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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통전적 고찰

최 형 근 (서울신학대학교, 선교학)

I. 들어가는 글

선교신학을 구축함에 있어 교회론의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적으로 본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인 하나님의 선교도 교회론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그 이해의 지평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 없는 선교는 생각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신학적 성향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환원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교회에 대한 선교적 본질을 축소시키거나 개인구원과 교회개척에 대한 선교신학적 근거들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신학적 내용들의 근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로서 1952년 독일의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린 국제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IMC)에서 제시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교회를 통하여 실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개신교와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 내에서 선교학의 출발점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관점이 많은 선교기관들의 사역을 재형성하기 시작한 것이 1980년대 이후이기는 하지만,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1970년대에 이러한 관점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은 전 세계 교회의 다양한 흐름 가운데서 선교신학에 관해 놀라울 정도의 통합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개념에 대한 환원적 해석과 이해는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의 양상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 복음전도와 사회참여(social action), 그리고 복음화와 인간화라는 이분법적인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복음주의 진영 내부에서도 선교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에 대해 통전성을 견지하려는 시도가 복음전도와 사회봉사(social service)라는 보다 덜 급진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통전적(holistic) 접근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신교 진영의 선교 개념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환원적 해석과 그 해석에 대한 복음주의 진영의 단순한 반발은,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신중심의 선교로의 전환이라는 이원론적 발상 자체가 갖고 있는 것으로서 서구신학의 한계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을 염두에 두며, 필자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선교의 개념에 대한 발전과의 연관성에서 고찰해보고,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하나님의 선교 이해를 선교적 교회론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Ⅱ.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역사적 전개과정과 논쟁점

1. 하나님의 선교의 기원과 개념

역사적으로 선교의 개념은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다. 선교의 개념은 구원론적인 용어로 이해되기도 했고, 서구문화의 우월성을 복음과 함께 전파하고 하는 문화적인 용어로 이해되기도 했으며, 선교지에서의 전도와 교회개척을 통한 교회나 특정교단의 확장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이러한 선교개념들은 구원론이나 교회론적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교회 중심의 선교는 제 3세계의 민족주의의 부흥과 신생교회들의 성장으로 인하여 선교 개념과 신학에 큰 변화와 도전을 초래하게 되었다. 즉, 그 때까지 지속되고 있었던 교회중심의 선교개념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변화는 1952년 독일의 작은 마을 빌링겐(Willingen)에서 열렸던 세계선교협의회에서였다. 그 주된 내용은 교회중심의 선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선교로서 선교개념의 일대 전환이었다. 즉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며,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선교사로서 세상에서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개념은 선교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선교(mission)와 전도와 교회개척, 구호와 개발 등의 선교활동(missions)을 규정했다. 즉 단수인 mission은 본질을 나타내며, 복수인 missions는 본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규정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Edinburgh Missionary Conference) 이래, 교회와 선교는 상호간의 정체 규명을 위해 노력해 왔는데, 1938년 탐바람(Tambaram) 대회에서는 초교파 선교단체들의 부상으로 인하여 교회의 본질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의무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탐바람의 결론은 “교회가 선교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즉,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근거는 선교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회중심의 선교에 대한 방향전환은 19세기에 교회와 초교파 선교회들이 서로 분리되어 활동하던 상태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탐바람 IMC 대회에 이어 열린 휘트비(Whitby) 선교대회는 제 2차 세계대전 후 전 세계 교회의 협력을 강조하며,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중심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휘트비의 핵심적 논의들 가운데 하나는 선교를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를 포괄하는 통전적인 관점으로 이해했으며, 교회의 최우선 과제가 복음화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휘트비는 전쟁의 아픔과 식민주의 종식, 인종간의 갈등,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으로 인해 종말론적 선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사도적 신학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네덜란드의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에 의해 제기된 선교 중심의 교회로의 교회의 성격규정은 탐바람의 선교부 중심에서 교회중심으로의 변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도적 신학의 주장은 선교의 중심이 하나님의 관심의 중심인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는 교회의 한 기능이 아니라, 교회가 선교의 한 기능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에 대해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의 장으로서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호켄다이크를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 신학자들의 주장은 후에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한 세상 중심의 해석으로 나타나에큐메니칼 신학의 핵심을 이루게 되고 복음주의 선교학과 첨예한 대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배경을 중심으로 1950년대 초의 세계 선교신학의 흐름과 선교지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하나님의 선교의 대두는 식민 제국주의적인 서구 선교에 대한 신학적 각성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빌링겐 회의의 주제는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Missions under the Cross)였다. 구달(Norman Goodall)에 따르면, 식민주의의 종식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빌링겐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숙고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빌링겐은 교회가 선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의 존재이유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므로 선교에 대한 교회중심의 입장에 도전을 가했는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점차적으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의 선교 이해에 중대한 격차를 가져오게 하였다. 빌링겐은 선교운동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그 원천을 갖는데, 특히 우리를 향한 깊은 사랑으로부터 아버지는 그 자신과 모든 피조물들과 화해를 이루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독생자들 보내셨으며 모든 인간은 성령을 통하여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선교의 정확한 기원에 대한 많은 오해가 한국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진영에서 있어 왔다. 사실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감독이었던 칼 하르텐슈타인(Karl Hartenstein)으로서, 그는 프라이탁(Walter Freytag)이 편집한 “어제와 오늘 사이에 있는 선교”라는 빌링겐 대회에 관한 독일어 보고서 가운데 “신학적 각성”이라는 글을 쓰면서 Missio Dei라는 라틴어 형태를 처음 사용했다. 그는 “선교란 단순히 개인의 회심이나 주님의 말씀을 향해 복종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의 회집에 대한 의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전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려는 포괄적인 목표를 가지고 아들의 보내심, 즉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르텐슈타인의 신학적 배경, 특히 선교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라는 개념은 칼 바르트(Karl Barth)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바르트는 계몽주의에 근거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거부하고 “위기의 신학”이라는 입장에서 신 정통주의라는 새로운 신학의 패러다임을 구축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의해 그 설립과 더불어 세상에 보냄을 받았으며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하르텐슈타인은 바르트의 영향 아래 하나님 중심의 선교개념을 발전시켰으나, 바르트와는 달리 하나님의 선교를 구속사적이고 종말론적인 시각에서 사용했다. 그에게 선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교회의 본질은 전 세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삼위일체적 선교의 근거는 기독론과 성령론을 약화시키거나 추상적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세계를 심판하셨을 뿐 아니라 화목을 이루셨고 하나님 나라에 이 세계가 속하도록 하셨다. 심판과 화목의 표적으로서의 십자가는 교회가 세계 속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론은 하나님과 세상과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에 의해 파송된 성령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나타낸다. 성자의 선교는 성령의 선교로 계속되며, 세상 안에서 제자들의 선교로 구체화된다(요 20:21-22).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선교학은 기독론과 성령론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하르텐슈타인이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은 기독론과 성령론과 밀접하게 연관된 교회론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보다 크며,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와 세상을 포함하며,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 가운데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에 참여할 특권을 부여받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선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와 하르텐슈타인의 의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선교는 점점 그 범위가 확대되었고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보쉬(David J. Bosch)는 하르텐슈타인이 선교를 세속화와 수평화로부터 보호하고 선교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남게 되기를 원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광범위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교가 교회의 선교보다 크다는 견해를 극단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더욱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교적 참여를 배제하려고까지 하였다. 이러한 성향이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적 근거로 발전되고 확산되면서 교회론의 약화, 즉 교회의 선교적 본질에 대한 호도를 초래했으며 복음주의 진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공격적인 견해들을 초래하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입장: 호켄다이크를 중심으로

하르텐슈타인에 의해 처음 사용된 하나님의 선교는 빌링겐 선교대회 이후 세계교회협의회의 핵심적 신학적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신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간 인물은 호켄다이크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사도적 신학을 주장하면서 선교의 중심을 세상으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교회의 역할을 축소시켰다.

교회중심의 선교정신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릇된 중심을 맴돌아 타락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와 하나님 나라는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즉 세계는 하나님의 위대한 활동 무대인 통일체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것은 화해된 세계요(고후5:19),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요(요 3:16), 그리고 그 분이 사랑으로 승리한 세계이다(요16:33).… (교회는) 확실히 출발점일 수도 없고 목적일 수도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전혀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활동에서, 즉 사도의 활동에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다.… 교회는 세계를 위해 있는 것이다.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려 할 때에만 “복음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고전 9:19-23).

호켄다이크의 교회중심 신학에 대한 비판은 1963년에 열린 멕시코 세계선교와 복음화 대회(CWME)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그 핵심 내용은 “교회의 선교구조”에 대한 WCC 연구위원회의 보고서와 1968년 웁살라 세계교회협의회 선교분과 준비 보고서인 “타자를 위한 교회”(The Church for Others)에 잘 나타난다. 그는 선교의 목적을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로 말미암은 샬롬(Shalom)을 수립하는데 두었다. 샬롬은 개인적인 구원을 넘어서 정의, 평화, 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사건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샬롬의 구현을 위해서만 교회는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호켄다이크는 하나님의 선교를 철저하게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므로 성자의 파송이나 성령의 파송으로 인한 교회의 파송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세계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주장한다. 이러한 신학적 성향은 선교를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철저한 사회참여의 형태로 제한시켰다. 이러한 견해를 도식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교회-세상에서 하나님-세상-교회의 형태의 변환이 될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교회와 관계를 가지시고 교회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이차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갖는다는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세상과 일차적인 관계를 가지시고 교회는 단지 세상의 한 부분으로 인식된다는 입장으로의 전환이었다. 즉, 교회의 탈 중심적인 요청을 여기서 볼 수 있다. 교회는 세상에서 책임적으로 행동하며 샬롬을 제시하고 선포하는데 그 존재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신학은 바르트나 하르텐슈타인의 것과는 달리 교회의 신학이 아니라 “세계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선교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과 연결시키는 것으로서 종말론적으로 메시야의 도래를 기대하는 샬롬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 샬롬은 단지 마음속의 평안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전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일련의 “인간화”(humanization)의 과정이다. 이러한 인간화는 세속화의 과정을 포용하면서 사회구원과 사회참여의 형태로 구체화되고 극단화되어갔다. 그의 사상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하여 현대 선교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르텐슈타인과 호켄다이크 양자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발전시켰던 사람이 피체돔(Georg F. Vicedom)이다. 피체돔은 1958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저서를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알리는데 공헌했다. 그는 처음에 교회중심적인 선교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선교의 수평적인 면을 강조한 웁살라 세계교회협의회를 염려하여 선교의 수직적인 면의 회복을 주창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후에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도구와 일하는 방식이며, 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그의 저서에서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선교를 “아들을 보내시므로 자신을 계시하시며, 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오심으로써 말씀을 인간에게 보내시며 자신을 계시하신다. 만약 하나님의 선교가 없었다면 우리는 또한 계시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선포는 항상 그리스도의 다가오심을 기대하고 있으며,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를 구속사적 의미에서 해석했다. 이러한 점은 하나님 자신의 파송을 강조한 호켄다이크와는 달리 그가 아들의 파송과 성령의 파송, 그리고 교회의 파송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교회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역사적으로 에큐메니칼 진영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는 그것을 처음 신학화하고 사용한 장본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변화되어 왔다. 특히 호켄다이크의 영향은 너무 지대한 것이었기에 전 세계 에큐메니칼 진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환원적인 하나님의 선교 이해는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무시하므로 교회중심의 선교를 지향하고 있는 복음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교회일치에도 장애가 되었다.
한국 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소속 교단 신학의 성향을 보면 호켄다이크의 영향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1969년 “오늘날 한국에서의 하나님의 선교”라는 주제 하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회가 열려 정식으로 그 개념을 도입했다. 그런데 1976년 한국신학연구소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혹은 보수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여기서 에큐메니칼 진영을 대표하는 심일섭 박사와 복음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김명혁 박사가 발제자로 나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소개하고 논쟁점들을 제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둘 모두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기원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제공하지 못했다. 심일섭은 하나님의 선교가 처음 사용된 곳이 1952년 빌링겐이며, 호켄다이크가 이 개념을 강조했다고 주장했으며, 피체돔에게서 그 개념을 이끌어내고 있다. 사실 빌링겐의 공식문서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가 사용된 적이 결코 없다. 이러한 오해는 한국 에큐메니칼 진영의 신학으로 하여금 호켄다이크의 신학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세상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평화와 정의를 수반하는 인간화와 사회변혁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선교는 유신정권이라는 사회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더욱 그 주장을 확고히 해 나갔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성향은 복음전도를 통한 개인구원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진영과의 갈등을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의 입장: 로잔 I, Ⅱ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진영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교회중심의 선교로서 복음전도를 통한 개인의 영혼구원과 교회개척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위임령(마 28:18-20)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 진영의 반응은 주로 호켄다이크의 사회, 정치적인 차원의 샬롬과 인간화 내지는 세속화에 대한 강조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주의 진영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는 다분히 부정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한국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이해는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났던 1960-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용공신학”, “세속주의”, 혹은 “인본주의” 등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웁살라 WCC총회에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호켄다이크의 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인간화”를 선교의 주요목표로 수용하여 선교의 목표를 “복음화”로 이해해 온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충격과 도전이 되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도 “인간화”냐 “복음화”냐 라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웁살라 대회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기독교 선교의 수직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수평적인 측면만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상실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복음주의의 반응은 1970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73년에는 WCC 방콕 세계선교와 복음화위원회(WCME)는 “오늘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열려 정체성으로서의 구원, 인간화로서의 구원, 그리고 해방으로서의 구원이라는 세 가지 구원을 주장했다. 이러한 구원이해는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에서 문제로 제기되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1974년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의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설명했다. 선교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 하나님의 활동이다. 살아계신 성서의 하나님은 파송하시는 하나님이며, 바로 이것이 선교의 의미이다. 그는 예언자들을 이스라엘로 파송하셨다. 그는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는 성령을 교회에 보내셨고, 사도들과 제자들, 그리고 교회를 세상에 보내셨다. 따라서 교회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 근거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선교의 동기(motivation for mission)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이러한 성향은 교회의 본성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보다 광범위한 선교의 근거들을 제시한 로잔운동의 비전은 보다 확장되었고 통전적(holistic)으로 되어갔다.
그러나 로잔언약은 하나님의 선교를 인간화나 세속화, 그리고 사회구원으로 한정하여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와 영혼구원, 그리고 교회개척이라는 차원을 약화시킨 WCC 선교신학과는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로잔언약이 주장하는 전도와 사회참여의 관계는 총체적인 것이다. 조종남 박사는 “로잔의 이러한 입장은 로잔 신학이 선교를 이해함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에서 시작하여, 선교의 형태와 그 내용, 그리고 모델을 예수의 사역에 기초를 둔 데서 연인된다. 로잔 선교신학은, 사랑에서 나온 예수의 전도(word)와 봉사(deed)를 이분화하거나 고립시킬 수 없듯이, 교회 선교를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맥락에서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로잔 선교신학은 전도의 우위성(primacy)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로잔 선교학은 총체적인 입장을 취하나 에큐메니칼 진영의 선교신학과는 차별화된다.
로잔 세계복음화 대회 이후, 1982년 그랜드래피즈에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간의 관계에 대한 협의회”가 열렸다. 여기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사회적 활동은 전도의 결과라는 견해와 사회적 활동은 전도의 교량역할을 한다는 견해, 그리고 사회적 활동은 전도의 동반자가 된다는 세 가지의 입장을 정리하여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동반자 관계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므로, 1974년 로잔언약이 주장한 복음전도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우위성을 확인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통전성을 강조하였다.
1989년에 마닐라에서 열린 로잔 세계복음화대회에서 이러한 견해는 다소 확장되었다. 제 2차 로잔 대회의 마닐라 선언문(Manila Manifesto)은 “온 세계 교회가 온 세계에 온전한 복음을 전하게 하자”라는 표어 아래 “온전한 복음”, “온 교회”, 그리고 “온 세상”이라는 주제를 전개했다. 온전한 복음(The Whole Gospel)은 교회의 선교를 강조하며 복음전도와 말씀선포가 사회적 책임보다 우위성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복음전도의 우위성은 기능적인 측면에서이며, 신학적으로 복음은 말씀과 행위로서 증거 되어져야 하고 “성서적 복음에는 언제나 사회적 적용이 내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참된 선교는 언제나 성육신적이라야 한다.” 또한 마닐라 선언은 온전한 복음을 주장하며 “사람들의 공적, 개인적 삶이나 지역적, 세계적 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 되심을 선포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을 통해 복음의 통전성을 강화했다. 선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제 1차 로잔대회보다는 보다 발전한 형태로서 구원과 선교의 환원주의(reductionism)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로마가톨릭과 정교회의 입장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기점으로 선교의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었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선교이해는 구원의 개인화와 교회화라는 개념이 중심이 되어 세례 받지 못한 자들에 대한 개종과 교회 없는 곳에 가시적인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겼다. 빌링겐 이후 가톨릭교회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Ad Gentes, AG)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선교이해는 교회와의 관계 가운데서 이해될 수 있다. 선교에 관한 혁신적인 견해인 선교적 교회론은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Lumen Gentium, LG)에서 나타난다. LG의 선교적 교회론은 전통적인 교회론과 상당한 거리를 둔다. 교회는 국가나 사회 제도와 같은 것들로 묘사되지 않고 성례와 표적,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속성을 표현하며 세상 속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써 묘사된다.
이러한 선교적 교회의 속성은 AG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이 교회론적인 개념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AG는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한 하르텐슈타인의 견해와 매우 유사한 입장을 피력한다. 여기서 우리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교신학이 하나님의 선교 개념을 수용하면서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갖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모든 선교활동들은 본질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교신학은 분명히 “하나님의 선교”에 근거하고 있다. 즉 성부는 성자를 파견하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세상에 파견이며, 그 근거는 세상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켄다이크의 견해와는 달리 가톨릭교회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는 교회의 배제를 전제하지 않는다.
1961년 WCC 뉴델리 총회에서 세계 4대 정교회들이 정식 회원으로 가입했다. 빌링겐 이후 정교회도 하나님의 선교를 수용했다. 동방교회의 사상은 전적으로 교회 중심적이다. 이러한 교회론 중심의 선교이해는 “교회가 선교의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복음의 목표이며 성취”라는 것을 나타낸다. 동방교회의 관점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며(요 3:16), 선교의 목적은 구원 혹은 생명이다. 이러한 선교의 목표는 전 피조물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차원을 견지한다. 또한 동방교회 선교신학의 다른 측면은 선교를 사회참여의 빛에서 조명한다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사회참여는 그들의 예배와 관습과 경험과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성찬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한 상승 운동으로 시작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운동으로 퍼져나간다. 거기에서 선교가 시작된다. 따라서 성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적인 영역에서 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은 동방교회의 신학에서 불가능한 것이다.
1988년 4월 그리스의 네아폴리스(Neapolis)에서 열린 정교회 선교회의에서 아테네 대학의 역사학 교수이며 동아프리카 동방 정교회의 임시 대주교, 그리고 WCC 산하 세계선교와 전도분과(CWME)의 위원장이었던 아나스타시오스(Yannoulatos Anastasios)가 행한 기조 연설문은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정교회의 입장을 잘 정리하고 있다. 그는 모든 선교운동의 확고한 기초를 계시와 삼위일체의 신비의 빛 안에서 조명한다. 사도적 활동의 출발점은 삼위일체적 관점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과 명령이다(요 20:21-22). 성부의 사랑은 성자의 파송을 통하여 표현된다(요 3:16-17). 처음부터 성령은 성자의 파송에 참여한다. 성령은 교회를 지탱하시고 제자들을 하나님의 빛과 지식과 능력으로 충만한 사도들로 변화시키신다.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깨닫는 것 뿐 아니라,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삶 가운데서 실천하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분석 및 평가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기독교 내의 여러 진영들의 입장이나 태도는 수용적이지만, 그 이해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하르텐슈타인이 말하려고 했던 하나님의 선교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가 제기된 상황이 18세기로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된 서구선교의 식민주의적인 선교사업이 교회중심의 선교라는 개념으로 규정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두 개념의 이분법적인 우위성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아직도 하나님의 선교를 위험하고 급진적인 신학으로 간주하는 한편,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호켄다이크와 같은 일부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교회의 본질로서의 선교를 축소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반 엔겐(Charles Van Engen)은 WCC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굳어진 호켄다이크의 하나님의 선교 이해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으며, 교회의 선교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에 충실하기보다는 스티븐 닐(Stephen Neill)이 주장한 “모든 것이 선교라면, 아무것도 선교가 아니다”라는 주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비판한다. 즉, 호켄다이크의 관점에 따른 교회의 사회정치적 유용성은 선교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호도했으며, 선교는 사회변혁을 이루는데 있어서 교회의 유용성과 일치하고, 따라서 교회는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일정들이라는 정글에서 길을 잃게 되었다.
하르텐슈타인이 빌링겐 회의에서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사용한 의도는 선교에서 교회를 배제하거나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심을 단순히 관망하는 무기력한 실체로 소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선교적 본질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슬로건인 “이 세대에 전 세계를 복음화하자”라는 “세상에 대한 정복자로서의 교회” 개념이 1947년 휘트비 선교대회에서는 “세상과 연대성을 가진 교회”라는 개념으로 변화되면서 교회론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와 세상과의 연계성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빌링겐 선교회의를 거쳐서 하나님과 세상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교회의 자리를 세상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보쉬는 이러한 교회와 세상과의 선교적 관점의 변화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교회-세상에서 하나님-세상-교회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교회에 대한 두 견해들 간의 지속적인 긴장이 유발되었다고 말하면서 “스펙트럼의 한 쭉 끝에서 교회는 자신을 구원의 소식을 독점하고, 그것을 유일하게 전달하는 자로 인식하며, 다른 한 쪽 끝에서 교회는 자신을 기껏해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의 예시로서 간주된다”고 주장한다. 즉 전통적인 교회중심의 선교는 교회가 하나님의 왕국의 실현자로 선교사명을 감당하며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회심을 유발시키는 활동의 대행자로 간주되는데 반하여,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 낳은 주장은 선교는 사회의 인간화이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활동하시는 방식에 대한 지시자 정도로 밖에 간주되지 않는다.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은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업이지 우리의 사업이 아님을 역설하며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갈등적인 요소들의 화해를 시도한다.

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때때로 교회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예수의 이름도 무시해 버리는 선교 개념들을 지지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것은 그 개념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잘못 사용한 경우다.… 만일 우리의 사고의 중심에 하나님의 선교의 실재를 위치시킬 경우, 현재 기독교 공동체를 철저히 분열시키는 선교에 관한 두 가지 잘못된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한편으로는 개개의 영혼이 회심해서 세례를 받고 교인으로 등록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교회의 양적인 증가가 선교의 주목표이다. 이들에게는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선교의 중심이 아니다. 소위 복음이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구조를 변화 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개인의 구원과 교회 성장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된 임무는 말이나 글로 복음을 직접 전하는 복음전도이다. 사회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도록 유인하기 위한 방법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가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알게 해주는 복음전도와 영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주된 사업이다.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사업은 복음과 무관하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고, 그것은 모든 나라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가 자기 몸집만을 불려 가는 일을 최우선적 사명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선교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이해 방식 사이의 갈등은 교회의 증거를 대단히 약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이 갈 등은 양쪽 진영 모두 중요한 진리를 수호하기 때문에 지속된다. 하지만 나는 두 진영 모두가 중심이 되는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뉴비긴이 말하는 중심 되는 실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적 실재에 대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새로운 실재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부여되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위기의 순간들, 즉 세상이 교회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제기한다. 그러한 위기의 순간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성서적 세계관에 근거한 참된 대답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복음전도를 위해 힘을 다하라고 재촉할 필요가 없었으며, 단지 이 시대의 지배자들과의 어떤 타협도 안 된다는 경고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보쉬는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의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진영, 그리고 정교회도 하나님의 선교 개념에 대한 이해와 관점에 동의한다고 주장하며, 문제나 위험은 삼위일체의 교리가 교회의 신학과 선교에 있어서 다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그 기능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을 염려한다. 또한 그는 하르텐슈타인이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한 본래의 의도가 교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선교활동(missions)의 성공이 결코 하나님의 선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복음주의 진영에서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초월지향적인 관점과 에큐메니칼 진영, 특히 호켄다이크가 주장하는 바대로 하나님 나라를 세상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 모두 위험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보쉬나 뉴비긴의 입장은 교회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며 교회의 선교에 대해 통전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오늘날 복음과 구원, 그리고 선교의 의미가 수직적인 차원과 수평적인 차원으로 양극화되고 축소되어 나타나는 현상인 환원주의(reductionism)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호켄다이크가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의 선교와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선교적 본질과 구조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이 태동된 배경에는 다양한 상황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론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서구교회가 지배해 왔던 세계관이 그 저변에 놓여 있었기에 그 세계관의 극복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선교가 나왔다고 보여진다. “교회 중심의 선교”가 안고 있는 함의는 교회가 복음과 문화와의 대면을 통해 역사적으로 형성한 세계관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우리는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틀이 무엇인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문화적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은 가장 가까운 근원은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이다. 서구 개신교는 계몽주의의 가정인 이분법적 세계관에 의해 정치, 과학, 경제, 등의 공적인 영역이 지배되는 것을 수락하고 개인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물러나게 됨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8세기 이후의 기독교 신앙의 틀은 영혼과 내적 삶, 개인적 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경건주의적 형태로 살아남게 되었다. 따라서 계몽주의의 틀 안에서 교회는 세속화의 길을 따라 나갔으며, 성서는 더 이상 세계 역사를 이해하는 준거 틀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성서(복음)의 빛에 비추어 문화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시각의 상실을 초래했다. 결국 교회는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 선교적 본질을 상실한 채 문화의 포로가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성서의 메시지의 왜곡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faith)는 그 뿌리를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인한 교회의 콘스탄틴화(Constantinization of the Church)에서 찾아볼 수 있다.
뉴비긴은 예수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왕권과 우주적 통치권에 관한 것으로서 세상의 공적 생활과 분리된 내적인 삶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교회가 예수의 메시지에 충실했을 때 로마 제국의 세력과 충돌 했으나, 그러한 충돌을 피하고 교회의 안전을 도모하는 방법으로 황제 숭배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결속력을 인정하고 신앙을 단지 구원의 길들을 제공하는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교회론은 서구 기독교가 구축한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의 세계관에 근거한 것이다. 현대 교회들이 공적인 생활을 지배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아무런 도전이나 위협을 가하지 않기에 국가의 법률에 의해 보호를 받아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공적인 삶의 양식을 지배하는 서구의 지배문화(a dominant culture) 가운데서 사적인 영역으로 좌천되어 오랜 기간 안정을 누려왔기 때문에 서구 문화에 대해서 강력한 도전을 제시할 힘을 상실했다. 또한 교회는 성서적 비전을 갖고 지배문화에 대한 변혁을 시도할 능력을 상실했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서구선교의 역사는 이러한 서구교회의 세계관의 다른 문화에 대한 침투로 말미암은 왜곡된 교회론과 신앙의 틀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구의 세속적 문화에 대해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문화이해의 초석을 제공하는 것은 교회의 책임이다. 뉴비긴은 교회가 개인적 영역에 길들여진 상태를 벗어나서 공적인 영역에 대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성서적 정열로 돌아가야 된다고 충고한다. 공적인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참여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공적인 영역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에서 선교적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어떠한 정치체제도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되지 못한다.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를 역사의 중심으로 본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세속적인 정치적 질서나 일정과 일치시킬 수 없다. 교회는 세속 정치와 경제적인 삶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위임과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해야만 한다. 즉, 교회가 복음을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하고 선교를 교회의 한 과제나 기능으로 축소한 것에 대해 회심을 경험한다는 것은 복음 안에서 교회의 본질을 발견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교회로서 지배문화의 유혹에 굴복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에 의해 파송 받은 대안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로서 세상을 복음으로 변혁하는 선교사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교회와 선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문제점은 이원론적인 접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교회와 선교는 분리될 수 없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다. 반 젤더(Craig Van Gelder)는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본래적으로 선교 교회이다. 성령께서 교회를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려고 확립하시고, 인도하시며, 가르치시는 것처럼, 교회는 아들의 구속사역에 전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교는 교회의 기능적 접근에서 그 본질로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교회의 본질과 사역과 조직에 대한 이해의 근거는 선교적 교회의 핵심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복음 20:21의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라는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명령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라는 말씀에서는 선교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파송되며 그의 사역은 아버지의 계획과 아들의 사역을 이행하기 위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선교적 교회론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교회의 선교적 본질과 더불어 교회의 선교적 구조에 대한 재발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Ⅳ. 나가는 글

이상에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기독교 내의 다양한 입장들을 정리하고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슈들을 살펴보았으며, 하르텐슈타인이 의도했던 하나님의 선교의 본래적 의미가 “교회는 본질적으로 선교”라고 하는 선교적 교회론을 담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이분법적인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선교적 교회론(missional ecclesiology)의 고찰을 통해 시도해 보았다.
우리가 신학의 상황성(contextuality of theology)을 진지하게 숙고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나온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즉, 1952년에 열린 IMC 빌링겐 선교대회는 계몽주의 세계관에 근거한 서구선교가 기독교 신앙의 사유화(privatization of faith)와 영화(spiritualization of faith)를 강조하며 이방인의 개종과 영혼 구원이라는 매우 단순하고 교파중심의 선교 수행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서구의 교회 중심적 선교는 식민지적 선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고,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제 3세계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와 서구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빌링겐의 모토는 서구 선교에 대한 겸손한 자성과 회개를 의미하는 “십자가 아래서의 선교”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고찰해 볼 때, 하르텐슈타인의 의도는 서구교회와 서구선교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통전적 신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르텐슈타인의 본래적 의도가 에큐메니칼 진영, 특히 현재적 종말론을 주장한 호켄다이크에 의해 환원적으로 해석되어 오해가 깊어졌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있는 긴장으로서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회심과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선교사로서 교회에 대한 하르텐슈타인의 강조는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핵심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교와 로잔운동의 신학이 주장하는 통전적 관점은 대화의 실마리를 찾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라는 의미는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해 파송 받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을 사랑(the Great Commandment)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교회는 복음전도를 통한 개인구원과 교회개척에 전념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구원활동에 참여하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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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어(Key Words)

하나님의 선교, 통전적 선교, 선교적 교회
Missio Dei, Holistic Misison, Missional Church


Abstract

A Holistic Approach of Missio Dei

Choi, Hyung Keun(Seoul Theological University)

This paper began by recognizing a critical issue that the concept, Missio Dei, has been in controversial debate between ecumenical and evangelical circle since the term was coined by Karl Hartenstein in the 1952 Willingen conference. The aim of this paper is to historically examine the concept of Missio Dei in relation to the development of the concept of mission, to review varied approaches of Missio Dei, and to analyze and evaluate them from a point of missional ecclesiology.
The Missio Dei concept has been understood in different approaches. After world war II, the concept of mission which was church-centered has been changed in 1952 WCC Willingen conference. That was a change from church-centered mission to God-centered mission, so-called Missio Dei. This concept embraces God Himself as the subject of mission and the church as the one being sent by the trinitarian God. This was the result of a theological reflection to western colonial mission. And these self-understandings and interpretations brought different revenues to understand mission to ecumenical and evangelical circles. In fact, there have been misunderstandings on Missio Dei concept for both ecumenicals and evangelicals. Karl Hartenstein coined the Latin words, Missio Dei, for the first time. His intension for using this particular words is to insist to mission as the participation in God's mission with the overall purpose for revealing the sovereignty of Jesus Christ who is sent by the Father, affecting every creature. For him, the subject of mission is the trinitarian God and its final purpose is the extension of the kingdom of God. The essence of the church is to participate in God's redemptive plan for salvation of the world. In other word, God accomplishes reconciliation with the world as well as judgement of the world through incarnation, crucifixion and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In this sense, the cross as signs of judgement and reconciliation is a sign of which the church is sent into the world by the trinitarian God. In Missio Dei the mission of the Son continues to be done in the mission of the Holy Spirit, and it concretizes in the mission of disciples in the world. For Hartenstein, the meaning of the church's existence is to participate in God's compassionate activity toward the world.
After Willingen conference, Missio Dei has been a central theological concept in ecumenical movement. The leading figure for developing this concept is J. C. Hoekendijk. He has reduced the role of the church as a bystander of God's concern for the world. He has emphasized a direct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the world as he more likely ignores the role of the church in the world. People who are proponents of this view developed the concept of mission as humanization and secularization.
Responses of the evangelical circle to the Hoekendijk's interpretation of Missio Dei were the criticism to his emphasis on socio-political shalom as humanization or secularization. In Lausanne 1974, John Stott affirmed that mission is the trinitarian God's activity, and the mission of the church is based on God's mission. This view has been developed as holistic approach of mission, that is, rejecting dichotomized view of evangelism and social action. But for evangelical circle many people insist priority of evangelism over social action.
For Roman Catholic church Missio Dei has been understood in Lumen Gentim and Ad Gente, which insist the church as God's pilgrim people and that the essence of the church is missionary. Here we can find that mission theology and ecclesiology of Vatican II embrace the concept of Missio Dei and maintain the main content of mission as the essence of the church. Also, Orthodox churches accepted Missio Dei.
In analysis and evaluation of the above different views on Missio Dei, we need to carefully examine what Hartenstein wanted to say. Hartenstein's intention in using Missio Dei can be viewed that he did not set the church aside from the mission of God to the world, but tried to define mission as the essence of the church. Lesslie Newbigin strongly asserts that mission is not our business, but God's as he points out the reductionist view on Missio Dei and resolves some conflicting factors. Rediscovering the concept of Missio Dei is a way to overcome dichotomy between horizontal and vertical dimension of mission and to rediscover the meaning of "public gospel." This attempt makes the church live out the gospel and transform the ministrial pattern and church 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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