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리지 않는 예정론 그 핵심을 논하다]

by 이재섭 posted Jun 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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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거 본인이 최초로 주장했던 완전 예정론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 내용은 [창세전 예정선택]과 그리고 [현재의 구원선택]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글입니다]**

[창세전 예정선택]과 [현재적 구원의 선택]은 같은 성격이 아니다.(과거 최초 공개된 내용)
이것을 같은 성격으로 보고 연결시키면 보수주의와 같이 하나님의 선택만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시간적으로 창세전을 의미한다. 예정은 창세전 하나님의 완전한 예정이다.
현재적인 선택은 시간적으로 창세 이후 현재의 보편적 구원의 선택을 말한다.(예정대로 진행 중)

이 둘은 시간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으며 그리고 성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정은 창세전 하나님의 고유한 범위이며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그 만의 예정선택이었다.
현재적 선택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이며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인간의 선택이 따라온다.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선택된 자들은 현재 보편적 구원의 선택으로 나타나게 된다.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선택된 자들은 현재 보편적 구원의 선택이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했던 이스라엘 선택의 구원이든 모두가 창세전 예정된 선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대로 창세전에 예정을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완전한 예정이며 그 예정은 마치 완전한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그 설계도가 예정이라면 그 설계도대로 나타나는 것이 현재적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유이다.

예정이라는 설계도는 이미 완전하다.(누가 구원을 얻을지 이미 예정 가운데 정해져 있음)
그런데 그 설계도대로 만들어지는 건축물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어 간다. 그래도 설계도 데로 지어지는 것이다. 설계도대로 나가는 것이지만 설계도대로 지어가는 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 되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전개되어도 이미 설계된 모습으로 완벽하게 나타난다.
어찌 되었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정대로 들어온 것뿐이다.

성령이 예정 된 자들만을 부른 것이 아닌 창세전 예정된 자들이 성령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만약에 성령이 예정된 자들만을 구원한다면 현재적인 하나님의 보편적으로 부르신다는 자신의 구원방법을 그가 스스로 어기는 것이 된다.

이렇게 창세전 예정선택은 현재적 구원선택과 구분된다.
창세전 예정과 창세후 현재적 선택을 같은 방법으로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선택과 현재적 하나님의 선택은 성격과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다.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예정선택과 현재적 선택을 동일선상에서 함께 이해하려고 한다.

즉 이 말은 창세전 하나님의 고유한 범위와 창조 후 하나님의 선택의 방법으로 구분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상은 마치 창세전 예정을 현재적 계획으로 보고 현재적 선택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런 관계로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현재 그 자신이 예정으로 선택된 자들을 이루기 위해서 사람들을 직접 구원한다는 사상이다. 이 사상으로 현재적 인간의 선택은 거의 상실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선택이 현재적 구원을 이루는 것이며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 예정 된 자만을 찾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믿게 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이 전형적인 보수주의 예정론을 중심으로 논하는 구원론이다.

이와 반면에 하나님의 예정보다는 인간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예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보주의 입장일 것이다. 이렇게 예정 선택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과 현재적인 선택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갈등하고 있는 것이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라고 생각한다.

본인은 먼저 예정선택과 그리고 현재적 선택의 관계를 다루었다.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예정이다. 누구도 그 예정의 범위에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이미 구원으로 창세전에 정해진 자들이며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지하시는 예정된 선택 자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변하며 모두 그 예정 가운데서 구원을 얻을 자가 들어오게 된다.

세상에서 창세전 예정으로 말미암아 선택된 자들이 현재적 구원의 선택에 의해서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예정선택은 현재의 선택에 의해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창세전에 예정 가운데 선택되었던 자들은 이 세상에서 구원이 진행되면서 그 창세전 예정된 된 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현재 구원이 진행되면서 구원에 들어온 모든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선택된 자들이다.

그럼 그 예정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그 예정에 있는 자들만을 골라서 현재 구원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정에 있는 자들만을 골라서 현재 선택해서 찾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이것이 전형적인 보수주의 입장이다. 반면에 진보주의 입장에서는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 다는 현재적 구원의 선택을 강조한다. 이렇게 진보에서는 현재적 선택을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정상적인 이해는 현재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으로 들어온 모든 자들은 모두가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이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현재 선택되어 구원을 얻은 모든 자들은 모두다 과거 창세전에 예정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자라고 말해야 옳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정은 항상 창세전이라는 창조된 이 세상을 뛰어넘는 과거라는 사실이다. 이는 현재의 선택을 보면서 과거 창세전 예정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창세전에 예정 가운데 선택되었던 자들이 지금 현재 그대로 선택되어서 들어온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현재에서 과거 하나님의 예정으로 선택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성경도 이러한 원리를 잘 따르고 있다.

성경은 창세전 예정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 예정을 이루기 위해서 현재 이 세상에서 직접 선택해서 찾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정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선택과 과거적 예정을 분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으로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 가운데서 선택된 자들이며 현재 그들이 부름 받은 자들이라고 현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정선택과 현재의 선택을 시간적으로 구분하면서 서로 관계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 예정선택은 현재선택과 서로 구분시키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 예정선택과 현재적으로 구원하는 선택은 서로 같은 성격이 아니다.
예정은 과거 완전히 예정된 선택이라면 현재적 선택은 보편적 구원의 방법이다.
즉 예정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범위의 예정이라면 현재적 선택은 보편적으로 선택의 방법이지만 결국 과거 창세전 예정된 자들만이 들어온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창세전 예정선택과 현재적 선택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관계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으로 성경은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먼저 선재하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세상에서 구원 얻을 자들을 미리 예정 가운데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적 구원으로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이 된 것이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된 자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들어온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은 모두다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서 이미 선택된 자들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고 난 이후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예정으로 우리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가운데 선택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가 현재 택함을 얻은 것으로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글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이해도 크게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진다.
보수주의에서는 예정론을 중심으로 구원의 선택을 강조하고 있다.

보수주의와 같이 예정론을 중심으로 구원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예정과 선택을 그가 현재 그 예정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그 예정된 자들을 그가 지금 찾고 계신다는 것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철저히 인간의 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선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들을 현재 찾고 계시는 그 방법을 성령의 역할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이 예정된 자들을 찾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은밀히 믿음을 주어서 믿도록 역사한다는 것이 보수주의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사람의 어떠한 선택의 노력이나 믿음은 그리 중요하거나 심지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진보주의는 보수주의와 조금 달리 창세전 예정에서 구원을 출발하면서 이해한 것 보다는 현재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즉 현재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에 있어서 인간의 선택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철저히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택과는 달리 인간의 선택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문제는 그런 진보와 보수가 모두 세계관에 의해서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결함은 예정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예정을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으로 이해하지 않고 진보주의나 보수주의 그 모두가 창세전 예정선택을 창조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예정선택을 현재의 구원선택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선택과 예정선택을 한 범위 안에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된다. 그것이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선택사상이다.

그러므로 창세전 예정선택과 창조이후 구원선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전 예정선택이 창조이후 구원선택과 구분이 되지 않으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하나는 창세전 예정선택을 하였던 그 하나님께서 현재 구원을 만들어간다고 주장하거나 또 하나는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이 현재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전적인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창세전 예정선택은 무엇인가?
이 예정이 단순히 구원을 얻을 자들이라는 추상적인 예정이며 선택인가 아니면 개인 개인을 구원하기로 예정한 구체적인 선택인가로 또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전자는 진보주의 입장이라면 후자는 보수주의 입장이 될 것이다.

전자의 입장은 현재 구원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으므로 개인이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이 그 예정에 들어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후자의 입장은 창세전 예정이 개인 개인을 선택한 예정이며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듯이 그 하나님께서 현재 찾아가는 것을 중심으로 이해하며 그 방법은 성령이 개인에게 믿음을 강권적으로 주어 하나님의 예정을 성취한다는 이해이다. 이것이 보수주의 입장이다.

이러한 차이는 예정이 과연 개인적인 선택으로써 예정인가? 아니면 단순히 현재 구원받은 무리들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해서 정확히 개개인의 예정을 말하지 않고 집단적인 보통 ‘우리’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셨다는 것이 에베소서 1장의 내용이다.

그럼 이 구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구원 얻게 된 ‘나’라는 한 존재를 두고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면 이 구절에서 개인적인 선택을 말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진보주의 입장에 대해서 이단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은 그 ‘우리’ 안에 ‘개인’이 포함된 개인적인 예정과 선택으로 이해하는 보수주의 입장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창세전 선택과 예정은 실재적인 현재적 구원의 선택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전 선택은 구원하기로 하는 작정으로써의 선택이라는 것이며 예정으로써의 선택이다. 그러나 현재 구원을 진짜 얻게 된 선택은 작정과 예정의 선택이 아닌 실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즉 현재 선택된 구원은 창세전 선택된 자들과 예정된 자들이 비로써 실재적으로 선택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구분하지 않으면 매우 혼란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는 정당한 이유는 창조 전 선택에서는 우리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가 홀로 장차 오게 될 우리들을 두고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고자 하는 선택(예정)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선택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현재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현재 우리가 선택된 구원선택은 창조 전 하나님의 아들을 삼으려는 작정선택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창조 전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이 먼저 있었고 그리고 오늘날 그들이 그 작정과 예정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창세전 개인적인 예정과 선택은 실재적 선택이 아닌 예정선택으로만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범위이며 그만이 아시는 것으로 그가 모든 자들을 작정한 것이다.
창조이후 개인적인 구원의 선택은 실재적 선택이며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현재 구원의 선택이 어떤 사람이 되든지 혹은 어떤 방법으로 되든지 모두다 하나님의 작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모두다 하나님의 예정을 벗어난 구원이 아닌 예정대로 구원을 얻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예정선택을 현재의 구원선택에 직접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전 예정과 선택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의 구원 선택에 창세전 예정선택을 가만히 끌어들인다면 예정은 더 이상 예정이 아닌 현재 구원을 이루는 실재적 방법으로써의 계획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이루는 것으로 전개되면 하나님께서 그 예정된 자들을 현재 그가 성령으로 직접 찾는다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이런 주장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드신 얼마든지 부르신다는 현재적인 보편적 구원의 부르심을 그 스스로 깨뜨려버리게 된다는 주장과 같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보수주의 신학의 오류이다.

그럼 현재적 구원의 선택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창세전 예정을 끌어들이지 말고 설명하게 되면 현재적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인간의 선택으로 설명이 될 것이다. 현재적 구원은 어느 한 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양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과 믿는 선택 그 모두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 작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약의 선택과 신약의 선택이 다르다.
구약의 선택은 보편적 선택이 아니었다. 특종적인 선택으로 이스라엘만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선택한 것도 사실이다.(아담에서 아브라함이전까지)

구약에서 모세를 선택한 것은 특종적인 것이다. 또한 바로를 버린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렇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방적 선택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이렇게 구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논한다면 보수주의 선택사상인 예정선택을 지지하는 것 같이 보인다. 구약에서 모세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나타나셨다. 반면에 버린 자들이 애굽이다. 이것은 죄인들 중에서 하나님은 임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구약에서 이렇게 특별히 선택한 것은 사실상 예수를 위한 준비된 과정이었다.
하나님은 구약의 과정을 통해서 신약의 보편적 선택을 다시 선택하게 된다. 그 출발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구약의 특수한 선택과는 달리 보편적인 부름인 믿음으로 선택되는 것이 강조된다. 믿음으로 들어오는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선택백성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전자의 구약시대의 선택방법도 하나님의 것이며 후자의 신약시대의 선택방법도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드신 선택방법이다.

오늘날은 구약시대의 선택을 중심으로 예정론을 강하게 논증하는 보수주의가 있다면 신약시대의 보편적 구원을 중심으로 논증하는 진보주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철저히 구약중심의 보수주의 예정론에 입각한 선택사상과 신약중심의 진보주의 보편선택에 입각한 것으로 양분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현재적 하나님의 선택은 구약과 신약에서 그리고 진보와 보수에서 그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은 창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택과는 다른 성격이다. 이 예정은 창세전의 예정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어떻게,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 선택되든 간에 창세전 예정대로 되어질 뿐이다. 이렇게 창세전 예정과 창조 안에서의 선택은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다.

그 예정대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선택하셨고 바로를 버리셨다.
그 예정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이방으로 삼았다.
그 예정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 가운데 믿는 자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고 있다.
그 예정대로 선택이 될 자들은 선택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을 자들은 버림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작정에서 벗어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왔으며 또한 선택된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개인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왔으며 또한 선택된 자임을 알게 된다.

먼저 선택된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듯이, 먼저 선택된 북한이 버림을 받았듯이, 먼저 선택된 중동지역이 버림을 받았듯이, 먼저 선택된 유렵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듯이, 한국교회도 그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선택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하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택은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 구원은 보편적으로 또한 부르신다.
이러한 모든 역사는 창세전 하나님의 작성에 모두 포함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자.

이미 인류의 끝까지 그리고 개인의 종말까지 모두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사 속에서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어야 되는 것이다. 믿고 들어온 모든 자들은 창세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이미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들은 이미 창세전에 버리기로 작정된 자들이다.

http://cafe.daum.net/hosannakim (2007년 6월 15일 김인찬 목사) www.rpress.or.kr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