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러시아 흑해 장창수 선교사
산상수훈과 천국,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천국
마태복음은 내용상 둘로 나눌 수 있다. 그 기준은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마16:13-20절). 전반부(1-15장)에서 예수님은 아무 것도 모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구약에서 약속한 ‘영광의 그리스도’로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천국 복음을 외치고 가르치며 수많은 이적들과 표적들을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행했다.
공생애 말기(末期)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정확한 신앙고백을 했다. 마침내 예수님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예수님은 비로소 자신을 ‘고난의 종’(사53장)으로 소개하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언했다(마16:21절). 이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내용에 의해 마태복음은 논리적으로 간단히 나뉘어진다. 마태복음과 함께 같이 공관복음서에 속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나 글 쓰는 방법인 기승전결(起承轉結)에 의해 마태복음을 더 확대하여 나눌 수 있다. 서론 또는 출발이라 할 수 있는 기(起)의 부분은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 과정이다(마1-3장).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잠재적인 왕이 출생하고 자라감을 기록된다. 내용의 발전을 의미하는 승(乘)의 부분은 예수님의 수세(受洗)부터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보인 제자들의 신앙고백 이전까지이다(마4-15장).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그리스도로 소개한다. 내용의 역전(逆轉)을 보여주는 전(轉)의 부분은 제자들의 신앙고백부터 성전 강화까지이다(마16-25장). 예수님이 고난의 종으로서 걸어가는 과정이 기록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결론을 보여주는 결(結)의 부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다(미26-28장). 마침내 그의 메시아 사역이 죽음과 부활로 성취됨을 기록한다.
이 나눔은 그대로 다른 공관복음서들에게도 적용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 초 발생했다. 같은 사건이지만 공관복음서들은 그 비중(比重)을 달리하며 기록한다. 16장으로 구성된 마가복음은 8장에 기록한다면(27-38절) 24장으로 구성된 누가복음은 9장에 기록한다(18-27절). 반면 28장으로 구성된 마태복음은 16장에 기록한다(13-28절).
이렇게 본다면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사건 순서대로 그대로 기록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初期)와 중기(中期)에 더 비중을 두었다면 누가복음은 말기(末期)에 그 비중을 더 두었다. 달리 말한다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로 소개하는 일에 기록 목적을 더 두었다면 누가복음은 ‘고난의 종’으로 소개하려는 목적을 드러낸다.
이렇게 공관복음서들은 기록 목적에서 다른 강조점을 보여준다. 이로 보아 마태복음은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를 열심히 기다리는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서인 반면 누가복음은 수신자 데오빌로로 대표되는(1:3절) 이방인인 로마인을 위한 복음서임에 분명하다. 물론 마가복음도 이방인 신자들을 위한 복음서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예수님을 영광의 그리스도와 고난의 종으로 균형 있게 소개한다.
이 이외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 같은 특정 주제(主題)로 접근하여 마태복음을 구조적으로도 연구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 37개의 비유들이 기록되는데 그 중에 마태복음에 21개의 비유들이 기록된다. 중요한 길목에서 의미를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 이 비유들 중 마태복음 13장과 25장에 기록된 천국 비유들은 더욱 그렇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에 의해 출발한 천국 운동의 내용을 나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복음 전파와 가르침 그리고 기적적인 신유(神癒) 이적이 기복주의적 신앙이나 윤리도덕적 또는 자선적 의미가 강한 사회 복음과 전혀 무관함을 증명한다. 이 사실은 25장의 천국 비유들에 의해 특별히 더 잘 확인된다.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천국 운동이 종국적으로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를 잘 예언해 준다. 그의 공생애 사역이 금생(今生) 넘어 내생(來生)까지 내다 봄을 말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비유들은 구원의 최종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산상수훈과 천국
천국은 하늘 왕국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나라이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면 당연히 천국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천국이 하나님의 나라보다 정확히 9배 정도 더 사용된다. 마태복음에서 이 두 단어들은 모두 40번 사용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나라는 4번 그리고 천국은 36번 사용된다. 저자의 의도가 숨어있음이 드러난다.
구약 시대 유대인들은 다윗 왕국을 땅의 나라 형태로 구현된 하나님의 나라로 믿었다. 그러므로 마태는 신구약 시대 사이 차이를 보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과 믿음도 달리 해야 함을 강조해야 했다. 예수님이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초월성을 그는 강조하고자 했다. 마태는 메시아인 예수님에 의해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으로 소개함으로 땅의 나라들과 완전히 다를 것임을 소개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초월적인 성격을 보이는 천국이 예수님의 존재와 그의 사역 활동으로 이 땅에 이미 임했음도 증언한다(마12:28, 13장).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 사이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탄생 기록(1장)은 하나님 나라 왕의 출생이었다.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적인 후손으로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제 2의 다윗이었다(렘30:9, 겔34:23절).
이 사실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수세(受洗)가 죄인 인간들이 받는 세례와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잘 증명된다. 그는 죄인(罪人)이 아니었기 때문이다(히4:15절). 그의 물세례는 그가 앞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일할 것을 알리는 공개적인 취임식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3:14-15절)
구약 시대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 결과 선민은 의롭게 되었다. 율법은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임을 잘 알려 주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바로 하나님의 ‘의’였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언급한 모든 ‘의’(義)란 창세 전 아버지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아들 안에서 작정된 모든 것이다(엡1:3-6절). 이 의에 근거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 언약이 맺어졌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구속언약(eternal covenant of redemption)이다(요6:40절). 이런 언약적인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물세례를 베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둘째이며 마지막 아담이었다(롬5:14, 고전15:45-47절). 그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출생할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될 것이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정받을 것이다(롬1:4절). 아담처럼(창3장) 그도 사탄에 의해 시험을 받아야 했다(마4장). 하나님이 그를 광야로 몰아낸 이유였다(마4:1, 막1:12절 비교요). 아담은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시험에 통과했다(마4:11절). 이로써 예수님은 앞으로 새로운 인류의 조상과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될 자격이 있음을 충분히 증명해 보였다.
이후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힘을 듣고 비로소 예수님도 천국 복음을 외쳤다(마4:17절). 예수님의 전령인 그의 사명이 끝났기 때문이다(말3:1절).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을 시작해야 했다. 이를 위해 제자들을 모았고(마4:18-22절) 그리고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쳤으며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예수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4:23-25절).
어느 날 예수님은 산에 올라 산상수훈(마5-7장)을 말했다. 산상수훈은 구약 사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선포된 십계명과 율법을 상기시킨다. 시내산 율법은 출애굽 사건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으로(시78:10, 사24:5, 호8:1절) 이스라엘이 준수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법이었다. 마찬 가지로 예수님도 앞으로 세울 하나님 나라의 법을 선포해야 했다. 구약의 율법이 출애굽 사건 후 주어진 것과 달리 신약의 산상수훈은 구속의 성취 이전 미리 주어졌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의 내용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었다. 구약의 율법이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또는 물질적(物質的)인 것의 도움으로 기록되었다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같은 내적(內的)인 것의 도움으로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했다(고후3:3절). 8복의 내용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 같은 표현들은 구약 시대와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산상수훈은 간접적으로 신약의 하나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소개한다. 예수님이 출발시킬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다윗 왕국보다 영광 면에서 마땅히 더 찬란해야 했다. 그러나 8복과 그 이하 산상수훈에서 이런 모습은 전혀 찾아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인 다윗 왕국은 이방 나라들처럼 땅의 나라 형태를 취했다. 이방 나라들과 싸운다면 다윗 왕국이 반드시 찬란하게 승리해야 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상징물인 예루살렘 성전이 이를 잘 설명한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열국보다 훨씬 우월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약속했다. 이 우월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시작될 하나님 나라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하나님 나라의 왕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 모습은 세상의 권세나 영광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이 이전 그는 유대나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이라는 촌구석에서 일하는 평범한 목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빌2:5-8절).
당연히 산상수훈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초라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백관들 앞이 아닌 그 당시 사회적인 약자(弱者)들인 가난하며 불쌍한 민중 앞에서 산상수훈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와 연장선 상에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한 이유였다. 포도주는 항상 같지만 생산 시기의 차이로 인해 다른 부대에 담아야 했다. 즉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9:17절). 이로써 산상수훈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켜 주었다(마5:17절).
그렇다면 예수님이 선포한 산상수훈의 내용에 따라 제자들도 새로 출발한 하나님 나라를 구약과 달리 해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구약 식을 고집했다. 이로 인해 스승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 공생애 내내 오해가 생겼다. 이 사실은 부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이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에서도 드러났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6-8절)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이젠 다윗 왕국이 복구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때와 기한이란 하늘 아버지의 권한에 속한다고 딱 잘라 답하며 곧 강림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명했다(행1:6-8, 마28:18-20절). 이것은 마태복음에서도 이미 예언된 바였다(마24:14절).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비로소 예수님이 재림하며 하나님 나라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 때까지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는 복음 전파에 의해 이 땅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것은 당연했다.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도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름을 받았다(출9:3-6절). 인류의 보편적인 아버지인 창조주 하나님은 선민만의 구원만을 위해 일할 수 없었다. 하나님 나라는 민족과 혈족을 초월해야 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인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킬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창1:26-27절).
마찬 가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된 구원은 새로운 창조로써(고후5:17절) 유대인만 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폐쇄적인 유대주의를 허물어야 했다. 내용상 창조 신학과 연장선 상에 있는 예수님의 구속 신학이 무엇을 목적하는지도 알아야 했다. 이를 위해서도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을 새롭게 해석해야 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 교회도 신약 성경은 물론 구약 성경을 달리 묵상해야 한다. 이 덕분에 신약 시대 성도의 의(義)는 구약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보다 더 나을 것이다(마5:20절).
이를 돕기 위해 예수님은 살인(마5:21-24절), 간음(27-32절), 맹세(33-37절), 원수 갚는 것(38-48절) 등등을 내면적인 마음의 동기에 기준을 두고 재해석했다. 구약의 외면적인 종교 시대는 지났고 신약 시대부터 내면적인 경건으로 신앙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다(마6장). 그리고 6장의 결론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마6:33-34절). 이런 해석은 7장에서도 계속되었다.
13장의 천국 비유들과 하나님 나라
산상수훈을 마친 후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사역을 단독으로 수행했다. 이미 자신의 부름을 받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임을 믿도록 제자들에게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말 천천히 알고 믿었다.공생애 초기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이 바다의 풍랑과 바람을 말씀으로 잠 재우는 이적을 직접 목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마8:2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12 사도들이 선택되었다(마10:1-4절). 예수님은 사도로서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것인지에 대해(5-20절) 가르치며 향후 조심해야 할 것들도 지적하며 경고했다(21-39절). 아울러 이들은 예수님을 대신한 사도로서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 임도 상기시켰다(40-42절).
이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보내 자기 대신 사역을 수행하도록 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사역을 모두 보았다.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 마치 예수님을 찾아온 그의 모친과 동생들을 보고 이들은 예수님의 존재를 격하시키려 했다(12:46-48절). 이 때 한 예수님의 답변은 참으로 놀랍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마12:49-50절)
예수님이 말한 혈연 관계는 구약 시대와 세상 방식과도 완전히 달랐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 사이에서만 새로운 혈연 관계가 맺어질 것이다. 이들은 곧 구원 받을 자들로 하나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이들이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예수님 시대 이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자격은 전혀 혈육과 무관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예수님은 구약의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과 대조시키며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다.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는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 암시되었다.
이를 배경 하며 천국 비유들이 13장에 기록되었다. 이 비유들은 공생애 이후 지금까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수행한 모든 사역을 한 마디로 설명한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통해 자신의 사역이 기복주의나 자선적인 목적을 띠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비유들의 내용이 이를 잘 증명한다.
씨 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까지는(마13:3-33절) 신약 시대의 천국의 출발과 성장 과정 그리고 그 마지막에 대해 잘 설명한다. 천국은 복음의 형태로 이 땅에 출발되었다.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 사단의 방해가 있어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이 땅에서 반드시 찬란한 결과를 맺으며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출발이 미약하게 보여도 예수님의 천국 운동은 절대로 무시되면 안 된다.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 구하는 장사의 비유(44-46절)는 예수님이 출발시킨 천국을 사람들이 어떤 제세로 대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자주 그리고 쉽게 사람들에 의해 무시 당하는 천국은 실상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귀하다. 그러나 이 보화는 아무에게나 알려지거나 보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가진 재물들을 다 팔아서라도 반드시 소유해야 할 보화이며 보물과도 같다. 이를 알고 세상 것을 희생시킬 줄 아는 성도만이 천국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물 비유(47-50절)는 천국과 관련된 종말론을 가르친다. 천국 운동은 반드시 그 마지막이 있고 그 때 그물 안에 있는 고기들을 종류별로 선별하듯이 참 신자와 거짓 신자 사이 선별 작업이 있을 것이 경고된다. 천국 운동에도 온갖 잡된 것들이 섞일 것이다. 이로 인해 한 동안 하나님 나라 운동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심판을 통해 가려질 것이다. 천국과 종말론의 긴밀한 관계가 이 비유를 통해 설명된다.
비유를 통해 천국 비밀을 말한 후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달았는지 묻고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13:52절) 산상수훈에서도 이미 설명되었듯이 이 비유들을 통해 제자들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으로서 새 것과 옛 것 사이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구약과 신약 사이 동질성이나 연속성이 있지만 이질성과 불연속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나라였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라는 말씀의 씨가 사람 마음에 심어짐으로 이 세상에서 출발한다.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인격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 나라이다. 구약이나 세상 나라의 관점에서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출발할 것이다. 이 점에서 구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와 다르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백성 앞에서 영광스런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세상의 비웃음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은밀하게 자랄 것이다. 나중 결과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찬란할 것이다. 이런 천국 비밀을 믿는다면 세상 영광을 탐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세상의 조롱을 받아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영광스러웠다. 너도나도 이 영광을 원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됨은 조롱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이 때도 신약 성도는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고 모든 것을 잃더라도 천국이라는 보화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찬란하고 영광스런 결말을 믿고 어떤 역경에서도 참고 견디는 신앙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이 후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마14:14-21절)을 목격했고 예수님 앞에서 갈리리 호수의 사나운 풍랑과 바람이 잠잠해지는 이적을 또 다시 목격했다(마14:22-32절). 곧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33절)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게 되었다. 이 후 예수님에 의해 계속된 행적들을 보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천국
16장부터 마태복음의 내용이 바뀌며 분위기도 갑자기 반전(反轉)되었다. 베드로의 정확한 신앙 고백을 들은 후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인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그리스도’라는 신분을 버리고 ‘고난의 종’(사53장)이 되었다. 때가 된 것을 안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고난을 당하기로 결단했다(마16:21, 눅9:51절). 이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예수님의 사역은 영광의 길보다 고난의 길을 예고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처럼 예수님은 놀라운 이적과 가르침을 계속 행했다. 그리고 즉시 자신은 고난의 종에 지나지 않음을 제자들에게 계속 상기시켰다. 변화 산에서(마17:12절) 그리고 산 아래서 신유의 이적을 행하고 난 후에도 그랬다(17:22-23절). 천국에 관한 놀라운 가르침을 준 후에도 그랬다(마20:1-19절).
그러나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은밀히 제자들을 불러 모은 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다시 예언했다(마20:18-19절). 그러나 이들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곧 임할 하나님 나라에서 더 높은 지위를 얻고자 서로 다투었다(20-24절). 이 때도 예수님은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남을 섬기는 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마20:25-28절).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칠 때(마21:23-32절) 포도원 비유(마21:33-42절)를 말하며 자신의 죽음(38-39절)을 또 다시 예언했다.
예수님의 이런 노력은 산상수훈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된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다. 제자들은 스승 예수님을 보는 눈과 자세를 바꾸어야 했다. 영광의 그리스도에서 고난의 종으로…… 그러나 제자들은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해 하고 두려워하며 동시에 근심하고 걱정했다(마16:22, 17:23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영광의 그리스도이면서 동시에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제자들이 보기에 이들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분법적인 개념이었다. 예수님의 계속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서로 권력 다툼을 한 이유였다(마20:20-28절). 고난의 비밀은 이들에게도 완전히 감추어 졌다(눅18:31-34절).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세상 나라와 달라서 먼저 고난을 당해야 나중 영광을 얻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군들이 흔히 타는 건장한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다(마21:1-5절). 이후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과 계속 충돌했다. 성전 청소(마21:12-16절)와 성전 강화(21:23-23:39절)는 이를 잘 증명한다. 예수님이 고난의 종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각오와 준비가 되어있다는 신호였다.
이렇게 16장을 전후(前後)로 마태복음이라는 전체 그림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15장 이전 예수님이 소개한 하나님 나라는 그 모습에서 너무나 찬란했다. 스승 예수님이 왕으로 존경을 받았고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도 영광스런 존재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대부분 갈릴리 촌구석 출신들인 제자들은 이런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러나 스승의 죽음이 계시된 16장 이후 하나님 나라는 갑자기 그 찬란한 빛을 잃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반복하여 자신의 죽음을 예언할 때마다 더 짙은 회색 빛으로 바뀌어 갔다. 이런 갑작스런 전환을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의 소원과 기대감을 단번에 버릴 수도 없었다. 사라지려 할수록 이들은 더욱 집착했다. 그 결과 스승과 제자들 사이 심리적(心理的) 차이가 드러났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며 스승 예수님은 내내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스승 예수님에게 고난과 치욕 그리고 죽음을 예약하는 길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영광과 승리 그리고 번영과 형통을 약속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님은 이전과 달리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이들과 충돌했다. 이를 보면서 제자들은 의아해 했지만 곧 예루살렘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이들은 굳게 믿었다(눅19:11절). 그러나 예수님의 반복적인 예언은 그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점점 더 기정 사실이 되어갔다.
3년 넘게 이들은 예수님을 따랐지만 하나도 배운 것이 없어 보였다. 한심한 제자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했다(요13:1절). 그리고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근심과 걱정에 죽을 상을 보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1-3절)
25장 이전 예수님은 20장과 22장에서 천국 비유를 말씀했다. 20장의 천국 비유(1-16절)은 천국 백성이 되는 순서에서 유대인들이 뒤쳐질 것을 예언했다. 그러나 22장의 천국 비유(1-14절)에선 유대인들이 천구 잔치에서 배제되고 초청을 받지 못한 이들로 채워질 것이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예복을 준비한 사람들만 종국적으로 천국 잔치에 참여할 것이 예언되었다. 이 두 비유들은 새로운 은혜의 시대 유대인들이 배제되거나 뒤늦게 참여할 것이 예언되며 향후 유대인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언된다. 그 이유는 구약에서 예언한 대로 온 메시아인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25장의 천국 비유들과 하나님 나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곧장 성전으로 향했다(마21:1-11절). 하나님의 나라 왕이라면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궁전인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유대주의의 상징물이지만 인간의 온갖 탐욕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청결케 했다(21:12-17절). 이 행위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성전에서 행해진 강화 중 예수님은 비유들(마21:28-32, 33-41, 22:1-14절)을 통해 이들의 위선과 잘못을 지적했다(마23장). 화가 난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세우며 빈틈을 찾으려 했다(마21:23, 45-46, 22:15-46절).
이 가르침 끝에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는 말씀을 무리와 제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했다(23장).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 공격은 유대인들이 곧 멸망케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가까운 것을 암시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면서 종말론과 함께 향후 예루살렘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해 예언했다(마24장).
이 예언에 의하면 보이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명을 다 했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 시대는 세례 요한의 때까지라고 이미 계시되었다(마11:13절).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도 옛 것은 물러나고 사라져야 했다(히8:13절).
그럼 왜 예수님은 이전과 달리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했는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한다면 신구(新舊)의 교체(交替)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미 예언된 바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획기적인 사건들이 몰고 올 새시대 천국 운동을 위해 어떻게 지상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가르쳐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25장의 비유들을 말했다. 이 비유들은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라는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 비유인 열 처녀의 비유에서 10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고 있다(마25:1-13절).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이 땅에 남아 있을 교회들과 신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은 결국 재림(再臨)을 잘 준비하는 신자와 그렇지 못한 신자, 둘로 나뉘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이 땅에 남겨질 성도들은 항상 긴장과 긴박감을 갖고 신앙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뜻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 성령에 의존한 삶은 아주 중요하다. 성령 강림이 간접적으로 예언되었다.
둘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는 신랑이 왕권을 받으러 먼 곳으로 갔음을 설명한다(마25:14-30절). 신랑이 왕의 신분을 얻기 위해 먼 지방으로 떠날 것이다. 이 때까지 예비 왕을 위해 그의 집사들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할 것이다. 처녀들이 기름을 늘 준비해야 하는 것이 집사로서 왕의 재산을 충성스럽게 잘 관리하는 것으로 이 비유에서 달리 설명된다. 왕의 재산을 증가시키는 충성된 집사만이 왕권을 받고 온 주인으로부터 새로운 일을 받을 것이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을 가르친다.
셋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는 왕위를 받고 올 신랑이 심판주일 것을 계시한다(마25:31-46절). 주인의 재산을 증가시키는 것이 윤리적인 관점에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잘 설명된다. 왕의 부재(不在) 중에도 그의 가르침에 따라 누구에게나 즉 사람의 얼굴을 구별함이 없이 선을 행하는 종들만이 왕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영생할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구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에선 이스라엘이라는 보이는 하나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물리적인 방법 즉 혈과 육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신약에선 기름이 상징하는 성령, 달란트로 표현된 하나님의 은사나 직분 그리고 윤리도덕적인 가치관의 도움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영역을 확장시키고 지켜야 한다. 눈에 안 보인다고 불충성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결산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를 알고 더욱 선을 행하여야 한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될(fulfilled) 것을 그리고 자신의 재림에 의해서만 완성될(consummated) 것을 계시했다. 이에 따라 예수님이 출발시킨 하나님 나라도 그의 재림 때 완성될 것이다. 이 사이 기간 동안 하나님 나라는 계속 인간의 인격을 통해 이 땅에서 계속 확장될 것이다. 이미 마태복음 13장에서 가르쳐 졌듯이 예수님의 천국은 복음의 형태로 사람의 인격적인 활동을 통해 온 인류 사회 안에 세워지고 확장될 것이다. 이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국경(國境)이라는 지정학적(地政學的)인 개념에 의하지 않고 문화(文化)라는 가치관적인 개념을 따를 것이다.
이로 본다면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현실도피적인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참여적인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자신의 통치를 실현할 목적으로 천지와 그 가운데 만물 그리고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다(창1:26-28절). 그렇다면 기독교 교회는 구약 시대처럼 혈과 육이 아닌 영과 정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한다. 기독교 윤리가 중요한 이유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낼 것이며 그를 통해 성도들에게 필요한 은사와 능력을 덧입혀 줄 것이다.
그렇다면 재림까지 성도들은 이중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성도는 이 세상 삶을 한편 적극적으로 그러나 다른 한편 소극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킬 무대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곳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성도의 세계관은 낙관적이면서도 동시에 비관적이다. 이 때문에 천국의 백성인 신자에게 자기부정(自己否定: self-denial)은 가장 중요한 신앙 덕목이다(고전7:29-31절).
구약 시대 가나안 땅이라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 선민은 하나님이 주는 모든 물질적인 은총을 최대한 누리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신약 시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은 영적(靈的: spiritual) 이며 정신적(精神的)이다. 이 영역은 종교적이며 윤리도덕적인 모습을 띤다. 이방인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가치관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겠다는 구약 식의 신앙 삶은 신약 시대 아주 위험하다. 이 점에서도 신약 시대 신앙 삶은 긴장감과 긴박감을 띤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천국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부터 예언되었듯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이것은 타락 즉시 주어진 예언에 따른 것이었다(창3:15절). 인류의 죄값을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은 성육신 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외 있을 수 없었다. 그가 죽음으로 죄값을 지불하고 나면 비로소 인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의 죽음이 없이 하나님 나라는 출발될 수 없었다. 공생애 말기부터 예수님이 자신을 고난의 종으로 소개한 이유였다. 이렇게 서로 어울리지 않는 영광과 고난이라는 두 상반된 개념들이 예수님의 지상 삶과 공생애 동안 내내 어울렸다.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이 만유의 주라는 영광스런 신분을 얻는 것이 아버지의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도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야 했다.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를 세운 아들은 그 나라의 개척자로서 영광스런 왕이 되었다(마28:18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동시에 누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될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쳤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고난을 통해 그 영광이 재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그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롭게 출생할 성도들도 고난을 통해 이미 약속된 영광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들도 먼저 고난 나중 영광이라는 방식으로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를 위해 객관적인 구속을 역사상 성취시켰다. 그럼 언제 이 성취가 주관적으로 성도들에게 적용될 것인가? 그것은 성령 강림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이미 성취된 구원에 관한 복음이 전해질 때 성령이 개인적으로 인침의 역사를 일으켜 구원의 은총을 전해 줄 것이다(마28:18-20, 엡1:13절). 이렇게 이 땅에 구원 받은 수가 늘어남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도 날로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사건은 반드시 성령강림 사건(행2장)과 긴밀히 연결된다. 성령도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을 세우고 확장시키는 일을 위해 이 땅에서 예수님의 뒤를 잇는 둘째 위로자(요16:7절)로서 사역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불활 그리고 승천은 모두 구속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들이다. 이들은 천국의 출발과 성장과 그 마지막에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런 사건들이 없었다면 천국은 마치 백성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부활 후 승천 전까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1:3절) 부활 후에도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하나님 나라의 일이었음이 설명된다.
그렇다면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일임에 분명하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이 지상에 실현하기 위해 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는 공생애 초기부터 천국복음을 외쳤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어야 했고 부활해야 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의 지상 삶과 공생애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나를 승천 전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려주어야 했다.
이를 깨달은 사도들의 사역도 하나님 나라였다. 빌립 집사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했다(행8:12절).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강론했다(행19:8, 20:25, 28:23, 31절). 왜냐하면 부활할 예수님은 구세주와 만유의 주가 되었기 때문이다(행2:36절). 무엇을 위함인가?
구세주란 속죄주란 뜻이며 주란 구속을 받은 새로운 인류의 주인 또는 왕이란 뜻이다. 즉 하나님 나라는 구속에 바탕을 두고 세워진 나라로 구속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만 그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인류는 예수님을 머리로 두고 그 아래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그리고 만유도 그를 중심으로 하나로 통일될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절)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도 완성될 것이다. 아들은 이를 위해 이 땅에 왔고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완성은 아들의 재림으로 가능할 것이다. 이 이후 아들도 물러나 왕권을 아버지에게 넘길 것이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8절)
마태복음에 기록된 천국 비유들은 예수님이 시작한 천국 운동의 성격과 내용과 목적이 무엇임을 설명함과 아울러 그 마지막 모습도 계시한다. 13장의 비유들은 천국의 현재성에 중점을 둔다면 25장의 비유들은 미래성에 비중을 둔다. 그러므로 천국 비유들은 마치 마태복음을 위해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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