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by 이재섭 posted Jun 2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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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권 - 기독교강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주 하나님의 지식, 맨 처음 율법하에서 조상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시고 그 다음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 11 장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다섯 가지이다 : 첫째로, 구약은 영적 축복을 일시적 축복으로 표현했다. 1-3)


1. 하늘나라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어야 할 지상의 은혜를 강조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여러분은 신구약간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말이냐고 물을 것이다. 또한 신구약을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서 대립시키는 많은 구절들은 어떻게 되느냐고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성경에 차이가 있으며, 그 사실에 주의를 환기하는 것을 나는 기꺼이 인정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엄연한 통일성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인정이다. 차이점들을 순서대로 토의하고 나면 이 점이 명백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거나 기억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점은 넷이다. 다섯째 것을 첨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겠다. 이 모든 차이점은 처리 방법에 관한 것이고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주장하며, 그 점을 나는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신구약의 약속들이 같으며, 이 약속들의 토대도 같은 그리스도시라는 입장을 방해하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차이점은 첫째로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자기의 백성이 마음을 고상하게 가져서 하늘 기업을 생각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의 이 소망을 더욱 잘 배양하시기 위해서 그 기업을 땅에 붙은 혜택의 모양으로 그들에게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들이 맛보게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이 내세의 은총을 더욱 명백하고 분명하게 계시했으므로, 주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직접 내세를 명상하게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시던 수준 낮은 훈련 방법을 버리신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은 고대인들이 육체에 대해서 약속된 축복을 더 이상 초월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해서 가나안 땅은 훌륭하고 심지어 유일한 상급이라고 하는 말씀이 자주 있는 것을 그들은 듣는다.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에게 주께서 하시는 가장 가혹한 벌의 위협은 소유한 이 땅에서 쫓겨나며 외국 땅으로 흩어지리라는 것임을 그들은 듣는다(참조, 레 26 : 33, 신 28 : 36). 그들은 모세가 말한 축복과 저주의 거의 전부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증거로 그들은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 자신의 유익을 위했다기보다 다른 민족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서슴치 않고 단정한다. 즉, 그리스도 교회가 한 외형을 보고 거기서 영적인 일들의 증거를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지상적 혜택을 유대인들에게 주셨을 때에, 친히 그들의 손을 잡아 천상적인 일에 대한 희망으로 인도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을 성경은 가끔 보여 준다. 따라서 이런 처리 방법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지몽매, 아니 우둔의 극치였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반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을 최고의 궁극적 행복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가 계시된 후로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 상속을 예표했다고 그들은 가르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즐긴 지상적 소유를 일종의 거울로 삼아, 자기들을 위해서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믿은 미래의 상속을 내다본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2. 지상에서의 약속은 구약에서 유년기 시절의 교회에 해당한다. 그렇다고 지상의 일에 대한 희망을 구속하지 않는다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서신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명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유대 민족을 어린 상속인에 비교한다. 아직 자립할 수 없어, 후견인 또는 관리인에게 맡겨 돌보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갈 4 : 1-2). 바울은 주로 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비교하지만,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여기서도 그 비교론을 가장 적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들과 우리는 같은 유업을 받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어려서 그것을 상속해서 운영할 수 없었다. 같은 교회가 그들 사이에도 있었지만, 아직 유년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들을 이 보호 감독 하에 두시며, 영적 약속을 주실 때에 아무 장식없이 또 드러나 보이게 하시지 않고, 지상적 약속에 의해서 어느 정도로 예표된 것을 주셨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영생 불사의 희망을 주시기로 정하셨을 때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약속하셨다. 그 땅은 그들의 소망의 최종목표가 아니었고, 그것을 봄으로써 진정한 유업을 아직 그들에게 계시되지 않은 유업을 바라보도록 그들을 훈련하며 확고한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해가 없도록 더 높은 약속을 주셔서 그 땅이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가 아님을 알리셨다.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가 거져 듣고만 있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고, 더 위대한 약속으로 그의 마음을 들어 올려 주를 향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임한 말씀은,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극히 큰 상급이니라"는 것이었다(창 15 : 1).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궁극적 상급은 오로지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상 초등 학문에서(참조, 갈 4 : 3) 무상하고 포착할 수 없는 상급을 구할 것이 아니라, 불멸의 상급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주께서는 그 다음에 땅에 대한 약속을 첨가하셨으나, 그것은 자기의 인애의 상징과 하늘 유업의 예표에 불과했다. 성도들도 이 일을 체험했노라고 각기 증언한다. 다윗은 현세의 행복으로부터 비약해서 저 최고의 궁극적 행복에 도달한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나의…영원한 분깃이니라"(시 73 : 26, 참조, 시 84 : 2). 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그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16 : 5). 또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 : 5). 이런 말을 감히 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자기들에게는 이 세상과 모든 현세적 혜택을 초월한 소망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주에게서 받은 예표로 내세의 행복을 표시하는 때가 더 많다. 이런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성경 말씀들이 있다. 예컨대, "대저 경건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리라" (잠 2 : 21), 그러나 "악인은 땅에서 끊어질 것이다"(욥 18 : 17, 참조, 잠 2 : 22, 집회서 41 : 9). 이사야서에는 예루살렘에 각종 재물이 풍성하며 시온에 모든 물건이 차고 넘치리라고 하는 구절이 많다(참조, 사 35 : 10, 52 : 1이하, 60 : 4이하, 62장). 우리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출생지에서나 지상의 예루살렘에 적용될 수 없고, 신자들의 진정한 고향 "여호와께서 복과 영생을 명하신"(시 133 : 3) 저 하늘 도성에만 적용된다는 것을 안다.

3. 유형별로 본 육체적인 은혜와 육체적인 처벌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현재의 우리에게는 합당하지 못 할 정도로 현세 생활과 그 행복을 너무 중요시했다. 그것이 경주의 종점인 듯이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의 약한 분량에 따라 그들을 훈련하시려고 그 행복에 은총의 표적을 남겨 주신 것을 보고, 그들은 그 은총을 직접 보지 않고 표적을 기뻐하여 거기 더욱 끌렸다. 그러나 주께서는 현세의 혜택으로 신자들에 대한 자기의 인애를 증거하실 때에 이런 예시와 상징으로 영적 행복을 예비하신 것과 같이, 한편으로는 신체적 처벌로 장차 악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증명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지상적인 일에서 더 현저히 나타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벌도 마찬가지였다. 무지한 자들은 상벌간에 있는 이 비슷함과 일치라고 할 것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많이 변하셨다고 해서 놀란다. 과거에는 엄격하고 무서운 벌을 모든 범행에 일일이 또 신속히 내리셨는데, 지금은 이전의 노하신 기분을 버리시고 훨씬 부드러운 벌을 훨씬 드물게 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니교도들과 같이, 신구약의 하나님은 다르다고까지 공상한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하나님의 처리 방법에 유의한다면, 우리는 이런 의구심을 곧 일소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울로 가리운 형태로 언약을 주신 동안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의 은총은 지상적인 혜택으로, 그리고 영적 죽음의 중대성은 신체적 형벌로 표시하며 상징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둘째 차이점 : 구약성경에서 진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모습과 의식에 의해서 전달되었다. 4-6)

4. 이 차이점의 의미

신구약간의 둘째 차이점은 상징에 있다. 구약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실체 대신에 형상과 그림자를 보였을 뿐이고, 신약은 진상의 실체 그 자체를 현재 있는 것으로서 계시한다. 항상 이 차이점이 신구약이 대조될 때에는 거의 언급되지만, 히브리서에 있는 설명이 가장 자세하다. 그곳에서 사도가 논란하는 상대자들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면 경건 전체도 파멸된다고 생각했다. 이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는 예언자 다윗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 예언한 것을 인정한다(시 110 : 4, 히 7 : 11).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으셨으므로, 제사장이 날마다 교체되던 제사장 제도는 폐지된 것이 확실하다(히 7 : 23). 이 새로운 제사장 직분은 맹세로 제정된 것이므로 우세하리라는 것을 그는 증명한다(히 7 : 21). 그리고 나서 그는 제사장 제도가 변했으므로 언약도 변한 것이라고 첨부한다(히 8 : 6-13). 율법은 그 자체가 약해서 완성에 이를 수 없었으므로, 이 변경이 필요했다고 그는 선언한다(히 7 : 19). 그 다음에 이 약점의 성격을 논한다. 율법에는 의의 행동이 외면적 신체적인 행동이 있었지만, 이런 행동을 준행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완전하게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동물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양심은 죄를 말소하거나 진정한 성결을 실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율법에는 "장차 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가 있고 "일 자체의 산 형상"은 없다고 그는 단정한다(히 10 : 1). 그러므로 율법의 유일한 기능은 복음에서 나타난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히 7 : 19, 시 110 : 4, 히 7 : 11, 9 : 9, 10 : 1).

여기서 우리는 율법의 언약과 복음의 언약, 그리스도의 사역과 모세의 사역이 어떻게 비교되는가를 관찰해야 한다. 만일 약속들의 내용에 관한 비교라면 신구약간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경향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므로, 우리는 그것을 따라 진상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가 일찌기 영원 불멸할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설명하겠다. 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시며, 이 성취에 의해서 언약은 최종적으로 확정되며 인준된다. 확정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에 주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의식들을 제정하셨고, 의식들은 이를테면 그 확인에 대한 엄숙한 상징이었다. 율법에 제정된 의식들은 그리스도에게 위치를 양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생겼다. 그런데 의식은 언약의 일시적인 속성, 첨가물, 부속물, 소위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언약을 실시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언약"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점은 다른 성례전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요약하면, 이 구절에서 "구약"은 언약을 확인하는 엄숙한 방법을 의미하며, 그 방법은 의식과 제사에 포함되었다.

우리가 방법을 초월하지 않을 때에, 거기는 본질적 기반이 없으므로, 사도는 방법을 종결시키며 폐지해서 그리스도에게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된다고 주장한다(참조, 히 7 : 22). 그리스도께서는 이 언약에 의해서 영원한 성결을 선택된 자들에게 단번에 주시며, 율법하에서 처리되지 못한 죄를 없애버린다. 원한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주의 옛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이었는데, 그것은 그림자 같고 효과가 없는 의식 준수에 포함되었으며, 확고하고 실질적인 확인을 받기까지는 이를테면 미결 상태에 있는 것, 일시적인 것이었다.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되며 확립된 때에 비로소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의 잔"이라고 부르셨다(눅 92 : 20). 이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쳐질 때에 그 진리에 도달했으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는 뜻이다.

5. 교회의 유년기와 장년기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인도되었다고 사도가 말한 뜻이 분명하다(갈 3 : 24. 참조, 4 : 1-2). 사도는 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후사였지만, 아직 어리기 때문에 보호자의 감독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의의 태양이 솟아오르기 전에는 크고 빛나는 계시나 분명한 이해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의 광명을 나눠주셨지만, 그들은 아직 그것을 여전히 또 멀리서 어렴풋하게 보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 미약한 이해 상태를 "어렸을 때"라는 말로 표현한다. 아동 교육의 방법으로서 이 유년기를 이 세상 초등 학문과 사소한 의식 준수로 훈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가 비치시게 되면, 그로 인해서 신자들의 지식이 성숙하도록 하신 것이다(참조, 엡 4 : 13).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이 구별을 시사하셨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느니라"(눅 16 : 16. 참조, 마 11 : 13). 율법과 선지자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그들은 언젠가는 분명히 계시될 그 지혜를 예상하게 만들었으며, 그 지혜가 멀리 반짝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열렸다. 그리스도에게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골 2 : 3)가 계시되었으며, 이 지혜와 지식에 의해서 우리는 가장 깊은 하늘 성소에 거의 이르게 할 수 있다.


6. 신앙이 깊었던 위인들도 옛 언약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과 비교할 만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예언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훌륭히 받아서 지금도 전 세계를 그 힘으로 비출 만한 것이 사실이지만, 위에서 말한 우리의 견해는 움직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소수 사람들에게 베푸신 주의 은총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백성을 가르치신 그 통상적인 처리 방법이 무엇이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한 통찰력을 받은 예언자들이 가르친 내용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까지도 먼데 있는 물건같이 희미하였고 예표로 표현되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탁월한 지식이 아무리 놀라운 것이었더라도, 그들은 민족의 전반적 훈련에 따라야 했기 때문에, 역시 어린이들로 인정됨을 면할 수 없었다.


끝으로, 그 때에는 시대적인 모호한 지식을 초월할 만큼 투철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 : 24). 그러므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 : 16). 확실히 이 특권을 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강림이 특출한 것은 당연하며, 그리스도가 오셨으므로 하늘 신비들이 더욱 분명히 계시되었다.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은 여기도 해당한다. 선지자들의 노고는 주로 우리 시대를 위한 것이었음이 계시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벧전 1 : 12).


(셋째 차이점 : 구약은 문자적이요 신약은 영적이다. 7-8)

7. 이 차이점의 성경적 기원과 의미

이제 셋째 차이점을 논할 터인데, 이것은 예레미야서에서 얻은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을 다스렸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라‥‥‥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리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치지 아니하리라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 : 31-34 의역과 순서 변경). 이 말씀을 근거로 사도는 율법과 복음을 비교한다. 율법은 문자적인 교훈이고, 복음은 영적인 교훈이며, 전자는 돌판에 새겼고 후자는 사람의 마음에 새겼으며, 전자는 죽음을, 후자는 생명을 전파하며, 전자는 정죄를, 후자는 의를 전파하며, 전자는 무효하게 될 것이요 후자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고후 3 : 6-11). 사도는 예언자의 뜻을 해석하려고 한 것이므로, 두 사람의 취지를 이해하려면 어느 한 쪽의 말만을 검토하면 충분하겠지만, 그들 사이에 다소의 차이가 있다.

예언자에 비해서 사도는 율법을 나쁘게 말한다. 율법 자체에 관해서 뿐 아니라, 일부 그릇된 율법 추종자들이 의식에 대한 도착된 열성으로 명료한 복음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오류와 어리석은 편벽을 보고 바울은 율법의 본성을 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 특이점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예레미야, 바울이 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조하므로, 율법의 고유한 특색만을 고려한다. 예컨대, 율법에는 처처에 자비에 대한 약속이 있지만, 그것은 다른 데서 빌려 온 것이기 때문에, 율법의 본성만을 논할 때에는 율법의 일부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들이 율법의 기능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다. 즉, 바른 일을 명령하고 악한 일을 금지하며, 의를 지키는 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범죄자들을 처벌로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부패를 변하거나 시정하지 못한다고 한다.



8. 고린도후서 3장에 따른 세부적인 차이점

이제 사도의 비교론을 한 항목씩 설명하겠다. 구약이 문자적이라고 하는 것은 영의 역사가 없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이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그것을 사람들의 심정에 영적으로 새기셨기 때문이다(고후 3 : 6상). 둘째 대조점은 첫째 것을 밝힌다. 구약이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저주 가운데 덮을 뿐이기 때문이다. 신약이 생명의 도구인 것은 사람들을 저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얻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3 : 6하). 구약이 정죄를 내림은 아담의 모든 자손의 불의를 고발하기 때문이며, 신약이 의를 줌은 하나님의 긍휼을 계시하며 이 자비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이다(고후 3 : 9). 마지막 대조는 의식적 율법에 관련시켜야 한다. 구약은 현장에 없는 것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때가 오면 죽어 없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복음은 본체 그것을 나타내므로 영원히 굳게 서 있다(고후 3 : 10-11). 참으로 예레미야는 도덕적 율법까지도 무력하고 연약한 언약이라고 부른다(렘 31 : 32).

그러나 거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즉, 은혜를 잊은 백성이 갑자기 이탈했기 때문에 그 언약이 곧 파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위반의 책임은 백성에게 있었으므로 언약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그런데, 의식들은 무력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강림에 의해서 폐지되었은즉, 폐기된 원인이 자체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자와 영의 이 차이를 근거로 주께서 유대 민족에게 주신 율법에 아무 효과도 없었고, 그들 중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선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차이점을 지적하여 비교한 것은 은총이 풍부하게 된 것을 찬양하려는 뜻이다. 동일한 입법자이신 하나님이 마치 성격이 달라진 듯이, 복음 전파에 은총을 풍성히 베푸신 것을 찬양한다. 복음 선포를 통해서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을-모든 민족 사이에서 불러 모으셔서 교회의 교제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 무수한 사람들을-생각하라. 그렇다면 고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을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받아들인 사람이 적었다. 아니, 거의 없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비교하지 않고 그들만을 본다면, 그들의 수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넷째 차이점 : 구약의 구속과 신약의 자유. 9-10)

9. 바울의 가르침

넷째 차이점은 셋째에서 생긴 것이다. 구약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포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경은 구약을 "구속"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약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어 올려 신뢰와 확신을 가지게 하므로 "자유"의 언약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한다(15절). 히브리서에 있는 구절도 여기 적용될 수 있다. 신자들이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이 아니라고 한다. 거기서는 이목에 접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그 무서운 음성이 울렸을 때에 백성은 듣지 않기를 구했으며, 모세까지도 겁이 났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히 12 : 22). 바울은 우리가 인용한 로마서의 발언에서 이 점을 간단히 언급하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더 상세히 설명한다. 거기서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에 대해서 비유로 해석한다. 계집종 하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받은 시내산의 상징이며, 자유 여인 사라는 복음의 근원지인 하늘 예루살렘의 상징이라고 한다. 하갈의 소생은 노예의 몸에서 났으므로 상속을 받을 수 없었고, 사라의 후손은 자유인이며 상속권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노예가 되지만, 복음에 의해서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갈 4 : 22-31). 요약하면, 구약은 양심에 공포심과 전율을 불어넣지만, 신약의 은혜로 양심은 해방과 기쁨을 얻는다. 구약은 양심을 노예의 멍에에 구속하였지만, 신약은 너그러운 영으로 양심을 해방하며 자유롭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항의한다고 가정하라. 곧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거룩한 족장들은 예외였으며, 분명히 우리와 같이 믿음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자유와 기쁨을 받았다는 결론이 된다고. 우리는 대답한다. 그 자유나 기쁨은 율법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족장들은 율법에 의해서 노예와 같이 압박을 받으며 양심의 불안으로 지치게 된 것을 느꼈을 때에 복음에 도망해서 피난처를 구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구약의 일반법과는 별개로 구약의 폐해를 면하게 된 것은 신약의 특별한 결실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자유와 화신의 영을 충분히 받아서 율법에서 오는 공포심과 노예 상태를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무리 복음의 은총을 통해서 받은 특권을 즐겼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일반 백성과 같이 의식 준수의 구속을 받으며 짐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 상태와 비슷한 훈련의 상징인 의식들을 정확히 지켜야 했으며(참조, 갈 4 : 3-11), 그들에게 유죄를 고백하게 한 증서는(참조, 골 2 : 14) 그들을 의무에서 해방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때에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쓰신 일반적 처리 방법을 고려할 때에, 그들은 우리와는 현저히 달라서 속박과 공포의 언약하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0. 율법과 복음

우리가 말한 둘째 이하의 세 가지 비교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것이다. 이 비교에서 "구약" 이라는 이름으로 율법을, "신약"이라는 이름으로 복음을 의미했다. 첫째 비교는 범위가 더 넓어서 율법 이전에 발표된 약속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 약속들을 "구약"이라는 이름에 넣지 말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현명한 생각이었다. 그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예레미야와 바울의 발언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들은 은총과 자비의 말씀을 구약과 구별했다. 어거스틴은 같은 구절에서 다음과 같은 적절한 말을 첨가했다. "하나님에 의해서 중생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믿음으로 계명에 복종한(갈 5 : 6) 약속의 자녀들은(롬 9 : 8) 창세 이후로 모두 새 언약에 속했다. 그들이 복종한 것은 육적․지상적․일시적인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적․천상적․영구적인 혜택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특히 중보를 믿었고, 그를 통해서 성령을 받아 선을 행하게 되며 죄를 지을 때마다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점이다.

즉, 성경에 창세 이후로 하나님의 특별 선택을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동일한 축복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우리와 어거스틴의 분석이 다른 점은 이와 같다.

곧 우리는 그리스도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라는 말씀에 따라(눅 16 : 16) 복음은 분명하고 그 이전에 있어온 말씀의 경륜은 비교적 모호했다는 점을 구별하는 것이며 어거스틴은 다만 율법은 무력했고 복음은 견고하다는 구별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족장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그들은 옛 언약하에 살면서도 거기 머무르지 않고 항상 새 언약을 사모해서 참으로 그것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재의 그림자로 만족하고 마음의 시야를 넓혀 그리스도에 이르지 않는 사람들을 사도는 맹목적이고 저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다른 일은 말하지 않더라도, 죽인 짐승에게서 죄의 대속을 얻겠다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맹목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는 외면적으로 물을 뿌려 영혼을 깨끗이 정결케 하며, 냉담한 의식들을 하나님이 즐기시는 듯이 그 의식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율법 준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어리석은 짓으로 엉터리없는 모순에 빠진다.





(다섯째 차이점 : 구약은 한 민족에 언급했으나, 신약은 모든 민족에 관계한다. 11-l2)

11. 장벽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너진다

다섯째로 첨가해도 좋은 차이점은 그리스도 강림할 때까지 주께서 한 민족을 택하시고 은총의 언약을 그 민족에 국한하셨다는 사실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모세는 말했다(신 32 : 8-9). 다른 곳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보라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써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느니라"(신 10 : 14-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한 백성만이 자기 백성인 듯이, 자기 이름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만 주셨다. 그들의 가슴에 자기의 언약을 안겨 주시다시피 하셨고, 자기의 숭엄성을 그들에게 나타내셨고, 모든 특권을 그들에게 퍼부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축복들은 보지 않고 화제에 오른 축복만을 고찰하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달하심으로써 그들을 자기에게 결부하시고, 그들이 자기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높이게 하셨다.





동시에 모든 다른 족속들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듯이 헛된 길로 다니게 묵인하셨다(행 14 : 16). 그들의 치명적 질병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인 말씀 전파도 그들에게는 주시지 않았다. 그 때에 이스라엘은 주의 제일 사랑하시는 아들이었고, 다른 민족들은 남이었다. 이스라엘은 인정과 신임과 보호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자체의 암흑 중에 방치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성별해 주셨으나, 다른 민족들은 속화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시는 영예를 받았으나, 다른 민족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길이 막혔었다. 그러나 만유를 회복하시기로 지정하신 "때가 차매"(갈 4 : 4) 주께서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자로 나타나셨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자비를 이스라엘의 경계선 안에 국한하던 "담을 허시며"(엡 2 : 14), "먼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였으니"(엡 2 : 17), 이는 그들이 함께 하나님과 화평하여 한 백성으로 융합하게 하시려는 뜻이었다(엡 2 : 16). 그러므로 지금은 유대인이나 헬라인(갈 3 : 28), 할례나 무할례의 차별이 없고(갈 6 : 15), 오직 "그리스도가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다"(골 3 : 11) "그리스도께서는 열방을 유업으로 만들어 주었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시 2 : 8),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게"된 것이다(시 72 : 8, 참조, 슥 9 : 10).

12. 이방인들을 부르심

그러므로 이방인들을 부르시는 것은 신약이 구약보다 우수한 점을 밝히 표시한다. 참으로 이 점은 선지자들의 아주 분명한 발언이 여러번 확인했다. 다만 그 실현은 메시아 왕국이 나타날 때까지 연기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까지도 전도의 초기에는 그 실현을 즉시 시도하시지 않고 연기하셨다. 우리를 구속하시는 일을 마치며 치욕을 받으시는 기간을 끝내신 후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그 앞에 모든 무릎이 꿇어야 하는 이름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실 때까지 연기하셨다(빌 2 : 9-10). 그래서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아무에게도 보냄을 받지 아니하셨노라고 하셨다(마 15 : 24). 그리고 제자들을 처음으로 전도 여행에 파송하셨을 때에도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일어 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다(마 10 : 5). 성경에 이방인을 부르시리라는 증언이 아무리 많았어도, 사도들은 그 일에 착수하려고 했을 때에 너무도 신기하고 해괴한 일같이 느껴져서 움츠렸다.

드디어 그들은 떠는 마음으로 시작하기는 했으나,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또 그것은 당연했다. 수천 년 동안 모든 민족 중에서 이스라엘만을 택하시던 주께서 갑자기 계획을 변경하시고 그 선택을 버리신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예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눈에 띄는 일이 너무도 신기해서 이런 예언들을 읽을 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인들을 부르시리라는 증거를 하나님이 옛날에 그들에게 주셨건만, 그 증거를 보고도 그들은 아직 믿을 수 없었다. 이전에는 부르신 이방인의 수효가 아주 적었을 뿐 아니라, 이를테면 그들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접붙여서 그 민족에 가입시키셨다. 그러나 이제는 공개적인 부르심에 의해서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동등하게 될 뿐 아니라, 이를테면 죽은 유대인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에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 받아들이신 외국인들은 유대인과 동등시된 일이 결코 없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 일을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었던 위대한 비밀이라고 부르며(골 1 : 26; 참조, 엡 3 : 9), 천사들에게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는 데는(참조, 벧전 1 : 12)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처리 방법이 다른 것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일관성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대답함. 13-14)

13. 보편적으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인가?

단순한 교리 설명의 범위내에서 나는 이 넷 또는 다섯 가지 점으로 신구약의 차이를 충실히 또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회 치리상의 이 변화와 교육 방법상의 차이와 예식 및 의식의 중대 변혁들을 비웃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그들에게 대답해야겠다. 다만 그들의 항의는 자세히 반박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확고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간단히 대답하겠다. 항상 시종 여일하신 하나님께서 일찍이 명령하시고 권장하시던 일을 후에 비난하신다는, 이런 큰 변동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이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각 시대에 유익하다고 보신 대로 형식을 조절하셨다고 해서, 그 일만으로 하나님이 변하신다고 볼 것이 아니다. 농부가 가족에게 시키는 일이 겨울과 여름에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의 변덕스러움을 비난하거나, 자연의 연속적 질서와 일치하는 정규의 영농법에서 그가 이탈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장(家长)된 사람이 가르치며 명령하며 인도하는 방법이 영아기와 유년기와 청년기에 서로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 때문에 그를 변덕스럽다고 하지 않으며, 목적을 버린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대 차이를 적절한 표지로 구별하신 것을 무슨 까닭에 변심이라고 비난하는가? 내가 둘째로 든 비교로 우리는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어린이들에, 그리스도 신자들을 청년에 비교한다(갈 4 : 1이하)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그들의 나이에 맞도록 초등교육에 국한하시고, 우리는 더 엄격하고 이를테면 더 어른다운 규율로 훈련하신 것이 어디가 변칙이라는 말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같은 교리를 모든 시대에 가르치시고, 자기 이름에 대한 결과는 처음에 명령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계속 요구하셨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일관성이 빛나는 것이다. 외면적인 형식과 방법을 바꾸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변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가지로 다르며 또 변하는 인간의 능력에 알맞도록 행동하신다.

14. 하나님이 뜻하시는 대로 모든 인간을 다루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런 다양성이 생겼는가? 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강림 후와 같이 처음에도 어떤 상징 없이 분명한 말씀으로 영생을 계시하실 수 없었는가? 맨 처음에 몇 가지 명백한 성례전으로 자기 백성을 가르치시며, 성령을 주시며, 은총을 전 세계에 보급시키실 수는 없었느냐고, 이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고 너무 늦게 창조하셨다느니, 겨울과 여름, 낮과 밤이 교대하게 만드셨다느니 하면서, 하나님과 싸우려는 것과 같은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현명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셨다는 것을 의심하지 말자. 무슨 까닭에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를 때가 많더라도,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을 하나님이 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동물의 희생 제물과 레위 족속의 사제 직분에 딸린 여러 가지 부속물들을 하나님이 옛날에 기뻐하셨는데, 지금은 멸시하시며 싫어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대체로 이런 외형적이며 덧 없는 것들이 하나님에게 즐거움이나 어떤 감동을 주었다는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정하신 것이다. 의사가 환자의 청년기에 쓰는 최선의 치료법과, 같은 사람의 노년기에 쓰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전에 기뻐하던 치료법을 버렸다고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그는 치료에 전념하면서 연령 관계를 고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그가 장차 오시리라고 선포하는 데 필요했던 표징과, 그가 계시된 지금 그를 나타내는 표징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 강림 후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백성 사이에 더욱 널리 퍼져 나갔고, 성령의 은총은 이전보다 더욱 풍부하게 쏟아졌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과 뜻으로 은혜를 자유로 분배하시며, 원하시는 민족들에게 광명을 주시는 것을 누가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려는가? 원하시는 곳에서 말씀 전파를 일으키시며, 원하시는 방법과 정도로 자기의 교훈이 전진하며 성공하게 하시며, 감사할 줄 모르는 세상에서 자기의 이름에 대한 지식을 몇 세대 동안 빼앗으시며, 자기의 자비에 따라 다시 원하시는 대로 그 지식을 돌려주시는 것을 누가 마땅하지 않다고 하려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생각들을 너무도 부드러운 중상이라고 본다. 단순한 사람들을 괴롭히며, 그들이 하나님의 의나 성경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경건한 자들이 이런 중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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