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용과 변혁의 '문화 목회' 제안한다
특별기고/기독교 문화의 시대를 열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문화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화를 거론하지 않으면 뒤처지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한 '문화'라는 용어는 이제 문화의 홍수를 맞이할 정도로 흔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문화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혼돈될 때도 있다. 문화는 삶의 양식, 의미의 구조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총체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남녀노소의 어느 누구도 이 문화라는 용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자 속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문화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가 가능하겠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행되어 풍성한 생명(요10:10)이 드러나게 하는 삶의 모든 것이라 하겠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는 어떠한가. 영화<아바타>가 그 한 예로서 나와 문화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바타>에서 '나'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조종하는 실체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현재의 나는 거꾸로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의 내가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문화를 창조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문화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봐야할 시점이다.
우리는 문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의 구성원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살아간다. 문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와 내가 실현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긍정적 측면이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내가 입는 옷, 내가 먹는 먹을거리,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등, '내'가 선택한 문화는 실상 누군가에 의해 나에게 주입되어진 기호와 취미일 수 있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기 싫어하는 현대인, 남들이 찾는 먹을거리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는 습관, 누구도 구닥다리라는 평가를 받기 싫어하는 현실, 남보다는 차별 되게 보이려는 비교의식, 바로 이 점에서 문화의 영향력은 지대해진다. 사람은 문화에 의해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하기도 하지만, 반면 문화에 의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중독과 같은 병리적 현상에 떨어지기도 한다. 문화를 영적 분별력으로 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양면적이다.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문화위임명령을 잘 지킨다면 문화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문화에 의해 타락의 길에 떨어질 것이다. 이 경우 테일러의 표현은 적절하다 하겠다.
"문화는 구원을 기다리는 기호로 가득차있다."
성과 속의 과격한 분리로 몸살
성경은 초대교회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공동체였던 것을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은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생활화했는지 보여준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기독교문화를 살아갔던 모습이었다. 그 결과 주변인들로부터 칭송도 받으며 전도에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쉐퍼는 이를 두고 문화변증학적 삶이라고 정리하였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힘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온몸이 뒤따라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삶이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를 두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7:21),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7:24)의 삶을 권고하셨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고 경고하셨다. 본질적으로 기독교문화는 복음을 행하는 행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기독교문화는 삶의 구체적이고 구석진 영역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 왜냐하면 거기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다가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터툴리아누스와 같은 교부의 생각으로 인해 복음과 삶의 통합이 둘로 나눠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성과 속을 과격하게 분리시켰다.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좋았으나 그만 세속사회를 등한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콘스탄틴 황제의 경우는 파급효과가 더 치명적이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로마의 이교적 습속이 급속하게 기독교 안으로 전이되어오는 비극이 일어났다. 서구 중세시대 동안 기독교는 복음을 순수하게 살았다기보다는 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이교적 전승에 의해 왜곡된 삶을 살았다. 기독교문화가 이방적인 신화와 전설에 몸살을 앓아야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서 쓴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는 글은 기독교문화의 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문화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목적은 죄인들의 자유함에 있었다.
16세기 제네바는 구교의 지배 속에서 예배의 혼란과 윤리적 타락에 빠져있었다. 부도덕한 사제들이 예배의 정신을 망각한 채 미사를 집전하고, 사회는 술과 오락, 도박과 무질서 등으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칼뱅이 시도한 개혁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로 뻗어나갔다. 그는 이단적 사설을 전하는 이들과 교리적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시민들의 삶을 바로 잡는 개혁을 펼쳐나갔다. 칼뱅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은 기독교문화의 정립은 교육을 통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깨달음에 기인한다. 그의 기독교문화 운동은 타락과 답보 상태에 빠진 사회에 복음의 생명으로 변화를 주는 개혁작업이었다.
문화변혁자 역할 감당해야
니버는 기독교문화를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의 이론으로 한국기독교문화를 분석한다면 네 가지 형태가 두드러져 보인다.
첫째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이들은 주로 '문화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문화를 도외시하거나 무관심하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자기끼리만의 영역에서 만족해한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기독교의 게토현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는 너희들과 노는 물이 달라'라는 선민의식은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종종 안티행동을 하게 만든다. 카이퍼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이란 모토로 사회개혁운동을 펼쳤다. 네덜란드 수상의 자리에까지 부름을 받은 개혁가의 정신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둘째는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신앙인들은 교회와 세상의 영역에 구분이 전혀 없다. 마치 세상이 모두 거룩하게 되어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죄와 상관없다는 행동을 한다. 로마 시대의 신앙인들이 시장에서 행하던 행동과 생각을 바실리카 안으로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예와 흡사하다.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세상이 거룩하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바울 사도의 권면은 지금도 우리가 삼가 받아야 행해야할 교훈이다. 주 예수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거룩성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문화를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행위는 언제든지 말씀에 비추어봐야 한다.
셋째로 세상과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유형이다. 한국 기독교인 중 역시 이 부류에 속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여기에 속하는 교회와 세상, 각각 문화를 다 인정하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이중적 태로라 아니할 수 없다. 교회에서 충실한 종이 세상에서도 성공적이다. 문제는 세상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성공적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세상에서는 세상신에게 충성한다면 주님 가르치심대로 두 주인을 섬기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넷째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독교문화의 속성이요 능력이라고 본다. 문화변혁자로서 그리스도 유형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하나님의 통치가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세상 모든 곳에 유효하다. 그러므로 세상문화는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치유되고 변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문화가 선교적 소명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기독교문화 책임지는 한국교회
한국기독교는 그동안 바쁘고 숨 가쁘게 뛰어왔다. 개화기 때부터 민족의식개혁, 민족자립, 민족교육, 독릭운동 등으로 바빴고,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낙후된 생활과 피폐해진 영혼을 회복시키느라 혼혈을 다 기울였다. 그 후 군부 독재시대에는 민주 자유화를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가정의 부모님이 식구들을 돌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자신은 병에 걸리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한국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로서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는 정작 문화를 돌아볼 여지가 많지 않았다. 성도 개개인의 삶을 돌아보고 치유와 회복, 나아가 양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문화정체 현상이 생겨났다.
교회와 세상의 과장된 이원론, 기독교 문화의 게토현상, '너희들끼리 잘 놀아'라고 등을 돌리는 세상에 대해 '괘씸한 것들'이라고 섭섭해 하기보다는 돌아올 둘째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에 안아햐 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이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2:5~11)이 아니겠는가. 기독교문화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세상에 대해 포용과 관용으로 끌어안고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사랑, 곧 기독교문화의 힘이라고 본다. 이를 보다 체계화하고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교단적 차원에서 문화목회를 고려해봄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한국기독교가 지혜롭다면 중세교회의 전철을 다시 밟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문화명령, 구원과 함께 허락하시는 풍성한 삶의 약속을 헛되이 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문화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약속되어진 소중한 은혜의 일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추태화 교수 / 안양대.기독교문화학)
특별기고/기독교 문화의 시대를 열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에 문화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화를 거론하지 않으면 뒤처지게 느껴지는 상황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한 '문화'라는 용어는 이제 문화의 홍수를 맞이할 정도로 흔한 개념이 되어버렸다. 문화가 과연 어떤 의미인지 혼돈될 때도 있다. 문화는 삶의 양식, 의미의 구조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총체이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남녀노소의 어느 누구도 이 문화라는 용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자 속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독교문화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가 가능하겠지만 기독교인의 삶을 통하여 복음의 진리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행되어 풍성한 생명(요10:10)이 드러나게 하는 삶의 모든 것이라 하겠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는 어떠한가. 영화<아바타>가 그 한 예로서 나와 문화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아바타>에서 '나'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조종하는 실체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자. 현재의 나는 거꾸로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현재의 내가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문화를 창조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문화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봐야할 시점이다.
우리는 문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사회의 구성원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살아간다. 문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와 내가 실현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긍정적 측면이다. 그러나 부정적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내가 입는 옷, 내가 먹는 먹을거리, 내가 좋아하는 음악 등, '내'가 선택한 문화는 실상 누군가에 의해 나에게 주입되어진 기호와 취미일 수 있다. 유행에 뒤떨어진 옷을 입기 싫어하는 현대인, 남들이 찾는 먹을거리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가는 습관, 누구도 구닥다리라는 평가를 받기 싫어하는 현실, 남보다는 차별 되게 보이려는 비교의식, 바로 이 점에서 문화의 영향력은 지대해진다. 사람은 문화에 의해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하기도 하지만, 반면 문화에 의해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버리기도 하고, 심지어 중독과 같은 병리적 현상에 떨어지기도 한다. 문화를 영적 분별력으로 봐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는 양면적이다. 유익하기도 하고, 해롭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문화위임명령을 잘 지킨다면 문화는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문화에 의해 타락의 길에 떨어질 것이다. 이 경우 테일러의 표현은 적절하다 하겠다.
"문화는 구원을 기다리는 기호로 가득차있다."
성과 속의 과격한 분리로 몸살
성경은 초대교회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공동체였던 것을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은 초대교회 신앙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생활화했는지 보여준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기독교문화를 살아갔던 모습이었다. 그 결과 주변인들로부터 칭송도 받으며 전도에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쉐퍼는 이를 두고 문화변증학적 삶이라고 정리하였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힘은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온몸이 뒤따라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삶이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이를 두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7:21),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7:24)의 삶을 권고하셨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26)이라고 경고하셨다. 본질적으로 기독교문화는 복음을 행하는 행위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기독교문화는 삶의 구체적이고 구석진 영역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 왜냐하면 거기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다가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터툴리아누스와 같은 교부의 생각으로 인해 복음과 삶의 통합이 둘로 나눠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성과 속을 과격하게 분리시켰다. 거룩함을 지키는 것은 좋았으나 그만 세속사회를 등한히 하는 결과를 낳았다. 콘스탄틴 황제의 경우는 파급효과가 더 치명적이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로마의 이교적 습속이 급속하게 기독교 안으로 전이되어오는 비극이 일어났다. 서구 중세시대 동안 기독교는 복음을 순수하게 살았다기보다는 교회의 잘못된 관행과 이교적 전승에 의해 왜곡된 삶을 살았다. 기독교문화가 이방적인 신화와 전설에 몸살을 앓아야했다.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서 쓴 '교회의 바빌론 포로'라는 글은 기독교문화의 정신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문화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 목적은 죄인들의 자유함에 있었다.
16세기 제네바는 구교의 지배 속에서 예배의 혼란과 윤리적 타락에 빠져있었다. 부도덕한 사제들이 예배의 정신을 망각한 채 미사를 집전하고, 사회는 술과 오락, 도박과 무질서 등으로 혼란에 빠져있었다. 칼뱅이 시도한 개혁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로 뻗어나갔다. 그는 이단적 사설을 전하는 이들과 교리적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시민들의 삶을 바로 잡는 개혁을 펼쳐나갔다. 칼뱅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한 것은 기독교문화의 정립은 교육을 통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깨달음에 기인한다. 그의 기독교문화 운동은 타락과 답보 상태에 빠진 사회에 복음의 생명으로 변화를 주는 개혁작업이었다.
문화변혁자 역할 감당해야
니버는 기독교문화를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그의 이론으로 한국기독교문화를 분석한다면 네 가지 형태가 두드러져 보인다.
첫째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이들은 주로 '문화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며 문화를 도외시하거나 무관심하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자기끼리만의 영역에서 만족해한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기독교의 게토현상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나는 너희들과 노는 물이 달라'라는 선민의식은 비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종종 안티행동을 하게 만든다. 카이퍼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이란 모토로 사회개혁운동을 펼쳤다. 네덜란드 수상의 자리에까지 부름을 받은 개혁가의 정신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둘째는 문화의 그리스도 유형이다. 여기에 속하는 신앙인들은 교회와 세상의 영역에 구분이 전혀 없다. 마치 세상이 모두 거룩하게 되어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지 죄와 상관없다는 행동을 한다. 로마 시대의 신앙인들이 시장에서 행하던 행동과 생각을 바실리카 안으로 그대로 가지고 들어온 예와 흡사하다.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세상이 거룩하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는 바울 사도의 권면은 지금도 우리가 삼가 받아야 행해야할 교훈이다. 주 예수의 보혈로 값주고 사신 교회의 거룩성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문화를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행위는 언제든지 말씀에 비추어봐야 한다.
셋째로 세상과 역설적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유형이다. 한국 기독교인 중 역시 이 부류에 속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여기에 속하는 교회와 세상, 각각 문화를 다 인정하며 살아가자는 것이다. 이중적 태로라 아니할 수 없다. 교회에서 충실한 종이 세상에서도 성공적이다. 문제는 세상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성공적이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세상에서는 세상신에게 충성한다면 주님 가르치심대로 두 주인을 섬기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넷째가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독교문화의 속성이요 능력이라고 본다. 문화변혁자로서 그리스도 유형이다. 개혁주의 전통은 하나님의 통치가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세상 모든 곳에 유효하다. 그러므로 세상문화는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치유되고 변화되어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문화가 선교적 소명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기독교문화 책임지는 한국교회
한국기독교는 그동안 바쁘고 숨 가쁘게 뛰어왔다. 개화기 때부터 민족의식개혁, 민족자립, 민족교육, 독릭운동 등으로 바빴고, 광복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낙후된 생활과 피폐해진 영혼을 회복시키느라 혼혈을 다 기울였다. 그 후 군부 독재시대에는 민주 자유화를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가정의 부모님이 식구들을 돌보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자신은 병에 걸리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한국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로서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고 보여 진다. 그러다 보니 한국교회는 정작 문화를 돌아볼 여지가 많지 않았다. 성도 개개인의 삶을 돌아보고 치유와 회복, 나아가 양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하는데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문화정체 현상이 생겨났다.
교회와 세상의 과장된 이원론, 기독교 문화의 게토현상, '너희들끼리 잘 놀아'라고 등을 돌리는 세상에 대해 '괘씸한 것들'이라고 섭섭해 하기보다는 돌아올 둘째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품에 안아햐 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이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2:5~11)이 아니겠는가. 기독교문화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세상에 대해 포용과 관용으로 끌어안고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사랑, 곧 기독교문화의 힘이라고 본다. 이를 보다 체계화하고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교단적 차원에서 문화목회를 고려해봄은 어떨지 제안해 본다. 한국기독교가 지혜롭다면 중세교회의 전철을 다시 밟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문화명령, 구원과 함께 허락하시는 풍성한 삶의 약속을 헛되이 여기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문화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약속되어진 소중한 은혜의 일부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추태화 교수 / 안양대.기독교문화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