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종교론
목 차
1. 종교란 무엇인가
1) 인간과 종교
2)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
3) 종교의 특징
4) 종교의 구성요소
2. 종교로서의 불교
1) 철학이냐 종교냐
2) 불교의 특징
3) 구도. 가피. 제도
3. 불교와 다종교 사회
1) 현대와 다종교 사회
2) 타종교를 향한 4가지 태도
3) 종교간의 대화
4) 불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5)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본요건
4. 종교에 대한 이해
1) 원시종교
2) 서구 고대종교
3) 조로아스터교
4) 유대교
5) 그리스도교
6) 이슬람
7) 힌두교
8) 자이나교
9) 불교
10) 유교
11) 도교
12) 시크교
13) 일본 신도
14) 신종교
15) 민간신앙
5. 비교종교 연습
1. 종교란 무엇인가?
1) 인간과 종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종교는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의 삶과 함께 해 왔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라든가 매장지, 주거지 등 유물과 유적지에서 이미 종교적인 행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어느 문화권에서나 종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종교는 인간이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그 이해와 가치관을 표현하는 주된 통로의 하나로서도 종교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리하여 종교는 관습을 비롯해서 규범과 윤리 등 사회제도와 예술, 정치, 경제, 국제 관계 등 온갖 분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종교적 삶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인구 조사 자료에 의하면, 특정 종교의 신자라고 스스로 답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반이 넘는다. 통계 숫자로만 보면, 종교에 친화적이지 않은 이른바 과학의 시대, 또한 세속화의 추세가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종교 인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굳이 특정 종교에 성직자나 신자로서 참여하지 않더라도, 어느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많건 적건 종교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시간의 단위를 이레를 한주로 묶어서 계산하면서 그 이레를 주기로 하여 정기적으로 휴일을 갖는 것은 이제 세계 공통의 관습이 되었다. 그런데 잘 알려졌다시피 그 관습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우주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정 공휴일을 살펴보면,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은 특정 종교 교조의 생일을 기리는 것이고 개천절은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제정된 기념일이다. 또한 가장 큰 명절인 설날과 추석에는 온갖 종교적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식목일은 한식과 겹쳐? 성묘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풍속의 날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종교적인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뜻밖의 곳에서도 종교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 기술의 산물을 향유하는 것과 종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서로 결합하기에 어색하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 기술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무궁화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고사를 지냈다거나,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새로 구입하면 우선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내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동차를 새로 사면 떡 한 시루 올려놓고 촛불 켠 제상(祭床)을 마련해서 무사고, 무고장을 빌며 고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직접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기는, 종교학자들은 인류가 워낙 그 특질적 본성으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라는 말이 그 점을 가리킨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나 호모 파베르(homo faber),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등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들이 있는데, 그런 특성 이외에도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워낙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호모 렐리기오수스를 운위하는 것이다. 인간의 전모는 그런 여러 가지 본질적 특성을 다 고려해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행태에는 그 모든 방면의 특성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특정 종교에 참여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외형적인 차원의 구별일 뿐이다. 아무리 무종교인이다, 또는 비종교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인간인 이상 그런 외형 아래 깊숙한 본성의 차원에서 이미 종교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 인간 본연의 종교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곧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사안을 두고 벌이는 담론의 핵심 주제가 된다. 그러니까 또한 역으로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
지성,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능력, 또는 경제 및 정치 행위 등으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운위할 때, 그런 특성들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정리된 보편적인 답변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답변을 끌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것이 무엇이냐를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발휘되느냐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되는 모양, 즉 종교 현상이 대단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부터 고대 문명의 종교들, 그리고 지금껏 전 세계의 많은 인류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 종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쉽게 싸잡아 부르는 인간의 행태는 사실상 극히 다양한 모습과 내막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우리가 종교라는 말과 가장 흔히 연관시키는 것이 신(神) 개념, 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 종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 개념과 신에 대한 신앙을 포함하지 않는 종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에서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 개념을 크게 확장하여, 도(道)라든가 붓다 등도 편의상 신이라 부르자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에서 신과의 관련이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신이라는 개념,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개념이 너무 다양한 것들을 한꺼번에 가리키게 되어 결국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된다. 그런 규정은 인간의 종교성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난관으로 인해서,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정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래도 종교를 정의해 보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여러 가지 종교 정의가 제시되었다. 한 때에는,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을 찾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종교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찾으면 그것이 곧 종교의 본질을 말해 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기원을 찾는 방법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을 원용하였다. 진화론은 워낙 생물의 진화 과정에 관하여 제시된 이론이지만, 생물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모든 부문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진화론적인 시각의 핵심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단순한 상태에서부터 복잡한 상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 각지로 탐사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다양한 종교에 관해 수집되는 자료의 양이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었는데, 이 진화론적 시각을 그에 적용하여 종교의 진화 과정을 정리하고 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몇 가지 들어보자면, 우선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들은 원래 해, 달, 별, 바람, 벼락, 계절 등 자연 현상을 그렇게 상징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 자연 현상에다가 이름을 붙이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작용과 힘을 묘사하다가 보니, 점차 정말 의지를 가지고 세상일을 움직이는 신이 따로 있는 듯이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물과 현상에 각자 눈에 안 보이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이른바 아니미즘(animism), 즉 정령신앙(精靈信仰)이 종교의 시원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정령신앙보다 더 단순하게 사물과 현상에 작용하는 어떤 힘을 믿는 것이 종교의 기원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조상숭배가 종교의 원초적 형태라고 하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주술로부터 종교가 발전해 나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세상일들이 일정한 인과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의도하는 대로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방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원인이 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주술이다. 다만 그 인과법칙이 과학적,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릇되게 상정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본떠 인형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해를 끼치면 그 실제 사람에게 비슷한 해악이 일어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그 인과율의 효능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영적인 존재들에게 빌거나 그들의
기분을 맞추도록 제의(祭儀)를 지내는 종교 행위로 발전해 갔다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개개인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그 삶을 규율하는 사회의 힘이 신적인 존재로 투사되었다고 하는 종교의 사회적 기원론을 제시하기도 했고, 인간 본연의 공포감, 또는 콤플렉스가 종교를 낳았다고 하는 심리학적 이론도 제기되었다.
종교의 기원을 찾는 그런 이론과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을 결합하면, 종교가 어디에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도식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사물에 깃 든 힘에 대한 신앙이든 주술이든 간에 결국에는 정령신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차차 이 세상에 여러 신들이 있다고 믿는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 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즉, 정령들이 반드시 특정 물체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신의 형태와 능력을 갖추게 된 단계이다. 다음에는 신들 사이에 계층화가 일어나 특별히 강력한 높은 신이 부각되는 이른바 대표신교(henotheism) 단계가 되고, 그 과정이 심화되어 결국에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전능의 신만을 섬기고 나머지는 다 그것에 흡수되어 도태되는 유일신교(monotheism)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잡다하게 수집되는 여러 가지 종교 자료들을 각자 그 진화의 도식 속 적절한 자리에 배치시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화론적 도식은 곧 허물어지게 되었다. 특히, 유일신교의 특징인 최고신, 지고(至高)한 존재에 대한 신앙이 역사적 발전의 꼭대기 단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나 치명타가 되었다. 극히 단순하고 유치한 수준의 문명에 머물고 있는 원시 사회에서도 유일신교의 신 관념에 상응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자 절대적인 최고신에 대한 신앙이 발견되었고, 더욱이 그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진화론적 도식에 정반대되는 역(逆)의 과정이 종교의 역사적 전개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나왔다. 원래 유신교로부터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잡다하게 이해되어 다신교, 애니미즘, 그리고 주술이 차례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진화론적 시각의 몰락은 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반성을 하게 하였다. 다양한 종교현상들을 서구의 유일신교 문화를 기준으로 해서 재단했다는 점, 그리고 이성(理性)을 최고의 준거로 여기며 인지(人智) 발달 수준을 서구적 합리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가늠하는 태도로 임했다는 점 등이 특히 비판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종교의 기원을 추적하고 그 진화의 과정을 그려본다고 해도 그 모두가 사변적 추정에 불과하고, 사료에 입각해서 검증할 수도 또 반증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종교 연구자들은 종교의 기원과 진화 과정을 추적하기보다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양상으로 종교적 사유와 행위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는지, 등등의 주제를 가지고 종교에 대해 서술하고자 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즉, 모든 종교에 공통된 본질적 요소를 찾아서 그것을 종교의 기원으로 여기며 그것으로써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실제로 다양하게 벌어지는 종교의 모습이 어떠하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서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종교 연구의 추이를 대강이나마 길게 언급한 것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헛된 수고를 덜고 의미 있는 결실을 낼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시사해 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흔히 종교에 보편적으로 공통된 어떤 핵심적 본질을 규정함으로써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리려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이는 귀납적 결론으로 제시되는 답이 아니라 연역적 선언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의 본질 규정은 대개 특정 개인이나 문화권에서 익숙한 종교 개념을 기준으로 삼아 내려지게 마련이다. 특정 문화권의 종교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종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그것이 하나의 선험적 전제가 된다. 그에 맞지 않는 것들은 통념상 아무리 종교로 인정되어 온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의 범주에서 억지로 배제시키게 된다. 아니면, 종교의 범주에 끼워 준다고 하더라도 역시 뭔가 좀 잘못된 종교로 치부하게 된다. 불교나 유교를 두고 종교냐 아니냐 따지는 것도, 종교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신에 대한 신앙으로 규정하는 유신론적 문화 배경 때문이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주어진 선입관이나 개인의 취향에 의거해 성급한 규정을 내리기보다는, 우선 통상 종교라고 불리우는 현상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이 무너진 데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종교를 어떤 하나의 측면, 특히 종교 자체에서 압도적으로 중시되는 것이 아닌 측면에 준거하여 규정하려고 하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이론들은 대부분 계몽주의에 연속되는 합리주의의 시각에서 종교에 접근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선 인지(人智)의 발달이 종교를 포함해서 문화 전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건이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임했던 것이다. 아니미즘이든 주술이든 조상숭배든 모두 세상과 인간 자신에 대해 합리적으로 깨우치지 못한 미혹한 인지 때문에 발단된 것으로 보며, 그 이후의 전개 과정도 모두 인간 인식의 변천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합리주의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의 문제 이외의 영역을 방대하게 펼쳐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합리주의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다 보면, 종교의 활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 너머의 방대한 부분에 대해 눈길을 주지 못하거나 그것을 왜곡되게 보기 십상이다. 인간이 한 개체로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주어지는 근본적인 제약 조건들을 넘어서 무한과 영원을 지향하는 인류의 꿈이 펼쳐지는 곳이 종교이고 바로 거기에서 종교가 인류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원동력이 나왔는데, 합리적 인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두는 시각에서는 그 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3) 종교의 특징
그러한 교훈을 명심할수록 종교에 대해 간략히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런 와중에서나마 종교 연구자들이 그 동안 많이 사용해 온 종교의 정의 몇 가지를 참고하면 종교가 일반적으로 다른 인간 현상과 구별되는 특징을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종교를 "경험적인 존재와 초경험적, 초월적 존재를 구별하면서 경험적인 것이 초경험적인 것에 종속된다고 믿는 일단의 신앙과, 또한 그러한 신앙의 표현하는 일단의 상징(그리고 그런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는 가치)"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자연 및 인간의 존재 질서와, 초경험적이라 할까 아니면 초자연적이라 할 수 있는 차원의 질서를 구별하고 그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는 데에서 종교의 한 특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성(聖)과 속(俗)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특질을 보는 견해도 매우 널리 받아들여졌다. 초경험적인 것을 성스럽다고 하고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속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정의도 앞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이 그 두 가지 질서 또는 차원에 대해 갖는 가치판단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의 특질이 보다 직접적으로 시사된다. 성스러움에 대해 인간은 외경, 경이의 감정과 태도를 보인다. 루돌프 옷토(Rudolf Otto)는 성스러움의 정서를 분석하여 장엄함에서 느끼는 두려움, 신비감, 그리고 매혹됨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과 장대한 규모의 초일상적 차원을 감지할 때에는 전율을 일으키는 두려움이 엄습하며, 또한 그 세계의 불가사의함, 유현(幽玄)함이 신비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인간이 그 세계를 감히 범접치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성스러움의 정서에는 반대로 그 세계에 이끌려 가게 하는 느낌도 더불어 있다. 성스러움의 세계, 그것은 두렵도록 장엄하고 장대하며 신비하여 그것을 감지하는 인간은 그 앞에서 위축되지만, 한편으로 그에 이끌려서 그것을 향해 가려는 열망이 있다.
근래에 또 많이 운위되어 온 것으로 종교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한 정의가 있다. 궁극적인 권위와 가치를 갖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중요성만 갖는 것을 구별하는 점도 종교의 특징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종교에서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는 것은 그 궁극성이 인간이 다른 어느 부문에서 기울이는 관심에 비할 수가 없다. 이 정의를 제시한 폴 틸릭히(Paul Tillich)도 언급했듯이, 궁극적인 관심사와 그렇지 못한 관심사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기꺼이 후자를 포기한다. 재산, 지위, 가족,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종교적 신념 상의 궁극적 관심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포기하는 종교인들이 종교사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어떤 일에 대해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전심전력으로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 그 일에 거의 종교적으로 매달리고 있어'라든가 '그 사람한테는 그 일이 곧 종교야'하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이것도 종교의 한 특징이 궁극적 관심사와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는 데에서 파생된 어법인 것이다.
4) 종교의 구성 요소
종교는 다양한 부문들이 유기적으로 복합된 총체적 현상이다. 초경험적이고 성스러우며 궁극적인 가치의 차원에 관한 체험을 인간은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매체와 통로를 통해서 표출하고, 그 모든 표상이 다 종교의 구성 요소가 된다. 요아힘 바하(Joachim Wach)는 그 종교체험의 표상들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이론적 표상이고 둘째는 행위를 통한 표상이며 셋째는 사회적 기제를 통한 표상이다.
종교체험의 이론적 표상은 흔히 쓰는 말로는 종교사상, 교리,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그 주제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신(神)이라든지 도(道), 깨달음 등 궁극적인 존재나 원리, 경지에 관한 이론적 진술이 있다. 다음에 우주에 대한 이론이 있다. 대개 이 세상은 어디에서 비롯해서 어떻게 진행되다가 어떻게 끝난다거나, 어떤 구조로 되어 있다거나, 그 가치는 어떻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 설명이 제시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인간에 대한 이론이 있다.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운명은 어떤 것인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나,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어떻게 살아야 좋은 것이고 어떻게 살면 안 되는가, 등등의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행위를 통한 표상에서 대표적인 것이 제의(祭儀)이다. 거기에는 예배, 기도, 노래, 춤, 강설 등 다양한 행위가 동원된다. 그래서 종교는 인류의 예술 활동에 주요한 영감 제공자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궁극적 경지의 실현을 위한 수행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포교 활동, 봉사 활동도 종교 행위의 중요 한 부문이다. 그밖에 사소한 행위를 통해 종교적 관심이 표출되는 예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한 예로, 종교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며 새삼스럽게 세차를 하는 것도 다 종교행위인 것이다.
종교는 항상 집단을 형성한다. 요즘에는 일인종교(一人宗敎)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궁극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체험은 있는데 거기에 그것이 전파되려고 하는 에너지는 들어 있지 않다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한 것이다. 혈연이나 지연 등 자연적인 조건에 의해 형성된 집단이 동시에 종교집단을 겸하는 경우도 있고,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고 종교행위를 함께 하는 것이 일차적인 동기가 되어 형성되는 종교집단도 있다. 원시종교, 민족종교의 집단이 앞의 것에 해당한다. 우리가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가족이라는 혈연집단이 곧 종교집단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른바 세계종교와 신종교의 집단은 뒤의 것에 해당된다. 종교가 신념이나 예배행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것이 종교의 다면성을 극도로 높여 놓는다. 종교집단도 하나의 사회집단인 까닭에, 조직과 규범 등 제도의 틀을 지니게 되고 정치, 경제의 요소도 내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종교를 구성한다. 종교에는 철학과 예술과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 온갖 부문이 다 연관된다. 그래서 순수하게 종교적이기만 한 종교현상은 없다는 말도 있다. 그 가운데 어느 부문만을 가지고 종교를 운위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윌프레드 캔트 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라는 종교학자는, 종교를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꿈이 서린 곳을 밟고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극히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종교를 그 원상대로 보지않고 선험적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고 훼손해 버리는 데 대한 우려이다. 근대 학문은 분석을 전가의 보도로 삼는다.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인문 현상에 대해서도 그 구성을 낱낱이 해부해 보는 것을 그 현상에 대한 지식을 취득하는 첩경으로 여긴다. 그러나 해부된 모든 부분들을 취합한다고 해서 한 생명체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극히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된 총체적 현상이고 그런 유기적 총체로서만 비로소 종교로서의 생명을 발휘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정 부문에 초점을 맞추어 해부하고 그것으로 종교 전체를 규정하거나 설명하려고 할 때, 그것은 훼손된 종교, 심하게는 종교의 시체에 대한 이야기가 될 뿐이다.
종교(宗敎, religion)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 인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힘을 빌려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죽음의 문제,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은 오래이며, 그 동안 많은 질적 변천을 거쳐 왔으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내적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특징
초경험적·초자연적이면서 의지를 가진 존재로 믿어지는 것이 신이나 영혼이며, 원리로 인정되는 것이 법·도덕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으로 만자(卍字)나 십자가(十字架)는 물론, 신상(神像)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또 신의 초인간적 행동이 신화로서 전해지고 숭배의 일정한 형식인 의례(儀禮)가 행해지는데, 이러한 종교의 특징이 고대로부터 철학자·지식인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일으키게 하고, 과학의 인식과 모순된다고 지적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구체성·실재감(實在感)이 사람들의 종교를 지탱해 가는 매력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앙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신앙적 공동체를 갖는 데 있다. 같은 신앙을 가진다는 원칙 위에 결성된 집단을 교단(敎團)이라고 하는데, 교단은 승려나 목사와 같은 전문가를 양성하여 신자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며 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하는 한편, 외부에 대해서는 새로운 신자를 획득하는 행동, 즉 전도(포교)를 한다. 또한 교단에는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종교를 볼 때,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입하는 경우와, 자기의사에 따라 가입하는 경우가 있다.
2. 기원설
종교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이유로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미 원시시대,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벽화나 장법(葬法)에서도 영혼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기원설의 자료가 된 것은 지금도 원시적 생활을 계속하는 미개인의 종교였다.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주물(呪物)을 기원으로 보는 페티시즘설(說), 사자(死者)의 숭배를 최고(最古)로 보는 설,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육체 이외에 영혼을 상상한 것이 기원이라고 보는 애니미즘설, 마나(에너지와 같은 힘에 대한 원시신앙)를 애니미즘 이전의 신앙형태로 보는 마나이즘(manaism)설, 동식물과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의 신념을 원초(原初)로 보는 토테미즘(totemism)설 등이 19세기 말 이래 잇달아 제창되었다.
또 물질문화가 빈약한 미개민족에게 인격을 가진 지상신(至上神)이 많다는 점에서 연유된 원시 지상신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복잡한 관념으로의 경과에서 파악되는 심리적 억측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실증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3. 전개과정
미개종교에서는 각자가 당연한 습관으로서 전해진 것을 믿고 있으며, 개인적인 면보다 사회적인 면이 강해서 제사(祭祀) 등의 의례가 그 중심이 되었다. 다만 종교를 주재하는 신관(神官)의 계급이 생기고 국가형성의 진전과 더불어 각지의 신들이 통합되고, 신들의 친자관계와 그 역할 등이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다신교(多神敎)의 시대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이집트 ·오리엔트제국(諸國) ·중국 ·페루에서와 같이 종교가 국가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국왕은 신 또는 신의 자손으로 여겨진 때도 있었다. 종교사상(宗敎史上) 최대의 질적 전개는 기원 전후 약 10세기 동안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개(BC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의 활약(BC 8∼BC 7세기),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제가(諸家)의 활동(BC 6∼BC 5세기), 그리스의 탈레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이르는 철학의 발생과 전개(BC 6세기 이후) 등이 주요한 것들인데,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 이들 사상가의 특징은 합리화라고는 하지만 신화나 주술(呪術)에서 분리하여 체계적인 사상을 부여함으로써 철학 ·윤리 등이 독립하고,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도 이루어졌다.
4. 세계종교
세계적인 여러 사상이 나타난 시기에 발전한 종교사상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현세부정의 사상이다. 미개 ·고대의 시대에는 타계(他界)관념은 있었어도 현세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는데, 이 시기의 종교는, 인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전생(轉生)하며 고통을 경험하여야만 된다든지, 타고난 죄(원죄)의 관념 등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에는 이미 현세의 인간관계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제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내세에서 달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족 특유의 종교로부터 세계적 ·보편적인 종교가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BC 5세기에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 1세기에 유대교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 7세기에 아라비아의 민족종교에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가장 세력을 떨쳤다. 이 종류의 종교는 석가, 예수 그리스도, 마호메트와 같은 교조가 있어서 각기 교단을 형성하고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전도(포교)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으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조직은 존속되어 정치적 집단에 비해 훨씬 오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5. 근대 이후
근대에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는 크게 변화하였다. 예술·도덕 등이 종교로부터 분화되고, 정치·경제·교육 등의 사회제도에서의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신앙의 자유, 철저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 등이 그 일례이다. 또 한편으로는 계몽사상과 과학의 발전이 종교의 진리성과 존재의식을 위협하고 있고, 따라서 종교비판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그 현대적 존재의의가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2. 종교로서의 불교
1. 철학이냐 종교냐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로부터 나오는 견해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것이 그런 견해의 주된 근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서구의 유일신 종교 문화를 준거로 해서 종교를 규정한 데 입각한 이야기일 뿐이다. 유태-그리스도교 전통의 유일신 신앙을 준거로 하는 종교 개념을 적용하면 그 전통 이외의 것은 모두 종교가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불교를 비롯해서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전통들을 모두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문화 중심주의의 독단일 뿐이다. 마루 종(宗), 가르침 교(敎)자를 합쳐서 만든 종교라는 말은 아마도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창안된 것이겠지만, 종(宗), 교(敎), 학(學)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 우리가 쓰는 종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게 보면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종교가 아니라고 함은 어불성설이요 오히려 서양 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religion이라고만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를 이제 더 이상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 이외의 온갖 잡다한 종교현상을 다 싸잡아 종교라고 불러대니 그 말을 더 이상 기독교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런 잡다한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될 수는 없으니, 종교라는 말을 이제는 주어버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religion이라는 말을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쓰고 싶어하는 문화적 독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와 철학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려는 시각 자체가 동양 종교 전통에는 걸맞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 하고 이성으로써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것을 철학이라고 구분하는데, 동양 종교 전통에서는 워낙 그런 식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인 진상[宗]을 체득하고 그것을 가르치며[敎] 배우는 데[學] 이성을 동원하느냐 신앙을 통하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배움, 수행을 불퇴전이게 해주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것을 다 동원한 전인적 체득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며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니 종교와 철학이 한 묶음인 것이다.
앞에서 종교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데에서 드러났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는 이미지적 탐구의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지식의 대전제를 초월적, 초경험적인 계시나 깨달음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그 지식의 추구와 정리에는 내내 이성이, 철학적 사유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만, 철학은 철저히 이성만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정리하며 이성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너머는 인정치 않는 반면에, 종교는 처음부터 그 너머까지를 포함하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불교가 처음부터 이성 너머의 마당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란 지적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으로 획득하는 지식의 족쇄를 벗어나는 데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식보다는 실천에 두는 비중이 크다는 데 있다. 철학에서 중시하는 실천이란 이성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관찰한 것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즉 모순이 없이 정연하고 일관된 지식 체계로 정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상과 인간의 진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따라가 보면, 어느 만큼까지는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명증적이지만 결국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 중도(中道)를 비롯해서 연기(緣起), 공(空), 3신불(三身佛)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핵심 개념들이 다 그렇다. 그런 대목에서 나오는 표현이 부사의(不思議)라든가 묘(妙)하다는 말이다.
논리적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가르침의 실천을 밀고 나갈 것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교의가 보살도(菩薩道)이다. 보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불교인의, 적어도 대승불교인이 당장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여 구현하려는 삶이 그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보살도이다. 보살도의 실천 항목인 6바라밀다(六波羅密多)을 보아도 그렇다. 그 중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 이 3가지 상(相)에 매임이 없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모든 상을 여읜 각자(覺者), 붓다만이 완벽한 보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붓다가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불교의 신행에서 별로 의미가 없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너머의 종교적 이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종교적 신행은 그밖에 어디에선가 따로이 논리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또 하나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철학도 그에 관심을 둘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실용적"인 관심이 철학의 우선적인 초점이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철학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비를 원동력으로 하지는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철학의 일차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적 호기심은 이른바 불도(佛道)에 이르는 방편적 통로는 될지언정 불도(佛道)를 걸어 가는 데에는 별무소용이다.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지적 호기심을 여지없이 좌절시키는 실천 항목들을, 모순이든 말든 온몸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불도를 걷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3귀의(三歸依)에서 불교의 종교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깨달은 이, 즉 붓다와, 그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 귀의한다는 것인데, 귀의라는 것이 이미 종교적인 행위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거기로 돌려 의탁하는 것이 귀의이다. 지적으로 아직 확인을 못했더라도 믿음으로써 거기에 자기를 전적으로 투여한다는 것이니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불교의 특징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적인 점이 잘 나타나는 항목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이론적 표상의 주제 가운데 궁극적인 존재, 원리 또는 경지에 관해서, 불교는 잘 알려졌다시피 신을 그 자리에 놓지 않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등을 다분히 신으로 관념하고 숭배하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령의 불교 교의에 입각한 신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붓다, 보살이 아니더라도, 불교에도 신중(神衆)이 있고 그들을 신앙하는 행위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런 신들은 다 중생에 속한다. 궁극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궁극적인 진상으로서 연기법(緣起法)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 이른바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에 상응하는 불교의 궁극적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연기법은인격적 신이 그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섭리와는 달리 어느 누가 만든 것도, 시작된 때도 없어질 때도 없는 세상의 본래 진상을 가리킨다. 전자를 '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 하고 후자는 '비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그 연기법을 깨달은 이가 궁극적 존재이고 그 깨달음의 세계가 궁극적인 경지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궁극적 존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세상의 진상을 깨달으면 궁극적인 존재이다. 심지어, 누구나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다고 하는 본각(本覺) 사상에 의하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궁극적인 존재이다. 불교가 유신론적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의 이론적인 면 가운데 우주론과 인간론을 보자면, 불교에는 창조신화가 없다. 이 세상과 인간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또 언제 어떻게 해서 멸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설명할 것도 관심을 둘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 문제를 무기(無記)라고 일컫는다. 그런 의문은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 등 세상의 진상을 모르는 어리석음[痴]과,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일으키는 성냄[瞋] 및 탐냄[貪] 등 중생의 질병을 고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 그런 쓸 데 없는 문제에 매달리다가 정작 급한 병 고치기에 관심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우주론을 대표하는 개념이 법계(法界)이다. 여기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연기(緣起)이다. 삼라만상이 각자 개별자이면서도 동시에 연기적인 존재로서 한덩어리로 얽혀 있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일자(一者)에서 나왔고 그리로 귀결된다는 교의는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지만, 불교에서처럼 무수한 개별자가 각자 개체인 동시에 그 개체성을 무화시키지 않는 채 모두 하나라는 극단적인 역설을 이야기하는 예는 찾기 힘들다.
불교 인간론의 특징은 앞에서도 시사했듯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인간에서 비롯되고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하는 데 있다. 인간 밖의 어떤 존재나 힘이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강력한 존재가 주는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믿는 면도 있다. 그러나 교의만을 가지고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들도 신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은 순전히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달린 은총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인과응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여느 주요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그 긴 역사 동안 장엄한 제의(祭儀)형식들을 다양하게 구축해 왔다. 붓다를 예배하는 예불의식, 설법이 중심이 되는 법회가 있는가 하면 천도제(薦度祭)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제의가 개발되었고, 경전의 음송(音誦)과 음악, 춤, 서화, 조각, 건축 등 모든 예술적 매체를 종교행위에 활용한다. 우리 나라 문화재의 절대적인 부분이 불교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불교가 한국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리고, 불교의 제의는 불교가 정착하는 곳에 따라 그 지역의 문화와 풍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모양을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물론 어느 종교의 제의나 지역에 따라 다소간 그 지역의 색깔을 입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 종교들과 견주어 보면, 불교의 제의에서는 다른 어떤 종교의 경우보다 지역적 특색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종교집단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출가 수행자 집단을 들 수 있다. 물론 가톨릭의 경우도 출가 수행자들의 집단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 외의 세계 종교들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가톨릭과도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출가자 사이에서도 사제와 수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출가자는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3. 가피(加被), 깨달음, 제도(濟度)
종교적 신념의 유형을 기복(祈福), 구도(求道), 개벽(開闢)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다. 복을 받고 화는 피하는 것을 종교적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위주로 해서 신행을 전개하는 것이 기복형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의 의지에 따라 화복이 나뉜다는 관념이 바탕이 된다. 한편, 세상과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와 그것을 체득하는 경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 수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구도형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리고, 개인 단위로써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혁명적인 변화를 전망하면서 이에 대비하거나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개벽형이다. 세상 전체가 바뀌어 일거에 종교적 이상이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어느 종교에나 이 3가지 요소는 다 있다. 교리의 차원에서는 뚜렷이 어느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거나 별로 강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행의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종교든 그 3가지 주제를 모두 다소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3가지를 다 다룬다 해도, 종교에 따라서 3가지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을 위한 노력이 구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고, 사회 현실을 개조하여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이 개벽에의 기대와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심이 결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내리는 은총으로 수렴된다. 개념은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지만, 위의 3가지 범주 가운데에서는 기복형에 해당한다.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맡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불교는 흔히 구도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역시 구도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념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구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한 자기 극복이다. 불교에서 인간의 병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세상과 자기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한 각종의 그릇된 행태이다. 그러므로 치료 방법은 곧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다. 물론 밖으로부터의 영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주변적인 것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이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처럼 극기가 중심 주제인 만큼 구도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도 고행 극기가 대종을 이룬다. 출가 수행생활 자체가 고행의 총화이다. 엄청나게 많고 엄격한 계율의 항목들, 특히 비폭력, 청빈, 금욕의 계율들이 모두 구체적인 고행의 처방들이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극복하는 데에 유일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것이므로, 간파되는 모든 안일과 집착에 대항하여 온갖 고행의 항목이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기복이나 개벽의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구도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교리에서나 실제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기복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교리상으로 원래 권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복을 비는 것이라는 뜻에 한정하지 않고, 논의를 좀더 넓은 마당에 가져가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개 중생의 세간적인 삶은 온갖 제약된 실존의 조건에 얽혀 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해당되지 않는, 무한히 넓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차원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조화(造化)의 힘을 감지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특성이다. 그것은 꼭 인격적인 신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이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나 조화주 같은 것은 꿈에도 믿지 않으면서도, 밤하늘 가득히, 또 깊숙히 인지를 압도하는 숫자로 박혀 있는 별들을 곰곰히 쳐다보고 있으면 흔히 무한이니 영원이니 오묘함이니 불가사의니 하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꼭 신적인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감득할 수 있는 세상의 성스러운 차원은 이른바 자력 신앙에 철저히 충실한 종교인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지하게 되는 것이고, 자력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불교인이 신격화된 붓다와 보살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감지하고 그 힘이 자기의 세간적 이익을 위해 작용하기를 비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러한 신행의 보다 깊숙한 원천에는 종교적 인간의 특징인 성스러움의 감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아주 간단하게 비불교적이라고 매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인들이 흔히 쓰는 불보살의 가피라는 말은 꼭 신격화된 불보살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법계라고 하는 탁 트인 무한의 마당에서 감지하는 성스러움, 신비한 힘을 표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불교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기 자신의 혁명적 변혁을 중심 주제로 한다고 해도, 세상전체를 단위로 한 변혁은 대망치 않으며 관심도 없다고 하면 그릇된 것이다. 특히 미래불인 미륵에 대한 대망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강력한 종교적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지상에 불국토를 구현하겠다는 이상은 불교인들에게 사회적 관심과 활동을 위한 원동력을 무한히 제공할 수 있는 샘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긴 세월 동안 불교의 사회적 역량이 단절된 곳이 특히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지역 대부분의 사정이다. 불교 스스로 선도하거나 깊숙히 참여치 못한 근대화의 과정 뒤에 갑자기 닥친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불교가 과연 어떻게 그 엄청난 사회적 역할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지는 예의 주시해 볼 만하다.
3. 불교와 다종교사회
(1), 현대와 다종교사회
지구촌과 다종교 사회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전통 사회는 여러 면에서 폐쇄적인 사회였다. 따라서 전통 사회는 그 성격상 여러 종교들을 한꺼번에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통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종교만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중동이나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사회의 경우 대체로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 도교가 함께 존재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사회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대체로 어느 하나의 종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다른 종교의 존재는 유명무실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전통 사회는 명실상부한 다종교 사회였다고 하기 어렵다.
반면에 일부 극단적인 예외를 제외한다면, 현대 사회는 개방된 사회로서 다양한 종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명실상부한 다종교 사회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밖에 모른 채 폐쇄주의를 고수하던 서구의 전통 사회가 타종교들을 또 다른 하나의 종교로서 동등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지난 1965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타종교는 종교가 아닌 혹세무민의 사설(邪說)이거나 미신일 뿐이었다. 동양의 전통 사회들은 타종교에 대해 비교적 덜 적대적이어서 타종교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는 것은 어떠한 종교도 끝내 포기하기 어려운 모든 종교의 본질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남녀간의 사랑과 같은 것이어서 다분히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종교의 어떠한 절대성 주장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이론이 없지는 않았으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예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의 짧은 기간에 상황은 급변했다. 급속도로 발달한 교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지구에는 한 개의 마을밖에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24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할 공간은 지구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는 그대로를 실시간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에 의해 시공간상의 절대 거리가 상대화됨으로써 지구는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러한 정황 때문에 지구촌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다종교 사회가 된 것이다.
한국과 다종교 사회
이러한 세계적 정황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이라고 하는 특수 지역만을 한정적으로 살펴보면 다종교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경우 등록된 종교 단체만 해도 수 백여 개에 이르고 종교 공동체임을 표방하고 활동하는 단체들은 수 천여 개가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공신력 있는 가장 최근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50.7%가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 인구 중에서 불교 신자가 23.2%로 제일 많고, 19.7%의 개신교, 6.6%의 가톨릭이 차례로 그 뒤를 잇는다. 유교 신자의 수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사 방법의 한계 때문이다. 종교에는 다른 사회 조직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지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제도 종교가 있는 반면에, 그런 조직을 갖지 못하지만 사회 생활과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교 무속 아프리카 종교 등의 확산 종교가 있다. 확산 종교는 발휘하는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종교 소속감은 훨씬 낮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은 조사 수치로 나타난 50.7%보다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한국의 종교 인구 50.7% 중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49.5%를 차지함으로써 한국의 종교인들은 대체로 불교 신자가 아니면 기독교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 4명 중에 한 명은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3명 중에 한 명은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소수이지만 유교와 같은 전통 종교,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한국 종교, 그밖에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신흥 종교의 신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먼 듯 여겨지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수 만 명에 이른다. 그래서 흔히 종교학자들은 한국을 두고서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등의 소규모 단위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모두 다종교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인간 사회의 최소 기초 공동체인 가정마저도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 형제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요즈음은 부부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주말이면 서로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사찰이나 교회로 따로 가거나 아니면 격주로 번갈아 다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다종교 현상은 우리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정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사람들에게 한국 가정의 이러한 다종교 현상은 지금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교 사회나 이슬람교 사회에서는 한국사람들처럼 개인 각자가 주체적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그 사회의 종교에 의해 선택 당하게 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국가는 이제 흔치 않지만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제국주의적 종교였다. 그 시대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성 종교를 거부하는 것은 곧장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다종교 상황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종교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가정의 기성 종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종교 선택에 거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가정이 핵가족화되면서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다종교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필연적 문제
이처럼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장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다종교 사회는 문화적인 은혜와 기회의 현장이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인류의 문화 유산 가운데서 종교 문화가 차지하는 양은 압도적이다. 종교 문화가 인류의 삶에 갖는 중요함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이전과 이후까지 걸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일 단일 종교 사회에 산다면 다양한 종교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그만큼 폭넓게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을 지도해 온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서구 문명을 형성한 두 뿌리 중의 하나인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선택하여 누리거나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이슬람교까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 이외에는 접촉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이슬람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문화 선택의 폭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종교 사회는 다양한 인류 문화의 유산을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는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한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함께 그것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란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 혹은 최고시하는 반면 남의 신앙은 오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종교는 신앙을 결코 기호(嗜好)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라면 된장을 좋아할 수도 있고 치즈를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기호품에 대한 우열을 논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렇지 않다. 신앙이란 기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이란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나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나 기독자가 아닌 사람은 불행한 사람 혹은 적어도 덜 행복한 사람이다. 불자나 기독자들은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종교인이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권면(勸勉)하지 않는다면 그는 덜 성실한 종교인이다. 사랑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사람을 성실한 기독자나 불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 들지 않는 불자라면 그는 자비심이 넘치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하려 하지 않는 기독자라면 그는 사랑이 충만한 기독자는 아니다. 성실한 종교인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성실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반드시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 즉 종교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갖는다. 문제는 모든 종교인의 이러한 "태도"는 같은 반면에, 전달하고자 하는 그 "내용"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내용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할 경우 긴장과 갈등은 예상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독선주의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남녀간의 애정 관계처럼 어느 정도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반목과 겹치게 될 때, 그것은 심각한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갈등과 알력은 동서양의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거의 예외 없이 존재했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을 한 종교가 독점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가 나누어 갖게 될 때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은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남달리 더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소개되면서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한국에서 다종교 상황이 야기(惹起)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해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 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던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서면 대체로 점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타종교를 향한 4 가지 태도
다종교 사회가 노정(露呈)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즉,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타종교를 대하는 우리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며, 종교인은 본성상 어느 정도 독선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타인의 신앙을 대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좀더 자세히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주의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대략 네 가지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먼저 배타주의를 들 수 있다. 배타주의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종교를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 중에서 이제 한국 사람들 자신의 일부가 된 기독교가 가장 대표적이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종교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주의적 태도를 갖는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여긴다.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면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면 오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기 때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허위나 오류일 뿐이기 때문에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은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이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적용했던 가치관을 자신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타종교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제국주의는 획일화를 추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러나 탈 현대의 포스트모던주의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한다. 배타주의는 이러한 현대 사조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전제 앞에서 양식 있는 지성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있다.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을 예외 없이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포괄주의는 일단 다른 종교들을 송두리째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다르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어느 정도 참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참의 요소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자신의 종교에 궁극적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를 우열 관계로 파악한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최고의 진리요 최종적인 진리인 것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적 포괄주의자는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교회 밖에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자들의 경건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그리스도인으로 그것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자들을 두고 아주 낮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예수를 예수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불자들이 기독자들을 익명의 불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낮은 단계의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결국 자신의 종교로 수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다만 포괄주의는 배타주의가 내놓고 휘두르던 칼을 꽃다발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종교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즉, 포괄주의 역시 자기 신앙의 완결성을 믿는다. 포괄주의는 어느 정도 개방적 태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그 개방적 태도는 자기 개방성이 아니라 타종교를 자기 종교로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전략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하나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 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放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정도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 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 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放棄)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끝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3). 종교간의 대화
대화의 불가피성
종교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분쟁의 문제를 결코 방치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세계적 유산을 한 줌의 재로 태워버리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지구촌의 현실은 세계 시민에게 결코 남의 문제일 수 없다. 다원주의는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문제들을 종교간의 대화로써 대처하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가 갖는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해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간에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분명한 이유는 신앙이 서로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세계 시민이 지켜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전제이다. 평화로운 공존은 분명 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이다. 종교간의 심각한 분쟁이 몰고 올 눈에 뻔히 보이는 공멸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다. 종교인들은 그보다 앞서 아직 남아있는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만큼 인류는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종교 외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종교적 선택을 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어쩔 수 없이 관용과 대화로 내몰린다면 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소극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일 수만은 없다. 이는 자기 개방을 기초로 한 열린 종교인으로서의 진리 추구나, 타종교인에 대한 이해나, 그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적 공존이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대화의 본래 목적들은 희생되고 만다. 배타주의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정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면, 평화적 공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평화적 공존이 우선적 목적이 되면 진리의 판단과 실천을 통한 행복 추구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유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공존도 대화의 분명한 목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의 필연적 이유를 종교 자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종교간의 대화의 고민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했다. 종교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타종교를 향한 대화의 시도는 전략적 위장이기 쉽다. 열성적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신앙을 타종교인에게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종교가 자기 완결성을 고집 하는 한 타종교를 향한 어떠한 대화의 시도도 전략일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다.
진정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 인정이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은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전제인 것이다. 즉, 전략적인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지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쇄신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본성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자기 독점권을 양보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간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의 고민이 자신의 신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하는 것이라면, 그 고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으로써 쉽게 해결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심한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는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현실적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은 "자신이 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타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반드시 타종교인을 위해 필연적인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타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성실한 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이나 자비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전제되며,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전제로 하며,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위해서는 정직한 대화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목 차
1. 종교란 무엇인가
1) 인간과 종교
2)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
3) 종교의 특징
4) 종교의 구성요소
2. 종교로서의 불교
1) 철학이냐 종교냐
2) 불교의 특징
3) 구도. 가피. 제도
3. 불교와 다종교 사회
1) 현대와 다종교 사회
2) 타종교를 향한 4가지 태도
3) 종교간의 대화
4) 불교와 타종교와의 대화
5) 종교간의 대화에 임하는 기본요건
4. 종교에 대한 이해
1) 원시종교
2) 서구 고대종교
3) 조로아스터교
4) 유대교
5) 그리스도교
6) 이슬람
7) 힌두교
8) 자이나교
9) 불교
10) 유교
11) 도교
12) 시크교
13) 일본 신도
14) 신종교
15) 민간신앙
5. 비교종교 연습
1. 종교란 무엇인가?
1) 인간과 종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종교는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의 삶과 함께 해 왔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라든가 매장지, 주거지 등 유물과 유적지에서 이미 종교적인 행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역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어느 문화권에서나 종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왔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종교는 인간이 이 세상과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또한 그 이해와 가치관을 표현하는 주된 통로의 하나로서도 종교의 역할이 매우 크다. 그리하여 종교는 관습을 비롯해서 규범과 윤리 등 사회제도와 예술, 정치, 경제, 국제 관계 등 온갖 분야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 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다양한 종교적 삶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인구 조사 자료에 의하면, 특정 종교의 신자라고 스스로 답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반이 넘는다. 통계 숫자로만 보면, 종교에 친화적이지 않은 이른바 과학의 시대, 또한 세속화의 추세가 진행되는 가운데에서도 종교 인구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굳이 특정 종교에 성직자나 신자로서 참여하지 않더라도, 어느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많건 적건 종교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시간의 단위를 이레를 한주로 묶어서 계산하면서 그 이레를 주기로 하여 정기적으로 휴일을 갖는 것은 이제 세계 공통의 관습이 되었다. 그런데 잘 알려졌다시피 그 관습은 유대-그리스도교의 우주 창조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정 공휴일을 살펴보면, 부처님 오신 날과 성탄절은 특정 종교 교조의 생일을 기리는 것이고 개천절은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제정된 기념일이다. 또한 가장 큰 명절인 설날과 추석에는 온갖 종교적 풍속이 집중되어 있다. 식목일은 한식과 겹쳐? 성묘라는 다분히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풍속의 날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종교적인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듯한 뜻밖의 곳에서도 종교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과학 기술의 산물을 향유하는 것과 종교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서로 결합하기에 어색하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이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 기술의 총화라 할 수 있는 무궁화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고사를 지냈다거나,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새로 구입하면 우선 그 앞에서 고사를 지내곤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동차를 새로 사면 떡 한 시루 올려놓고 촛불 켠 제상(祭床)을 마련해서 무사고, 무고장을 빌며 고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직접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기는, 종교학자들은 인류가 워낙 그 특질적 본성으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라는 말이 그 점을 가리킨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나 호모 파베르(homo faber),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등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가리키는 말들이 있는데, 그런 특성 이외에도 인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워낙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호모 렐리기오수스를 운위하는 것이다. 인간의 전모는 그런 여러 가지 본질적 특성을 다 고려해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행태에는 그 모든 방면의 특성들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특정 종교에 참여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외형적인 차원의 구별일 뿐이다. 아무리 무종교인이다, 또는 비종교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인간인 이상 그런 외형 아래 깊숙한 본성의 차원에서 이미 종교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다. 그 인간 본연의 종교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곧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사안을 두고 벌이는 담론의 핵심 주제가 된다. 그러니까 또한 역으로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문제가 되는 것이다.
2) 종교를 정의하는 문제
지성,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능력, 또는 경제 및 정치 행위 등으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운위할 때, 그런 특성들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을 가리키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정리된 보편적인 답변이 가능하다. 그러나 종교성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답변을 끌어내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것이 무엇이냐를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발휘되느냐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인간의 종교성이 발휘되는 모양, 즉 종교 현상이 대단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원시종교에서부터 고대 문명의 종교들, 그리고 지금껏 전 세계의 많은 인류가 참여하고 있는 세계 종교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쉽게 싸잡아 부르는 인간의 행태는 사실상 극히 다양한 모습과 내막의 파노라마를 펼쳐 보인다.
우리가 종교라는 말과 가장 흔히 연관시키는 것이 신(神) 개념, 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 종교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 개념과 신에 대한 신앙을 포함하지 않는 종교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에서 그것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 개념을 크게 확장하여, 도(道)라든가 붓다 등도 편의상 신이라 부르자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종교에서 신과의 관련이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신이라는 개념,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개념이 너무 다양한 것들을 한꺼번에 가리키게 되어 결국 의미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된다. 그런 규정은 인간의 종교성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난관으로 인해서, 종교학자들은 종교를 정의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래도 종교를 정의해 보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여러 가지 종교 정의가 제시되었다. 한 때에는, 특히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학자들이 종교의 기원을 찾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종교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찾으면 그것이 곧 종교의 본질을 말해 주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기원을 찾는 방법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을 원용하였다. 진화론은 워낙 생물의 진화 과정에 관하여 제시된 이론이지만, 생물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모든 부문에도 적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진화론적인 시각의 핵심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단순한 상태에서부터 복잡한 상태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당시 세계 각지로 탐사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다양한 종교에 관해 수집되는 자료의 양이 급격하게 불어나고 있었는데, 이 진화론적 시각을 그에 적용하여 종교의 진화 과정을 정리하고 기원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몇 가지 들어보자면, 우선 종교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들은 원래 해, 달, 별, 바람, 벼락, 계절 등 자연 현상을 그렇게 상징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 자연 현상에다가 이름을 붙이고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작용과 힘을 묘사하다가 보니, 점차 정말 의지를 가지고 세상일을 움직이는 신이 따로 있는 듯이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물과 현상에 각자 눈에 안 보이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이른바 아니미즘(animism), 즉 정령신앙(精靈信仰)이 종교의 시원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정령신앙보다 더 단순하게 사물과 현상에 작용하는 어떤 힘을 믿는 것이 종교의 기원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죽은 사람을 신격화하는 조상숭배가 종교의 원초적 형태라고 하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주술로부터 종교가 발전해 나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세상일들이 일정한 인과법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의도하는 대로 어떤 일을 일으키거나 방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원인이 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주술이다. 다만 그 인과법칙이 과학적,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릇되게 상정된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본떠 인형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해를 끼치면 그 실제 사람에게 비슷한 해악이 일어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그 인과율의 효능을 좌우한다고 생각되는 영적인 존재들에게 빌거나 그들의
기분을 맞추도록 제의(祭儀)를 지내는 종교 행위로 발전해 갔다는 것이다. 또 어떤 학자들은 개개인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그 삶을 규율하는 사회의 힘이 신적인 존재로 투사되었다고 하는 종교의 사회적 기원론을 제시하기도 했고, 인간 본연의 공포감, 또는 콤플렉스가 종교를 낳았다고 하는 심리학적 이론도 제기되었다.
종교의 기원을 찾는 그런 이론과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을 결합하면, 종교가 어디에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발전해 왔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도식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사물에 깃 든 힘에 대한 신앙이든 주술이든 간에 결국에는 정령신앙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차차 이 세상에 여러 신들이 있다고 믿는 다신교(多神敎, polytheism) 단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즉, 정령들이 반드시 특정 물체에만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신의 형태와 능력을 갖추게 된 단계이다. 다음에는 신들 사이에 계층화가 일어나 특별히 강력한 높은 신이 부각되는 이른바 대표신교(henotheism) 단계가 되고, 그 과정이 심화되어 결국에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전능의 신만을 섬기고 나머지는 다 그것에 흡수되어 도태되는 유일신교(monotheism)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잡다하게 수집되는 여러 가지 종교 자료들을 각자 그 진화의 도식 속 적절한 자리에 배치시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진화론적 도식은 곧 허물어지게 되었다. 특히, 유일신교의 특징인 최고신, 지고(至高)한 존재에 대한 신앙이 역사적 발전의 꼭대기 단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나 치명타가 되었다. 극히 단순하고 유치한 수준의 문명에 머물고 있는 원시 사회에서도 유일신교의 신 관념에 상응하는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자 절대적인 최고신에 대한 신앙이 발견되었고, 더욱이 그것이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진화론적 도식에 정반대되는 역(逆)의 과정이 종교의 역사적 전개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나왔다. 원래 유신교로부터 종교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잡다하게 이해되어 다신교, 애니미즘, 그리고 주술이 차례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때 유행했던 진화론적 시각의 몰락은 학자들로 하여금 많은 반성을 하게 하였다. 다양한 종교현상들을 서구의 유일신교 문화를 기준으로 해서 재단했다는 점, 그리고 이성(理性)을 최고의 준거로 여기며 인지(人智) 발달 수준을 서구적 합리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가늠하는 태도로 임했다는 점 등이 특히 비판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종교의 기원을 추적하고 그 진화의 과정을 그려본다고 해도 그 모두가 사변적 추정에 불과하고, 사료에 입각해서 검증할 수도 또 반증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종교 연구자들은 종교의 기원과 진화 과정을 추적하기보다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는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양상으로 종교적 사유와 행위가 구체적으로 전개되는지, 등등의 주제를 가지고 종교에 대해 서술하고자 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즉, 모든 종교에 공통된 본질적 요소를 찾아서 그것을 종교의 기원으로 여기며 그것으로써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실제로 다양하게 벌어지는 종교의 모습이 어떠하며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서술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진화론적인 관심에서 시작하여 종교 연구의 추이를 대강이나마 길게 언급한 것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어떤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헛된 수고를 덜고 의미 있는 결실을 낼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시사해 주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는 흔히 종교에 보편적으로 공통된 어떤 핵심적 본질을 규정함으로써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내리려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이는 귀납적 결론으로 제시되는 답이 아니라 연역적 선언의 성격을 지닌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의 본질 규정은 대개 특정 개인이나 문화권에서 익숙한 종교 개념을 기준으로 삼아 내려지게 마련이다. 특정 문화권의 종교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종교란 이런 것이다 하고 선언하면, 그것이 하나의 선험적 전제가 된다. 그에 맞지 않는 것들은 통념상 아무리 종교로 인정되어 온 것이라 할지라도 종교의 범주에서 억지로 배제시키게 된다. 아니면, 종교의 범주에 끼워 준다고 하더라도 역시 뭔가 좀 잘못된 종교로 치부하게 된다. 불교나 유교를 두고 종교냐 아니냐 따지는 것도, 종교라고 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신에 대한 신앙으로 규정하는 유신론적 문화 배경 때문이다.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주어진 선입관이나 개인의 취향에 의거해 성급한 규정을 내리기보다는, 우선 통상 종교라고 불리우는 현상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있는 그대로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종교의 기원에 관한 이론들이 무너진 데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종교를 어떤 하나의 측면, 특히 종교 자체에서 압도적으로 중시되는 것이 아닌 측면에 준거하여 규정하려고 하면 종교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이론들은 대부분 계몽주의에 연속되는 합리주의의 시각에서 종교에 접근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선 인지(人智)의 발달이 종교를 포함해서 문화 전체의 역사적 발전에 관건이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임했던 것이다. 아니미즘이든 주술이든 조상숭배든 모두 세상과 인간 자신에 대해 합리적으로 깨우치지 못한 미혹한 인지 때문에 발단된 것으로 보며, 그 이후의 전개 과정도 모두 인간 인식의 변천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합리주의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의 문제 이외의 영역을 방대하게 펼쳐 보인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합리주의적인 관심과 지적 인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종교를 규정하려고 하다 보면, 종교의 활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그 너머의 방대한 부분에 대해 눈길을 주지 못하거나 그것을 왜곡되게 보기 십상이다. 인간이 한 개체로 이 세상에 날 때부터 주어지는 근본적인 제약 조건들을 넘어서 무한과 영원을 지향하는 인류의 꿈이 펼쳐지는 곳이 종교이고 바로 거기에서 종교가 인류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 온 원동력이 나왔는데, 합리적 인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두는 시각에서는 그 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3) 종교의 특징
그러한 교훈을 명심할수록 종교에 대해 간략히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그런 와중에서나마 종교 연구자들이 그 동안 많이 사용해 온 종교의 정의 몇 가지를 참고하면 종교가 일반적으로 다른 인간 현상과 구별되는 특징을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종교를 "경험적인 존재와 초경험적, 초월적 존재를 구별하면서 경험적인 것이 초경험적인 것에 종속된다고 믿는 일단의 신앙과, 또한 그러한 신앙의 표현하는 일단의 상징(그리고 그런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는 가치)"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졌다.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자연 및 인간의 존재 질서와, 초경험적이라 할까 아니면 초자연적이라 할 수 있는 차원의 질서를 구별하고 그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는 데에서 종교의 한 특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성(聖)과 속(俗)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종교의 특질을 보는 견해도 매우 널리 받아들여졌다. 초경험적인 것을 성스럽다고 하고 일상적 경험의 세계가 속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이 정의도 앞의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이 그 두 가지 질서 또는 차원에 대해 갖는 가치판단과 그에 상응하는 행위의 특질이 보다 직접적으로 시사된다. 성스러움에 대해 인간은 외경, 경이의 감정과 태도를 보인다. 루돌프 옷토(Rudolf Otto)는 성스러움의 정서를 분석하여 장엄함에서 느끼는 두려움, 신비감, 그리고 매혹됨이라고 개념화하였다. 압도적이고 강력한 힘과 장대한 규모의 초일상적 차원을 감지할 때에는 전율을 일으키는 두려움이 엄습하며, 또한 그 세계의 불가사의함, 유현(幽玄)함이 신비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인간이 그 세계를 감히 범접치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성스러움의 정서에는 반대로 그 세계에 이끌려 가게 하는 느낌도 더불어 있다. 성스러움의 세계, 그것은 두렵도록 장엄하고 장대하며 신비하여 그것을 감지하는 인간은 그 앞에서 위축되지만, 한편으로 그에 이끌려서 그것을 향해 가려는 열망이 있다.
근래에 또 많이 운위되어 온 것으로 종교는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한 정의가 있다. 궁극적인 권위와 가치를 갖는 것과 그렇지 못하고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중요성만 갖는 것을 구별하는 점도 종교의 특징임에 분명하다. 더욱이 종교에서 궁극적인 관심으로 삼는 것은 그 궁극성이 인간이 다른 어느 부문에서 기울이는 관심에 비할 수가 없다. 이 정의를 제시한 폴 틸릭히(Paul Tillich)도 언급했듯이, 궁극적인 관심사와 그렇지 못한 관심사가 충돌하는 경우에는 기꺼이 후자를 포기한다. 재산, 지위, 가족, 심지어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종교적 신념 상의 궁극적 관심을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포기하는 종교인들이 종교사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어떤 일에 대해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전심전력으로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 그 일에 거의 종교적으로 매달리고 있어'라든가 '그 사람한테는 그 일이 곧 종교야'하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이것도 종교의 한 특징이 궁극적 관심사와 그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는 데에서 파생된 어법인 것이다.
4) 종교의 구성 요소
종교는 다양한 부문들이 유기적으로 복합된 총체적 현상이다. 초경험적이고 성스러우며 궁극적인 가치의 차원에 관한 체험을 인간은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매체와 통로를 통해서 표출하고, 그 모든 표상이 다 종교의 구성 요소가 된다. 요아힘 바하(Joachim Wach)는 그 종교체험의 표상들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이론적 표상이고 둘째는 행위를 통한 표상이며 셋째는 사회적 기제를 통한 표상이다.
종교체험의 이론적 표상은 흔히 쓰는 말로는 종교사상, 교리,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그 주제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신(神)이라든지 도(道), 깨달음 등 궁극적인 존재나 원리, 경지에 관한 이론적 진술이 있다. 다음에 우주에 대한 이론이 있다. 대개 이 세상은 어디에서 비롯해서 어떻게 진행되다가 어떻게 끝난다거나, 어떤 구조로 되어 있다거나, 그 가치는 어떻다거나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 설명이 제시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인간에 대한 이론이 있다.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운명은 어떤 것인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나,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어떻게 살아야 좋은 것이고 어떻게 살면 안 되는가, 등등의 주제를 다루는 것이다.
행위를 통한 표상에서 대표적인 것이 제의(祭儀)이다. 거기에는 예배, 기도, 노래, 춤, 강설 등 다양한 행위가 동원된다. 그래서 종교는 인류의 예술 활동에 주요한 영감 제공자 역할을 해 온 것이다. 궁극적 경지의 실현을 위한 수행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포교 활동, 봉사 활동도 종교 행위의 중요 한 부문이다. 그밖에 사소한 행위를 통해 종교적 관심이 표출되는 예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한 예로, 종교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갖추며 새삼스럽게 세차를 하는 것도 다 종교행위인 것이다.
종교는 항상 집단을 형성한다. 요즘에는 일인종교(一人宗敎)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궁극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체험은 있는데 거기에 그것이 전파되려고 하는 에너지는 들어 있지 않다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한 것이다. 혈연이나 지연 등 자연적인 조건에 의해 형성된 집단이 동시에 종교집단을 겸하는 경우도 있고, 종교적 신념을 공유하고 종교행위를 함께 하는 것이 일차적인 동기가 되어 형성되는 종교집단도 있다. 원시종교, 민족종교의 집단이 앞의 것에 해당한다. 우리가 집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가족이라는 혈연집단이 곧 종교집단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이른바 세계종교와 신종교의 집단은 뒤의 것에 해당된다. 종교가 신념이나 예배행위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것이 종교의 다면성을 극도로 높여 놓는다. 종교집단도 하나의 사회집단인 까닭에, 조직과 규범 등 제도의 틀을 지니게 되고 정치, 경제의 요소도 내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모여서 종교를 구성한다. 종교에는 철학과 예술과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 온갖 부문이 다 연관된다. 그래서 순수하게 종교적이기만 한 종교현상은 없다는 말도 있다. 그 가운데 어느 부문만을 가지고 종교를 운위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에 대해 한 마디씩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윌프레드 캔트 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라는 종교학자는, 종교를 탐구하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꿈이 서린 곳을 밟고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극히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것은 종교를 그 원상대로 보지않고 선험적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고 훼손해 버리는 데 대한 우려이다. 근대 학문은 분석을 전가의 보도로 삼는다.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인문 현상에 대해서도 그 구성을 낱낱이 해부해 보는 것을 그 현상에 대한 지식을 취득하는 첩경으로 여긴다. 그러나 해부된 모든 부분들을 취합한다고 해서 한 생명체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는 극히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된 총체적 현상이고 그런 유기적 총체로서만 비로소 종교로서의 생명을 발휘한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정 부문에 초점을 맞추어 해부하고 그것으로 종교 전체를 규정하거나 설명하려고 할 때, 그것은 훼손된 종교, 심하게는 종교의 시체에 대한 이야기가 될 뿐이다.
종교(宗敎, religion) -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 인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힘을 빌려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죽음의 문제,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은 오래이며, 그 동안 많은 질적 변천을 거쳐 왔으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내적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특징
초경험적·초자연적이면서 의지를 가진 존재로 믿어지는 것이 신이나 영혼이며, 원리로 인정되는 것이 법·도덕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사상이나 이론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으로 만자(卍字)나 십자가(十字架)는 물론, 신상(神像)과 같은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또 신의 초인간적 행동이 신화로서 전해지고 숭배의 일정한 형식인 의례(儀禮)가 행해지는데, 이러한 종교의 특징이 고대로부터 철학자·지식인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경멸심을 일으키게 하고, 과학의 인식과 모순된다고 지적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상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체험할 수 없는 구체성·실재감(實在感)이 사람들의 종교를 지탱해 가는 매력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신앙을 함께하는 자들끼리 신앙적 공동체를 갖는 데 있다. 같은 신앙을 가진다는 원칙 위에 결성된 집단을 교단(敎團)이라고 하는데, 교단은 승려나 목사와 같은 전문가를 양성하여 신자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며 공동체의 유지를 도모하는 한편, 외부에 대해서는 새로운 신자를 획득하는 행동, 즉 전도(포교)를 한다. 또한 교단에는 사회에서의 지배적인 종교를 볼 때,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입하는 경우와, 자기의사에 따라 가입하는 경우가 있다.
2. 기원설
종교가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이유로 발생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이미 원시시대, 수렵의 성공을 기원하는 벽화나 장법(葬法)에서도 영혼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기원설의 자료가 된 것은 지금도 원시적 생활을 계속하는 미개인의 종교였다.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믿어지는 주물(呪物)을 기원으로 보는 페티시즘설(說), 사자(死者)의 숭배를 최고(最古)로 보는 설, 꿈과 죽음의 경험에서 육체 이외에 영혼을 상상한 것이 기원이라고 보는 애니미즘설, 마나(에너지와 같은 힘에 대한 원시신앙)를 애니미즘 이전의 신앙형태로 보는 마나이즘(manaism)설, 동식물과 인간과의 밀접한 관계의 신념을 원초(原初)로 보는 토테미즘(totemism)설 등이 19세기 말 이래 잇달아 제창되었다.
또 물질문화가 빈약한 미개민족에게 인격을 가진 지상신(至上神)이 많다는 점에서 연유된 원시 지상신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단순한 관념으로부터 복잡한 관념으로의 경과에서 파악되는 심리적 억측에 의거하고 있으므로 실증적인 근거는 희박하다.
3. 전개과정
미개종교에서는 각자가 당연한 습관으로서 전해진 것을 믿고 있으며, 개인적인 면보다 사회적인 면이 강해서 제사(祭祀) 등의 의례가 그 중심이 되었다. 다만 종교를 주재하는 신관(神官)의 계급이 생기고 국가형성의 진전과 더불어 각지의 신들이 통합되고, 신들의 친자관계와 그 역할 등이 체계화되었다. 이것이 전형적인 다신교(多神敎)의 시대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이집트 ·오리엔트제국(諸國) ·중국 ·페루에서와 같이 종교가 국가에 의하여 뒷받침되고, 국왕은 신 또는 신의 자손으로 여겨진 때도 있었다. 종교사상(宗敎史上) 최대의 질적 전개는 기원 전후 약 10세기 동안에 세계 각지에서 일어났다.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의 전개(BC 8세기), 이스라엘 예언자의 활약(BC 8∼BC 7세기), 중국의 공자를 비롯한 제가(諸家)의 활동(BC 6∼BC 5세기), 그리스의 탈레스로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이르는 철학의 발생과 전개(BC 6세기 이후) 등이 주요한 것들인데,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미치고 있다. 이들 사상가의 특징은 합리화라고는 하지만 신화나 주술(呪術)에서 분리하여 체계적인 사상을 부여함으로써 철학 ·윤리 등이 독립하고,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계도 이루어졌다.
4. 세계종교
세계적인 여러 사상이 나타난 시기에 발전한 종교사상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현세부정의 사상이다. 미개 ·고대의 시대에는 타계(他界)관념은 있었어도 현세의 가치는 부정되지 않았는데, 이 시기의 종교는, 인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전생(轉生)하며 고통을 경험하여야만 된다든지, 타고난 죄(원죄)의 관념 등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에는 이미 현세의 인간관계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구제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내세에서 달성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족 특유의 종교로부터 세계적 ·보편적인 종교가 출현하였다.
그 중에서도 BC 5세기에 힌두교에서 나온 불교, 1세기에 유대교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 7세기에 아라비아의 민족종교에서 발생한 이슬람교가 가장 세력을 떨쳤다. 이 종류의 종교는 석가, 예수 그리스도, 마호메트와 같은 교조가 있어서 각기 교단을 형성하고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전도(포교)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변천이 있었으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조직은 존속되어 정치적 집단에 비해 훨씬 오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5. 근대 이후
근대에 들어와서 종교의 위치는 크게 변화하였다. 예술·도덕 등이 종교로부터 분화되고, 정치·경제·교육 등의 사회제도에서의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신앙의 자유, 철저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 등이 그 일례이다. 또 한편으로는 계몽사상과 과학의 발전이 종교의 진리성과 존재의식을 위협하고 있고, 따라서 종교비판도 활발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교는 끊임없이 그 현대적 존재의의가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2. 종교로서의 불교
1. 철학이냐 종교냐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는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이는 주로 그리스도교 신학자들로부터 나오는 견해이다. 신에 대한 신앙을 핵심으로 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는 것이 그런 견해의 주된 근거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서구의 유일신 종교 문화를 준거로 해서 종교를 규정한 데 입각한 이야기일 뿐이다. 유태-그리스도교 전통의 유일신 신앙을 준거로 하는 종교 개념을 적용하면 그 전통 이외의 것은 모두 종교가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불교를 비롯해서 유교, 도교, 힌두교 등 동양의 주요 종교전통들을 모두 종교의 범주에서 제외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 문화 중심주의의 독단일 뿐이다. 마루 종(宗), 가르침 교(敎)자를 합쳐서 만든 종교라는 말은 아마도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번역으로 창안된 것이겠지만, 종(宗), 교(敎), 학(學)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금 우리가 쓰는 종교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렇게 보면 불교, 유교, 도교 등을 종교가 아니라고 함은 어불성설이요 오히려 서양 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religion이라고만 불러야 할 것이다.
어느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를 이제 더 이상 종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하였다. 기독교 이외의 온갖 잡다한 종교현상을 다 싸잡아 종교라고 불러대니 그 말을 더 이상 기독교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그런 잡다한 종교들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될 수는 없으니, 종교라는 말을 이제는 주어버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라고만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religion이라는 말을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쓰고 싶어하는 문화적 독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와 철학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려는 시각 자체가 동양 종교 전통에는 걸맞지 않는다. 신에 대한 신앙을 종교라 하고 이성으로써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지식을 얻는 것을 철학이라고 구분하는데, 동양 종교 전통에서는 워낙 그런 식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세상과 인간의 궁극적인 진상[宗]을 체득하고 그것을 가르치며[敎] 배우는 데[學] 이성을 동원하느냐 신앙을 통하느냐 하는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배움, 수행을 불퇴전이게 해주고 이성이니 감성이니 오성이니 하는 것을 다 동원한 전인적 체득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확인하며 그 구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니 종교와 철학이 한 묶음인 것이다.
앞에서 종교의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데에서 드러났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교에는 이미지적 탐구의 측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종교적 지식의 대전제를 초월적, 초경험적인 계시나 깨달음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그 지식의 추구와 정리에는 내내 이성이, 철학적 사유가 작동하는 것이다. 다만, 철학은 철저히 이성만으로 지식을 추구하고 정리하며 이성이 가 닿을 수 있는 곳 너머는 인정치 않는 반면에, 종교는 처음부터 그 너머까지를 포함하는 점에서 다르다. 그리고 불교가 처음부터 이성 너머의 마당까지를 포함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란 지적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으로 획득하는 지식의 족쇄를 벗어나는 데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지식보다는 실천에 두는 비중이 크다는 데 있다. 철학에서 중시하는 실천이란 이성을 통해서 경험적으로 관찰한 것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즉 모순이 없이 정연하고 일관된 지식 체계로 정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상과 인간의 진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따라가 보면, 어느 만큼까지는 대단히 논리정연하고 명증적이지만 결국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역설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게 된다. 중도(中道)를 비롯해서 연기(緣起), 공(空), 3신불(三身佛)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핵심 개념들이 다 그렇다. 그런 대목에서 나오는 표현이 부사의(不思議)라든가 묘(妙)하다는 말이다.
논리적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가르침의 실천을 밀고 나갈 것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교의가 보살도(菩薩道)이다. 보살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불교인의, 적어도 대승불교인이 당장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실천하여 구현하려는 삶이 그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보살도이다. 보살도의 실천 항목인 6바라밀다(六波羅密多)을 보아도 그렇다. 그 중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 받는 물건, 이 3가지 상(相)에 매임이 없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하라고 한다. 그러니 모든 상을 여읜 각자(覺者), 붓다만이 완벽한 보시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살은 붓다가 아니어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모순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은 불교의 신행에서 별로 의미가 없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너머의 종교적 이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실제로 가장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종교적 신행은 그밖에 어디에선가 따로이 논리 정연하게 이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도 여느 종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또 하나 불교가 철학만은 아닌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철학도 그에 관심을 둘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실용적"인 관심이 철학의 우선적인 초점이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철학은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비를 원동력으로 하지는 않는다. 지적 호기심이 철학의 일차적인 원동력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지적 호기심은 이른바 불도(佛道)에 이르는 방편적 통로는 될지언정 불도(佛道)를 걸어 가는 데에는 별무소용이다. 논리적으로 모순되므로 지적 호기심을 여지없이 좌절시키는 실천 항목들을, 모순이든 말든 온몸으로 이행해 나가는 것이 불도를 걷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는 3귀의(三歸依)에서 불교의 종교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깨달은 이, 즉 붓다와, 그의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에 귀의한다는 것인데, 귀의라는 것이 이미 종교적인 행위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거기로 돌려 의탁하는 것이 귀의이다. 지적으로 아직 확인을 못했더라도 믿음으로써 거기에 자기를 전적으로 투여한다는 것이니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불교의 특징
앞에서 이야기한 종교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적인 점이 잘 나타나는 항목 몇 가지를 짚어보기로 하자. 우선 이론적 표상의 주제 가운데 궁극적인 존재, 원리 또는 경지에 관해서, 불교는 잘 알려졌다시피 신을 그 자리에 놓지 않는다. 석가모니(釋迦牟尼), 아미타불(阿彌陀佛), 약사여래(藥師如來),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등을 다분히 신으로 관념하고 숭배하는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령의 불교 교의에 입각한 신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붓다, 보살이 아니더라도, 불교에도 신중(神衆)이 있고 그들을 신앙하는 행위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런 신들은 다 중생에 속한다. 궁극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의 궁극적인 진상으로서 연기법(緣起法)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 이른바 신의 섭리라고 하는 것에 상응하는 불교의 궁극적 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연기법은인격적 신이 그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섭리와는 달리 어느 누가 만든 것도, 시작된 때도 없어질 때도 없는 세상의 본래 진상을 가리킨다. 전자를 '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 하고 후자는 '비인격적 실재'를 믿는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그 연기법을 깨달은 이가 궁극적 존재이고 그 깨달음의 세계가 궁극적인 경지이다. 그러니까 불교의 궁극적 존재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세상의 진상을 깨달으면 궁극적인 존재이다. 심지어, 누구나 사실은 이미 깨달아 있다고 하는 본각(本覺) 사상에 의하면, 모든 중생이 이미 다 궁극적인 존재이다. 불교가 유신론적 종교와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의 이론적인 면 가운데 우주론과 인간론을 보자면, 불교에는 창조신화가 없다. 이 세상과 인간이 언제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또 언제 어떻게 해서 멸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설명할 것도 관심을 둘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 문제를 무기(無記)라고 일컫는다. 그런 의문은 무아(無我), 무상(無常), 연기(緣起) 등 세상의 진상을 모르는 어리석음[痴]과,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일으키는 성냄[瞋] 및 탐냄[貪] 등 중생의 질병을 고치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장애가 된다. 그런 쓸 데 없는 문제에 매달리다가 정작 급한 병 고치기에 관심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의 우주론을 대표하는 개념이 법계(法界)이다. 여기에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연기(緣起)이다. 삼라만상이 각자 개별자이면서도 동시에 연기적인 존재로서 한덩어리로 얽혀 있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인 것이다. 모든 것이 일자(一者)에서 나왔고 그리로 귀결된다는 교의는 여러 종교에서 볼 수 있지만, 불교에서처럼 무수한 개별자가 각자 개체인 동시에 그 개체성을 무화시키지 않는 채 모두 하나라는 극단적인 역설을 이야기하는 예는 찾기 힘들다.
불교 인간론의 특징은 앞에서도 시사했듯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인간에서 비롯되고 인간에 의해서만 해결된다고 하는 데 있다. 인간 밖의 어떤 존재나 힘이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강력한 존재가 주는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믿는 면도 있다. 그러나 교의만을 가지고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들도 신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은 순전히 신의 절대적인 의지에 달린 은총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인과응보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여느 주요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도 그 긴 역사 동안 장엄한 제의(祭儀)형식들을 다양하게 구축해 왔다. 붓다를 예배하는 예불의식, 설법이 중심이 되는 법회가 있는가 하면 천도제(薦度祭)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제의가 개발되었고, 경전의 음송(音誦)과 음악, 춤, 서화, 조각, 건축 등 모든 예술적 매체를 종교행위에 활용한다. 우리 나라 문화재의 절대적인 부분이 불교 문화재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불교가 한국 문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그리고, 불교의 제의는 불교가 정착하는 곳에 따라 그 지역의 문화와 풍토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모양을 형성해 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물론 어느 종교의 제의나 지역에 따라 다소간 그 지역의 색깔을 입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 종교들과 견주어 보면, 불교의 제의에서는 다른 어떤 종교의 경우보다 지역적 특색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종교집단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출가 수행자 집단을 들 수 있다. 물론 가톨릭의 경우도 출가 수행자들의 집단이 중심이 된다. 그러나 그 외의 세계 종교들에서는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가톨릭과도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출가자 사이에서도 사제와 수사가 구분된다. 그러나 불교에서 출가자는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사제의 역할을 담당한다.
3. 가피(加被), 깨달음, 제도(濟度)
종교적 신념의 유형을 기복(祈福), 구도(求道), 개벽(開闢)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 있다. 복을 받고 화는 피하는 것을 종교적 관심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위주로 해서 신행을 전개하는 것이 기복형이다. 여기에서는 주로 초월적인 힘을 지닌 존재의 의지에 따라 화복이 나뉜다는 관념이 바탕이 된다. 한편, 세상과 인생의 궁극적인 원리와 그것을 체득하는 경지에 관심을 두고 이를 위해 수행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 구도형이다. 여기에서는 개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리고, 개인 단위로써가 아니라 이 세상 전체의 혁명적인 변화를 전망하면서 이에 대비하거나 그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개벽형이다. 세상 전체가 바뀌어 일거에 종교적 이상이 현세에서 이루어진다는 기대가 여기에서 작동한다. 어느 종교에나 이 3가지 요소는 다 있다. 교리의 차원에서는 뚜렷이 어느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부인하거나 별로 강조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신행의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종교든 그 3가지 주제를 모두 다소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 3가지를 다 다룬다 해도, 종교에 따라서 3가지 가운데 가장 중시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을 위한 노력이 구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고, 사회 현실을 개조하여 이상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이 개벽에의 기대와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관심이 결국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이 내리는 은총으로 수렴된다. 개념은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지만, 위의 3가지 범주 가운데에서는 기복형에 해당한다. 초월적 존재의 의지에 맡겨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불교는 흔히 구도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역시 구도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념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이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구도의 핵심은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한 자기 극복이다. 불교에서 인간의 병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세상과 자기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한 각종의 그릇된 행태이다. 그러므로 치료 방법은 곧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 데 있어서 전적으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다. 물론 밖으로부터의 영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주변적인 것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이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처럼 극기가 중심 주제인 만큼 구도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도 고행 극기가 대종을 이룬다. 출가 수행생활 자체가 고행의 총화이다. 엄청나게 많고 엄격한 계율의 항목들, 특히 비폭력, 청빈, 금욕의 계율들이 모두 구체적인 고행의 처방들이다.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극복하는 데에 유일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길이 있다는 것이므로, 간파되는 모든 안일과 집착에 대항하여 온갖 고행의 항목이 개발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 기복이나 개벽의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구도에 비해 덜 중요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은 교리에서나 실제에서나 다 마찬가지이다. 기복이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교리상으로 원래 권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꼭 복을 비는 것이라는 뜻에 한정하지 않고, 논의를 좀더 넓은 마당에 가져가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개개 중생의 세간적인 삶은 온갖 제약된 실존의 조건에 얽혀 있다. 그런데 그런 조건이 해당되지 않는, 무한히 넓고 영원하고 자유로운 차원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조화(造化)의 힘을 감지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의 특성이다. 그것은 꼭 인격적인 신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이 감지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나 조화주 같은 것은 꿈에도 믿지 않으면서도, 밤하늘 가득히, 또 깊숙히 인지를 압도하는 숫자로 박혀 있는 별들을 곰곰히 쳐다보고 있으면 흔히 무한이니 영원이니 오묘함이니 불가사의니 하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꼭 신적인 존재를 개입시키지 않더라도 감득할 수 있는 세상의 성스러운 차원은 이른바 자력 신앙에 철저히 충실한 종교인이라 해도 얼마든지 감지하게 되는 것이고, 자력 신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많은 불교인이 신격화된 붓다와 보살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성스러움을 감지하고 그 힘이 자기의 세간적 이익을 위해 작용하기를 비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튼 그러한 신행의 보다 깊숙한 원천에는 종교적 인간의 특징인 성스러움의 감지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며, 아주 간단하게 비불교적이라고 매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인들이 흔히 쓰는 불보살의 가피라는 말은 꼭 신격화된 불보살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법계라고 하는 탁 트인 무한의 마당에서 감지하는 성스러움, 신비한 힘을 표상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무리 불교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한 자기 자신의 혁명적 변혁을 중심 주제로 한다고 해도, 세상전체를 단위로 한 변혁은 대망치 않으며 관심도 없다고 하면 그릇된 것이다. 특히 미래불인 미륵에 대한 대망은 불교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강력한 종교적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그리고 지상에 불국토를 구현하겠다는 이상은 불교인들에게 사회적 관심과 활동을 위한 원동력을 무한히 제공할 수 있는 샘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다만, 전통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긴 세월 동안 불교의 사회적 역량이 단절된 곳이 특히 대승불교의 요람이었던 지역 대부분의 사정이다. 불교 스스로 선도하거나 깊숙히 참여치 못한 근대화의 과정 뒤에 갑자기 닥친 전혀 새로운 사회 환경 속에서, 불교가 과연 어떻게 그 엄청난 사회적 역할의 잠재력을 일깨울 것인지는 예의 주시해 볼 만하다.
3. 불교와 다종교사회
(1), 현대와 다종교사회
지구촌과 다종교 사회
다종교 사회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어느 하나의 종교가 압도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여타의 종교는 있으나마나한 경우라면 다종교 사회로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다종교 사회의 충분 조건은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전통 사회는 여러 면에서 폐쇄적인 사회였다. 따라서 전통 사회는 그 성격상 여러 종교들을 한꺼번에 수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전통 사회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종교만 존재했었던 것은 아니다. 중동이나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사회의 경우 대체로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 도교가 함께 존재해 왔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사회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대체로 어느 하나의 종교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다른 종교의 존재는 유명무실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전통 사회는 명실상부한 다종교 사회였다고 하기 어렵다.
반면에 일부 극단적인 예외를 제외한다면, 현대 사회는 개방된 사회로서 다양한 종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명실상부한 다종교 사회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신앙밖에 모른 채 폐쇄주의를 고수하던 서구의 전통 사회가 타종교들을 또 다른 하나의 종교로서 동등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지난 1965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타종교는 종교가 아닌 혹세무민의 사설(邪說)이거나 미신일 뿐이었다. 동양의 전통 사회들은 타종교에 대해 비교적 덜 적대적이어서 타종교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하는 것은 어떠한 종교도 끝내 포기하기 어려운 모든 종교의 본질적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은 어떤 면에서는 남녀간의 사랑과 같은 것이어서 다분히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종교의 어떠한 절대성 주장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 했던 이론이 없지는 않았으나, 현실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예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의 짧은 기간에 상황은 급변했다. 급속도로 발달한 교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은 지구 전체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지구에는 한 개의 마을밖에 없다. 마음만 먹는다면 24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할 공간은 지구상에서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제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하는 그대로를 실시간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교통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에 의해 시공간상의 절대 거리가 상대화됨으로써 지구는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러한 정황 때문에 지구촌은 이제 아주 자연스럽게 다종교 사회가 된 것이다.
한국과 다종교 사회
이러한 세계적 정황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이라고 하는 특수 지역만을 한정적으로 살펴보면 다종교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경우 등록된 종교 단체만 해도 수 백여 개에 이르고 종교 공동체임을 표방하고 활동하는 단체들은 수 천여 개가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공신력 있는 가장 최근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의 50.7%가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종교 인구 중에서 불교 신자가 23.2%로 제일 많고, 19.7%의 개신교, 6.6%의 가톨릭이 차례로 그 뒤를 잇는다. 유교 신자의 수가 1%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조사 방법의 한계 때문이다. 종교에는 다른 사회 조직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자신들만의 조직을 가지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같은 제도 종교가 있는 반면에, 그런 조직을 갖지 못하지만 사회 생활과 문화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교 무속 아프리카 종교 등의 확산 종교가 있다. 확산 종교는 발휘하는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종교 소속감은 훨씬 낮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인의 종교적 열정은 조사 수치로 나타난 50.7%보다 훨씬 높다고 보아야 한다.
여하튼 한국의 종교 인구 50.7% 중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49.5%를 차지함으로써 한국의 종교인들은 대체로 불교 신자가 아니면 기독교 신자임을 알 수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 4명 중에 한 명은 불교 신자이고 나머지 3명 중에 한 명은 기독교 신자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외에도 한국에는 소수이지만 유교와 같은 전통 종교, 원불교나 증산교 같은 한국 종교, 그밖에 이름도 생소한 수많은 신흥 종교의 신자들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먼 듯 여겨지는 이슬람교 신자들도 수 만 명에 이른다. 그래서 흔히 종교학자들은 한국을 두고서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다양한 종교들이 한국 사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국가 사회뿐만 아니라 직장, 학교, 친족 등의 소규모 단위 사회에서도 예외 없이 모두 다종교 현상이 나타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인간 사회의 최소 기초 공동체인 가정마저도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다. 부모와 자식은 물론 형제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요즈음은 부부간에도 신앙이 다른 경우가 드물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주말이면 서로의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사찰이나 교회로 따로 가거나 아니면 격주로 번갈아 다닌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다종교 현상은 우리들에게는 이미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특별한 정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폐쇄적이고 획일화된 사회의 사람들에게 한국 가정의 이러한 다종교 현상은 지금도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교 사회나 이슬람교 사회에서는 한국사람들처럼 개인 각자가 주체적으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그 사회의 종교에 의해 선택 당하게 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신봉하는 국가는 이제 흔치 않지만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제국주의적 종교였다. 그 시대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기성 종교를 거부하는 것은 곧장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에 비하면 오늘날의 다종교 상황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종교 사회가 된 오늘날에도 가정의 기성 종교는 새로운 가족 구성원의 종교 선택에 거의 결정적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가정이 핵가족화되면서 이마저도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다종교 상황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더 심화되어 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필연적 문제
이처럼 한 사회 안에 둘 이상의 종교가 각각 분명한 사회적 영향력으로서 존재하는 다종교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장점과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먼저 다종교 사회는 문화적인 은혜와 기회의 현장이다. 지금까지 축적해 온 인류의 문화 유산 가운데서 종교 문화가 차지하는 양은 압도적이다. 종교 문화가 인류의 삶에 갖는 중요함 또한 결코 작지 않다. 종교는 인간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물론 그 이전과 이후까지 걸치는 인생관과 세계관을 제시한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만일 단일 종교 사회에 산다면 다양한 종교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고 말 것이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중요한 인류의 문화 유산을 그만큼 폭넓게 누릴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한국 사람들은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을 지도해 온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 서구 문명을 형성한 두 뿌리 중의 하나인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선택하여 누리거나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이슬람교까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종교 이외에는 접촉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이슬람 사회를 생각해 보면 그들의 문화 선택의 폭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종교 사회는 다양한 인류 문화의 유산을 풍부하게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을 갖는다.
반면에 다종교 사회는 하나의 위기일 수도 있다.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된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절대시한다. 종교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종교인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절대적 확신과 함께 그것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종교의 제국주의적 속성이란 자신의 신앙을 절대시 혹은 최고시하는 반면 남의 신앙은 오류 혹은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성격을 말한다. 종교는 신앙을 결코 기호(嗜好)의 문제로 남겨 두지 않는다. 음식의 경우라면 된장을 좋아할 수도 있고 치즈를 좋아할 수도 있다. 또한 상대방의 기호품에 대한 우열을 논할 일도 없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렇지 않다. 신앙이란 기호가 아니라 목숨을 걸만큼 절실하고 절대적인 것이다. 신앙이란 세계관과 인생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불자나 기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불자나 기독자가 아닌 사람은 불행한 사람 혹은 적어도 덜 행복한 사람이다. 불자나 기독자들은 자신이 그런 신앙을 가짐으로써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종교인이 자신의 믿음을 남에게 적극적으로 권면(勸勉)하지 않는다면 그는 덜 성실한 종교인이다. 사랑이나 자비심이 부족한 사람을 성실한 기독자나 불자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일 붓다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 들지 않는 불자라면 그는 자비심이 넘치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전하려 하지 않는 기독자라면 그는 사랑이 충만한 기독자는 아니다. 성실한 종교인은 자기 혼자만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적극적이고 성실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을 남에게 반드시 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태도, 즉 종교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갖는다. 문제는 모든 종교인의 이러한 "태도"는 같은 반면에, 전달하고자 하는 그 "내용"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내용을 서로에게 적극적으로 전파하려고 할 경우 긴장과 갈등은 예상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독선주의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종교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남녀간의 애정 관계처럼 어느 정도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다종교 사회에서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반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의 반목과 겹치게 될 때, 그것은 심각한 분쟁이나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되는 것이다. 다종교 사회의 갈등과 알력은 동서양의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거의 예외 없이 존재했었다. 특히 사회적 영향력을 한 종교가 독점하지 못하고 여러 종교가 나누어 갖게 될 때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의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은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들에 의해서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종교들은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남달리 더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 사회는 기독교가 소개되면서 이러한 긴장과 갈등을 심각하게 겪어 왔다. 한국에서 다종교 상황이 야기(惹起)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의 다종교 상황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사실 논리적 귀결을 기대한다면, 한국 사회는 다종교 상황의 문제점이 그 어느 사회보다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는 종교의 백화점이라고 할만큼 전형적인 다종교 사회이고, 다종교 현상이 심하면 심할수록 종교간의 알력과 반목도 증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아하게도 다종교 사회의 전범(典範)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은 극단적인 종교 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에 대한 종교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요한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는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에 의해 형성된 국가로서 강력한 사회 통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단위 공동체간에 분쟁의 소지가 적다. 종교 분쟁이 심각한 사회와 달리 한국은 종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심각한 분쟁을 겪고 있지만, 양 진영이 종교를 한 가지씩 나누어 갖고 있지는 않다. 한 쪽에서는 종교를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있고 다른 한 쪽 역시 하나의 종교가 압도하고 있지 못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일 남북한이 각각 하나씩의 신앙을 나누어 가진 채 대립해 있다면 분쟁의 정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할 것이며 통일을 향한 전망도 그만큼 어두울 것임에 틀림없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한국의 문화나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분열이나 개성보다는 통합과 총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해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는 모든 사회 생활을 유교적 가치관과 질서에 따르고 있다. 특히 조상 제사는 전적으로 유교의 것이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이 이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기독자들조차 한국에서는 조상 제사를 점차 수용해 가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기독자를 포함하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인생을 무상하게 여기거나 윤회나 인과응보를 믿는 등, 인생관이나 가치관에서 다분히 불교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은 자신이 어떤 신앙을 갖고 있던 간에 합리적 이성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들에 맞닥뜨리게 되거나 일생의 중요 고비에 서면 대체로 점치는 집을 찾거나 굿거리를 마련한다. 한국인들은 새로 들여온 점보 제트기나 슈퍼 컴퓨터 앞에서도 고사를 지내야 안심한다. 대규모 관급 공사의 기공식에서 해당 부서의 수장(首長)이 돼지머리에 지폐를 얹거나 막걸리를 올리는 광경 역시 보기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무속적이다. 요즈음은 예수를 몸주 귀신으로 모시는 무당들이 등장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인들은 정치적 혹은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앙과 상관없이 기독교 공동체에 기꺼이 합류하기도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는 구성상의 성격과 한국인의 심성이나 문화적 성격 때문에 종교간의 갈등과 알력이 억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 때문에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심각한 종교 분쟁을 겪어 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이 한국 사회에서는 전혀 염려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 사이의 갈등과 알력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다종교 상황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가정을 비롯해서 학교나 직장 등 모든 단위 사회 속에서 알력과 반목의 요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국의 종교인들은 누구나 이러한 갈등과 알력에서 비롯되는 불쾌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다종교 가정에서 장례 의식 문제로 가족 구성원들끼리 불안을 겪거나 다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런 다툼은 심각한 가정 불화로 비화되기도 한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러한 갈등과 알력을 분쟁 직전의 수준까지 경험하기도 한다. 불교와 기독교간의 알력 때문에 종종 저질러지는 방화 사건은 어쩌면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팔만대장경 같은 민족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이 단숨에 잿더미로 변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이러한 갈등과 알력이 집단적인 분쟁으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암묵적인 차원에서는 분쟁의 잠재력으로 포진하고 있다. 이러한 잠재력은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가연성(可燃性)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타종교를 향한 4 가지 태도
다종교 사회가 노정(露呈)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간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이다. 즉,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은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종교 사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타종교를 대하는 우리들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앞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며, 종교인은 본성상 어느 정도 독선적 제국주의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타인의 신앙을 대하는 종교인의 태도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좀더 자세히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주의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을 대략 네 가지로 일별해 보고자 한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들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서 먼저 배타주의를 들 수 있다. 배타주의는 전통적으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유일신을 믿어온 종교들이 타종교를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태도이다. 그 중에서 이제 한국 사람들 자신의 일부가 된 기독교가 가장 대표적이다.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종교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타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타종교에 대해서 배타주의적 태도를 갖는 종교인은 자신의 종교만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여긴다. 자신의 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라면 자신 이외의 것은 모두 허위가 아니면 오류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앙만이 참이기 때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종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종교뿐이다. 즉, 자신의 종교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들은 허위나 오류일 뿐이기 때문에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혹세무민이나 미신의 가르침은 척결이나 처단의 대상이다. 그래서 배타주의는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개종시키려는 개종주의거나 그것이 불가능하면 처단해버리고 마는 성전주의(聖戰主義)이다. 기독교는 로마 제국주의가 자신들에게 적용했던 가치관을 자신이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뒤 타종교에게 그대로 적용했다. 제국주의는 획일화를 추구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그러나 탈 현대의 포스트모던주의는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원가치와 상대주의를 추구한다. 배타주의는 이러한 현대 사조와 평화적 공존이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전제 앞에서 양식 있는 지성들에 의해 외면 당하고 있다.
포괄주의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들을 예외 없이 포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포괄주의는 일단 다른 종교들을 송두리째 무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타주의와 다르다. 이 입장은 다른 종교를 어느 정도 인정한다.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도 어느 정도 참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적인 참의 요소는 전체적으로 완전한 자신의 종교에 궁극적으로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포괄주의는 자신의 종교와 타종교를 우열 관계로 파악한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최고의 진리요 최종적인 진리인 것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대표적 포괄주의자는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이다. 그는 교회 밖에서 비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불자들의 경건함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그리스도인으로 그것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불자들을 두고 아주 낮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불교의 입장에서 예수를 예수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불자들이 기독자들을 익명의 불자들이라고 부르면서 아주 낮은 단계의 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결국 자신의 종교로 수렴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다만 포괄주의는 배타주의가 내놓고 휘두르던 칼을 꽃다발 속에 숨겨 지니고 있는 셈이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자신의 종교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즉, 포괄주의 역시 자기 신앙의 완결성을 믿는다. 포괄주의는 어느 정도 개방적 태도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그 개방적 태도는 자기 개방성이 아니라 타종교를 자기 종교로 흡수 통합하고자 하는 전략적 개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Ernst Troeltsch)는 하나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 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放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정도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 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 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放棄)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바로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끝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3). 종교간의 대화
대화의 불가피성
종교인은 물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종교간의 긴장과 갈등, 알력과 분쟁의 문제를 결코 방치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조상 대대로 물려 내린 세계적 유산을 한 줌의 재로 태워버리도록 놓아둘 수는 없는 것이다.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에도 수 백 명씩 죽이고 죽어야만 하는 지구촌의 현실은 세계 시민에게 결코 남의 문제일 수 없다. 다원주의는 다종교 사회가 노정하는 문제들을 종교간의 대화로써 대처하고자 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여기서 종교간의 대화가 갖는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대해 이해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종교간에 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분명한 이유는 신앙이 서로 달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평화로운 공존이야말로 세계 시민이 지켜야 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대전제이다. 평화로운 공존은 분명 대화를 불가피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이다. 종교간의 심각한 분쟁이 몰고 올 눈에 뻔히 보이는 공멸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다. 종교인들은 그보다 앞서 아직 남아있는 자제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할 만큼 인류는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평화적 공존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이는 종교 외적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종교적 선택을 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어쩔 수 없이 관용과 대화로 내몰린다면 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 혹은 정치적 행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는 소극적 태도일 뿐만 아니라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대화의 궁극적 목적일 수만은 없다. 이는 자기 개방을 기초로 한 열린 종교인으로서의 진리 추구나, 타종교인에 대한 이해나, 그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의 추구와는 거리가 멀다. 평화적 공존이 대화의 궁극적 목적이 되면 대화의 본래 목적들은 희생되고 만다. 배타주의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정죄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라면, 평화적 공존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타종교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평화적 공존이 우선적 목적이 되면 진리의 판단과 실천을 통한 행복 추구라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유보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화적 공존도 대화의 분명한 목적일 수 있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종교간의 대화의 필연적 이유를 종교 자체 안에서 찾아야만 한다.
대화의 종교 자체적 필연성
다원주의가 추구하는 종교간의 대화의 고민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할 수 있느냐는 문제라고 했다. 종교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 헌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타종교를 향한 대화의 시도는 전략적 위장이기 쉽다. 열성적 종교인일수록 자신의 신앙을 타종교인에게 관철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에 임할 가능성이 높다. 즉, 어떤 종교가 자기 완결성을 고집 하는 한 타종교를 향한 어떠한 대화의 시도도 전략일 수밖에 없다. 이때의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다.
진정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직한 자기 개방이 필요하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자신의 발전 가능성 인정이란 어느 정도의 자기 부정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자기 부정은 정직하고 진지한 종교간의 대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전제인 것이다. 즉, 전략적인 대화의 목적은 설득이나 교화이지만, 정직하고 진지한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자기 쇄신인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그 본성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자기 독점권을 양보하기 어렵다.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 배타적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종교간의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는 다원주의의 고민이 자신의 신앙에 전적으로 투신하면서 동시에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에 임하는 것이라면, 그 고민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자신의 신앙에 성실하게 헌신하는 것으로써 쉽게 해결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심한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는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현실적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은 "자신이 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타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반드시 타종교인을 위해 필연적인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도 유독 타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성실한 종교인이 아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에 실재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하여 웃고 울고 성내고 기뻐한다. 타종교인을 위한 헌신은 타종교인을 위한 공감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에게 공감한다는 것은 내가 그 주인공이 된 듯이 느끼는 것이다. 타종교에 대한 공감적 이해란 내가 타종교의 신자가 된 듯이 느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 없는 헌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공감적 이해도 없이 사랑이나 자비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결코 사랑이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공감적 이해 없이는 드라마 한 편도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이나 자비야말로 진정한 공감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공감적 이해를 가지고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추구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이나 자비는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이 전제되며, 상대에 대한 진지한 헌신은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전제로 하며, 상대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위해서는 정직한 대화가 전제된다. 그러므로 성실한 불자나 기독자는 필연적으로 타종교인과 적극적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