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신앙 삶의 최종적인 목적인가?

by 이재섭 posted Feb 0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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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신앙 삶의 최종적인 목적인가?

기독교가 영멸(永滅)로부터 영생(永生)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종교라고 교회와 신자들은 주장한다. 신약의 사복음서의 저자들인 마태와 누가가 이를 잘 증언한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1절)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그리고 사도 바울도 말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절)

이런 주장은 주후 15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결과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이신칭의(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칭의는 믿음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결과 얻은 구원의 상태를 뜻한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유럽 교회는 교부 시대로부터 항상 헬라의 이원론적(二元論的: dualistic)인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교회도 늘 이분법(二分法: dichotomy)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헬라의 철학에 따르면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 세계를 창조한 저급한 신(神)이다. 그러나 신약의 하나님은 영적 차원에서 해방이라는 구원을 주는 고급한 신(神)으로 여겨졌다. 신약의 거룩한 하나님은 죄 많은 세상을 주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유럽 교회는 창세기 1-2장의 창조 신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창세기 3장부터 기록된 타락 사건과 그로부터 구원을 약속한 원복음(창3:15절)에만 집착했다.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신앙 삶도 현실도피적이며 금욕주의적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수도원이 한 때 유행한 이유였다. 구약을 경시하고 신약을 중요하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신(神)이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신으로까지 생각했다. 물론 신구약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성취로 이해하는 것도 구약을 무시하는 일에 일조(一助) 했다.


그럼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은 성격상 정말 상반되는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서로 보완시켜 준다. 우선 구약은 창조 기사(창1-2장)를 통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만 아니라 보이는 물질적 세계의 주인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신약에서 영적 차원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들과 예언들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 가운데 성취되었는지를 구약은 생생하게 설명해 준다. 신약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앙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구약은 가르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靈)과 육(肉) 또는 물질(物質)은 분리되거나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영(靈)인 하나님이 보이는 물질 세계를 창조했다(창1:1절).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눈에 보이는 자연 세계에서 먼저 성취되고 완성되기를 창조주 하나님은 원했다(창1:28절). 인간 창조 방법도 이를 잘 증언한다. 물질에 지나지 않는 몸에 하나님이 생기(生氣)를 불어넣으니 비로소 인간은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창2:7절). 여기 생령은 영적, 정신적, 동물적 그리고 물질적 면들로 구성된 인간 자체를 뜻한다. 인간 영은 정신과 물질인 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영과 정신은 육 또는 물질과 서로 반대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 성경은 이들 사이 유기적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들 사이 관계를 대립적인 이분법으로 이해하는 이분법이나 삼분법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성도들이 대립적인 이분법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여부가 신앙 삶의 내용과 성숙 정도를 결정한다. 이 극복은 현실 도피적이며 금욕주의적인 신앙으로부터의 탈출을 돕는다.


자연과 인간 사회가 이를 잘 증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동양 철학에서 양(陽)으로 취급되는 태양과 음(陰)으로 여겨지는 달을 모두 창조하여 지구의 낮과 밤을 주관하게 했다(창1:14-19절).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맡은 기능과 역할이 다를 뿐이다.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동일한 목적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타락의 영향으로 인류 사회는 이 둘 사이 관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그 순환 운동도 대립적인 이분법에 따르지 않는다. 서로 반대되는 둘 사이 조화와 군형을 통해 자연 질서는 유지된다. 예컨대 원운동(圓運動)에서 상반(相反)되는 두 힘 즉 원심력(遠心力)과 구심력(求心力)이 모두 동시에 작용한다. 이 덕분에 우주의 수많은 천체들은 자신의 궤도를 유지하며 계속 돈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하나가 그 힘을 잃는다면 우주의 질서는 무너진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유지 수단인 물도 두 가지 서로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이 구조는 고작 20∼40조분의 1초라는 찰나에 깨졌다 생겨났다 한다. 이로써 물이라는 성격이 유지되고 보존된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상반되는 것들이 만남으로 더 많은 유익을 인류 사회에 준다. 난류(暖流)와 한류(寒流)가 함께 만나는 바다에서 온갖 종류의 고기들이 잘 잡힌다. 그리고 하늘에서 한류와 난류가 만남으로 농사에 유익을 주는 비가 내린다. 깨끗한 곳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땅에서 뒹굴면서 자란 아이들이 더 건강하다. 후자의 아이들이 전자의 아들보다 면역성이 더 강하다. 온실 속보다 바람과 비가 세차게 불고 내리는 들판에서 자란 식물들이 더 강하다. 이것은 동물의 짝짓기에서도 잘 증명된다. 짐승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짝을 구해야 더 우수한 새끼들을 얻을 수 있다. 본능적으로 이들은 근친간의 짝짓기를 피한다. 아프리카 밀림에서도 며느리를 구하기 위해 아주 멀리 떨어진 마을을 찾는다.

인류 사회에서도 마찬 가지이다. 보수와 진보가 자기 자리만 고수한다면 영원히 대립하며 투쟁할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여 절충한다면 새로운 사상과 정책이 나오며 인류 사회를 더 발전시킨다. 그리고 인류 문화도 서로 이질적(異質的)인 것들의 교류에서 찬란하게 발전한다. 동양으로부터 발전된 문화를 받은 서구 사회가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며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자동차에도 전진력과 제동력이라는 상반된 힘들이 서로 작용한다. 이 덕분에 운전자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의 힘만 작용한다면 자동차는 늘 사고를 내거나 제 자리에 항상 서있을 것이다. 인생에도 행복과 불행, 건강과 질병, 기쁨과 슬픔 그리고 성공과 실패라는 상반된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이로써 하나님도 인류 사회나 성도의 삶을 얼마든지 조종하며 자신의 뜻대로 인도할 수 있다(엡1:11절).


서로 반대되는 것들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 동일한 구조나 조직에 함께 속할 수 있다. 태양과 달이 우주라는 동일한 세계에 속한 천체들이다. 동양 철학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이들을 대립시킨다. 물론 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먹이사슬이 말하듯이 천적(天敵) 관계를 가진 생물들이 동일한 자연에 속하여 산다. 이들이 서로 대적함으로 자연은 균형을 유지한다. 아무리 미천한 생물이라도 인류 사회는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된다.

사람의 뇌 구조도 마찬 가지이다. 논리를 주관하는 왼쪽 뇌와 정서를 주관하는 오른 쪽 뇌가 같은 머리에 속한다. 맡은 역할을 다르지만 이들은 씨줄과 날줄과 같아 서로 얽혀가며 다 다른 인생사를 사람들에게 허락해 준다. 그리고 사람의 몸도 이를 잘 설명한다. 대칭을 이루는 지체(肢體)들은 서로 반대 편에 위치한다. 이 덕분에 눈은 더 멀리 그리고 더 많이 보고 귀는 반대 방향으로부터 오는 소리들을 들으며 손은 더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고 그리고 발은 몸의 균형을 유지시켜 더 멀리 걷게 한다. 이들은 싸우지 않고 서로 돕는다. 위치만 다르지 역할과 기능은 같다. 사람 손도 이를 잘 설명한다. 엄지와 나머지 손가락들은 서로 반대의 위치에 있지만 같은 목적을 더 효과적으로 이루게 한다.


창조의 관점에서 성경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라는 세계 즉 거대한 구조를 창조했다. 그 구조에 속하는 것들은 어느 하나라도 헛되이 창조되지 않았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역할과 그에 따라 기능들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 기능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할 뿐이다.

다음 성구가 이를 잘 증명한다.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대상29:11절) 하나님이 만유의 머리라면 만유는 그의 몸인 셈이다. 만유라는 몸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 유기적일 뿐만 아니라 그 몸의 지체들로써 머리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므로 인류 사회는 자연 만물을 소홀히 취급할 수 없다. 문화 사명(창1:28절)이 뜻하는 바이다.

부활주인 예수 그리스도도 만유의 머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7-10절)

원문에 따르면 밑줄 친 부분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합시킨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골1:18절). 부활주도 만유의 주(主)이기 때문이다(엡1:20-23절).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은 종래에 가졌던 이분법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이 세상과 그 문화를 보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때 부활 주님이 만유의 주임을 증언하는 삶이 가능하다.


이렇게 기독교 성경은 대립적인 이분법에 따라 교회와 성도들이 사물을 이해하거나 성경의 기록을 해석하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맡은 역할과 받은 은사 또는 수행해야 할 직분이 서로 다를 뿐 모두 동일한 목적을 위해 일한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대적자인 사단도 창조주 하나님의 허용 아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위해 일하는 종에 지나지 않는다.

욥이 잘 증언했다. 하나님의 허락 아래 사단은 욥과 그 가족에게 비극과 불행을 일으켰다(욥1-2장). 그러나 불행을 겪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절)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2:10절)

그는 사단을 하나님과 동일 선상에 놓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유일한 주권자 하나님을 믿는 일원론(一元論: monism)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기독인의 성화의 삶이란 결국 일원론적 사고 방식의 결과이어야 한다. 성경의 구속사가 그렇게 증언한다.


창조 기사는 구원의 목적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역은 작정(作定)과 창조(創造) 그리고 섭리(攝理)로 나뉘어진다. 창세 전 이미 세워진 작정을 실현시키기 위해 만물을 창조했고 그리고 보존(保存)과 협력(協力)과 통치(統治)라는 신적 행위들을 통해 오늘날도 만물을 섭리한다. 사도 바울이 정확히 말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엡11:36절)

하나님의 인간 창조 계획은 하나님의 작정이 무엇인지 잘 설명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1:26절) 성삼위 하나님이 모여 인간 창조를 합의했다. 그 목적은 인간 대리자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성취하고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미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은 그대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분명하다. 인류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인류 사회의 이상(理想)이어야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일은 인류의 일이 되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 할 것이다.


거룩한 영(靈)인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자연적인 세상에 자신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 이원론적인 이분법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인류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때문이다. 문화 명령(창1:28절)이 이를 잘 증명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주인이지만 피조물의 통치를 인류에게 위임했다.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문화 명령에 따르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가 이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함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땅에서 난 존재인 인간은 땅을 떠나 살 수 없고 땅에 의존하며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 문화나 문명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문화를 통해 찬란하게 꽃 피울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세상 문화를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인류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규례(창2:17절)를 준 이유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없는 문화 창달은 하나님 앞에 그 의미를 잃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인류는 이에 실패했다(창3장). 이에 따라 하나님도 잠시 실패했다. 아담과 그의 후손인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새로운 주인인 사단을 위해 사는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롬6:16절).


하나님은 자신을 떠난 인류를 다시 돌아오도록 해야 했다. 이를 위해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했다. 이를 원복음(창3:15절)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인류가 문화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나님 앞에 종으로 다시 불러 세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구속이라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구원은 구속의 결과라면 구원은 창조 목적의 성취를 겨냥한다.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불순종의 결과 인류가 에덴 동산을 잃었다. 에덴 밖에서 저주스런 삶을 살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가 장소의 이전(移轉)으로 설명되었다. 그렇게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근한 관계를 상실했다. 그러나 원복음이 약속한 메시아는 에덴으로 복귀시켜줄 구세주일 것이다. 여기서도 구원의 은총이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된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구될 것이다.

그러나 에덴 동산 안이나 밖은 모두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같은 세상에 속했다. 타락으로 인해 위치의 변화가 발생했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문화 사명의 실현 장소로 남았다. 이것은 구속사가 계속 보여주는 진리이다.


노아의 선택도 잘 증언한다.

에덴 동산을 잃은 인류는 앞으로 올 메시아(창3:15절)를 소망하며 세상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인류는 이를 거부했다. 우선 가인이 아벨을 살인함으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버렸고 아비의 집을 떠났다(창4:1-15절). 그리고 하나님 없이 인류 최초의 고대 문명과 문화를 창설했다(16-24절).

셋의 후손도 서서히 메시아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버리고 가인의 후손과 연혼함으로 그들처럼 세상 삶을 살았다(창6:1-2절). 그 결과 세상에 죄가 관영 했고 이를 본 하나님은 한탄했다(5-6절). 인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존재할 목적과 이유를 갖지 못했다. 홍수 심판으로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인 옛 인류를 멸하기로 했다. 그 대신 새로운 인류를 세우고자 노아와 그 가족을 선택했다(8-22절).

홍수 심판의 결과 아담으로 대표되었던 옛 세상은 사라졌다. 노아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이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렇게 명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창9:1-2절).


홍수 심판은 인류가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버린다면 하나님도 인류를 버릴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이 심판에서 살아남게 한 구원의 은총은 노아와 그 후손인 새로운 인류가 메시아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심판주이며 구원주인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인 통치의 실현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홍수 전후(前後)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발견된다. 노아도 아담처럼 인류의 새로운 대표자였다. 노아의 후손도 결국 아담의 후손으로 그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류였다. 사람만 바뀐 것이지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었다. 그리고 홍수 후에도 인류는 여전히 문화 명령의 수행자였다. 홍수 전처럼 새 인류도 이 세상 삶을 살아야 했다.

다른 점이 발견된다. 노아와 그 식구들은 심판의 대상인 ‘옛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킬 무대인 ‘새 세상’으로 옮겨졌다. 옛 세상이나 새 세상이나 모두 같은 지구의 일부였다. 여기서도 구원의 은총이 장소의 이전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 짐승들과 곤충들은 인간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 사명 수행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을 뜻했다.

유감스럽게도 새로운 인류도 홍수 후 100년도 안되어 또 다시 만물의 창조주이며 홍수 심판에서 구해준 구원주 하나님인 여호와를 버렸다. 이들은 시날 땅에 바벨탑을 세움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인간의 통치를 실현하고자 했다(창11:4절). 이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또 다시 실패에 봉착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전략을 바꾸어야 했다.


장소의 이전은 신분의 변화를 동반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데아 우르에서 불러냈다(창11:31, 수24:2-3절).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도록 지시했다(창12:1-3절). 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은 더 이상 인류 전체를 구원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 대신 아브람을 택해 그의 후손을 민족으로 세워 자신의 통치를 가나안 땅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전해야 했다. 하나님의 소명이 아브람에게 장소의 이전을 가능케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베푼 구원의 은총이었다.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됨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그 결과 아브람의 후손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장소의 이전은 신분의 변화를 초래시킬 것이다. 그러나 갈데아 우르나 가나안은 모두 지정학적으로 이 세상에 속한 곳이었다.

그렇다면 구약의 구원은 신학적으로 3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인간이 통치하는 곳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곳으로 이전한다(새로운 소속).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던 죄인이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사는 새로운 사람이 된다(새로운 신분). 그 목적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새로운 윤리).


이런 의미를 갖는 구원은 구속사(救贖史)에서 계속 반복된다. 하란에서 살았던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버지 이삭이 사는 가나안 땅으로 귀향해야 했다(창32장).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는 하란에 붙잡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선택을 받았고(창25:20-23절) 그 덕분에 족장의 언약을 상속받았다(창28:11-15절). 그리고 야곱의 식구들은 요셉 덕분에 세계적인 기근을 피해 애굽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430년 후 모세의 주도 아래 일어난 출애굽 사건 후(출12장) 광야를 통해(민수기)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정착했다(여호수아서).

기독교 교회는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세 장소들을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과 관련시켜 해석한다. 노예에서 해방된 곳인 애굽은 칭의(justification)까지, 광야는 성화(sanctification)와 견인의 은총으로 그리고 가나안은 최종적인 단계인 영화(榮華: glorification)로 이해된다. 이것은 복락의 땅 가나안을 성도들이 들어가 마침내 안식할 영원한 낙원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이 해석 방법에 따르면 이 세상은 애굽과 광야와 같아 하루 속히 벗어나야 할 장소와 나그네 삶 또는 순례자의 삶을 살 곳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교회가 세상을 비관적이며 부정적으로 본 이유였다. 그 결과 기독교 교회는 현실도피적이며 금욕주의적인 신앙 삶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가나안은 애굽과 같이 이 세상에 속한 장소였다. 하나님이 애굽을 버리고 가나안을 택했다는 차이만 있다.


아브라함의 소명에 따르면 그의 후손은 가나안 땅에서 민족을 이루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소명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하나님 나라 건설과 긴밀히 연결된다. 가나안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안식할 곳이 아니라 하나님 통치를 실현시켜야 할 사명의 장소였다.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시내산 율법을 재해석했다(신명기). 이 때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든지 망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신4:25-26절) 가나안 땅에서도 율법 준수가 강조된 이유였다. 가나안은 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여전히 시험을 받아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에 기록된 가나안 정복전은 혈육적인 전쟁과 싸움이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려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도 이런 전쟁은 불가피했다. 이런 영적 전쟁은 신약 시대에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사사기는 가나안 땅에서 지역적으로 벌어지는 전투는 족장 언약에 대한 믿음으로 계속 수행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에 팔아 노예로 전락될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약 시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구원 받은 신약 성도들도 노예처럼 고통을 당할 수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안식의 땅 낙원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통치는 가나안 땅에 세워진 다윗 왕국에 의해 마침내 실현되었다(삼하7장). 그리고 솔로몬에 의해 성전이 완공됨으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왕상7장). 이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었으며 여호와는 왕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거했다. 이것은 언약의 문자적인 성취였다(레26:11-12, 겔37:27절).

그러나 다윗 왕국은 족장 언약의 국지적(局地的)이며 부분적인 성취였다. 인류의 일부만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홍수 이전처럼 보편적인 인류를 대상하여야 한다. 다윗 왕국도 가나안이 낙원일 수 없음을 증언한다. 가나안은 하나님 통치의 기점으로 그곳으로부터 계속 확장시켜 나가야 할 출발점과 근거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한편 다윗 왕국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신약 시대 메시아에 의해 성취되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계시해 주었다. 다윗 왕국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망했고 그렇게 인류 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 후 약 400년이 지나 메시아가 강림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전세계로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이를 위해 그의 통치도 구약 시대처럼 유대 나라를 기점으로 삼을 것이다.


결론

구약 성경은 신분의 변화를 수반하는 장소의 이전으로 구원을 설명했다. 에덴에 사는 것이 구원이었다면 이곳에서 쫓겨나는 것은 구원을 잃은 것이었다. 그러나 에덴 안이나 밖은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곳으로 둘 사이 차이는 전혀 없었다. 구원의 서정을 잘 설명해 주는 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이라는 세 장소들도 마찬 가지였다.

다만 차이란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존재 여부에 있었다. 이 은총이 없다면 죄인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특별은총이 임한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점점 더 세상으로 확장되어 나가야 한다. 그렇게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특별 은총) 아래 놓일 것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구약과 다른 내용을 보여주는 듯 하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기록내용이 메시아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구약 사이 연속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구약은 메시아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그러나 신약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메시아가 누구인지에 대해 기록한다.


신약 성경도 구약과의 연결성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이렇게 외쳤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절) 그러나 같은 내용을 마가는 달리 기록했다.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절) 이로 보아 마태의 천국은 하나님 나라를 뜻한다. 누가 복음도 천국을 하나님 나라로 소개한다.

마태복음의 천국 비유들(13장)에 의하면 천국은 현재 이곳에 임한 하나님 나라이다. 처음 복음의 씨로 시작하여 마침내 천국은 이 세상에서 찬란히 꽃을 피울 것이다. 세상 문화의 옷을 입고...... 구약의 다윗 왕국과 달리 천국은 눈에 안 보일 것이다. 천국은 말씀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영적 통치가 실현된 곳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 나라와 긴밀히 연결됨을 증언한다.

요한복음도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절) 흥미롭게도 하나님은 죄인 인류가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냈다. 여기 ‘세상’은 헬라어로 'cosmos'로써 우주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죄인 인류가 사는 곳을 가리킨다.

그럼 왜 하나님은 죄인 인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우주적으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조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우주적으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될 무대인 세상까지 포함한다.

이 성구의 문맥이 이를 잘 증명한다. 니고데모는 구약의 다윗 왕국의 재건을 기대하며 예수님을 찾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혈육적인 다윗 왕국이 아니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며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먼저 거듭나야 한다고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했다(요3:3, 5절).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도록 예수님이 속죄 사역을 수행할 것임을 예언했다(9-15절). 대속죽음의 결과인 중생 즉 구원과 하나님 나라 사이 관계가 아주 긴밀하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다면 신앙 삶은 균형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종래의 구원론은 수정되어야 한다. 영혼 구원이라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관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구원론은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 때 신앙 삶에서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성격이 사라진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구원주이면서 동시에 만유의 주(主) 또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 삶은 실천적으로 바뀐다.

아울러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는 장소라는 구체적 개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주(主)의 영(靈)인 성령이 임재한 곳에 바로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기 때문이다(고후3:17절). 이 때문에 거듭난 성도의 참여로 세상 문화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세상 문화는 주체자에 의해 그 성격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성도의 신앙 삶에 균형과 조화가 나타나며 성숙한 신앙 삶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성경적인 세계관이 정립되어야 한다. 구약 성경은 이 세상을 애굽으로, 광야로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설명한다. 결국 성경적인 세계관은 삼중적이다. 성도에게 이 세상은 애굽과 같다. 이 세상은 성도가 속히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다. 이 세상은 사나운 짐승과 무서운 도적들이 숨어 사는 광야와도 같다. 그런 열악한 곳에서 성도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며 사는 훈련을 열심히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은 가나안과 같다. 물질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남아야 할 장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해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할 곳이다.

그럼 무엇을 위해 애굽을 버리고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아야 하는가? 가나안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함이다. 이렇게 본다면 성경적인 세계관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는다. 이 세상은 계속 버려야 할 애굽이면서 동시에 계속 훈련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 세상은 결국 불로 심판 받아 멸망 당할 곳이다. 이 세상을 광야로 알고 열심히 훈련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가나안처럼 보아야 하지만 그런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성도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성취되도록 노력하여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이 불로 파멸된 후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 가르침은 아주 중요하다. 일부 기독교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완전한 형태로 세워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 신학의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대적자 사단과 그 추종자들이 유황 불에 던져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 이전 인류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이 세상에 완전한 낙원을 세울 수 없다.

이 세상은 시험 무대이기 때문이다. 시험과 연단을 위해 하나님은 사단이란 존재가 에덴 동산에서 활동하도록 허용했다. 여기 시험은 누군가에게는 파멸케 하는 무서운 유혹으로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는 연단케 하는 유익한 훈련으로 나타난다. 누가 어느 시험에 속할 것인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다.

타락 이전 에덴 동산에서 시험이 있었다. 구원 받은 이후에도 마찬 가지이다. 구원의 결과 성도들은 영적으로 타락 이전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 이후에도 성도들에게 시험은 계속된다. 이 세상은 완전한 낙원이 아니라 시험과 연단을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사건 이후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이유이며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여전히 율법 준수가 중요함이 강조된 이유였다.

이것은 그대로 신약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신앙 삶만이 받은 구원이 참된 것임을 밝혀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을 뜻한다(빌1:27절). 그런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다. 성도는 이런 통치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성도들의 삶 방식이다. 그러므로 구원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4중적 의미를 갖는 성경적인 세계관은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과 예배론의 내용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 근거를 두고 어떻게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킬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도 ‘모으는 목회’뿐만 아니라 ‘보내는 목회’에도 힘쓸 것이다.

이 때 비로소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이 말한 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고 성도가 성도답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국 교회도 개혁될 것이다. 주님! 한국 교회를 이렇게 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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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수 목사님은 한국외대를 졸업한 후 대기업 과장으로 있다가 합동신학교를 거쳐 러시아 선교사로 오랫동안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사역하셨습니다(현재 러시아 서부 지역에서 사역 중임). 우리 가족이 몇몇 좋지 않은 인물들의 방해로 비자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르쿠츠크 1번 교회 미하일 목사님을 찾아가 상의해 볼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이를 계기로 미하일 목사님과 협력 관계에 갖게 되었으며 사역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창수 목사님이 지적하신대로 구원받은 사실만 대단하게 생각하고 제멋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실현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말씀대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