주장이었다. 빛의 속도는 과연 변해온 것일까? 이 흥미있는 주장을 살펴보자.

상수라고 믿었던 빛의 속도가 오래 전에는 달랐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사람은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대의 존 웹 교수이다. 그가 이끄는 국제연구팀은 하와이 마우나케아산의 망원경을 이용해 1백 20억 광년 떨어진 퀘이사 17개를 관측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퀘이사(Quasar; QUASi-stellar radio source: 준성 전파원)란 우주 초기에 출발했던 빛이 지금 관측될 정도로 멀리 있는 천체이다. 퀘이사의 빛이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중간에 가스구름을 통과하면 일부는 흡수된다. 이런 빛의 흡수현상이 과학자들에게 가스와 빛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연구팀은 퀘이사의 빛이 가스를 이루는 원자에 의해 흡수되는 양상을 연구해 원자의 구조를 지배하는 ‘상수’(常數)인 미세구조상수(微細構造常數)를 결정했다.

그 결과 미세구조상수가 지금의 값과 10만분의 1만큼 달랐다는 점을 알아냈다. 매우 작은 차이지만 이번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미세구조상수는 빛의 속도와 관련 있기 때문에 빛의 속도가 과거에는 지금과 달랐다는 말이다. 존 웹 교수는 “우주의 기본법칙이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번 연구의 의미를 설명했다.

현재 우주를 설명하는 이론은 빛의 속도가 상수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만일 이것이 무너진다면 가히 물리학의 혁명적인 일이 된다. 현대 물리학의 대부분의 이론은 관속이 일정하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는 18세기 브래들리(Bradley, 1740)가 300,650Km/s로 추정한 이후 관측자와 관측 방법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측정되어 왔다. 마이켈슨(Michelson, 1926)은 299,798 ±15로 발표하였고, 최근 레이저를 통한 측정 결과는 빛의 속도(1983)가 299,792.4586±0.0003Km/s로 나타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빛의 속도 측정 결과는 오차가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이 같은 빛의 속도 측정을 살펴보건데 미세하나마 시간이 흐르면서 감속되어 온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이번의 연구 결과가 보태진 것이다. 이번 연구 결과를 발표한 호주 시드니 남부웨일즈대학은 광속의 변화 문제에 대한 늘 진원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과연 이 문제를 기독교적으로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첫째, 현대 물리학이 말하듯 광속이 일정하다고 전제해 보자. 광속이 일정하다면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광속이 일정하든 일정하지 않든 광속은 누가 우주에 넣어준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빅뱅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현대 우주 기원론에 있어 광속은 태초부터 그저 우연히 일정한 속도를 가진 것인가 아무런 답을 할 수 없다. 설령 광속이 일정하다 해도 그렇다면 광속은 우주의 시작 이전(6천년이든 150억년이든)에는 어디 있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은 계속 남게 된다. 우주의 인과율에 있어 광속이 시작된 기원의 시작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우주에 에너지를 공급한 근원자는 누구인가라는 답은 여전히 자연과학 밖의 일이 된다. 즉 창조주에 대한 고백이 없는 기원의 문제는 늘 해답을 공백의 상태로 둘 수밖에 없게 된다.

둘째, 광속이 정말로 과거에 변해왔다면 기독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일 광속이 정말 변해왔다면 현대 물리학에는 혹 치명타를 가할지 모른다. 하지만 성경적으로는 아무런 모순이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1987년 러시아의 천문학자 트로이츠키(Troitskii)는 현재 가능한 천문학 자료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우주 모델은 우주의 초기에는 광속이 무한대이었다가 현재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는 확신으로부터 나온다는 혁신적인 주장을 폈다. 마치 배드민턴에서 스매싱한 순간에는 셔틀콕이 엄청난 속도를 가지나 떨어지는 순간에는 급격히 그 속도가 감속하는 것처럼 우주의 팽창이 수십억 년 이상을 두고 점진적으로 팽창을 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팽창을 하였다는 쪽의 주장인 것이다. 그는 창조론자가 아닌 진화론자이다.

비록 트로이츠키가 진화론자이기는 하나 그의 주장의 골격은 창조론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우주와 지구의 생성이 오래지 않고 극히 짧다는 견해가 성경이 지지하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그 동안 수억 수천만 광년 떨어진 곳에서 오는 별빛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자연과학적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매우 먼 곳의 별들로부터 오는 별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수십억 년 걸린다는 어떤 가정도 필요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법에 의해 수십 억 년으로 측정되는 천체와 물질에 대한 측정값조차도 큰 광속의 결과로 인한 빠른 붕괴 현상 때문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 대폭발에 의한 우주 팽창론을 지지하는 현대 물리학의 위대한 결과로 치부되고 있는 별들의 적색변이나 우주배경복사 등도 팽창이 아니라 광속의 감소로 인한 결과로 보는 반대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참으로 물리학 전체의 혁명적인 내용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이번에 관측된 차이가 매우 작은 값이기 때문에 통계적인 우연이 아니냐는 반박도 만만치 않다.

최근에는 물리학자 러셀 험프리스(Russell Humphreys)가 "섬" 우주 가설(Island Universe) 또는 "성경적 우주론"(Biblical Cosmolgy)이라는 이론으로 “빛은 공간 매질에 의해 그 속도가 고정 되기 때문에 빛 자체는 해답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는 성경은 세 종류의 서로 다른 히브리어 동사를 사용하여 15번이나 하나님이 하늘을 “펴셨음(streched out)”, 또는 “펼치셨음(spred out)”을 언급하고 있다(예: 이사야 42:5, 45:12, 51:13, 예레미야 10:12)며 이 하늘은 그 점유물들, 곧 별과 행성들(“하늘의 주인”으로 인용되는)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그 펼치셨음은 아마도 우주 그 자체의 골격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주의 급속한 팽창과 모든 것이 그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허용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중력장방정식에 이에 대한 해결책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들 이론은 현대 우주론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대폭발 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으며 시편 147편 4-5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별들의 수효를 세신다는 것은 우주의 유한성을 의미하므로 우주는 섬과 같다는 주장을 편다. 이와 같은 험프리스의 주장에 대해 캐나다벤쿠버세계관대학원(VIEW)의 양승훈 박사는 물리학의 기초부터 잘못 적용된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이런 억지 주장을 과감하게 펴게 된 것은 그가 물리학을 덜 배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신학 즉 성경에 대한 잘못된 자신의 관점에 억지로 갖다가 맞추려는 무리수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유명한 천문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도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방정식 E= mc2(E= 에너지, m=질량, c= 빛의 속도를 나타냄)은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성, 빛의 속도보다 빠른 물체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에너지와 질량은 동등하기 때문에, 운동으로 인한 에너지는 물체의 질량에 더해질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물체의 속도를 증가시키기는 더 어려워진다. 물체의 속도는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그 질량은 급속하게 늘어나게 되고 속도를 늘리는데 더욱더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사실상 빛의 속도에 다다를 수 없는 것이다. 험프리스의 주장은 분명 현대 과학적 성과들을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자신의 신념을 전제한 다음 거기에 모든 것을 꿰맞추기 위해 무모한 과학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려가 된다.

어찌 되었든 전문적인 이 문제에 대해 비전문가가 더 깊이 뛰어들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또 다른 관측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우주 연대 논쟁은 지극히 짧다는 창조과학적 견해(ICR, AIG, 호주창조과학회, KACR), 오래되었다는 견해(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대부분의 현대 과학자들), 성경과 신학과 과학에서 분명한 결정적 자료가 나오기까지는 좀 더 차분히 기다려보아야 한다는 견해(창조론오픈포럼), 오랜 연대와 짧은 연대를 조화시켜보려는 견해(제랄드 슈뢰더, 영남대 권진혁 교수의 우주씨앗창조론 등), 연대문제에 대해 자유로운 입장에 있는 지적설계운동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섣불리 단정하지 말고 과학의 결과를 차분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견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지나칠 수 없는 이유가 분명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명확한 해석이야말로 진정한 복음 해석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시 19:1~6). 필자는 젊은 연대에도, 오랜 연대에도 결정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문을 열어놓아 양측으로 부터 공격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놓지 않는 이유이다. 하지만 빛의 속도가 상수가 아니라는 것을 믿는 소수의 주장은 자신들의 주장이 검증 가능하다는 것을 정통 과학자들에게 타당한 논문으로 제시하는 일이 남아있다. 이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Ⅵ. 빛의 신학적 이해


1. 창조주 비유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 토하신 첫 말씀이 빛이 있으라(창 1:3)였으며 이 빛은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빛(창 1:16)을 만들기 전에 이미 만드신 빛이었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빛이 단순히 과거 인류가 빛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던 태양의 빛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을 가졌음을 성경은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빛이요(사 10:17)요 자신을 스스로 빛(시 27:1; 미 7:8; 요1 1:5)이라 하신 동시에 빛들(포톤, photon)의 아버지라고 하였다(약 1:17). 즉 하나님이 빛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빛의 아들들이다(살전 5:5). 사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피조 된 질료(質料)에 불과한 빛이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것일까? 무한(無限)은 유한(有限)에 담을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 인류에게 빛을 자신을 설명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원천이요 그것을 유한한 우리 인류에게 알리시려는 수사학적 적응(accommodation)이라고 보는 것 이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왜 하나님이 죄 많고 더럽고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유한한 인간에게 적응하려는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의 참 빛이라고 설명한다(요1 2:8-10). 이것이 답일 것이다. 빛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과 위엄을 보여주는 광채였다. 당연히 생명에 생명의 빛을 주시는 분도 창조주 하나님이다(시 56:13; 전 11:7; 욥 33:30). 하나님은 그 빛을 옷처럼 입으신다(시 104:2).


2. 그리스도 비유

그리스도의 본성과 성품 안에도 빛이 있었다. 사도 요한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다(요 1:4-5). 예수는 참 빛이었다. 요한은 이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고 했다(요 3:19).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요 8:12).

물론 예수님이 자신을 빛이라 한 것은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그런 차원의 단순한 빛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연의 하나님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하나님인 것이다. 보이지 않은 세계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직접 인간의 제한 속으로 들어오셨다. 자연과학적 영역도 당연히 중요하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도 피조세계요. 지금의 피조세계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시 19편)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빛의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비로소 인간에게 다가온다. 온누리의 주인은 빛의 하나님이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러난다(눅 2:32; 요 1:4, 9). 자기 자신과 자신의 뜻을 빛으로 나타나 알리셨던 하나님(사 10:17; 51:4; 호 6:5)은 비로소 성육신을 통해 인간을 빛으로 인도한다(시 34:5; 전 8:1; 마 5:14)


3. 성령의 비유

빛의 성령 비유는 더욱 기이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비체험이었다. 성령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마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행 2:3)처럼 제자들에게 보였고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었다. 성령에 대해 인간은 해석할 위치에 있지 않다.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이었다. 불의 혀는 없다. 그러므로 불의 혀가 갈라진다는 것도 인간은 그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성령은 그렇게 인간에게 다가왔다. 성령 강림은 우주와 인간에 전혀 다른 세상(하나님의 나라)이 강림하였음을 알린 웅변적 사건이었다.


4. 인간과 빛

1) 참빛을 상실한 인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아담과 하와도 사실 빛을 입고 있었다. 한자의 빛 광(光)자는 첫 두 사람(人)인 아담과 하와에게서 무언가 빛이 나오고 있음을 상징하는 글자로 보인다. 물론 지금도 사람의 몸에는 미량의 빛이 존재한다. 그러니 그 빛으로 인해 사람이 서로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빛은 그 수준의 빛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빛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이유는 이 빛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무언지 모르는 이 빛이 인류의 몸에서 상실되면서 인간에게는 죽음이 찾아왔을 것이다. 암(癌)은 바로 그 빛이 사라진 인간의 몸을 자연스럽게 파고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인류는 빛(방사선)을 다방면의 치료에 이용하여 왔다. 인류는 햇빛을 통해서 빛이 그런 귀중한 요소가 많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여 왔다고도 볼 수 있다. 햇빛은 지구 생태계에 다양한 에너지를 공급해 줄 뿐 아니라 인체 내 해독작용과 대기 중의 청소작용과 살균, 소독에 관여한다. 인간의 Vitamin D 합성에도 관여하고, 코티손(부신피질호르몬의 일종)의 합성에도 관여한다. 햇빛은 광합성을 통해 식물의 잎에서 포도당을 생성하기도 한다.

2) 인간과 빛에 관련된 세 가지 사건
성경에는 인간과 빛이 관련된 아주 특별하고 기이한 사건이 세 가지 기록되어 있다.

첫째 모세는 80세 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의 빛(광채)을 목격한 이후 시내산에서 40일을 금식한다. 이후 하나님의 돌 판을 들고 산 아래로 내려 올 때 그의 얼굴에서는 사람들이 쳐다보기 힘든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모세는 민망해서 자기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웠다고 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변화산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마 17:1-8; 막 9:2-8; 눅 9:28-36))과 베드로서(벧후 1:16-18)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얼굴과 옷이 변화되어 ‘해와 같이’ 빛났다. 이 변화산 변형에는 계시가 있었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의 계시였다(눅 9:31). 이 영광 가운데는 부활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하였다. 모세와 엘리야의 출현은 예수의 사역이 율법(모세)과 선지자들(엘리야)의 성취임을 증명해준다. 그리스도가 새 언약의 중보자로 대제사장 중의 대제사장이요 선지자 중의 선지자임을 나타내는 기독론적 모형(模型)이었다.

마지막 빛은 사울에게 일어났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 바울이 되기 전 예수님과 함께한 빛에 시력을 잃고 3일 동안을 보지 못하였다. 사울을 사도 바울이 되게 하고 빛을 보게 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른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였다. 사도 바울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빛의 사도가 되었다.

3) 인간과 구속
태초의 빛이 변화산에서 세상에 회복된 적이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다. 변화산에서는 예수님과 부활한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이 빛나고 있었다. 예수님의 얼굴은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져 있었다(마 17:2). 성경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딤전 6:16)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신다(시 104:2)고 하였다. 그렇다면 빛은 임재와 축복과 치유와 회복의 상징이 된다(시 44:3). 예수님은 바로 그 빛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영적인 것뿐이 아니었다. 육적인 것을 늘 포함한다. 천국도 어떤 식으로든 육적 장소이다. 카톨릭 신학자 베스터만(Claus Westermann)도 빛에 구원의 의미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어둠을 죽음과 연관시킨다. 베드로는 구속은 기이한 빛과 같은 것이라고 기록한다(벧전 2:9).


5. 교회와 종말과 빛

빛이라는 명사는 성경에 120회나 등장한다. 교회는 이 빛과 함께 하여왔다. 교회는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요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빛이 되라 하지 않고 이미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하였다. 교회는 그 빛을 비추어야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었다(고후 4:6). 과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가 지니고 있는 모든 에너지의 총 저장량(석탄, 석유, 천연 가스, 목재와 기타 연수 가능한 물질의 총량, 우라늄과 기타 방사성 물질의 양을 모두 합한 양)은 겨우 태양에서 지구로 오는 총 에너지를 단 3일간 합한 양과 똑같다고 한다. (태양) 빛 없이 인간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삶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종말은 이 빛이 빛을 잃는 때요(사 13:10; 겔 32:7; 마 24:29; 계 6:12-14) 새로운 빛을 기대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되어 종말의 날에 특별한 증거로 나타날 빛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사 60:19-20; 계 21:23; 22:5). 이렇게 교회와 빛은 종말 때까지 함께 하고 또한 새로운 빛을 맞이할 것이다. 물론 그 참 빛은 예수이다(요 1:9).



Ⅶ. 나가면서

지금까지 빛의 속성과 신학적 이해에 대해 살펴보았다. 빛은 첫째 날 창조된 이래 인류와 우주와 함께하여왔다. 빛이 없다면 인간도 우주도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빛은 세상과 가장 친밀하게 소통하는 물질임이 분명하다. 빛은 또한 과학과 신학에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 넣는 신기한 물질이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앞으로도 빛에 대한 놀라운 연구 성과와 발견들은 계속될 것이고 신학자들은 그 신앙적 함축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진정 중요한 문제는 단순한 빛이 아니라 빛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그 신앙적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과 그 기이한 빛(벧전 2:9)을 아는 인류가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마 5:14, 6:22,23)이라 했다. 하나님은 이방의 빛(사 42:6,49:6)이라고도 했다. 성도들은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온누리를 덮어야할 사명이 있다. 우리 민족이 큰 복을 받아서 복음을 들고 온 세상에 그 빛을 전하는 민족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말 4:2).




조덕영kict

http://www.kictnet.net 창조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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