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교회론
- 참 이스라엘로서 세상에 마주선 그리스도의 교회 -
(1996년 10월 22일 신학정론 원고 조병수)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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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료비평 또는 문학비평 2) 양식사와 편집사 3) 미래적인 교회의 영향
1.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1) 선교의 두 대상
2) 마 1:1
(1) 유대인에의 관심 (2) 이방인에의 관심 (3) 모든 민족에의 관심
2. 그리스도의 교회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1) 베드로와 반석 (2) 예수와 교회 (3) 반석과 교회
(4) 교회와 음부 (5) 교회와 천국
2)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하신다
(1) 교회의 현재 (2) 예수의 임재
3. 교회와 세상
1) 세상에서 불리워진 교회 2) 세상 안에 있는 교회
3)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 4) 세상으로 가는 교회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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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신학을 다루기 위하여 우리는 공관복음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점을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자료에 관한 문제점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전승과 해석에 관한 문제점이다.
1) 자료비평 또는 문학비평
첫째로 자료에 관한 문제점은 자료비평 (Quellenkritik) 혹은 문학비평 (Literarkritik)과 연관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 대하여 자료 (문학)비평은 적어도 다섯가지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원복음설 (Urevangeliumshypothese, G.E.Lessing 1777/1778), 구전설 (Traditionshypothese, J.G.Herder 1796), 단편설 (Fragmenten-, Diegesenhypothese, F.D.E.Schleiermacher 1817), 사용설 (Benutzungshypothese, J.J.Griesbach 1789/90), 두자료설 (Zweiquellentheorie, C.H.Weisse 1838). 자료 (문학)비평이 발전할수록 마태복음은 권위를 크게 상실하였다. 공관복음서 연구에 관한 한, 결국 두자료설이 현금의 신약신학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 가설에 의하면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복음의 권위란 것은 마가복음의 권위와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의 권위에 종속하고 만다.
하지만 마태복음이 마가복음과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견이 아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을 기초로 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두 복음서를 면밀히 조사할때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이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을 사용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지금까지도 현재의 복음서들에 버금가는 소위 예수어록집을 담은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견해로는 세개의 복음서는 동일한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다. 이에 대한 의견은 다른 기회에 발표할 것이다. 단지 여기에서 전제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복음서들의 독립적인 동일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복음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지면 마태복음으로부터 다시 권위있는 여러가지 신학을 구성할 수가 있다.
2) 양식사와 편집사
둘째로 전승과 해석에 관한 문제점을 다루기 위하여 두가지 방법론이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양식사 (Formgeschichte)이다. 양식사가 관심하는 것은 우선 공관복음서의 특징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서가 다른 문학들과 비교할때 어떤 위치를 가지느냐를 따진다. 양식사는 공관복음서가 문학사에 있어서 특별한 양식을 가지는 “소문학” (Kleinliteratur)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더 나아가서 양식사가 관심하는 것은 공관복음서의 형성 (전역사 Vorgeschichte)이다. 이것은 전문학적인 기원들로부터 문학적인 정착에 이르기까지 복음서들의 전승의 과정에 관한 연구이다 (Frage nach dem Weg der Evangelientradition von den vorliterarischen Ursprüngen bis zur literarischen Fixierung). 그래서 양식사는 각 개 텍스트의 양식과 여러 개의 각 개 텍스트들의 양식을 연구하여 전승자들 (Tradenten)의 상황에서 “삶 안의 자리” (Sitz im Leben)을 캐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식사의 관심은 복음서의 과거적인 면에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편집사 (Redaktionsgeschichte)이다. 편집사는 복음서의 각 단락들의 수집 (Zusammenfassung)에 나타나는 편집자의 신학적인 관념에 관심한다. 이것은 저자 (마지막 편집자!)의 신학적인 입장에 대한 연구이다 (Frage nach dem theologischen Standort des Verfassers/Endredaktors). 편집자가 어떠한 신학적인 견점하에 자료들을 선택 (auswählen)하고 구성 (zusammenstellen)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그래서 편집사는 편집자들 (Redaktoren)의 상황에서의 “삶 안의 자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편집사의 관심은 복음서의 현재적인 면에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3) 미래적인 교회의 영향
양식사와 편집사는 다같이 복음서를 복음서의 과거와 현재에 관련된 역사적인 문서라는 견해로 이해한다. 양식사는 복음서들을 인간의 글로서 양식을 지닌 전승이라고 이해하는데서 그 한계를 가지며, 편집사는 복음서들을 사람의 글로서 신학을 지닌 편집이라고 이해하는데서 그 한계를 가진다. 우리의 과제는 우선 복음서들을 하나님의 글 (scriptura Dei)로 확인하는 것이다 (참조. 마 16:17). 이때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떠 오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음서기자들을 통하여 앞으로 오게 될 모든 교회를 지향하는 글을 쓰게 하셨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미래적인 교회의 존재로 하여금 복음서들의 내용을 결정하게 하셨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보존가운데 미래의 교회들의 상황을 결정하는 내용들이 들어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미래의 교회들이 가지게 될 상황이 결정해 주는 내용들도 들어있다. 이것은 복음서들이 미래의 교회들로부터 받는 충격이다. 복음서의 시간을 중심으로 이것은 양식사가 관심하는 과거적인 전승자들이나, 편집사가 관심하는 현재적인 편집자들에 대한 관심과 달리 복음서들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미래적인 소유자들 (교회들)에 대한 관심이다. 양식사는 복음서들보다 이전에 있던 시간에, 편집사는 복음서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관심을 두었다면 우리는 복음서들보다 이후에 있을 시간에 관심을 둔다. 특히 이러한 미래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은 복음서의 양식이나 편집에서 보다는 복음서의 영향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마태복음의 여러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사상들가운데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에서 교회론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언어적으로 볼때 복음서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태복음 만이 “교회” (ἐκκλησα)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마 16:18; 18:17), 둘째로 내용적으로 볼때 신약 전체 내에서 예수의 부활이후 예수의 재림까지의 시간에 있는 기독교공동체가 교육적인 면에서, 선교적인 면에서, 사회적인 면에서 어떠한 사명을 띄고 있는지 그 관심을 높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가장 먼저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1) 선교의 두 대상
신약학자들은 마태복음에 유대기독교적인 신학 (judenchristliche Theologie)을 반영하는 자료와 이방기독교적인 신학 (heidenchristliche Theologie)을 반영하는 자료가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을 한다. 유대기독교적인 신학은 예수의 선교와 제자들의 선교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관계되는 것으로 진술되는 구절들에서 보여진다 (마 10:6; 15:24,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방기독교적인 신학은 제자들의 선교가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한다는 내용에서 반영된다 (마 28:16-20). 그러나 소위 이같은 두 신학의 마찰은 구속사 사상의 도움을 받으면 잘 해결된다. 예수의 활동과 제자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으나 이스라엘의 거절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2) 마 1:1
이러한 구속사적인 사상은 이미 마태복음의 첫 말에서부터 엿볼 수가 있다. 마태는 첫말인 마 1:1로부터 그의 복음서를 전개하고 있다. 마 1:1은 단지 계보 만을 위한 종합적인 서언인가, 아니면 마태복음서 전체를 위한 어떤 효과를 가지는가? 나의 생각에는 마태가 그의 복음서 첫 문장으로 그의 복음서의 신학 전체를 요약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마태의 기독론과 교회론이 교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말함으로써 시작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아들” (υἱς)로 설명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로 설명되고, 다시 다윗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설명된다.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종속된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왜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가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가? 이에 대하여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인에의 관심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루신 지상사역의 촛점이 우선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상사역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마 15:24)에 국한시켰다. 이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우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갈 것을 명령하셨다 (마 10:6). 말하자면 예수의 사역의 요점은 예수의 이름에 대한 마태의 해석에서 분명하게 언급된다. 예수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 2:21). 그래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우며 (마 2:2), 예수는 “나의 백성 (τὸν λαν μου)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ποιμανεί)고 예언되었다 (마 2:6). 그러나 예수는 지상사역 중에 우선 유대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결국은 “모든 백성 (πάς ὁ λας)”에 의하여 거절을 당하였다 (마 27:25).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마 27:11,29,42).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를 버렸다.
(2) 이방인에의 관심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에게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이 새로운 내용을 가지게 된다. 마태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사실로부터 이방인들이 구원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 여러방면으로 설명된다. 가장 먼저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 (마 3:7-10/눅 3:7-9)에서 잘 나타난다.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며 “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가지고 있다고 속으로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이 돌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 3: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아브라함의 아버지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조상된 신분은 그대로 남아도, 유대인들의 자손된 신분은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 요한이 말하는 “이 돌들”은 유대인 외의 이방인들을 암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상실할 위험성 앞에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획득할 가능성이 생긴다. 아마도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이 선포하는 임박한 천국 (마 3:2)은 요한이 내다보는 새로운 자손들 (마 3:9)에게 해당된다 (참조. 마 21:43!). 또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단락 (마 8:5-13)에서 다시 한번 잘 입증된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나, 그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데로 쫒겨 날 것이다” (마 8:11-12).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의 말씀이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예언적인 말씀은 예수의 포도원 비유 (마 21:33-46)에서 더욱 분명하게 진술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탈취되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한 민족 (ἔθνει)에게 주어질 것이다” (마 21:43). 여기에서도 역시 동사는 미래형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백성이 아닌 또 하나의 민족이 성립될 것임이 예상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마태는 교회를 “진정한 이스라엘” (Das wahre Israel)로 이해를 한다.
(3) 모든 민족에의 관심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서 박탈되어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한 민족에게 주어진다. 이같은 또 하나의 민족은 사실상 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을 의미하기 보다는 모든 민족들가운데서 이루어질 새로운 민족을 뜻한다. “사거리 길에서” 초청을 받는 사람들이다 (마 22:9,10). 세상에 있는 악한 자와 선한 자들을 모두 대상으로 삼는다 (마 5:45; 22:10). 이것을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결론 (마 28:16-20)에서 잘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모든 민족들 (πντα τὰ ἔθνη)을 제자로 만들라” (마 28:19)고 말씀하셨다. 마태가 복음서의 결론에서 “모든 민족들”을 언급하는 것은 복음서의 서론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 (πατὴρ πλθους ἐθνών 또는 πολλών ἐθνών)로서 (창 17:4-5) “모든 민족들” (πντα τὰ ἔθνη)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창 18:18), “모든 민족들” (πντα τὰ ἔθνη)이 그의 “씨로 말미암아 (ἐν τῷ σπρματι) 복을 받을” (창 22:18) 것이라는 구약의 사상은 이미 유대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 (σπρμα)이다 (갈 3:16; 히 2:16!). 이렇게 마태복음은 처음과 끝에서 Inclusio를 구성한다.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할” 열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아들 (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만들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일은 예수의 지상사역을 넘어서는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되는 미래의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옛 민족 이스라엘에게서 새 민족 교회로 가는 길에 대한 암시가 이미 마태복음의 서론에 들어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첫 문장은 대단히 교회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촛점이다.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교회론은 기독론에서 출발한다.
2. 그리스도의 교회
마태에게서 있어서 교회론이 기독론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교회는 그 시작점과 최종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신다.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예수께서는 지상사역을 하시면서 이미 부활 이후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하여 미래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단락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단락이다 (마 16:13-20). 베드로가 이스라엘에 속해있다는 사실로부터 교회가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계성은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단락에서 특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이 마태 (마 16:17-19)에게는 있지만, 마가 (막 8:27-30)와 누가 (눅 9:18-21)에게는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가와 누가에 비하여 마태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육과 혈” (인간적인 것의 총체, 참조 요 1:13; 고전 15:50; 갈 1:16; 엡 6:12; 히 2:14)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마 16:17).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강조점은 베드로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단지 이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자신의 것을 선언하신다. 여기에 “그리고 나도” (κἀγ)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한다 (마 16:18).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예수의 선언도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계시하셨다 17절 ... 그리고 나도 너에게 말한다 18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의 다섯가지 말씀이 나온다 (마 16:18-19). 첫째는 베드로에 대한 것으로서 “너는 πτρος (= 돌)이다”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예수에 대한 것으로서 “내가 이 πτρα (=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이며, 셋째는 음부에 관한 것으로서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넷째는 천국에 관한 것으로서 “천국의 열쇠들을 너에게 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매는 것과 푸는 것의 권세에 대한 말씀이 곁들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입장에서 교회는 미래적인 성격 (동사의 미래형. 세울 것이다. 이기지 못할 것이다)을 가진다는 사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마태의 교회론에 관한 몇가지 중요한 사상을 정리할 수 있다.
(1) 베드로와 반석
첫째로 베드로와 반석의 관계를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서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선 베드로와 반석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네 위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구태어 “이 반석 위에”라는 용어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베드로와 반석이 서로 같은 것일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πτρος와 πτρα는 단순히 말놀이 (Wortspiel)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벧전 2:8 참조: λθος - πτρα). 아마도 여기에서 작은 돌같은 베드로를 큰 반석같이 여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은혜의 사상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반석의 기능을 할 것이기에 베드로라고 불리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반석으로 생각하였다 (사 51:1f).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옛 이스라엘의 기초이었듯이, 이제 베드로는 새 이스라엘의 기초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유대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한다는 대표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교회의 단일함을 나타내는 통일성 (베드로를 기초로 교회는 하나이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이 반석이 하나님일 수 있다. 사실상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상은 비록 용어상 차이는 있지만 (עלס,רוצ) 구약에 널리 퍼져 있는 사상이다 (신 32:4,31; 삼상 2:2; 시 18:2,31,46; 19:14; 31:3 passim).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또는 그의 계시를 의미할 수 있다 (마 16:17).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확인하고 난 다음인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결국 예수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없다.
(2) 예수와 교회
둘째로 살펴볼 것을 예수와 교회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와 교회의 관계이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마 16:18b).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내가”).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의 교회이다 (“나의”).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세우며 교회를 소유하는 분이 예수라는 점이다.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는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기자들에 비해서 특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 (마 1:1,16,17,18; 2:4; 11:2; 16:20; 22:42/막 12:35/눅20:4; 23:10; 24:5,23/막 13:21; 26:63/막 14:6/눅 22:67; 26:68; 27:17). 그러므로 교회에 관한 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예수가 중심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분께 모든 일에 첫번째 자리를 내드려야 한다. 교회에서 사람은 언제나 예수를 앞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사 (事) 이전에 예수사 (事)이다! 교회론에 있어서 기독론이 인간론보다 앞선다.
(3) 반석과 교회
셋째로 반석과 교회의 관계이다.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다” (마 16:18b).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반석 위에 세운다”는 말은 마 7:24-25의 도움을 받으면 잘 해석된다. 반석위에 세워진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에 어떠한 세력에 의하여도 무너지지 않는다.
(4) 교회와 음부
넷째로 교회와 음부의 관계이다. “음부의 문들 (πλαι)이 그것을 (= 교회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마 16:18c). “문들”이라는 표현으로 겹겹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다면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떻든지 문을 언급함으로써 음부가 방어적인 입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음부의 행위를 위하여 사용된 κατισχειν은 전쟁용어로서 “...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때 “...보다 힘이 세지 못하다”, 즉 “...을 당하지 못하리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이 구절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씨가 그의 대적자들의 문 을 얻으리라” (창 22:17; 참조. 창 24:60)는 약속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께서 교회에게 다시 주신다. 그렇다면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들을 가지고 방어를 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사탄의 나라는 교회의 세력 앞에 방어할 힘이 없다. 이것은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흔든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한다 (참조. 겨자씨 비유 마 13:31-32; 누룩 비유 마 13:33).
(5) 교회와 천국
다섯째로 교회와 천국의 관계이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들 (κλείδας)을 줄 것이다” (19a).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너에게” (σοι)가 단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베드로는 교회의 대표성이 아니라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라는 말로써 교회의 단일하며 통일된 전체를 지시한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받는다. 교회는 음부에 대하여는 문들을 깨뜨리는 전투적인 모습을 가지지만, 천국에 대하여는 문을 순조롭게 여는 자격을 가진다. “천국의 열쇠들” (τὰς κλείδας τής βασιλεας τών οὐρανών)를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마 23:13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닫는다” (κλεειν τὴν βασιλεαν τών οὐρανών)는 말로부터 해석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이 천국을 닫는 것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선교적인 차원의 말이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도록 문을 여는 기능을 한다. “열쇠들”은 교회가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를 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열쇠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게는 땅에서 하늘의 권한을 가지는 것이다. 선교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게서도 풀릴 것이다” (마 16:19). 마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하늘과 땅”을 짝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 마태는 짝말인 “하늘과 땅”을 가지고 우주관 (Kosmologie 마 24:30) 뿐 아니라, 신론 (마 11:25), 기독론 (마 28:18), 성경관 (마 5:18; 24:35), 윤리 (마 5:13,16) 그리고 교회론 (마 16:19; 18:18)의 핵심을 말한다. 여기에서 특히 교회론이 중요하다. 마태에게서 이 짝말로 교회론은 선교적인 차원과 함께 치리적인 차원이 설명된다. 교회에게 선교와 치리에 있어서 하늘과 땅을 엮는 권세가 허락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첫째로 교회가 얼마나 능력적인지를 배운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게 땅에서 하늘을 결정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면 교회는 선교와 치리를 결정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선교와 치리를 진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하신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뿐 아니라, 교회에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1) 교회의 현재
교회의 현재적인 상황은 다양성과 혼합성으로 묘사될 수 있다. 현세의 교회는 혼합체 (corpus permixtum)이다. 다양성은 시간차의 그리스도인들 (마 20:1-16 포도원 비유)과 규모차의 그리스도인들 (마 18:10-14 작은 자에 대한 말씀)로 나타나며, 혼합성은 알곡과 가라지 (마 13:24-30,36-43 가라지 비유),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마 13:47-50 그물 비유), 악한 자와 선한 자 (마 22:1-14,10! 잔치하는 왕 비유), 양과 염소 (마 25:31-46 양과 염소 비유)으로 나타난다. 이 혼합은 마지막 날의 심판에서 비로소 정리될 것이다. 분리는 오직 마지막 때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이다. 키질을 통하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울 것이다 (마 3:12). 키질에 관한 말씀은 구원사상과 심판사상을 함께 보여준다.
(2) 예수의 임재
하지만 현재적으로 예수께서는 진정한 교회를 위하여 임재를 약속하신다 (마 28:20). 이것은 새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교회에게 약속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셨던 은혜의 반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보라, 나의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 (ἐγὼ ἰδοὺ ἡ διαθκη μου μετὰ σού, ךתא יתירב ינה ינא)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창 17:4),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 21:22).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삶도 역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삭 창 26:28; 야곱 창 28:15; 31:3; 요셉 창 39:2).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께서 교회에 이러한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서론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함으로써 임마누엘의 사상을 함축시키고 있다. 마태는 이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된 임마누엘의 성취임을 말한다 (마 1:23 = 사 7:14). 그리고 마태는 예수의 교회에 관한 설교 (마 18장)를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시킨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모인 곳에는 내가 거기에 그들 가운데 있다 (εἰμι 현재형!)” (마 18:20). 마지막으로 마태는 예수의 임마누엘되심을 복음서의 결론에서 마지막 말로써 결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다 ((εἰμι 현재형!)” (마 28:20).
3. 교회와 세상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현재의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무엇인가 마태는 참 이스라엘이며 예수의 소유인 교회가 세상과 가지는 관계를 여러가지 면에서 설명한다.
1) 세상에서 불리워진 교회
첫째로 교회는 세상에서 불리워진 교회이다 (마 22:9). 세상이 악한 자와 선한 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마 5:45), 가시적 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재현된다. 교회에는 세상의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모인다 (마 22:10). 이 때문에 현재적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혼합성을 지닌 혼합체로 묘사된다.
2) 세상 안에 있는 교회
둘째로 교회는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이다 (마 5:13-14). 그러나 이것은 아래에서 보겠지만 교회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세상의 교회이기에 혼합체적인 이중구조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감당할 것을 요구받는다. 하나님께서 세상가운데서 교회를 부르셨기에,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가진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을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의식을 가지고 대응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3)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
셋째로 교회는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이다 (마 5:14-16). 교회는 산들 위에 우뚝 선 도시이며, 등경 위에 높이 달린 등불이다. 교회는 세상과 질다른 모습을 가진다. 교회는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교회의 질다른 모습은 “그 나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 (마 21:43) 에서 표현된다. 예수를 가리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 만으로도 (마 7:21),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 만으로도 (마 7:22상),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만으로도 (마 7:22하) 참된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마 7:24). 단순한 신앙고백도 단순한 은사행위도 참된 교회의 표식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마태에게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 (Namenchristen)로 여겨진다. 참된 교회의 표식은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 동기가 되는 “착한 행실”이다 (마 5:16).
마태는 다섯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마 7:28; 11:1; 13:53; 19:1; 26:1)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단락짓는 다섯개의 설교들가운데 산상설교는 이러한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일러준다. 산상설교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 (der eigentliche Sinn)를 알려주는 복음이다. 산상설교의 내용들은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단순히 사람들에게 죄를 확인시켜주는 기능 만 하는 것도 아니며, 실천할 수는 있지만 단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만 행할 수 있는 중간윤리 (Interimsethik)도 아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종을 통하여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서 (Gehorsamsethik), 실천을 위한 상당히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윤리를 담고 있다. 예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꾸준히 회개하는 가운데 실현하여 못한 상태에서 나은 상태 (“더 나은 의”, 마 5:20)로 나아가도록 표준을 설정해주는 가르침이다. 이같은 표준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았으나 다시 세상으로 (마 22:9 “사거리 길로” ἐπὶ τὰς διεξδους τών ὁδών) 가서 “땅의 (τής γής) 소금으로, 세상의 (τού κσμου) 빛으로” (마 5:13-15) 역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마 5:16).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 가운데 하나는 용서일 것이다. 한편으로 용서는 형제교회 (Brüdergemeinde)의 표식이다. 마태복음에는 교회의 직분에 대한 뚜렷한 진술은 보이지 않지만 (단지 선지자, 서기관, 교사, 등이 언급), 이에 반하여 분명하게 형제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에 서로 “형제들” (마 23:8)이며,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에 예수와 함께 형제 (Mitbrüder)가 된다 (마 12:50).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나타나 자녀들을 인도하며 제공하는 분이시며 (마 5:45이하; 6:26,32; 7:11), 두려움으로 나타나 자녀들의 잘못된 것을 질책하는 분이시다 (마 15:13). 마태는 하나님을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표현으로 마태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땅에 있는 아버지와 구별된다는 것 (마 23:9)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격리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 (마 11:25)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함으로써 능력적인 하나님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교회가 연약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천지를 향해서 능력이 있다. 형제교회로서의 기독교공동체는 서로 용서한다 (ἀφημι). 용서는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 (ἀδελφς)를 용서할 것에 대한 교훈은 형제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 (마 18:21)과 이에 대한 답변인 예수의 회계하는 왕의 비유 (마 18:23-34)와 결론 (마 18:35)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특히 이 결론부분은 형제용서는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본골격임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형제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형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하여 교회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마태에게 있어서 형제 용서는 일반인에 대한 용서로 발전한다. 그래서 용서는 세상의 교회 (Weltgemeinde)의 표식이다. 이것은 주기도문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 (마 6:14-15)에서 명확하게 보여진다. 여기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마 18:35에서는 “형제” (τῷ ἀδελφῷ)가 사용된 반면에 마 6:14-15에서는 “사람들” (τοίς ἀνθρποις)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이 용서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교회는 형제에 대한 용서를 이룰 뿐 아니라 세상사람들에 대한 용서도 이룬다. 교회는 좁게는 같은 그리스도들을 용서하며, 넓게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용서한다. 교회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용서를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모든 사람이 용서의 대상이다. 사람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전제가 된다.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이 설정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히 기도해야 할 내용이 된다 (마 6:12).
4) 세상으로 가는 교회
넷째로 교회는 세상으로 가는 교회이다 (마 28:16-20).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간다 (마 22:9 “사거리 길로 가라”). 우리는 이 점에도 또 한번 아브라함이 교회의 전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창 12:1), 예수께서도 교회에게 “가라”고 명령하신다 (마 28:19). 교회는 예수의 명령을 따른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사역 중에 제자들을 만드시고, 이 제자들로 하여금 또 다시 제자들을 만들게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으로 가는 교회는 먼저 예수의 제자로서의 따름을 전제로 한다. 따름에는 예수와 제자들에게 다같이 인격적인 관계가 설정된다. 예수의 편에서 볼때 예수는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마 28:20), 제자들의 편에서 볼때 제자들은 예수와 동일한 삶을 구성한다. 예수와 같은 내용을 복음으로 전파하고 (마 4:17; 10:7),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 (마 10:38-39; 16:24-25).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며, 교회는 순교하는 교회이다! 선교는 순교를 전제로 하며, 순교는 선교를 결과시킨다.
4. 결론
마태복음은 앞으로 오게 될 모든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미래적인 교회들이 가져야 할 모습에 영향을 주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마태복음의 교회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삼는 참 이스라엘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임재하시는 교회이며, 세상에서 구별되지만 세상에 존재하며 세상으로 가는 교회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교회를 지향한다. 마태복음이 결정된 미래적인 교회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미래적인 교회에 의하여 마태복음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미래의 교회가 마태복음의 교회론을 결정한다. 마태복음에는 미래의 교회들이 가지게 될 모습이 결정해 주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미래의 교회들로부터 받는 충격이다.
- 참 이스라엘로서 세상에 마주선 그리스도의 교회 -
(1996년 10월 22일 신학정론 원고 조병수)
목차
0. 도입
1) 자료비평 또는 문학비평 2) 양식사와 편집사 3) 미래적인 교회의 영향
1.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1) 선교의 두 대상
2) 마 1:1
(1) 유대인에의 관심 (2) 이방인에의 관심 (3) 모든 민족에의 관심
2. 그리스도의 교회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1) 베드로와 반석 (2) 예수와 교회 (3) 반석과 교회
(4) 교회와 음부 (5) 교회와 천국
2)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하신다
(1) 교회의 현재 (2) 예수의 임재
3. 교회와 세상
1) 세상에서 불리워진 교회 2) 세상 안에 있는 교회
3)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 4) 세상으로 가는 교회
4. 결론
0. 도입
마태복음의 신학을 다루기 위하여 우리는 공관복음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점을 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자료에 관한 문제점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전승과 해석에 관한 문제점이다.
1) 자료비평 또는 문학비평
첫째로 자료에 관한 문제점은 자료비평 (Quellenkritik) 혹은 문학비평 (Literarkritik)과 연관되어 있다. 공관복음서에 대하여 자료 (문학)비평은 적어도 다섯가지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원복음설 (Urevangeliumshypothese, G.E.Lessing 1777/1778), 구전설 (Traditionshypothese, J.G.Herder 1796), 단편설 (Fragmenten-, Diegesenhypothese, F.D.E.Schleiermacher 1817), 사용설 (Benutzungshypothese, J.J.Griesbach 1789/90), 두자료설 (Zweiquellentheorie, C.H.Weisse 1838). 자료 (문학)비평이 발전할수록 마태복음은 권위를 크게 상실하였다. 공관복음서 연구에 관한 한, 결국 두자료설이 현금의 신약신학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 가설에 의하면 마태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마가복음과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마태복음의 권위란 것은 마가복음의 권위와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의 권위에 종속하고 만다.
하지만 마태복음이 마가복음과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렇게 간단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의견이 아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을 기초로 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두 복음서를 면밀히 조사할때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이 가설적인 예수어록집을 사용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지금까지도 현재의 복음서들에 버금가는 소위 예수어록집을 담은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견해로는 세개의 복음서는 동일한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다. 이에 대한 의견은 다른 기회에 발표할 것이다. 단지 여기에서 전제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복음서들의 독립적인 동일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복음서 연구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지면 마태복음으로부터 다시 권위있는 여러가지 신학을 구성할 수가 있다.
2) 양식사와 편집사
둘째로 전승과 해석에 관한 문제점을 다루기 위하여 두가지 방법론이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양식사 (Formgeschichte)이다. 양식사가 관심하는 것은 우선 공관복음서의 특징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서가 다른 문학들과 비교할때 어떤 위치를 가지느냐를 따진다. 양식사는 공관복음서가 문학사에 있어서 특별한 양식을 가지는 “소문학” (Kleinliteratur)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더 나아가서 양식사가 관심하는 것은 공관복음서의 형성 (전역사 Vorgeschichte)이다. 이것은 전문학적인 기원들로부터 문학적인 정착에 이르기까지 복음서들의 전승의 과정에 관한 연구이다 (Frage nach dem Weg der Evangelientradition von den vorliterarischen Ursprüngen bis zur literarischen Fixierung). 그래서 양식사는 각 개 텍스트의 양식과 여러 개의 각 개 텍스트들의 양식을 연구하여 전승자들 (Tradenten)의 상황에서 “삶 안의 자리” (Sitz im Leben)을 캐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식사의 관심은 복음서의 과거적인 면에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편집사 (Redaktionsgeschichte)이다. 편집사는 복음서의 각 단락들의 수집 (Zusammenfassung)에 나타나는 편집자의 신학적인 관념에 관심한다. 이것은 저자 (마지막 편집자!)의 신학적인 입장에 대한 연구이다 (Frage nach dem theologischen Standort des Verfassers/Endredaktors). 편집자가 어떠한 신학적인 견점하에 자료들을 선택 (auswählen)하고 구성 (zusammenstellen)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그래서 편집사는 편집자들 (Redaktoren)의 상황에서의 “삶 안의 자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편집사의 관심은 복음서의 현재적인 면에 머문다고 말할 수 있다.
3) 미래적인 교회의 영향
양식사와 편집사는 다같이 복음서를 복음서의 과거와 현재에 관련된 역사적인 문서라는 견해로 이해한다. 양식사는 복음서들을 인간의 글로서 양식을 지닌 전승이라고 이해하는데서 그 한계를 가지며, 편집사는 복음서들을 사람의 글로서 신학을 지닌 편집이라고 이해하는데서 그 한계를 가진다. 우리의 과제는 우선 복음서들을 하나님의 글 (scriptura Dei)로 확인하는 것이다 (참조. 마 16:17). 이때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떠 오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복음서기자들을 통하여 앞으로 오게 될 모든 교회를 지향하는 글을 쓰게 하셨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미래적인 교회의 존재로 하여금 복음서들의 내용을 결정하게 하셨다.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보존가운데 미래의 교회들의 상황을 결정하는 내용들이 들어있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미래의 교회들이 가지게 될 상황이 결정해 주는 내용들도 들어있다. 이것은 복음서들이 미래의 교회들로부터 받는 충격이다. 복음서의 시간을 중심으로 이것은 양식사가 관심하는 과거적인 전승자들이나, 편집사가 관심하는 현재적인 편집자들에 대한 관심과 달리 복음서들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미래적인 소유자들 (교회들)에 대한 관심이다. 양식사는 복음서들보다 이전에 있던 시간에, 편집사는 복음서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관심을 두었다면 우리는 복음서들보다 이후에 있을 시간에 관심을 둔다. 특히 이러한 미래적인 시간에 대한 관심은 복음서의 양식이나 편집에서 보다는 복음서의 영향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마태복음의 여러가지 중요한 신학적인 사상들가운데 교회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복음에서 교회론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로 언어적으로 볼때 복음서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태복음 만이 “교회” (ἐκκλησα)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마 16:18; 18:17), 둘째로 내용적으로 볼때 신약 전체 내에서 예수의 부활이후 예수의 재림까지의 시간에 있는 기독교공동체가 교육적인 면에서, 선교적인 면에서, 사회적인 면에서 어떠한 사명을 띄고 있는지 그 관심을 높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 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
가장 먼저 교회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고찰해보자.
1) 선교의 두 대상
신약학자들은 마태복음에 유대기독교적인 신학 (judenchristliche Theologie)을 반영하는 자료와 이방기독교적인 신학 (heidenchristliche Theologie)을 반영하는 자료가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을 한다. 유대기독교적인 신학은 예수의 선교와 제자들의 선교가 단지 이스라엘에게만 관계되는 것으로 진술되는 구절들에서 보여진다 (마 10:6; 15:24,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방기독교적인 신학은 제자들의 선교가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한다는 내용에서 반영된다 (마 28:16-20). 그러나 소위 이같은 두 신학의 마찰은 구속사 사상의 도움을 받으면 잘 해결된다. 예수의 활동과 제자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이스라엘에게 해당되었으나 이스라엘의 거절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2) 마 1:1
이러한 구속사적인 사상은 이미 마태복음의 첫 말에서부터 엿볼 수가 있다. 마태는 첫말인 마 1:1로부터 그의 복음서를 전개하고 있다. 마 1:1은 단지 계보 만을 위한 종합적인 서언인가, 아니면 마태복음서 전체를 위한 어떤 효과를 가지는가? 나의 생각에는 마태가 그의 복음서 첫 문장으로 그의 복음서의 신학 전체를 요약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마태의 기독론과 교회론이 교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말함으로써 시작한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아들” (υἱς)로 설명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로 설명되고, 다시 다윗은 “아브라함의 아들”로 설명된다. 다윗은 아브라함에게 종속된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왜 마태는 처음부터 예수가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가? 이에 대하여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 유대인에의 관심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이루신 지상사역의 촛점이 우선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에게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지상사역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마 15:24)에 국한시켰다. 이때문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우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갈 것을 명령하셨다 (마 10:6). 말하자면 예수의 사역의 요점은 예수의 이름에 대한 마태의 해석에서 분명하게 언급된다. 예수는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 2:21). 그래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우며 (마 2:2), 예수는 “나의 백성 (τὸν λαν μου)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 (ποιμανεί)고 예언되었다 (마 2:6). 그러나 예수는 지상사역 중에 우선 유대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결국은 “모든 백성 (πάς ὁ λας)”에 의하여 거절을 당하였다 (마 27:25). 그러므로 예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은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마 27:11,29,42).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를 버렸다.
(2) 이방인에의 관심
이러한 맥락에서 마태에게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것이 새로운 내용을 가지게 된다. 마태는 예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사실로부터 이방인들이 구원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이것은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 여러방면으로 설명된다. 가장 먼저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 (마 3:7-10/눅 3:7-9)에서 잘 나타난다. 요한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나아오는 것을 보며 “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가지고 있다고 속으로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이 이 돌들로부터 아브라함에게 자손들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 3: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요한이 아브라함의 아버지됨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조상된 신분은 그대로 남아도, 유대인들의 자손된 신분은 상실될 가능성이 있다. 요한이 말하는 “이 돌들”은 유대인 외의 이방인들을 암시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상실할 위험성 앞에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획득할 가능성이 생긴다. 아마도 이러한 의미에서 요한이 선포하는 임박한 천국 (마 3:2)은 요한이 내다보는 새로운 자손들 (마 3:9)에게 해당된다 (참조. 마 21:43!). 또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단락 (마 8:5-13)에서 다시 한번 잘 입증된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이나, 그 나라의 아들들은 바깥 어두운데로 쫒겨 날 것이다” (마 8:11-12).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의 말씀이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예언적인 말씀은 예수의 포도원 비유 (마 21:33-46)에서 더욱 분명하게 진술된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탈취되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한 민족 (ἔθνει)에게 주어질 것이다” (마 21:43). 여기에서도 역시 동사는 미래형으로 사용된다. 이스라엘백성이 아닌 또 하나의 민족이 성립될 것임이 예상된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마태는 교회를 “진정한 이스라엘” (Das wahre Israel)로 이해를 한다.
(3) 모든 민족에의 관심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에게서 박탈되어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한 민족에게 주어진다. 이같은 또 하나의 민족은 사실상 한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을 의미하기 보다는 모든 민족들가운데서 이루어질 새로운 민족을 뜻한다. “사거리 길에서” 초청을 받는 사람들이다 (마 22:9,10). 세상에 있는 악한 자와 선한 자들을 모두 대상으로 삼는다 (마 5:45; 22:10). 이것을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결론 (마 28:16-20)에서 잘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는 부활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모든 민족들 (πντα τὰ ἔθνη)을 제자로 만들라” (마 28:19)고 말씀하셨다. 마태가 복음서의 결론에서 “모든 민족들”을 언급하는 것은 복음서의 서론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하는 것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 (πατὴρ πλθους ἐθνών 또는 πολλών ἐθνών)로서 (창 17:4-5) “모든 민족들” (πντα τὰ ἔθνη)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고” (창 18:18), “모든 민족들” (πντα τὰ ἔθνη)이 그의 “씨로 말미암아 (ἐν τῷ σπρματι) 복을 받을” (창 22:18) 것이라는 구약의 사상은 이미 유대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 (σπρμα)이다 (갈 3:16; 히 2:16!). 이렇게 마태복음은 처음과 끝에서 Inclusio를 구성한다.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할” 열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아들 (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만들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일은 예수의 지상사역을 넘어서는 예수의 부활에서 시작되는 미래의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옛 민족 이스라엘에게서 새 민족 교회로 가는 길에 대한 암시가 이미 마태복음의 서론에 들어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첫 문장은 대단히 교회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촛점이다. 이방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설명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교회론은 기독론에서 출발한다.
2. 그리스도의 교회
마태에게서 있어서 교회론이 기독론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교회는 그 시작점과 최종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끝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신다.
1)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예수께서는 지상사역을 하시면서 이미 부활 이후에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하여 미래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을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단락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단락이다 (마 16:13-20). 베드로가 이스라엘에 속해있다는 사실로부터 교회가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연계성은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이 단락에서 특히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이 마태 (마 16:17-19)에게는 있지만, 마가 (막 8:27-30)와 누가 (눅 9:18-21)에게는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 마가와 누가에 비하여 마태의 교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육과 혈” (인간적인 것의 총체, 참조 요 1:13; 고전 15:50; 갈 1:16; 엡 6:12; 히 2:14)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마 16:17).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자신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강조점은 베드로의 고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단지 이같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자신의 것을 선언하신다. 여기에 “그리고 나도” (κἀγ)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한다 (마 16:18).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예수의 선언도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계시하셨다 17절 ... 그리고 나도 너에게 말한다 18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의 다섯가지 말씀이 나온다 (마 16:18-19). 첫째는 베드로에 대한 것으로서 “너는 πτρος (= 돌)이다”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예수에 대한 것으로서 “내가 이 πτρα (=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는 말씀이며, 셋째는 음부에 관한 것으로서 “음부의 문들이 그것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넷째는 천국에 관한 것으로서 “천국의 열쇠들을 너에게 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매는 것과 푸는 것의 권세에 대한 말씀이 곁들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의 입장에서 교회는 미래적인 성격 (동사의 미래형. 세울 것이다. 이기지 못할 것이다)을 가진다는 사실과 함께 다음과 같이 마태의 교회론에 관한 몇가지 중요한 사상을 정리할 수 있다.
(1) 베드로와 반석
첫째로 베드로와 반석의 관계를 살펴보자.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서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선 베드로와 반석이 서로 다른 것일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네 위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구태어 “이 반석 위에”라는 용어를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베드로와 반석이 서로 같은 것일 수 있는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πτρος와 πτρα는 단순히 말놀이 (Wortspiel)일 수 있기 때문이다 (벧전 2:8 참조: λθος - πτρα). 아마도 여기에서 작은 돌같은 베드로를 큰 반석같이 여기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은혜의 사상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베드로는 반석의 기능을 할 것이기에 베드로라고 불리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반석으로 생각하였다 (사 51:1f).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옛 이스라엘의 기초이었듯이, 이제 베드로는 새 이스라엘의 기초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유대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한다는 대표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베드로가 교회의 단일함을 나타내는 통일성 (베드로를 기초로 교회는 하나이다)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것은 이 반석이 하나님일 수 있다. 사실상 하나님이 반석이라는 사상은 비록 용어상 차이는 있지만 (עלס,רוצ) 구약에 널리 퍼져 있는 사상이다 (신 32:4,31; 삼상 2:2; 시 18:2,31,46; 19:14; 31:3 passim). 그렇다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반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또는 그의 계시를 의미할 수 있다 (마 16:17).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확인하고 난 다음인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결국 예수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없다.
(2) 예수와 교회
둘째로 살펴볼 것을 예수와 교회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와 교회의 관계이다.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마 16:18b).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 (“내가”).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의 교회이다 (“나의”).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세우며 교회를 소유하는 분이 예수라는 점이다.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받는다. 마태는 다른 복음서기자들에 비해서 특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 (마 1:1,16,17,18; 2:4; 11:2; 16:20; 22:42/막 12:35/눅20:4; 23:10; 24:5,23/막 13:21; 26:63/막 14:6/눅 22:67; 26:68; 27:17). 그러므로 교회에 관한 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스도로 고백되는 예수가 중심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그분께 모든 일에 첫번째 자리를 내드려야 한다. 교회에서 사람은 언제나 예수를 앞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사 (事) 이전에 예수사 (事)이다! 교회론에 있어서 기독론이 인간론보다 앞선다.
(3) 반석과 교회
셋째로 반석과 교회의 관계이다.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다” (마 16:18b).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반석 위에 세운다”는 말은 마 7:24-25의 도움을 받으면 잘 해석된다. 반석위에 세워진 집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에 어떠한 세력에 의하여도 무너지지 않는다.
(4) 교회와 음부
넷째로 교회와 음부의 관계이다. “음부의 문들 (πλαι)이 그것을 (= 교회를) 당하지 못할 것이다” (마 16:18c). “문들”이라는 표현으로 겹겹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다면의 문들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어떻든지 문을 언급함으로써 음부가 방어적인 입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음부의 행위를 위하여 사용된 κατισχειν은 전쟁용어로서 “...보다 힘이 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부정사와 함께 사용될때 “...보다 힘이 세지 못하다”, 즉 “...을 당하지 못하리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이 구절은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씨가 그의 대적자들의 문 을 얻으리라” (창 22:17; 참조. 창 24:60)는 약속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예수께서 교회에게 다시 주신다. 그렇다면 사탄의 나라가 아무리 강한 문들을 가지고 방어를 한다고 해도, 교회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사탄의 나라는 교회의 세력 앞에 방어할 힘이 없다. 이것은 교회가 담대하게 어둠의 나라를 공격해야 할 것을 알려준다. 교회는 공격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서 있기에 흔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나라를 흔든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그 영역을 꾸준히 확장한다 (참조. 겨자씨 비유 마 13:31-32; 누룩 비유 마 13:33).
(5) 교회와 천국
다섯째로 교회와 천국의 관계이다.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들 (κλείδας)을 줄 것이다” (19a).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너에게” (σοι)가 단지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베드로는 교회의 대표성이 아니라 통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너”라는 말로써 교회의 단일하며 통일된 전체를 지시한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받는다. 교회는 음부에 대하여는 문들을 깨뜨리는 전투적인 모습을 가지지만, 천국에 대하여는 문을 순조롭게 여는 자격을 가진다. “천국의 열쇠들” (τὰς κλείδας τής βασιλεας τών οὐρανών)를 가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마 23:13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천국을 닫는다” (κλεειν τὴν βασιλεαν τών οὐρανών)는 말로부터 해석을 얻을 수 있다. 이들이 천국을 닫는 것은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선교적인 차원의 말이다. 교회는 천국의 열쇠들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도록 문을 여는 기능을 한다. “열쇠들”은 교회가 다양한 방면에서 선교를 해야 할 것을 암시한다.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열쇠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게는 땅에서 하늘의 권한을 가지는 것이다. 선교적인 차원에서 교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킨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게서도 풀릴 것이다” (마 16:19). 마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하늘과 땅”을 짝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다. 마태는 짝말인 “하늘과 땅”을 가지고 우주관 (Kosmologie 마 24:30) 뿐 아니라, 신론 (마 11:25), 기독론 (마 28:18), 성경관 (마 5:18; 24:35), 윤리 (마 5:13,16) 그리고 교회론 (마 16:19; 18:18)의 핵심을 말한다. 여기에서 특히 교회론이 중요하다. 마태에게서 이 짝말로 교회론은 선교적인 차원과 함께 치리적인 차원이 설명된다. 교회에게 선교와 치리에 있어서 하늘과 땅을 엮는 권세가 허락되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첫째로 교회가 얼마나 능력적인지를 배운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게 땅에서 하늘을 결정하는 권세가 주어졌다면 교회는 선교와 치리를 결정함에 있어서 얼마나 신중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며, 선교와 치리를 진행함에 있어서 얼마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하신다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뿐 아니라, 교회에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1) 교회의 현재
교회의 현재적인 상황은 다양성과 혼합성으로 묘사될 수 있다. 현세의 교회는 혼합체 (corpus permixtum)이다. 다양성은 시간차의 그리스도인들 (마 20:1-16 포도원 비유)과 규모차의 그리스도인들 (마 18:10-14 작은 자에 대한 말씀)로 나타나며, 혼합성은 알곡과 가라지 (마 13:24-30,36-43 가라지 비유), 좋은 물고기와 못된 물고기 (마 13:47-50 그물 비유), 악한 자와 선한 자 (마 22:1-14,10! 잔치하는 왕 비유), 양과 염소 (마 25:31-46 양과 염소 비유)으로 나타난다. 이 혼합은 마지막 날의 심판에서 비로소 정리될 것이다. 분리는 오직 마지막 때에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이다. 키질을 통하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울 것이다 (마 3:12). 키질에 관한 말씀은 구원사상과 심판사상을 함께 보여준다.
(2) 예수의 임재
하지만 현재적으로 예수께서는 진정한 교회를 위하여 임재를 약속하신다 (마 28:20). 이것은 새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교회에게 약속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주셨던 은혜의 반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보라, 나의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 (ἐγὼ ἰδοὺ ἡ διαθκη μου μετὰ σού, ךתא יתירב ינה ינא)고 약속하였기 때문에 (창 17:4),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 21:22).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삶도 역시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삭 창 26:28; 야곱 창 28:15; 31:3; 요셉 창 39:2).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께서 교회에 이러한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의 서론에서 아브라함을 언급함으로써 임마누엘의 사상을 함축시키고 있다. 마태는 이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된 임마누엘의 성취임을 말한다 (마 1:23 = 사 7:14). 그리고 마태는 예수의 교회에 관한 설교 (마 18장)를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시킨다.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나의 이름을 위하여 모인 곳에는 내가 거기에 그들 가운데 있다 (εἰμι 현재형!)” (마 18:20). 마지막으로 마태는 예수의 임마누엘되심을 복음서의 결론에서 마지막 말로써 결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다 ((εἰμι 현재형!)” (마 28:20).
3. 교회와 세상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현재의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무엇인가 마태는 참 이스라엘이며 예수의 소유인 교회가 세상과 가지는 관계를 여러가지 면에서 설명한다.
1) 세상에서 불리워진 교회
첫째로 교회는 세상에서 불리워진 교회이다 (마 22:9). 세상이 악한 자와 선한 자로 구성되어 있기에 (마 5:45), 가시적 교회에도 이러한 현상이 재현된다. 교회에는 세상의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모인다 (마 22:10). 이 때문에 현재적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혼합성을 지닌 혼합체로 묘사된다.
2) 세상 안에 있는 교회
둘째로 교회는 세상 안에 있는 교회이다 (마 5:13-14). 그러나 이것은 아래에서 보겠지만 교회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세상의 교회이기에 혼합체적인 이중구조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하여 어떤 책임을 감당할 것을 요구받는다. 하나님께서 세상가운데서 교회를 부르셨기에,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책임을 가진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상을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의식을 가지고 대응할 것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3)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
셋째로 교회는 세상에 마주서는 교회이다 (마 5:14-16). 교회는 산들 위에 우뚝 선 도시이며, 등경 위에 높이 달린 등불이다. 교회는 세상과 질다른 모습을 가진다. 교회는 세상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교회의 질다른 모습은 “그 나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것” (마 21:43) 에서 표현된다. 예수를 가리켜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것 만으로도 (마 7:21),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는 것 만으로도 (마 7:22상),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만으로도 (마 7:22하) 참된 교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마 7:24). 단순한 신앙고백도 단순한 은사행위도 참된 교회의 표식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마태에게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 (Namenchristen)로 여겨진다. 참된 교회의 표식은 사람들이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만들 동기가 되는 “착한 행실”이다 (마 5:16).
마태는 다섯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마 7:28; 11:1; 13:53; 19:1; 26:1)라는 구문을 사용하여 단락짓는 다섯개의 설교들가운데 산상설교는 이러한 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일러준다. 산상설교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 (der eigentliche Sinn)를 알려주는 복음이다. 산상설교의 내용들은 결코 실천할 수 없는 것으로서 단순히 사람들에게 죄를 확인시켜주는 기능 만 하는 것도 아니며, 실천할 수는 있지만 단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까지의 아주 짧은 시간동안 만 행할 수 있는 중간윤리 (Interimsethik)도 아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순종을 통하여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서 (Gehorsamsethik), 실천을 위한 상당히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윤리를 담고 있다. 예수의 산상설교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꾸준히 회개하는 가운데 실현하여 못한 상태에서 나은 상태 (“더 나은 의”, 마 5:20)로 나아가도록 표준을 설정해주는 가르침이다. 이같은 표준적인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았으나 다시 세상으로 (마 22:9 “사거리 길로” ἐπὶ τὰς διεξδους τών ὁδών) 가서 “땅의 (τής γής) 소금으로, 세상의 (τού κσμου) 빛으로” (마 5:13-15) 역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마 5:16).
아마도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 가운데 하나는 용서일 것이다. 한편으로 용서는 형제교회 (Brüdergemeinde)의 표식이다. 마태복음에는 교회의 직분에 대한 뚜렷한 진술은 보이지 않지만 (단지 선지자, 서기관, 교사, 등이 언급), 이에 반하여 분명하게 형제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기에 서로 “형제들” (마 23:8)이며,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기에 예수와 함께 형제 (Mitbrüder)가 된다 (마 12:50).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나타나 자녀들을 인도하며 제공하는 분이시며 (마 5:45이하; 6:26,32; 7:11), 두려움으로 나타나 자녀들의 잘못된 것을 질책하는 분이시다 (마 15:13). 마태는 하나님을 꾸준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표현으로 마태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 땅에 있는 아버지와 구별된다는 것 (마 23:9)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격리가 있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 (마 11:25)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함으로써 능력적인 하나님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다. 이것이 교회가 연약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천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천지를 향해서 능력이 있다. 형제교회로서의 기독교공동체는 서로 용서한다 (ἀφημι). 용서는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 (ἀδελφς)를 용서할 것에 대한 교훈은 형제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 (마 18:21)과 이에 대한 답변인 예수의 회계하는 왕의 비유 (마 18:23-34)와 결론 (마 18:35)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특히 이 결론부분은 형제용서는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본골격임을 알려준다. 왜냐하면 형제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형제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하여 교회의 존립이 위협을 받는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런데 마태에게 있어서 형제 용서는 일반인에 대한 용서로 발전한다. 그래서 용서는 세상의 교회 (Weltgemeinde)의 표식이다. 이것은 주기도문에 이어지는 예수의 말씀 (마 6:14-15)에서 명확하게 보여진다. 여기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마 18:35에서는 “형제” (τῷ ἀδελφῷ)가 사용된 반면에 마 6:14-15에서는 “사람들” (τοίς ἀνθρποις)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이 용서의 조건이 된다고 가르친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교회는 형제에 대한 용서를 이룰 뿐 아니라 세상사람들에 대한 용서도 이룬다. 교회는 좁게는 같은 그리스도들을 용서하며, 넓게는 비그리스도인들을 용서한다. 교회는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용서를 실현하는 공동체이다. 모든 사람이 용서의 대상이다. 사람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전제가 된다.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이 설정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꾸준히 기도해야 할 내용이 된다 (마 6:12).
4) 세상으로 가는 교회
넷째로 교회는 세상으로 가는 교회이다 (마 28:16-20). 세상으로부터 불림을 받은 교회는 다시 세상으로 간다 (마 22:9 “사거리 길로 가라”). 우리는 이 점에도 또 한번 아브라함이 교회의 전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명령하신 것처럼 (창 12:1), 예수께서도 교회에게 “가라”고 명령하신다 (마 28:19). 교회는 예수의 명령을 따른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지상사역 중에 제자들을 만드시고, 이 제자들로 하여금 또 다시 제자들을 만들게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만들기 위하여 세상으로 가는 교회는 먼저 예수의 제자로서의 따름을 전제로 한다. 따름에는 예수와 제자들에게 다같이 인격적인 관계가 설정된다. 예수의 편에서 볼때 예수는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고 (마 28:20), 제자들의 편에서 볼때 제자들은 예수와 동일한 삶을 구성한다. 예수와 같은 내용을 복음으로 전파하고 (마 4:17; 10:7),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다 (마 10:38-39; 16:24-25).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이며, 교회는 순교하는 교회이다! 선교는 순교를 전제로 하며, 순교는 선교를 결과시킨다.
4. 결론
마태복음은 앞으로 오게 될 모든 교회를 지향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미래적인 교회들이 가져야 할 모습에 영향을 주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마태복음의 교회는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삼는 참 이스라엘이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임재하시는 교회이며, 세상에서 구별되지만 세상에 존재하며 세상으로 가는 교회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교회를 지향한다. 마태복음이 결정된 미래적인 교회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미래적인 교회에 의하여 마태복음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미래의 교회가 마태복음의 교회론을 결정한다. 마태복음에는 미래의 교회들이 가지게 될 모습이 결정해 주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이것은 마태복음이 미래의 교회들로부터 받는 충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