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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21:14

심판과 정죄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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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성경을 보면서 단어의 의미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떤 나라 말은 동의어가 많고 신학적인 용어 선택이 잘 안 되어 있어 성경 의미를 일상용어 정도로 해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정된 신학 용어가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한국의 경우 용어만 잘 가르치고 이해시켜도 전도와 신앙 성숙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회개, 정죄, 사죄, 구원, 심판 이런 중요한 용어들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너무 한 단어로 고착되어 있어 부득이 그 의미를 폭넓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단어의 의미를 한 가지로 국한할 경우 특정 대상이나 마음 상태에 따라 적용이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회개”의 의미로 자신이 지은 죄를 깊이 느끼고 뉘우치는 것으로 해석하면 맞을까요. 얼핏보면 맞는 것도 같지만 엄격히 말하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궁극적인 “회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앞에서 말한 회개가 틀린 것도 아닙니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어느 순간 진정한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교회를 나가고 성경공부를 참석하고 짧게 혹은 길게 노력을 기울여도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 주어지게 됩니다(고전 12:3). 결국 회개와 믿음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신분이 된 후부터 이방인과 다른 형태의 삶아가게 됩니다.

"회개하라", "믿어라" 이런 말들이 원어적으로 보면 진행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메타노에이테 카이 피스튜에테"란 명령법을 살펴보면 시작하는 점을 강조하기 보다 진행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더 전문가가 판단해야겠지만 제 소견은 이렇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새로운 생명을 지니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회개 상태에 있고 믿음 상태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해석할 때는 원어 자체가 주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봅니다. <심판과 정죄>만 해도 혼동해 쓰입니다. 차라리 마지막 심판이라고 쓴다면 단 한 차례 최후 심판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 심판으로 표현한 경우 대부분 마지막 심판을 뜻합니다.

정죄는 피할 수 없는 심판 대상이 되었다는 검사의 논고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단어는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정죄가 되었으니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단순한 죄를 가리키기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보내신 구속주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 즉 구원받지 못한 형태를 가리킵니다.

헬라어는 어휘가 풍부하지 못합니다. 불과 5000여개의 단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 이란 단어는 "판단"이라는 말과 원어가 같습니다."평화", "화평", "화목" 결국 같은 단어를 가지고 번역을 달리한 것입니다. "비판"은 "판단"이란 단어 앞에 부정 의미가 첨가된 정도입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는 일일이 신학적으로 단어의 한계를 정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따라서 독자가 알아서 의미를 찾아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5:24에서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은 완전히 구원에 들어간 상태를 말합니다. 완료형이면서도 미래 구원(심판에서의 보장)을 가리킵니다.

사실상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죄당했습니다.“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율법에 가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율법의 정죄는 곧 심판 아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태어나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정죄의 대상이자 궁극적인 심판 대상입니다. 죽을 때까지(또는 주님의 재림날까지)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면 결국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정죄와 심판은 서로 피할 수 없는 상관관계인 셈입니다. 이 말은 결국 불신자에게 적용됩니다. 삶 속에서의 정죄와 마지막 정죄로 나누어보면 이해가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이미 정죄당한 자라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심판 자리에서 그의 정죄당한 것이 입증될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얻을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
어둠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듯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길이 나타났습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6-19).

정죄와 심판 사이를 간략하고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구원얻은 하나님의 백성은 정죄가 아닌 사죄받은 자이고 그 결과 궁극적인 심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따라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정죄"란 말을 쓰는 것은 모순이라 생각합니다. 삼손을 묶은 끈이 그의 힘으로 모두 끊어지듯 용서받은 백성을 묶어놓을 수 있는 힘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를 대상으로 정죄란 말을 쓰기보다 자신의 잘못을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요일 1:9).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죄를 가지고 반복해서 문제삼아서도 안 됩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용서의 축복 속에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답게 힘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젠가 영생과 영벌을 나누게 됩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 25:46) 불신자에게는 멸망의 자리가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원한 승리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심판이란 말에 너무 겁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따금 저를 위로하기 위해 어려운 땅에서 지내느라 상을 많이 받겠네요.”라고 말하면 그냥 흘려듣습니다. 솔직히 상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 받기 위해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제 삶을 통해 제대로 열매를 맺은 것 같지도 않아 그저 구원받는 걸로 족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의 사명이자 의무이기에 감당해 나갑니다. 나머지 문제는 어차피 스스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 크게 비중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이웃을 향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이자 사역자의 도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자들에게 사용하는 단어라 생각합니다. 두 용어는 같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웃(이방 종족까지)이 정죄당한 상태에 있고 장차 심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신자가 극히 적은 나라나 종족을 대할 때면 더욱 마음이 아프답니다. 복음은 먼저 믿는 자만의 축복이요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는 대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3).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진 불길이 이 시대에 내릴 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개인의 죽음은 곧 심판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도 좋지만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 외지에 나가는 것도 이런 목적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이 아닐 지라도 정죄 대상에서 벗어나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토록 함께 거하기 원하는 마음에서 춥고 더운 것 가리지 않고 사랑과 복음을 가지고 선교지를 향해 나가는 것이 선교사의 심정이라 생각합니다.

새해를 맞아 섬기시는 교회에 부흥의 불꽃이 타오르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가정이 복되고 더욱 보람된 한 해를 맞이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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