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도 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선교신학 전공)
심 상 철
선교지향적 교회로의 전환
목 차
I. 서 론 .................................................................................................................... 1
1. 문제 제기 및 연구목적 ................................................................................. 1
2. 연구방법 및 범위 ........................................................................................... 2
II. 초대교회 :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 .................................................................. 5
1. 예루살렘교회 ................................................................................................... 5
2. 안디옥교회 ...................................................................................................... 10
3. 데살로니가교회 .............................................................................................. 15
III. 개혁교회 : 분석과 평가 ......................................................................................... 18
1. 종교개혁 교회 : 루터와 칼빈 교회 ............................................................ 19
2. 독일 교회 :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교회 .................................................... 23
3. 영국 교회 : 윌리암 캐리의 선교 ................................................................ 32
IV. 패러다임 전환 : 변화와 전망 .......................................................................... 37
1. 예배 패러다임 전환 ...................................................................................... 38
2. 교육 패러다임 전환 ...................................................................................... 44
3. 봉사 패러다임 전환 ...................................................................................... 47
4. 교제 패러다임 전환 ...................................................................................... 51
5. 증거 패러다임 전환 ...................................................................................... 52
V. 결 론 ................................................................................................................. 56
1. 요 약 .................................................................................................. 56
2. 평가와 전망 .................................................................................................. 58
참 고 문 헌 ..................................................................................................... 62
I. 서 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우리는 불과 21세기를 3년 남겨 둔 세기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고 지상명령을 주신지 어언 2천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상황은 어떠한가? 데이빗 바레트(David B. Barrett)의 1997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체 세계인구 59억중 약 20억이 기독교인이고 나머지 39억이 비기독교인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땅에 수 많은 교회들이 있고 엄청난 자원들을 소유하고 있음에 불구하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가?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교회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선교지향적인 교회(Mission-oriented Church)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하여 왜 많은 교회들이 선교지향적이지 못한지에 대해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일어난 16세기에서 18세기의 개혁교회를 중심으로 그 시대적인 배경과 그 교회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들과 선교지향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의 선교의 대동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서 거듭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그 이정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첫째로 선교지향적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범위를 한정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의미하는 선교지향적인 교회란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말해 복음을 전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 모두를 행하는 통전적인 모습을 지닌 교회를 의미한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함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고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교회를 선교지향적인 교회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둘째 본 논문은 시기별, 나라별 연구방법을 채택한다. 1세기의 초대교회,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한 종교개혁교회, 17세기 개신교선교를 시작했던 독일교회, 이어서 18세기말에 선교적 바톤을 이어 받은 영국교회에 국한지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본 논문은 선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교회와 인물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선교운동이 중심적인 몇몇 사람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교회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문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독일의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 영국의 윌리암 케리와 영국 교회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넷째, 본 논문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사적인 고찰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채택한다. 선교지향적 교회들의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그중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에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 교회가 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분석을 꾀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각 시대별, 나라별 교회의 선교지향적 교회로서의 핵심을 통해 현대 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중요한 특성을 부각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본 논문을 전개시킬 때
II장에서는 초대교회의 선교지향성을 다룬다. 여기서는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로서의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III장에서는 16세기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을 통한 종교개혁교회의 선교지향적이지 못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17세기 경건주의운동을 통한 독일교회의 선교와 18세기 영국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다루게 되는데 진젠도르프를 중심으로 하는 모라비안 교회와 윌리암 케리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에 대해서 살펴 보게 될 것이다.
IV장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여러 측면에서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함으로서 한국교회에 대한 변화와 전망을 꾀하고자 한다.
V장은 결론으로서 각장의 성과를 개괄하고 각장의 분석작업으로 드러난 선교지향적인 교회들의 특성들을 통시적인 조망을 통해 규명하고 이것이 오늘의 현실에서 갖는 의미와 구체적인 적용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올바른 선교 정신을 통한 선교열이 바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시발점이요 원동력임을 밝힘으로써 본 논문을 맺고자 한다.
II. 초대교회 :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
본 장에서는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로서의 초대교회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그 범위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교회,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운 안디옥교회,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먼저 오순절 성령강림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과 아울러 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선교의 범위를 확대하지 못한 원인들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에 이어 선교하는 교회로의 바톤을 이어받은 안디옥교회의 선교기지로서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서 살펴 보고 끝으로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초대교회의 주요한 세 교회를 통해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시작과 모델을 규명하고자 한다.
1. 예루살렘교회
(1)예루살렘교회의 선교
교회 갱신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마다 우리는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를 내걸 때가 있다. 이러한 갱신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바로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에 묘사된 예루살렘교회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교회가 어떠한 면에서 선교지향적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들은 오늘의 교회가 선교지향적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침들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에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7주일이 지난 후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세례의 결과로 세례를 받게 되어 시초부터 상당히 큰 공동체로 출발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전도(Kerygma)를 들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하심을 성령을 통해서 현재도 역사하시는 구원사건의 사도적 선포인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장소와 어떤 시기에 있어서도 예루살렘교회의 활력의 근원이었다.
둘째로 교육(Didache)을 들 수 있다. 사도들은 그들의 가르침의 사역을 성전과 가정들을 돌아다니며 날마다 수행했으며(행 5:42), 이러한 사실은 개종자들의 배움에 대한 갈망과 사도들에 의해 소유된 정보의 충분한 축적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바나바와 같은 사람은 교사로 부름을 받았으므로(행 13:1) 그가 안디옥교회를 돕기위해 보내지기 전에 예루살렘교회에서 가르침의 사역을 감당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렇듯 예루살렘교회가 교육하는 것을 즐겼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로 봉사(Diakonia)를 들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교제에 대한 언급후에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공유한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쿰란공동체의 실천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지만 사해 공동체에 있어서는 소유의 나눔이 의무적인 것인 반면에 예루살렘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는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를 갖고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서로 빵을 나눔으로써 부족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던 자체안의 공동체의 삶 뿐만 아니라 성전 문앞에 있는 장애인을 돕는 등의 공동체 밖의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역들 가운데서 예루살렘 교회는 참된 교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교제(koinonia)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2:42절에 가르침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들의 교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열려져 있는 어떤 것을 말하며 신자들에 의해 일상적인 삶이 나누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성서적이고 사도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교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자주 모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 2장 46절에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신앙이 배우고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람들을 함께 이끌었으며 이러한 교제에 있어서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들 가운데 있느니라(마 18:20)” 는 주님의 약속을 갖고 있는 가정 교회(The church in the house)는 큰 혜택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가정의 모임들에서 예수님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이 구세주에 대한 많은 기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봉사가 전도 못지 않은 선교적 의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전도만이 선교라는 일변도의 것이 아니라 전도와 봉사, 교육 이 모든 것이 포괄적으로 선교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교회가 보여주는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모이는 데 열심을 다했으며(행 2:46), 경건한 신앙의 풍토가 조성되었다(행 2:42-43). 아울러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같은 그들의 선교적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과 추앙을 받는결과를 가져왔으며 다수의 결신자를 얻어 양적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사역은 오늘날 여성선교회나 해외선교부와 같은 몇몇 선교관련기관이 담당했던 업무가 아니었으며, 장로나 집사나 사도들과 같은 전문가들에게만 위임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평신도와 사역자가 구분없이 모두 이 일에 참여하였으므로 교회자체가 선교사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예루살렘교회의 시련과 선교 범위의 확장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최고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도시와 나라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이러한 편견을 믿으면서 자라왔으며 초기 마가 다락방 공동체는 오순절의 놀라운 역사에 그들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더욱 그러한 것들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예루살렘교회는 지속적인 보존사역이 크게 요구되어지는 하나의성숙된 규모를 가진 제도적인 교회가 되었다. 비록 생동적이기는 하지만 첫 교회는 마치 거대한 조직체처럼 지나친 행정적인 부담아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첫 교회는 여전히 살아있고 흥분되어 있었지만 지도력과 수고의 많은 부분이 현상유지를 위한 사역에 집중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만 집중해 있는 기독교인들이 AD. 35년경에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로 인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서 예수의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실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복음은 우선 예루살렘에서 북상하여 소아시아에 이르게 되고 수리아의 수도였던 안디옥에 이방인들로 조직된 큰 교회가 설립되었고 안디옥에서 복음은 다시 서북쪽으로 행하여 드디어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2. 안디옥교회
(1)안디옥교회의 설립과 성장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확장되어 가면서 변화가 요구되었는데 그러한 변화의 일부로서 활동의 중심지가 전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안디옥 교회를 들어 사용하심으로 선교사역의 중심을 예루살렘 밖으로 옮기셨고 전세계로 뻗어나가게 하셨던 것이다. 권위의 중심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선교의 중심지는 안디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사도들은 사명과 권위를 가졌지만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께 안수받은 전도자를 갖고 있었다. 안디옥은 선교를 위해 매우 중요한 위치 즉 선교본부가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의 시점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시리아의 마을들을 통해 안디옥까지 이른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할례에 의해 먼저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회심자들을 공동체안으로 받아들였다(행 11:19-21). 이처럼 이방인을 향한 안디옥교회의 전도는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에 대해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에서의 상황을 조사토록 하기 위해 바나바를 보내게 되는데 바나바는 그곳에서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기 위해 돌아가는 대신에 북부 도시에 머무르면서 주목할만한 성공적인 사역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인도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행 11:23-24). 이러한 안디옥교회의 성장으로 인해 바나바는 도움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사울을 찾기 위해 다소로 가게 된다. 사울은 안디옥에서의 필요와 기회에 대해 감동을 받고 기꺼이 그의 사역의 영역을 바꾸었다. 이 두사람은 일년동안 “큰 무리(행 11:26)”로 묘사되는 회심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열매있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2)안디옥교회의 선교
그리스도 시대까지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동양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서양의 교차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헬라 문화가 로마의 정치와 안디옥에서 합류하게 되어 복음을 수용하는 이상적인 중심부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공공질서가 철저하여 안디옥교회는 규모와 주요성에 있어서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안디옥은 복음 전파가 대중 소동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던 소수의 제국도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에 대한 첫번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때로부터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디옥교회는 뛰어난 선교적인 교회였다. 예루살렘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점점 그레꼬-로만 세계의 복음화에 대해 덜 중요해진 반면 안디옥교회는 헬레니즘 세계의 이 지도적인 센터를 통해 앞으로 전진할 준비가 되어 있고 커다란 선교적인 확장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안디옥교회는 아시아 소수 만족과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그리이스에서 이방인 회중들의 엄청난 성장을 위한 촉매제가 되어 갔다. 안디옥교회는 선교기지로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라(행 1:8)”는 그리스도의 위임의 마지막 부분을 성취하기를 착수한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교회는 교회의 지도적인 사람들을 선교사로 부르시는 성령의 부름에 대해 주저하기보다는 금식과 기도를 통한 신중함의 자세로 전적으로 순종하는 참으로 놀라운 선교정신을 보여 주었다(행 13:2-3). 교회가 이방인의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할 떼 기도하고 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기도로 시작한 교회, 기도로 시작한 전도자들이 있었기에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기도를 중심한 영적 전쟁이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바로 인식시켜 준 기도를 통해 선교한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타문화권선교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먼저 안디옥교회는 봉사하는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다양화된 사역의 부유함으로 축복받은 교회였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보면 안디옥교회의 몇몇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회중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도록 용기를 복돋을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의 매우 커다란 무리들이 그들이 받은 사역을 위한 은사에 따라 봉사할 용기를 얻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이른 선지자중 한 사람인 아가보의 ‘흉년 예언’을 듣고 흉년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즉시로 유대에 있는 형제들의 구제를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행 11:29). 그리고 이것을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내는 모습을 통해 이웃 사랑의 참된 봉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끝으로 안디옥교회는 교육하는 교회였다. 안디옥교회의 생활에 있어서 가르침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기 위해 간 것도 이러한 도움을 얻을 목적이었다(행 11:25-26). 이방인들은 구약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그들의 환경이 그들에게 적당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안내를 필요로 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의 신생 교회들에게 보낸 바울 서신의 실제적인 부분들을 읽을 때 그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이 상당히 정확하게 안디옥교회의 환경에서 이미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전도와 봉사와 교육 모든 면에 자연스럽고 친밀한 교제가 스며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도 있었고 교사도 있었다. 선지자란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영적 본위의 신자요, 교사란 이지적인 교인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신령파니 진실파니 하면서 사우지 않고 일치단결하였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모였으나 지역감정이나 민족적 장벽이 없었고 귀족 출신과 평민이 한 데 어울렸고 교회 설립자나 학자라고 자랑하지 않고 일치 단결하는 참된 교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그룹으로 실제적인 하나됨을 실현하고 보여준 최초의 교회일 것이다.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들이 식사할 때 함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가리킨 바울의 증거(갈 2:11-14)로 인해 이러한 사실은 더욱 확고해 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에 의해 실행된 책임감의 깊은 의미로부터 복음으로 이방 세계에 나아가기 위해 그들의 선교적인 역할을 시작했으며 계속적인 기도와 커다란 기쁨을 불어 넣는 복음을 위한 승리를 보고할 수 있었던 그들의 선교사들과의 계속적인 접촉 때문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안디옥교회를 선교본부로 삼고 선교활동을 했던 바울은 15년 남짓 걸린 3차 선교 여행을 통해 아시아의 갈라디아와 아시아 및 유럽의 마게도냐와 아가야등 인구가 조밀한 네 지역을 다닐 수 있었으며 넓게 뚫린 로마의 도로를 따라 도로 주변에 주요 도시마다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 3차 선교 여행이 끝날 때에 이르러서는 “...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고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데살로니가교회
(1)데살로니가교회의 설립
바울의 선교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그들의 목적지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러서 관습에 따라 세 안식일을 사역하며 바울이 강론의 기지로서 회당을 사용했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풀어 증명할 때 토론과 논쟁이 일어났다. 바울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라고 선포했을 때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의 불일치는 가장 강렬해졌다(행 17:3). 실라도 바울이 단언한 것을 확고히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복음의 선포의 결과로 몇몇 유대인들과 수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설득되었다(17:4). 그러나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와 같은 상업의 중심지에 많이 있었던 폭도들을 동원해 소란을 일으키게 되어 비록 교회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메신저를 보낼 가능성을 배제시키지는 못했지만(살전 3:2), 결국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 사역이 일단락 짓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도시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갈망하고 또 그들을 돕기를 원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서신을 그들에게 쓰게 되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이 복음을 받고 개종하여 설립한 교회이다. 그러한 면에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복음을 통해 개척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받은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룩한 교회인 것이다.
(2)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
데살로니가교회는 신약 성경의 교회 중에서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선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에 담긴 믿음, 소망, 사랑을 삶속에서 가장 잘 실천한 교회였다(살전 1:2). 또한 하나님의 도를 받아 주를 본받는 모범적인 교회였다(살전 1:7상).
아울러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랑의 교제가 있는 교회였으며(살전 1:1, 4:10),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서로를 세워주는 교회였다(살전 5:11).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는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전한 것인지 아니면 그 도시를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증거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먼저 주님과 그의 구원에 대한 증거를 전하는 열심을 갖은 교회였다(살전 1:8).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는 복음을 받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즉시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성장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세 교회를 통해 나타난 모습은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인 것을 살펴 보았으며 이러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들은 대체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통전적인 선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이 중세의 어두움을 깨고 개혁의 횃불을 밝힌 종교개혁으로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교회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다음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III. 개혁교회 : 분석과 평가
본 장에서는 종교개혁이후 개혁교회의 선교에 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그 범위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교회,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독일의 경건주의자, 특히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 그리고 근대선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케 한 윌리암 케리와 영국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먼저 왜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이어서 독일에 있어서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우는 경건주의운동으로 시작된 독일 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를 중심으로 고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윌리암 케리에 의해 어떻게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이에 대해 영국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반응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개혁교회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과 비선교지향적인 모습의 원인과 관계성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다.
1. 종교개혁 교회 : 루터와 칼빈 교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나타난 영적 세력이 유럽의 신교 교회들을 발전시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의 논객이었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네(Robert Bellarmine)는 참된 교회의 18가지 특징들 중에 그 교회의 선교활동을 포함시키고 이점을 가지고서 비교할만한 선교 활동이 전혀 없었던 프로테스탄트들을 다음과 같이 힐난할 정도였다.
이단들(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킴)이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교 신 앙으로 개심시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이 한 일은 단지 그리스도 인들을 유혹한 것 뿐이다. 그러나 금세기에만 하여도 가톨릭은 신대륙에서 수만명의 이교도들을 개심시켰다. 해마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감독 에게 충성스러운 가톨릭 교도들에 의하여 로마에서 개심하고 세례를 받고 있다. 로마와 다른 지역에서 개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투르크인들도 있 다. 루터교도들은 자신들을 사도들과 전도자들과 비교한다. 그러나 독일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폴란드와 헝가리는 투르크인들을 그 이웃으 로 삼고 살고 있지만 단 한줌의 사람마저도 그들은 개종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종교개혁교회들이 이토록 선교지향적이지 못했는가? 그 첫째 이유는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계에서는 선교의 의무가 특히 사도들에게만 주어졌고 그들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인간의 책임을 배제한 예정론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회심시키고자 하신다면 사람들이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이 간여한다는 것은 어리석고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는 선교사를 땅끝까지 보낼 권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책임도 없다고 가르쳤으며 그로 인해 종교개혁교회들은 비선교지향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너무 임박했기 때문에 복음을 널리 전파할 시간이 없다고 믿은 신학사상의 영향 때문이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모두 세상종말이 절박하다고 믿었다. 어두움은 이미 많이 지나갔고 밤이 상당히 깊었으며 새 날이 임박하였으므로 멀리 있는 접근할 수 없는 영토에 대한 오랜 기간의 선교는 문제시 되지 못했던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개신교 자체의 생존의 절박한 문제 때문이었다. 로마 천주교회의 강대한 세력권 안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진압당하지 않고 살아서 뻗어 나가기 위하여 많은 힘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생존의 문제에 고민해야 했던 개신교 교회는 세계 복음화에 필요한 비전이나 열정같은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와 연관지어서 루터교와 개혁파 교회 사이의 교리논쟁 등의 상호 갈등으로 인해 선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네 번째 이유는 개신교쪽으로 기울어진 국가들이 유럽의 북쪽에 있는 독일 북부, 덴마크, 화란, 영국 등이었는데 전세계적인 지형상 한편에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진출하려면 해상 통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종교개혁 직후에는 천주교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바닷길을 지배하고 있음으로 인해 선교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양로를 완전 장악하여 정치상의 제국주의와 병행하는 일종의 종교상의 제국주의를 수립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활동은 대부분 국내에 제한되어 있었다. 지리적인 제한은 연방 교회의 개념에 따르는 심리적인 제한에 의하여 더욱 강화 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통치자가 신민의 영적 안녕에 책임을 지며 신민의 종교를 통치자가 결정하고 그의 영토에서 통치자는 국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일에 있어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토안에서’ 즉 자신의 영토밖에 대해서 그는 아무 책임도 없었다. 이렇듯 주어진 지리상의 테두리안 속에 완전히 폐쇄된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 이유는 종교 개혁가들이 교황청을 반대함과 함께 가톨릭의 선교 정신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그들이 수도원 생활을 거부함과 함께 수도원에 의한 선교조차도 무시했으며, 재세례파를 거부함과 함께 그들의 선교 정신조차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종교개혁교회는 거의 천 년 동안 선교의 전통, 전문 기술, 기구를 제공하였던 수도원 제도 및 개념을 거절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선교가 지니고 있는 수도원 구조를 대신할 만한 구조를 제공할 수 없었으며 영토적 한계에 의하여 제약을 받지 않는 세계선교에 대한 초기 프로테스탄트 비전을 구현하고 독특한 양식으로 선교적 백성의 기수로서 후기 교회 개념을 예시해 주었던 제세례파의 선교를 거부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선교를 거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가진 성질을 들 수 있다. 다시말해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라는 신앙으로 인해 개인주의적인 면이 강하게 되고 사회적인 헌신의 측면은 약화되었으며 특히 그들이 가졌던 민족주의로 인해 선교지향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개신교의 신앙생활이 법적으로 승인된 후부터는 자체정비에 몰두하면서 개신교회가 기구화 현상을 나타내고 선교력을 갖추지 못함으로 인해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바른 말씀의 선포, 성례전의 바른 집행, 정당한 권징의 실시등은 주님께 얼마나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를 기본적인 요소로 사용하여 교회의 존재 의미와 진위를 가리려 했으며 이러한 교회의 특성들이 교회의 통일성, 성결성, 보편성을 갖게 하는 보다 역동적이며 포괄적인 방편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이러한 좋은 특성의 어두운 면, 배타적이며 내향적인 면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특성을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역 자체보다 특정한 일이 일어나는 특정한 장소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후기의 개신교는 자성하는 일과 역동적인 역할을 계속 상실해 갔던 것이다.
2. 독일교회 :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교회
(1)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배경과 발전
30년전쟁(1618-1648)이 끝나던 17세기 중엽 독일 루터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사변적 기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정권이 교권을 지배하는 정치체제로 인한 교회의 타락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성직자들이 사변적 교리 논쟁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경주석이나 목회에는 별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고 신조를 가르치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했으며 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변적 설교를 라틴어를 사용해 가면서 길게 하곤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30년전쟁으로 인해 물질적, 영적으로 황폐해져 있는 독일의 상황에 위로나 구제의 손길을 펴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그야말로 활력을 잃고 교회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670년 독일 개신교 안에서 형성된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성과 교회의 철저한 갱신을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후 대각성 운동, 부흥 운동, 19세기의 범세계적 선교 운동 및 많은 종류의 자선 활동의 유익한 요소들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경건주의 운동은 그 창시자로 여겨지는 필립 야곱 슈패너(Philipp Jakob Spener)가 교회와 사회에 대한 매우 솔직한 비판과 아울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개혁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경건주의 이념을 피력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 라는 글이 출판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슈패너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Prancke)에 의해 이어지게 되는데 프랑케는 드레스덴에서 슈패너의 집에 거의 두달간 머물렀는데 이것이 아주 긴밀한 내적인 결속으로 이끌었다. 그 후 1691년 프랑케는 브란덴부르그(Brandenburg)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통하여 새로 설립한 할레 대학(University of Halle)을 경건주의자들로 채우려 했던 슈패너의 도움으로 할레 대학의 헬라어와 동양어 교수로 임명받게 됨과 동시에 글라우카(Glaucha)에 있는 시골 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할레 대학에서 프랑케는 경건주의 정신에 입각한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가난과 부도덕의 생활에 빠져있던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뻗쳤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고, 고아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여 엄격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과부들을 위한 과부의 집, 병원, 교사양성 학원을 설립했고 성경 보급소를 세워 성경을 각국어로 출판하여 싼값으로 보급했다.
뿐만 아니라 1706년에는 할레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프랑케의 두 제자 바돌로뮤 치겐발그(Bartholemaus Ziegenbalg)와 하인리히 플뤼차우(Heinrich Plutschau)가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 4세에 의해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 해외 선교를 자신의 기관의 양자로 삼을 만큼 정열을 쏟음으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독일 개신교의 역사에 있어서 해외 선교를 위한 최초의 기관이 되게 하였다.
이처럼 사회복지 사업을 포함한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 등을 시작한 프랑케를 통하여 경건주의는 크게 성장하고 보편 타당성을 얻게 되었으며 특히 프랑케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의 해외 선교가 할레 대학 출신인 진젠도르프로 이어 지게 된다.
(2)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
1)진젠도르프와 선교
1700년 5월 26일에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 가문 출신인 한 작센 선 제후국 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경건주의자 슈패너와 친밀하였으며, 프랑케와 함께 대중교육과 성경배포 그리고 선교를 장려하였던 외할머니 헨리테 카타리나폰 게르스도르프(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프랑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인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뿌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보낸 동 인도 선교에 관한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고 1713년에는 플뤼차우가 할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할레 재단의 선교적 지원을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젠도르프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 모임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그 후 1719년 진젠도르프는 네델란드와 프랑스로 연구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고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으로부터 그의 필생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주요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2)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교회의 선교
진젠도르프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바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 교회의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Herrnhut)로 피난온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불리우던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기독교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공동체가 ‘모라비아파’라고 불리워졌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고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된다.
진젠도르프에 의한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지향적인 교회였다. 그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도하는 것이었다. 진젠도르프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특별히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전도를 실천하였는데 암스테르담, 발틱 국가들, 베를린, 제네바등지에서 집회를 갖고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이르러서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 모두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다음으로 중보기도를 들 수 있다. 1722년까지 90명이 헤른후트에 정착하고 1726년에 이르러서는 300명의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1727년 서로를 권고하고 부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작은 그룹들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4명의 형제와 24명의 자매가 자정부터 그 다음날까지 계속 기도하기 위해 각자 1시간씩 맡을 것을 서약하기에 이르렀다.
모라비안 교회의 시간 마다의 중보기도는 그 후 백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그 다음 2백년 이상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대륙으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모라비안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를 들 수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3)진젠도르프이후의 모라비안교회의 선교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 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고 하였으며,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3. 영국 교회 : 윌리암 케리의 선교
(1)윌리암 케리의 선교 배경
윌리암 케리는 14세때부터 구두를 짓고 수선하는 사람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22세때 침례교회로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침례교회 목사로 안수받게 되었다. 케리의 선교열을 자극했던 것들로는 ‘쿡 선장의 항해기'라는 책과 데이비드 버어나드의 생애, 덴마크-할레 선교회, 존 엘리오트, 모라비안 선교 등을 들 수 있다.
특별히 케리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저술한 ‘기도합주회'라는 책자를 통해 영적각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경험한 케리가 새로운 선교 정신으로 성경을 보게 되니 해외선교야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자신이 완전히 선교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2)윌리암 케리와 영국 교회의 선교
선교 정신을 통해 변화된 윌리암 케리에 의해 나타난 영국 교회의 선교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므로 이방인을 개종하는 일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케리가 노탐프톤셔(Northamptonshire)에서 모인 교역자회의에서 주님의 지상명령의 적용에 관해 토론할 것을 제안하였을 때 죤 라이랜드 박사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여보게 젊은이, 그만 앉게, 만일 하나님이 이교도를 회심시키는 것이 기쁘신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자네나 내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하실 것일세”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케리는 그의 분석을 참을성 있께 정리하여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이교도 회심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해야할 기독인의 의무에 대한 탐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version of Heathens)'였으며 그의 이 소책자는 개신교 선교운동의 대헌장이 되었다.
1792년 5월 케리는 이사야 54:2-3절을 본문으로하여 설교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라는 말을 통해 침례교 목사들에게 선교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모라비안 선교 회보'를 보여 주면서 “만일 당신들이 이 책을 읽고 그들이 어떻게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교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믿음안에서 해외선교를 해야만 할 것이오” 라고 간청하였는데 이것이 모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선교 정신으로 변화된 케리의 여러 가지 노력으로 말미암아 결국 1972년 11월에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침례교 연합회"라는 침례교 선교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1793년 6월 13일에 케리는 이 침례교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인도로 향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40여년 동안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케리의 선교적 환상과 정열은 곳곳에 선교의 불을 붙이게 되는데 선교지인 인도에서 보낸 캐리의 첫 편지가 런던에 새로운 선교운동을 불러 일으켜서 결국 1795년 ‘영국선교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게 했으며 그 후 25년내에 케리의 책과 실제적인 선교의 모범을 따라 11개의 중요한 선교 기관이 설립되었다.
이처럼 케리에 의해 사도시대 이후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선교의 열정과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연합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동안 독일어 사용국에 의해 주도되어 온 개신교 선교가 영어 사용국으로 넘어 오게 되어 영국이 개신교 선교를 주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있어서의 선교는 대체로 기성교단과 별도로 조직된 선교회들에 의해 발흥되어 전개된 것이었으며 교회적인 차원의 적극적인 참여없이 선교회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이들의 선교형태는 선교회 지도자나 선교사 자신의 선교이해와 신앙정신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선교는 대체로 장기적인 교회사역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 및 문화적 차원에 걸친 선교문제 들의 과제에는 민감하지 못하였다. 지상명령에 대한 순종과 강한 말세사상과 인간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세계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 나가 복음전파에 힘썼던 것이다.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를 통해 나타났던 선교지향적인 양상들의 원인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지향적 모습, 그리고 윌리암 케리로 인해 시작된 선교지향적인 양상들을 통해 선교 정신이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고찰을 토대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모습들에 대해서는 다음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IV. 패러다임 전환 : 변화와 전망
플레밍(J. Fleming)은 교회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분담하도록 그 세계에 존재하여 있는 것이며 그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의 의미를 나타내도록 보냄을 받은 선교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를 갱신하고 개혁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하고 공장 노동자는 작업복을 착용한다. 선교를 출발하려는 한국교회는 선교복장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지 못함을 잘안다. 선교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교회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선교를 위한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이제까지 살펴본 성서적,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얻어진 교훈들과 21세기에 선교의 주역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가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어서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지역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그 범위는 교회를 어떻게 선교 정신을 통해 재해석 하고 그 패러다임을 선교지향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먼저 예배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육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 셋째로 봉사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넷째로는 교제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끝으로 증거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제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예배 패러다임 전환
예배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어떠한가? “예배를 보러간다”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다시말해 예배가 구경하듯 보러 가는 행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적극적 결단을 촉구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결의를 적극적으로 다짐해야 한다. 그런데 소극적으로 구경하는 자세로 예배에 임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생활 전체와의 관련에서 역사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공동체안에서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각자가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그 예배에도 공동체적 참여가 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예배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모이는 예배가 흩어지는 선교와 무관한 것일까? 참 예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참 선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접하면서 이제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예배 패러다임을 전환해야만 하는 요청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와 선교를 전혀 무관한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과 만나 그 안에서 하나님이 행동 하시고 인간이 봉사하는 행위이며 예배는 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해 가야하는 지를 알게 해준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경험하며 갱신되고 신앙이 새롭게 되고 희망이 불붙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결속되며 봉사의 길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배는 교회를 ‘세례적 공동체’ 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에 의해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고, 그래서 세상의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례의 공동체라는 것은 그 세례가 죽음에 동참하는 세례이며 신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히고 그와 함께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롬 6:3-5). 그러므로 교회는 온 신도가 다함께 부활의 실재성의 증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며 이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행동이 곧 선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삶의 전체성과 분리하지 않았다. ‘거룩한 장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편재로써 존재했다. 그리하여 신앙인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응답도 하나님의 신성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만남인 예배라는 점에서 생각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말씀과 행위에서 선포되는 거기서 파악되는 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제의적 예배와 엄격하게 제약되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자율적인 내적 활동으로서 예배를 이해하려는 어떠한 계획을 헛되이 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의 윤리적인 부분을 시작하는 12장을 ‘영적 예배’라는 개념으로 시작했듯이 예배란 세상에서 우리의 은사들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몸을 선교하는 일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여 예배가 선교로부터 분리되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데이비스(J.G. Davies)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배가 선교로부터 분리되는 곳에 교회의 내향화가 종종 일어나게 된다. 그 렇게 되면 크리스천들의 집단은 종교적인 연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어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교적 과업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고 그들 회원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게 되며 지역사회 전반의 생활에 대한 책임 은 아랑곳 없이 하나의 종교적 집단과 같이 움직이게 된다.
예배는 수직적인 면과 수평적인 면을 다같이 쌓았을 때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신 말씀을 통해서 수평적인 면이 수직적인 면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배의 수직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그 차원은 충분치 않고 선교에서의 형제 사랑이 전적인 행동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발견 할 수 있다. 예배의 행위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와 선교가 일치될 때 이러한 도피적인 형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예배패러다임을 바르게 전환하여 예배와 선교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고 이 둘의 일치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예배의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시말해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뿌리박은 예배에서 떠나서 객관성과 공동체의 신앙,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앙에 뿌리를 내리는 예배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아울러 신학적 균형을 잃은 설교위주의 예배에서 떠나 말씀과 성례전의 신학적인 균형을 이루는 예배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원이 되기 위한 입회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임무를 맡기는 것이며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제사장의 직무와 계약은 선교와의 관계에서 확인되며 성만찬은 이 임직과 계약을 갱신한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교회원은 성만찬에서 그의 영혼과 육체를 그리스도의 독특한 희생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드리며 이 자기헌신은 세례받을 때 성별된 것을 선교를 위해 갱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직무인 예배와 선교가 부단히 갱신되고 확인되어 가야만 한다. 교회공동체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선교행위에 자신을 봉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것인 동시에 선교 자체가 또한 이 “몸”의 형성에 기여한다. 여기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과 선교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며 예배와 선교의 일치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배당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제 1부라고 한다면 이제 세상에 나가서 예배 제 2부를 삶으로 드린다는 의미에서 축도시 교인들을 모두 돌아서게 하는 교회의 모습은 교인들을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점에 있어서 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예배의 다양화를 통한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예배가 주일 낮예배와 같이 정형화된 예배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려진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상을 예배와 연관지어 손종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전에 있는 어느 교회의 학생회 수련회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는 보기 드문 쾌적한 시설의 장소에서 열린 수련회였다. 그 교회의 장년 출 석은 2~3천명 정도였으나 막상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학생들은 중고등부 합쳐 고작 7~80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고작 30분의 예배시간을 참지 못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장난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반응과는 아랑곳없이 예배는 장년부 예배 스타일로 대단히 엄숙하고 전통적 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순간 일년 동안에 교회를 이탈하는 교인 들 중 40대 이상의 장년층에 비해 청소년과 청년 그룹이 4배에 달한다는 충 격적인 보고를 거기서 실감있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통계가 가리키는 것은 앞으로 10~20년 사이에 한국교회가 젊은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문화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에 젖어 있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 일반적인 교회들은 장년부 중심으로 거의 수십년간 똑같은 스일로 예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자 수가 장년에 비해 4배에 달한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신세대라고 불리우는 청소년들에게 신앙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예배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2. 교육 패러다임 전환
한국교회의 교육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육과 선교는 분리된 별개의 영역인가? 그렇치 않다.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 철저한 개인주의적인 교육을 행하였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복음을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나 자신의 복’이 교인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도록 교육하였다. 이렇게 ‘나 자신의 복’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어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교육은 그 공동체 전체가 하는 행위다. 따라서 그 공동체 안에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 하는데 의존한다. 그리고 그 멤버의 교육이란 그 공동체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시말해 선교 교육이란 선교하는 공동체에서만 이루어진다. 그 선교 교육이 어느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어느만큼 활발하게 선교하느냐 하는 것과 교인을 어느만큼 이 공동체의 삶에 깊이 참여 시키느냐 하는 데 달린 것이다.
선교와 교육은 불가피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교육이 하는 노력의 전부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교에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향하고 있으며 선교 프로그램은 가르침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교육은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선교를 위한 교육은 교회의 교육적인 과업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안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이처럼 교회는 교육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이것은 자체의 성장과 발달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돕는 것이다. 이일을 우리는 교육선교라고 할 수 있다. 선교는 주님이 분부하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육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선교는 선교의 일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교육을 수단으로 하여 가능케 하자는 것이다. 물론 교육만이 선교의 모든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선교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말씀의 선포나 개인전도의 과정을 통해 모인 공동체를 교육을 통하여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전인으로 성장하며 평생토록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교육을 통해 선교를 더욱 효과있게 하는 일이다.
주일학교의 원형으로서의 처음 교회는 전도(Kerygma), 교육(Didache), 교제(Koinonia), 봉사(Diakonia)를 통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갔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초대교회의 교육은 전도, 교제, 봉사로부터 독립된 혹은 이탈된 교육이 아니라 전도에 의해 회개한 자들의 교육이었으며, 그 교육은 말씀의 나눔(Koinonia)으로 이어진 교육이었으며 그것은 다시 세상을 향한 봉사로 이어진 교육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교회의 교육은 전 회중이 참여한 구조적 연결 속에서 이루어진 전 회중의 교육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의 교육을 비로소 “교회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전도, 교제, 그리고 봉사와의 신앙적, 구조적 연계속에서 이루어졌던 전 회중의 교육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교회의 모델을 교회교육 모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의 신앙적 구조의 표현속에서 교회의 존재이유와 표현양식을 되참음으로 디다케를 전 교회회중의 삶 속에서 찾도록 그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핸드릭 크레머가 지적한것처럼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교에 ‘안수받은 교역자나 종교적인 교역자’등 그 소수의 사람만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 되기 위해서는 10퍼센트에 의해서 90센트가 훈련되고 용기를 얻고 도움과 지도를 받아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든 성도들을 훈련시켜 전세계를 향해 전교회가 온전한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이 가진 놀라운 잠재력을 일깨워 주도록 하는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와야 겠다.
아울러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위대하고 성스러운 소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소명들이 “세속적”이라는 것을 시사하지 않아야 겠다. 한국교회는 기독 청년들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전문 직업에 있어, 산업과 상업에 있어,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의 공직에 있어 그리고 매스 미디어에 있어 하나님의 요청에 반응하도록 교육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본거지에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이것은 우리를 다시 복음 전도에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위리의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으로서 그곳에 침투할 수 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또 그들을 제자로 훈련하도록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겠다.
3. 봉사 패러다임 전환
한국교회는 개인영혼 구원을 중시해온 반면 개인의 삶의 터전이 되는 사회의 구조적인 현실을 복음화하는 데에는 침체되었던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역사를 통해 실천한 사회봉사의 유형으로는 첫째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고, 둘째로는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인권옹호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고 셋째로는 교육, 의료, 자선, 문화사업등을 통한 민족사회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선교적 관심이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 즉 해당지역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함께 해결해보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다시말해 선교의 현장으로서 지역사회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이처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보다는 개교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차원에서 사회봉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함께 지고 가야할 아픔들을 외면한 채로 물러서 있는 교회들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사역이 교회의 핵심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데 꼭 있어야 하는 사역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도 예수님이 주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섬기는 봉사의 사역은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말한다. 봉사는 예수님의 주권하에서 평화, 정의, 자비등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하는 데 교회가 참여하고 공헌하라는 부르심이다. 봉사는 단순히 선행 정도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돕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누구나를 섬겨야 하는 교회의 핵심적인 본질인 것이다.
이처럼 봉사를 통해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빈핍한 자들을 돌보시며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또 주린 자들에게 식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아울러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소경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146:5~9).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나님 아버지의 이 사랑과 친절을 친히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굶주린 자들, 병든 자들, 빼앗긴 자들, 버림 받은 자들에게 동정을 가지셨으며 언제나 그의 동정은 적정한 행동을 유발하셨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성령 하나님의 첫 열매는 사랑이다(갈 5:22). 그러므로 그의 백성에게 온유한 사회적 양심을 주시고 또 그들을 박애주의적 구제와 발전과 정의를 위한 추구에 몰두하도록 강권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함으로 우리의 예배를 이러한 행동들 가운데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변화시키는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지역 교회는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제도화된 기관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제도적인 교회를 문화적인 또는 정치적인 운동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구분선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적. 정치적 정의를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확실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부르심은 결코 개인적인 영적 범주로 제한되거나 경제-사회적인 자유의 범주로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선교 지향적인 교회의 봉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삶의 부분을 하나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도록 변화시키는 패러다임 전환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선교지향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지체들과 그들이 가진 은사를 모두가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일에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선교 사역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것이지 선택된 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목표를 설정할 때 하나님의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함께 참여하고 후원하고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활동 계획은 확실하고 가능한 일로 기간을 정하고 기도하며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 이곳 이 시대 안에서 참된 ‘이 땅의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실제적 이어야 하겠다. 아울러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봉사가 복음 전도나 회심의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므로 복음 전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책임도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에 포함되어야 하겠다.
4. 교제 패러다임 전환
교회 공동체의 교제는 별도의 항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바른 유기체적 공동체라면 교제는 자연스럽게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증거를 하는 가운데 되어지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사랑하는 교제 가운데 새롭게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없으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가지는 교제는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증거의 기초가 된다.
교회 공동체의 교제에 있어서 선교지향적 교회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한국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터 와그너가 ‘교제병(koinonitis)'이라고 부르는 병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교회 공동체의 교제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교제는 인간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알고 서로를 좋 아하게 되고 서로를 아끼게 될 때 이 교제는 이루어 진다. 그러나 병이 들 면 교제는 교제병이 되고 이런 서로 좋아하는 관계에만 너무 깊이 빠져 들 어 교회의 거의 모든 활동들의 초점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 내의 활동 들과 인간 관계는 내향적으로 되고 만다.
성도들의 교제가 존재하는 이유를 상실했을 때 교제는 교제병이 되고 만다. 교회는 왜 교육을 하고, 왜 기도를 하는가에 대한 목적 의식을 잃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교회안에서만 서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제 교회안에서만 안주하려는 교제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초대교회처럼 참된 교제가 밖으로 뻗어 나가는 힘이 되며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교제를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로 이끄는 동력이 되도록 그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겠다.
5. 증거 패러다임 전환
초대교회가 철저한 구원관에 입각한 복음의 전달이 이룩되었던 점에 반하여 한국교회의 60년대와 70년대의 복음은 구원이라는 차원을 축복이라는 차원으로 개념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말해 복음전파의 양태가 말씀 0위주에서 주정주의적 신앙의 방향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교회가 설교와 성례, 권징등 교회의 특징들을 내향적으로 해석하여 교회 내에서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잘못을, 선포하는 증거를 통해 교회의 특징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교회는 변혁된다. 다시말해 그 본질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교량이 되게 하는 생활을 통해 교회가 밖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현대는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따라서 언어의 위력은 사라지고 불신의 현상이 계속되고 있음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오웬(D. Owen)이 지적한 바 대로 기독교의 진리는 거의 언어위주의 소유물로 전락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복음 전달의 방법이 언어만을 가지고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언어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증거에서 교회의 행동과 참여를 통해 복음을 전달하는 행동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증거가 필요하다. 오늘의 시대에 증거의 가장 살아있는 방법은 행동하는 참여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함께 묶여진 전달자를 추종하고 거기서 나오는 복음에 더 많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증거는 오로지 말로만 되어져서는 안된다. 생활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심같이(요 17:6) 우리가 위탁받은 것도 생활의 모범적 형태에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거에도 증거하였고 또 현재도 증거하는 것이다.
선교지향적 교회는 주일에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교육과 음악, 설교, 성례, 의식 등을 통하여 선교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며 자의식을 갖게 된다. 이렇게 모였던 교회가 월요일이면 사회 각 곳으로 흩어져 있다. 성도들은 사회 각계 각층으로 스며들어가 있다. 그곳으로 보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교하며 사회에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서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이처럼 세상에서 성취되는 기독교의 증거는 매일 자기가 하는 일상적인 일을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의 일로 생각하고 일하는 교회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신도들이야말로 교회의 최전방 병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피동적으로 설교를 듣고 성례전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며 세속 생활의 초점에 분산된 참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도의 자격과 성례전에서 행한 서약을 통하여 선교와 교역을 위임맡은 자로서 세속 생활 속에서 모일 수 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들 평신도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어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는 새로운 공동체에 의한 낡은 공동체로의 침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빛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라거나 또는 세상에 동화됨으로써 그들의 거룩함을 상실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세상에 침투하면서 그들의 하나님의 나라의 독특성을 보존할 것을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을 신빙성있게 나눌 수 있고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한 효과적인 대리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안에서만 주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와 우주적 권세자들에까지 주가 되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은 “주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라면 교회를 온 민족들에게로 나아가 증거하는 선교지향적인 모습으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증거는 선교와 분리된 별개의 항목이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선교와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증거를 선교와 무관한 별개의 항목으로 여겼던 패러다임을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전환시켜야 할지에 대해서 예배 패러다임으로 시작하여 교육, 봉사, 교제, 증거 패러다임에 이르기까지 살펴 보았다. 이러한 모든 패러다임들이 선교 정신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그리하여 성도들이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God's Missionary People)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V. 결 론
1. 요 약
지금까지 본 논문은 성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과 비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 고찰하고 이것을 통해 얻어진 교훈들과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하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먼저 초대교회에 대해 다루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시작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지향적인 측면과 예루살렘에 다가온 핍박을 통해 안디옥에까지 확장된 교회,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선교지향성,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 살펴 보았다. 아울러 위의 교회들이 교제를 바탕으로해서 전도와 교육, 그리고 봉사를 실천했던 통전적인 선교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을 밝혔다.
이어서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종교개혁교회가 선교지향적이지 못했던 신학적인, 상황적인 요인들을 살펴 보았고 경건주의운동을 통해 독일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던 슈패너, 프랑케와 할레의 선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모라비안교회를 통해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던 진젠도르프와 선교에 대해 살펴 보았다. 아울러 윌리암 케리의 각성된 선교 정신을 통해 본격적인 선교운동이 선교단체들을 통해 전개되어 근대 개신교 선교운동을 일으켰음을 살펴 보았다.
끝으로 어떻게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예배, 교육, 봉사, 교제가 선교와 무관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선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선교 정신을 통해 재조명되고 그 패러다임을 전환함으로써 한국교회가 다가오는 21세기의 선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음을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의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검토, 분석한 결과들을 통시적인 조망을 통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교회를 시작으로하여 안디옥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모라비안교회는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통전적인 모습으로 그 선교지향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편견과 선입견으로 선교를 지역적인 한계안에 가두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핍박이라는 방법을 통해 선교의 범위를 확장시키셨다.
아울러 종교개혁교회와 영국 교회를 통해 교회 지도자들이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으로 선교를 사도시대에 국한지음으로서 선교정신과 선교열을 갖지 못하여 종교개혁교회가 비 선교지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국 교회에 있어서도 윌리암 케리의 선교 운동을 영국 교회 지도자들이 같은 선교 정신과 선교열을 갖고 호응하고 후원하지 못함으로 결국 선교가 교회 중심이 아닌 선교회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른 선교정신과 선교열을 갖도록 하는 것은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여겨진다.
끝으로 한국교회가 통전적 선교의 모습으로 21세기 선교의 주역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증거를 선교정신과 선교열의 프리즘을 통해 새롭게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한다는 긴급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2. 평가와 전망
성경에 나타난 교회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선교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교회들을 통해서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시고 그 교회들을 통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케 하시는 선교운동을 일으키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한국교회,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주목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멈출 줄 모르고 치솟던 교회성장이란 꺾은선 그래프가 갑자기 마이너스 현상을 나타내면서 상향 직선 화살표에서 하향 곡선으로 방향을 바꿔서 선을 긋기 시작함으로 너무 빨리 성장 둔화 현상이 오고 말았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의 거룩한 교회 의식들이 세속 행사의 영향을 받아 물질 위주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겠다. 18세기만 해도 부흥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유럽 교회가 날이 갈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선교신학 전공)
심 상 철
선교지향적 교회로의 전환
목 차
I. 서 론 .................................................................................................................... 1
1. 문제 제기 및 연구목적 ................................................................................. 1
2. 연구방법 및 범위 ........................................................................................... 2
II. 초대교회 :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 .................................................................. 5
1. 예루살렘교회 ................................................................................................... 5
2. 안디옥교회 ...................................................................................................... 10
3. 데살로니가교회 .............................................................................................. 15
III. 개혁교회 : 분석과 평가 ......................................................................................... 18
1. 종교개혁 교회 : 루터와 칼빈 교회 ............................................................ 19
2. 독일 교회 :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교회 .................................................... 23
3. 영국 교회 : 윌리암 캐리의 선교 ................................................................ 32
IV. 패러다임 전환 : 변화와 전망 .......................................................................... 37
1. 예배 패러다임 전환 ...................................................................................... 38
2. 교육 패러다임 전환 ...................................................................................... 44
3. 봉사 패러다임 전환 ...................................................................................... 47
4. 교제 패러다임 전환 ...................................................................................... 51
5. 증거 패러다임 전환 ...................................................................................... 52
V. 결 론 ................................................................................................................. 56
1. 요 약 .................................................................................................. 56
2. 평가와 전망 .................................................................................................. 58
참 고 문 헌 ..................................................................................................... 62
I. 서 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우리는 불과 21세기를 3년 남겨 둔 세기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고 지상명령을 주신지 어언 2천년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상황은 어떠한가? 데이빗 바레트(David B. Barrett)의 1997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체 세계인구 59억중 약 20억이 기독교인이고 나머지 39억이 비기독교인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땅에 수 많은 교회들이 있고 엄청난 자원들을 소유하고 있음에 불구하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었는가?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교회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선교지향적인 교회(Mission-oriented Church)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논문을 통하여 왜 많은 교회들이 선교지향적이지 못한지에 대해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일어난 16세기에서 18세기의 개혁교회를 중심으로 그 시대적인 배경과 그 교회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들과 선교지향적이지 못한 모습들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분석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의 선교의 대동력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서 거듭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 그 이정표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연구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첫째로 선교지향적 교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범위를 한정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 의미하는 선교지향적인 교회란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말한다. 다시말해 복음을 전하는 일과 봉사하는 일 모두를 행하는 통전적인 모습을 지닌 교회를 의미한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함과 더불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고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교회를 선교지향적인 교회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둘째 본 논문은 시기별, 나라별 연구방법을 채택한다. 1세기의 초대교회,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한 종교개혁교회, 17세기 개신교선교를 시작했던 독일교회, 이어서 18세기말에 선교적 바톤을 이어 받은 영국교회에 국한지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셋째 본 논문은 선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교회와 인물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선교운동이 중심적인 몇몇 사람들과 그들에게 영향을 받은 교회들에 의해서 시작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문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독일의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 영국의 윌리암 케리와 영국 교회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넷째, 본 논문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사적인 고찰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채택한다. 선교지향적 교회들의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그중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에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 교회가 되기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분석을 꾀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각 시대별, 나라별 교회의 선교지향적 교회로서의 핵심을 통해 현대 교회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중요한 특성을 부각시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본 논문을 전개시킬 때
II장에서는 초대교회의 선교지향성을 다룬다. 여기서는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로서의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III장에서는 16세기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을 통한 종교개혁교회의 선교지향적이지 못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17세기 경건주의운동을 통한 독일교회의 선교와 18세기 영국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다루게 되는데 진젠도르프를 중심으로 하는 모라비안 교회와 윌리암 케리를 중심으로 하는 선교에 대해서 살펴 보게 될 것이다.
IV장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여러 측면에서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함으로서 한국교회에 대한 변화와 전망을 꾀하고자 한다.
V장은 결론으로서 각장의 성과를 개괄하고 각장의 분석작업으로 드러난 선교지향적인 교회들의 특성들을 통시적인 조망을 통해 규명하고 이것이 오늘의 현실에서 갖는 의미와 구체적인 적용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올바른 선교 정신을 통한 선교열이 바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시발점이요 원동력임을 밝힘으로써 본 논문을 맺고자 한다.
II. 초대교회 :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
본 장에서는 선교지향적 교회의 모델로서의 초대교회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그 범위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루살렘교회,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운 안디옥교회,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먼저 오순절 성령강림에 의해 시작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과 아울러 그들이 예루살렘 밖으로까지 선교의 범위를 확대하지 못한 원인들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에 이어 선교하는 교회로의 바톤을 이어받은 안디옥교회의 선교기지로서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서 살펴 보고 끝으로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초대교회의 주요한 세 교회를 통해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시작과 모델을 규명하고자 한다.
1. 예루살렘교회
(1)예루살렘교회의 선교
교회 갱신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마다 우리는 흔히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라는 구호를 내걸 때가 있다. 이러한 갱신의 모델이 되는 교회가 바로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에 묘사된 예루살렘교회이다. 그렇다면 예루살렘교회가 어떠한 면에서 선교지향적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들은 오늘의 교회가 선교지향적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침들을 제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에 즉,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7주일이 지난 후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세례의 결과로 세례를 받게 되어 시초부터 상당히 큰 공동체로 출발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전도(Kerygma)를 들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하심을 성령을 통해서 현재도 역사하시는 구원사건의 사도적 선포인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장소와 어떤 시기에 있어서도 예루살렘교회의 활력의 근원이었다.
둘째로 교육(Didache)을 들 수 있다. 사도들은 그들의 가르침의 사역을 성전과 가정들을 돌아다니며 날마다 수행했으며(행 5:42), 이러한 사실은 개종자들의 배움에 대한 갈망과 사도들에 의해 소유된 정보의 충분한 축적을 암시하고 있다. 아울러 바나바와 같은 사람은 교사로 부름을 받았으므로(행 13:1) 그가 안디옥교회를 돕기위해 보내지기 전에 예루살렘교회에서 가르침의 사역을 감당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이렇듯 예루살렘교회가 교육하는 것을 즐겼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로 봉사(Diakonia)를 들 수 있다. 사도행전 2장 44절에 보면 교제에 대한 언급후에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공유한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쿰란공동체의 실천에서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지만 사해 공동체에 있어서는 소유의 나눔이 의무적인 것인 반면에 예루살렘교회 공동체에 있어서는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었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를 갖고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서로 빵을 나눔으로써 부족을 느끼는 사람이 없었던 자체안의 공동체의 삶 뿐만 아니라 성전 문앞에 있는 장애인을 돕는 등의 공동체 밖의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모든 사역들 가운데서 예루살렘 교회는 참된 교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교제(koinonia)라는 단어가 사도행전 2:42절에 가르침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들의 교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회심자들에게 열려져 있는 어떤 것을 말하며 신자들에 의해 일상적인 삶이 나누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성서적이고 사도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교제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자주 모이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 2장 46절에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신앙이 배우고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람들을 함께 이끌었으며 이러한 교제에 있어서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들 가운데 있느니라(마 18:20)” 는 주님의 약속을 갖고 있는 가정 교회(The church in the house)는 큰 혜택이 되었다. 아울러 이러한 가정의 모임들에서 예수님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졌던 사람들이 구세주에 대한 많은 기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봉사가 전도 못지 않은 선교적 의의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전도만이 선교라는 일변도의 것이 아니라 전도와 봉사, 교육 이 모든 것이 포괄적으로 선교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교회가 보여주는 선교적 삶의 모습이었다. 예루살렘교회는 모이는 데 열심을 다했으며(행 2:46), 경건한 신앙의 풍토가 조성되었다(행 2:42-43). 아울러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는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같은 그들의 선교적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과 추앙을 받는결과를 가져왔으며 다수의 결신자를 얻어 양적으로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사역은 오늘날 여성선교회나 해외선교부와 같은 몇몇 선교관련기관이 담당했던 업무가 아니었으며, 장로나 집사나 사도들과 같은 전문가들에게만 위임된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평신도와 사역자가 구분없이 모두 이 일에 참여하였으므로 교회자체가 선교사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예루살렘교회의 시련과 선교 범위의 확장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최고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것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도시와 나라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들은 이러한 편견을 믿으면서 자라왔으며 초기 마가 다락방 공동체는 오순절의 놀라운 역사에 그들이 참여하게 됨으로써 더욱 그러한 것들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예루살렘교회는 지속적인 보존사역이 크게 요구되어지는 하나의성숙된 규모를 가진 제도적인 교회가 되었다. 비록 생동적이기는 하지만 첫 교회는 마치 거대한 조직체처럼 지나친 행정적인 부담아래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첫 교회는 여전히 살아있고 흥분되어 있었지만 지도력과 수고의 많은 부분이 현상유지를 위한 사역에 집중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예루살렘에만 집중해 있는 기독교인들이 AD. 35년경에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로 인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서 예수의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실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복음은 우선 예루살렘에서 북상하여 소아시아에 이르게 되고 수리아의 수도였던 안디옥에 이방인들로 조직된 큰 교회가 설립되었고 안디옥에서 복음은 다시 서북쪽으로 행하여 드디어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2. 안디옥교회
(1)안디옥교회의 설립과 성장
첫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가 확장되어 가면서 변화가 요구되었는데 그러한 변화의 일부로서 활동의 중심지가 전환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안디옥 교회를 들어 사용하심으로 선교사역의 중심을 예루살렘 밖으로 옮기셨고 전세계로 뻗어나가게 하셨던 것이다. 권위의 중심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선교의 중심지는 안디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사도들은 사명과 권위를 가졌지만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께 안수받은 전도자를 갖고 있었다. 안디옥은 선교를 위해 매우 중요한 위치 즉 선교본부가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의 시점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시리아의 마을들을 통해 안디옥까지 이른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할례에 의해 먼저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고 회심자들을 공동체안으로 받아들였다(행 11:19-21). 이처럼 이방인을 향한 안디옥교회의 전도는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에 대해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에서의 상황을 조사토록 하기 위해 바나바를 보내게 되는데 바나바는 그곳에서 자신이 발견한 사실들에 대해 매우 기뻐하며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기 위해 돌아가는 대신에 북부 도시에 머무르면서 주목할만한 성공적인 사역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인도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행 11:23-24). 이러한 안디옥교회의 성장으로 인해 바나바는 도움을 찾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 사울을 찾기 위해 다소로 가게 된다. 사울은 안디옥에서의 필요와 기회에 대해 감동을 받고 기꺼이 그의 사역의 영역을 바꾸었다. 이 두사람은 일년동안 “큰 무리(행 11:26)”로 묘사되는 회심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열매있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2)안디옥교회의 선교
그리스도 시대까지 안디옥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세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도 동양으로 가는 대로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동서양의 교차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헬라 문화가 로마의 정치와 안디옥에서 합류하게 되어 복음을 수용하는 이상적인 중심부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공공질서가 철저하여 안디옥교회는 규모와 주요성에 있어서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안디옥은 복음 전파가 대중 소동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던 소수의 제국도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였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에 대한 첫번째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때로부터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안디옥교회는 뛰어난 선교적인 교회였다. 예루살렘교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점점 그레꼬-로만 세계의 복음화에 대해 덜 중요해진 반면 안디옥교회는 헬레니즘 세계의 이 지도적인 센터를 통해 앞으로 전진할 준비가 되어 있고 커다란 선교적인 확장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안디옥교회는 아시아 소수 만족과 마케도니아를 포함한 그리이스에서 이방인 회중들의 엄청난 성장을 위한 촉매제가 되어 갔다. 안디옥교회는 선교기지로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중인이 되라(행 1:8)”는 그리스도의 위임의 마지막 부분을 성취하기를 착수한 첫 번째 교회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교회는 교회의 지도적인 사람들을 선교사로 부르시는 성령의 부름에 대해 주저하기보다는 금식과 기도를 통한 신중함의 자세로 전적으로 순종하는 참으로 놀라운 선교정신을 보여 주었다(행 13:2-3). 교회가 이방인의 선교를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할 떼 기도하고 보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기도로 시작한 교회, 기도로 시작한 전도자들이 있었기에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기도를 중심한 영적 전쟁이 승리할 수밖에 없음을 바로 인식시켜 준 기도를 통해 선교한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타문화권선교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먼저 안디옥교회는 봉사하는 교회였다. 안디옥교회는 다양화된 사역의 부유함으로 축복받은 교회였다. 사도행전 13장 1절에 보면 안디옥교회의 몇몇 예언자들과 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회중들이 그들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도록 용기를 복돋을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의 매우 커다란 무리들이 그들이 받은 사역을 위한 은사에 따라 봉사할 용기를 얻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이른 선지자중 한 사람인 아가보의 ‘흉년 예언’을 듣고 흉년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예상을 하며 즉시로 유대에 있는 형제들의 구제를 위한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행 11:29). 그리고 이것을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내는 모습을 통해 이웃 사랑의 참된 봉사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끝으로 안디옥교회는 교육하는 교회였다. 안디옥교회의 생활에 있어서 가르침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기 위해 간 것도 이러한 도움을 얻을 목적이었다(행 11:25-26). 이방인들은 구약에 대한 그들의 무지와 그들의 환경이 그들에게 적당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인들보다 더 많은 안내를 필요로 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그의 신생 교회들에게 보낸 바울 서신의 실제적인 부분들을 읽을 때 그의 가르침의 많은 부분이 상당히 정확하게 안디옥교회의 환경에서 이미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안디옥 교회는 전도와 봉사와 교육 모든 면에 자연스럽고 친밀한 교제가 스며 있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도 있었고 교사도 있었다. 선지자란 현대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영적 본위의 신자요, 교사란 이지적인 교인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신령파니 진실파니 하면서 사우지 않고 일치단결하였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모였으나 지역감정이나 민족적 장벽이 없었고 귀족 출신과 평민이 한 데 어울렸고 교회 설립자나 학자라고 자랑하지 않고 일치 단결하는 참된 교제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디옥교회는 이러한 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의 그룹으로 실제적인 하나됨을 실현하고 보여준 최초의 교회일 것이다. 안디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들이 식사할 때 함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가리킨 바울의 증거(갈 2:11-14)로 인해 이러한 사실은 더욱 확고해 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안디옥교회는 성령에 의해 실행된 책임감의 깊은 의미로부터 복음으로 이방 세계에 나아가기 위해 그들의 선교적인 역할을 시작했으며 계속적인 기도와 커다란 기쁨을 불어 넣는 복음을 위한 승리를 보고할 수 있었던 그들의 선교사들과의 계속적인 접촉 때문에 선교에 대한 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안디옥교회를 선교본부로 삼고 선교활동을 했던 바울은 15년 남짓 걸린 3차 선교 여행을 통해 아시아의 갈라디아와 아시아 및 유럽의 마게도냐와 아가야등 인구가 조밀한 네 지역을 다닐 수 있었으며 넓게 뚫린 로마의 도로를 따라 도로 주변에 주요 도시마다 교회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 3차 선교 여행이 끝날 때에 이르러서는 “...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고 보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데살로니가교회
(1)데살로니가교회의 설립
바울의 선교 일행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그들의 목적지인 데살로니가에 이르러서 관습에 따라 세 안식일을 사역하며 바울이 강론의 기지로서 회당을 사용했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풀어 증명할 때 토론과 논쟁이 일어났다. 바울이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사렛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라고 선포했을 때 바울과 유대인들 사이의 불일치는 가장 강렬해졌다(행 17:3). 실라도 바울이 단언한 것을 확고히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복음의 선포의 결과로 몇몇 유대인들과 수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설득되었다(17:4). 그러나 이를 시기한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와 같은 상업의 중심지에 많이 있었던 폭도들을 동원해 소란을 일으키게 되어 비록 교회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알아 보기 위해 메신저를 보낼 가능성을 배제시키지는 못했지만(살전 3:2), 결국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 사역이 일단락 짓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도시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보기를 갈망하고 또 그들을 돕기를 원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서신을 그들에게 쓰게 되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이 복음을 받고 개종하여 설립한 교회이다. 그러한 면에서 데살로니가교회는 복음을 통해 개척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을 받은 유대인들과 이교도들이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룩한 교회인 것이다.
(2)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
데살로니가교회는 신약 성경의 교회 중에서 가장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선교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에 담긴 믿음, 소망, 사랑을 삶속에서 가장 잘 실천한 교회였다(살전 1:2). 또한 하나님의 도를 받아 주를 본받는 모범적인 교회였다(살전 1:7상).
아울러 데살로니가교회는 사랑의 교제가 있는 교회였으며(살전 1:1, 4:10),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서로를 세워주는 교회였다(살전 5:11).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는 다른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전한 것인지 아니면 그 도시를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증거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먼저 주님과 그의 구원에 대한 증거를 전하는 열심을 갖은 교회였다(살전 1:8).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는 복음을 받고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즉시로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성장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세 교회를 통해 나타난 모습은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인 것을 살펴 보았으며 이러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들은 대체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통전적인 선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선교지향적인 교회의 모습이 중세의 어두움을 깨고 개혁의 횃불을 밝힌 종교개혁으로 초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교회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변화되었는지에 대해서 다음장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III. 개혁교회 : 분석과 평가
본 장에서는 종교개혁이후 개혁교회의 선교에 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그 범위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와 칼빈을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교회,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독일의 경건주의자, 특히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 그리고 근대선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케 한 윌리암 케리와 영국 교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먼저 왜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지 못했는가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이어서 독일에 있어서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리우는 경건주의운동으로 시작된 독일 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를 중심으로 고찰하게 될 것이다. 끝으로 윌리암 케리에 의해 어떻게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이에 대해 영국 교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반응하였는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개혁교회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과 비선교지향적인 모습의 원인과 관계성에 대해 규명하고자 한다.
1. 종교개혁 교회 : 루터와 칼빈 교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나타난 영적 세력이 유럽의 신교 교회들을 발전시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의 논객이었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네(Robert Bellarmine)는 참된 교회의 18가지 특징들 중에 그 교회의 선교활동을 포함시키고 이점을 가지고서 비교할만한 선교 활동이 전혀 없었던 프로테스탄트들을 다음과 같이 힐난할 정도였다.
이단들(프로테스탄트를 가리킴)이 이교도들이나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교 신 앙으로 개심시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이 한 일은 단지 그리스도 인들을 유혹한 것 뿐이다. 그러나 금세기에만 하여도 가톨릭은 신대륙에서 수만명의 이교도들을 개심시켰다. 해마다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감독 에게 충성스러운 가톨릭 교도들에 의하여 로마에서 개심하고 세례를 받고 있다. 로마와 다른 지역에서 개심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투르크인들도 있 다. 루터교도들은 자신들을 사도들과 전도자들과 비교한다. 그러나 독일에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폴란드와 헝가리는 투르크인들을 그 이웃으 로 삼고 살고 있지만 단 한줌의 사람마저도 그들은 개종시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종교개혁교회들이 이토록 선교지향적이지 못했는가? 그 첫째 이유는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 신학계에서는 선교의 의무가 특히 사도들에게만 주어졌고 그들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인간의 책임을 배제한 예정론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회심시키고자 하신다면 사람들이라는 도구를 통하지 않고도 구원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교도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이 간여한다는 것은 어리석고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는 선교사를 땅끝까지 보낼 권위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책임도 없다고 가르쳤으며 그로 인해 종교개혁교회들은 비선교지향적인 모습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너무 임박했기 때문에 복음을 널리 전파할 시간이 없다고 믿은 신학사상의 영향 때문이었다. 루터와 멜랑히톤은 모두 세상종말이 절박하다고 믿었다. 어두움은 이미 많이 지나갔고 밤이 상당히 깊었으며 새 날이 임박하였으므로 멀리 있는 접근할 수 없는 영토에 대한 오랜 기간의 선교는 문제시 되지 못했던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개신교 자체의 생존의 절박한 문제 때문이었다. 로마 천주교회의 강대한 세력권 안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진압당하지 않고 살아서 뻗어 나가기 위하여 많은 힘을 경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생존의 문제에 고민해야 했던 개신교 교회는 세계 복음화에 필요한 비전이나 열정같은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이와 연관지어서 루터교와 개혁파 교회 사이의 교리논쟁 등의 상호 갈등으로 인해 선교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네 번째 이유는 개신교쪽으로 기울어진 국가들이 유럽의 북쪽에 있는 독일 북부, 덴마크, 화란, 영국 등이었는데 전세계적인 지형상 한편에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로 진출하려면 해상 통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종교개혁 직후에는 천주교 국가였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바닷길을 지배하고 있음으로 인해 선교하는데 장애가 되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양로를 완전 장악하여 정치상의 제국주의와 병행하는 일종의 종교상의 제국주의를 수립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활동은 대부분 국내에 제한되어 있었다. 지리적인 제한은 연방 교회의 개념에 따르는 심리적인 제한에 의하여 더욱 강화 되었다. 모든 지역에서 통치자가 신민의 영적 안녕에 책임을 지며 신민의 종교를 통치자가 결정하고 그의 영토에서 통치자는 국가의 일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일에 있어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영토안에서’ 즉 자신의 영토밖에 대해서 그는 아무 책임도 없었다. 이렇듯 주어진 지리상의 테두리안 속에 완전히 폐쇄된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적 교회가 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 이유는 종교 개혁가들이 교황청을 반대함과 함께 가톨릭의 선교 정신까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며, 그들이 수도원 생활을 거부함과 함께 수도원에 의한 선교조차도 무시했으며, 재세례파를 거부함과 함께 그들의 선교 정신조차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다시말해 종교개혁교회는 거의 천 년 동안 선교의 전통, 전문 기술, 기구를 제공하였던 수도원 제도 및 개념을 거절함으로써 로마 가톨릭 선교가 지니고 있는 수도원 구조를 대신할 만한 구조를 제공할 수 없었으며 영토적 한계에 의하여 제약을 받지 않는 세계선교에 대한 초기 프로테스탄트 비전을 구현하고 독특한 양식으로 선교적 백성의 기수로서 후기 교회 개념을 예시해 주었던 제세례파의 선교를 거부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선교를 거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가진 성질을 들 수 있다. 다시말해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라는 신앙으로 인해 개인주의적인 면이 강하게 되고 사회적인 헌신의 측면은 약화되었으며 특히 그들이 가졌던 민족주의로 인해 선교지향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울러 개신교의 신앙생활이 법적으로 승인된 후부터는 자체정비에 몰두하면서 개신교회가 기구화 현상을 나타내고 선교력을 갖추지 못함으로 인해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바른 말씀의 선포, 성례전의 바른 집행, 정당한 권징의 실시등은 주님께 얼마나 충성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례를 기본적인 요소로 사용하여 교회의 존재 의미와 진위를 가리려 했으며 이러한 교회의 특성들이 교회의 통일성, 성결성, 보편성을 갖게 하는 보다 역동적이며 포괄적인 방편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이러한 좋은 특성의 어두운 면, 배타적이며 내향적인 면만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의 특성을 세상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사역 자체보다 특정한 일이 일어나는 특정한 장소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종교개혁 후기의 개신교는 자성하는 일과 역동적인 역할을 계속 상실해 갔던 것이다.
2. 독일교회 : 경건주의와 모라비안 교회
(1)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배경과 발전
30년전쟁(1618-1648)이 끝나던 17세기 중엽 독일 루터교회는 생명력을 잃은 사변적 기독교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정권이 교권을 지배하는 정치체제로 인한 교회의 타락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성직자들이 사변적 교리 논쟁에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성경주석이나 목회에는 별관심을 나타내지 않았고 신조를 가르치는 것으로 족하게 생각했으며 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변적 설교를 라틴어를 사용해 가면서 길게 하곤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30년전쟁으로 인해 물질적, 영적으로 황폐해져 있는 독일의 상황에 위로나 구제의 손길을 펴는 등의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그야말로 활력을 잃고 교회의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670년 독일 개신교 안에서 형성된 경건주의 운동은 경건성과 교회의 철저한 갱신을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후 대각성 운동, 부흥 운동, 19세기의 범세계적 선교 운동 및 많은 종류의 자선 활동의 유익한 요소들을 촉진시키는데 기여했다.
이러한 경건주의 운동은 그 창시자로 여겨지는 필립 야곱 슈패너(Philipp Jakob Spener)가 교회와 사회에 대한 매우 솔직한 비판과 아울러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개혁의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경건주의 이념을 피력한 ‘경건한 소원(Pia Desideria)’ 라는 글이 출판됨으로써 시작되었다.
슈패너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Prancke)에 의해 이어지게 되는데 프랑케는 드레스덴에서 슈패너의 집에 거의 두달간 머물렀는데 이것이 아주 긴밀한 내적인 결속으로 이끌었다. 그 후 1691년 프랑케는 브란덴부르그(Brandenburg)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통하여 새로 설립한 할레 대학(University of Halle)을 경건주의자들로 채우려 했던 슈패너의 도움으로 할레 대학의 헬라어와 동양어 교수로 임명받게 됨과 동시에 글라우카(Glaucha)에 있는 시골 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할레 대학에서 프랑케는 경건주의 정신에 입각한 혁신적인 프로그램들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가난과 부도덕의 생활에 빠져있던 소외된 대중들에게 교육과 자선의 손길을 뻗쳤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고, 고아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여 엄격한 교육을 실시했으며, 과부들을 위한 과부의 집, 병원, 교사양성 학원을 설립했고 성경 보급소를 세워 성경을 각국어로 출판하여 싼값으로 보급했다.
뿐만 아니라 1706년에는 할레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프랑케의 두 제자 바돌로뮤 치겐발그(Bartholemaus Ziegenbalg)와 하인리히 플뤼차우(Heinrich Plutschau)가 덴마크의 왕 프레드릭 4세에 의해 인도의 선교사로 파송되었을 때 해외 선교를 자신의 기관의 양자로 삼을 만큼 정열을 쏟음으로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독일 개신교의 역사에 있어서 해외 선교를 위한 최초의 기관이 되게 하였다.
이처럼 사회복지 사업을 포함한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 등을 시작한 프랑케를 통하여 경건주의는 크게 성장하고 보편 타당성을 얻게 되었으며 특히 프랑케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의 해외 선교가 할레 대학 출신인 진젠도르프로 이어 지게 된다.
(2)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
1)진젠도르프와 선교
1700년 5월 26일에 드레스덴에서 오스트리아 가문 출신인 한 작센 선 제후국 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진젠도르프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경건주의자 슈패너와 친밀하였으며, 프랑케와 함께 대중교육과 성경배포 그리고 선교를 장려하였던 외할머니 헨리테 카타리나폰 게르스도르프(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밑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10세가 되던 해에 할레대학에 입학하여 17세까지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프랑케와 깊은 유대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 그의 경건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상인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뿌리가 내면에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할레 대학 출신의 선교사 지겐발크와 플뤼차우가 보낸 동 인도 선교에 관한 보고들을 접하게 되었고 1713년에는 플뤼차우가 할레를 방문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할레 재단의 선교적 지원을 보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진젠도르프는 다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the Order of the Grain of Mustard Seed)'을 결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증거하고 신앙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들 모임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그 후 1719년 진젠도르프는 네델란드와 프랑스로 연구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도중에 뒤셀도르프에서 화가인 도메니코페티(Domenico Feti)가 그린 “내가 너를 위하여 이것을 당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라는 각명(刻銘)이 달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게 되었고 진젠도르프는 이 그림으로부터 그의 필생의 사역에 있어서 상당히 주요한 자극을 받게 되었다.
2)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교회의 선교
진젠도르프가 이룩한 괄목할만한 업적은 바로 모라비안 교회를 설립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보헤미아 국가 교회의 박해를 피해 헤른후트(Herrnhut)로 피난온 형제단(The Unity of the Brethren)이라고 불리우던 모라비아의 후스파(Hussites) 개신교도들이 진젠도르프의 지도하에 기독교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 공동체가 ‘모라비아파’라고 불리워졌다.
진젠도르프는 모라비안의 형제단을 돌보기 위해 나중에는 드레스덴에서 법정 변호사로 일하던 공직을 버리고 형제단의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으며 루터교회의 신학자로서 인정되는 시험에 합격하고 1727년 모라비안의 감독으로 안수를 받게 된다.
진젠도르프에 의한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지향적인 교회였다. 그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전도하는 것이었다. 진젠도르프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기독교의 기사(騎士)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특별히 그는 모라비안 교회의 형제들을 작은 그룹으로 구성하여 주의 일을 하게 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이러한 전도를 실천하였는데 암스테르담, 발틱 국가들, 베를린, 제네바등지에서 집회를 갖고 전도하였다. 그의 접촉은 다양하고 각계 각층에 이르러서 귀족들, 법원의 사람들, 대학생들, 교수들 모두가 그의 전도의 대상들이었다.
다음으로 중보기도를 들 수 있다. 1722년까지 90명이 헤른후트에 정착하고 1726년에 이르러서는 300명의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1727년 서로를 권고하고 부흥을 위한 기도를 위해 작은 그룹들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4명의 형제와 24명의 자매가 자정부터 그 다음날까지 계속 기도하기 위해 각자 1시간씩 맡을 것을 서약하기에 이르렀다.
모라비안 교회의 시간 마다의 중보기도는 그 후 백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중보기도는 그 다음 2백년 이상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대륙으로 선교를 위해 파송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으로 모라비안 교회의 타문화권 선교를 들 수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1732년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을 서인도제도(the West Indies)에 파송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뒤를 이어 1735년에는 그린랜드로, 1735년에는 수리남(Sirinam)으로, 1737년에는 아프리카에, 1740년에는 북아메리카의 인디언과 실론(Ceylon)에, 1742년에는 중국에, 1747년에는 페르시아에, 1754년에는 자메이카에, 1756년에는 안티구아(Antigua)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기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서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이러한 선교는 독일 개신교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자발적인 선교운동으로서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세계 각처에서 사명을 완수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는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의 전적인 지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선교로서의 전체 교회" 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다. 아울러 개신교내에서 ‘선교에 대한 책임은 만일 어떤 주어진 지역내에 적법하게 세워진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통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의 지역적인 견해(the territorial view)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때 이후로 심지어는 유럽 식민지의 권력자들의 외국 전초기지들도 새로운 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곳이 되었다. 선교의 전진은 더 이상 전통적인 교구의 경계에 의해 제한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3)진젠도르프이후의 모라비안교회의 선교
진젠도르프의 사후에도 모라비안 교회는 다른 교회로서는 이루지 못한 헌신적인 표준을 세워 놓았다. 뿐만 아니라 서인도제도로 건너간 모라비안들이 2백년에 걸쳐 3천명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낳았고 해외 선교구에 속한 신자의 수가 내지 교회의 신자의 수의 3배나 되는 특수한 예를 보여 주었다. 이들 모라비안 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개척적인 역할을 감당했을 뿐 아니라 어려움을 참고 이기며, 고난을 달게 받으며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활동하였다.
모라비안들은 그린랜드와 레브로돌(Labrador) 그리고 알라스카와 서인도제도, 동부 및 남부 아프리카와 빅토리아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했으며 국내 전도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다. 모라비안 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그들이 다른 종파에게 미친 영향은 특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운동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지역적으로 유럽의 여러 지역과 세계에 널리 미쳤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로날드 녹스(Ronald Knox)는 모라비안 운동의 그런 점을 가리켜 “유럽 선교에 활력 있는 누룩”이라고 하였으며, 하세(Hasse) 주교는 “모라비안의 영향은 초기 영국 부흥의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3. 영국 교회 : 윌리암 케리의 선교
(1)윌리암 케리의 선교 배경
윌리암 케리는 14세때부터 구두를 짓고 수선하는 사람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22세때 침례교회로 들어가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침례교회 목사로 안수받게 되었다. 케리의 선교열을 자극했던 것들로는 ‘쿡 선장의 항해기'라는 책과 데이비드 버어나드의 생애, 덴마크-할레 선교회, 존 엘리오트, 모라비안 선교 등을 들 수 있다.
특별히 케리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저술한 ‘기도합주회'라는 책자를 통해 영적각성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경험한 케리가 새로운 선교 정신으로 성경을 보게 되니 해외선교야말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자신이 완전히 선교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2)윌리암 케리와 영국 교회의 선교
선교 정신을 통해 변화된 윌리암 케리에 의해 나타난 영국 교회의 선교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주신 지상명령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므로 이방인을 개종하는 일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케리가 노탐프톤셔(Northamptonshire)에서 모인 교역자회의에서 주님의 지상명령의 적용에 관해 토론할 것을 제안하였을 때 죤 라이랜드 박사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여보게 젊은이, 그만 앉게, 만일 하나님이 이교도를 회심시키는 것이 기쁘신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자네나 내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하실 것일세”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케리는 그의 분석을 참을성 있께 정리하여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이교도 회심을 위하여 수단을 사용해야할 기독인의 의무에 대한 탐구(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s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version of Heathens)'였으며 그의 이 소책자는 개신교 선교운동의 대헌장이 되었다.
1792년 5월 케리는 이사야 54:2-3절을 본문으로하여 설교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십시오"라는 말을 통해 침례교 목사들에게 선교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모라비안 선교 회보'를 보여 주면서 “만일 당신들이 이 책을 읽고 그들이 어떻게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교했는지를 알게 된다면 믿음안에서 해외선교를 해야만 할 것이오” 라고 간청하였는데 이것이 모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되었다.
선교 정신으로 변화된 케리의 여러 가지 노력으로 말미암아 결국 1972년 11월에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침례교 연합회"라는 침례교 선교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1793년 6월 13일에 케리는 이 침례교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인도로 향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40여년 동안 많은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케리의 선교적 환상과 정열은 곳곳에 선교의 불을 붙이게 되는데 선교지인 인도에서 보낸 캐리의 첫 편지가 런던에 새로운 선교운동을 불러 일으켜서 결국 1795년 ‘영국선교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게 했으며 그 후 25년내에 케리의 책과 실제적인 선교의 모범을 따라 11개의 중요한 선교 기관이 설립되었다.
이처럼 케리에 의해 사도시대 이후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선교의 열정과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연합되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선교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그동안 독일어 사용국에 의해 주도되어 온 개신교 선교가 영어 사용국으로 넘어 오게 되어 영국이 개신교 선교를 주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에 있어서의 선교는 대체로 기성교단과 별도로 조직된 선교회들에 의해 발흥되어 전개된 것이었으며 교회적인 차원의 적극적인 참여없이 선교회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었다. 이들의 선교형태는 선교회 지도자나 선교사 자신의 선교이해와 신앙정신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교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선교는 대체로 장기적인 교회사역에 대한 관심이나 사회 및 문화적 차원에 걸친 선교문제 들의 과제에는 민감하지 못하였다. 지상명령에 대한 순종과 강한 말세사상과 인간 구원에 대한 열정으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세계의 각 지역으로 흩어져 나가 복음전파에 힘썼던 것이다.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를 통해 나타났던 선교지향적인 양상들의 원인과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교회의 선교지향적 모습, 그리고 윌리암 케리로 인해 시작된 선교지향적인 양상들을 통해 선교 정신이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고찰을 토대로 오늘의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한 모습들에 대해서는 다음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IV. 패러다임 전환 : 변화와 전망
플레밍(J. Fleming)은 교회가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분담하도록 그 세계에 존재하여 있는 것이며 그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의 의미를 나타내도록 보냄을 받은 선교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를 갱신하고 개혁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일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하고 공장 노동자는 작업복을 착용한다. 선교를 출발하려는 한국교회는 선교복장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지 못함을 잘안다. 선교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교회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선교를 위한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이제까지 살펴본 성서적,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얻어진 교훈들과 21세기에 선교의 주역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한국교회가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어서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지역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향해 전진할 수 있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전개시킴에 있어서 그 범위는 교회를 어떻게 선교 정신을 통해 재해석 하고 그 패러다임을 선교지향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해 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 먼저 예배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로 교육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 셋째로 봉사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넷째로는 교제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 끝으로 증거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제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예배 패러다임 전환
예배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일반적인 태도는 어떠한가? “예배를 보러간다”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다시말해 예배가 구경하듯 보러 가는 행위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적극적 결단을 촉구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결의를 적극적으로 다짐해야 한다. 그런데 소극적으로 구경하는 자세로 예배에 임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생활 전체와의 관련에서 역사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며 공동체안에서 다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각자가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그 예배에도 공동체적 참여가 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예배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모이는 예배가 흩어지는 선교와 무관한 것일까? 참 예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참 선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접하면서 이제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가 되기 위해 예배 패러다임을 전환해야만 하는 요청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배와 선교를 전혀 무관한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과 만나 그 안에서 하나님이 행동 하시고 인간이 봉사하는 행위이며 예배는 신도들로 하여금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향해 가야하는 지를 알게 해준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기쁨을 경험하며 갱신되고 신앙이 새롭게 되고 희망이 불붙게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결속되며 봉사의 길을 발견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배는 교회를 ‘세례적 공동체’ 로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배에 의해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고, 그래서 세상의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모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례의 공동체라는 것은 그 세례가 죽음에 동참하는 세례이며 신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히고 그와 함께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롬 6:3-5). 그러므로 교회는 온 신도가 다함께 부활의 실재성의 증인이 되어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며 이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행동이 곧 선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삶의 전체성과 분리하지 않았다. ‘거룩한 장소’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편재로써 존재했다. 그리하여 신앙인에게서 일어나는 어떤 응답도 하나님의 신성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만남인 예배라는 점에서 생각되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말씀과 행위에서 선포되는 거기서 파악되는 교회의 선교는 교회의 제의적 예배와 엄격하게 제약되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자율적인 내적 활동으로서 예배를 이해하려는 어떠한 계획을 헛되이 하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의 윤리적인 부분을 시작하는 12장을 ‘영적 예배’라는 개념으로 시작했듯이 예배란 세상에서 우리의 은사들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몸을 선교하는 일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여 예배가 선교로부터 분리되는 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데이비스(J.G. Davies)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배가 선교로부터 분리되는 곳에 교회의 내향화가 종종 일어나게 된다. 그 렇게 되면 크리스천들의 집단은 종교적인 연기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되어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교적 과업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고 그들 회원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게 되며 지역사회 전반의 생활에 대한 책임 은 아랑곳 없이 하나의 종교적 집단과 같이 움직이게 된다.
예배는 수직적인 면과 수평적인 면을 다같이 쌓았을 때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말씀하신 말씀을 통해서 수평적인 면이 수직적인 면에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배의 수직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그 차원은 충분치 않고 선교에서의 형제 사랑이 전적인 행동의 본질적인 부분임을 발견 할 수 있다. 예배의 행위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와 선교가 일치될 때 이러한 도피적인 형태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예배패러다임을 바르게 전환하여 예배와 선교의 기능을 정상화시키고 이 둘의 일치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예배의 정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시말해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뿌리박은 예배에서 떠나서 객관성과 공동체의 신앙,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신앙에 뿌리를 내리는 예배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아울러 신학적 균형을 잃은 설교위주의 예배에서 떠나 말씀과 성례전의 신학적인 균형을 이루는 예배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세례는 단순히 교회원이 되기 위한 입회식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임무를 맡기는 것이며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제사장의 직무와 계약은 선교와의 관계에서 확인되며 성만찬은 이 임직과 계약을 갱신한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교회원은 성만찬에서 그의 영혼과 육체를 그리스도의 독특한 희생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드리며 이 자기헌신은 세례받을 때 성별된 것을 선교를 위해 갱신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 직무인 예배와 선교가 부단히 갱신되고 확인되어 가야만 한다. 교회공동체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선교행위에 자신을 봉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몸”을 형성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것인 동시에 선교 자체가 또한 이 “몸”의 형성에 기여한다. 여기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의 형성과 선교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며 예배와 선교의 일치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배당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제 1부라고 한다면 이제 세상에 나가서 예배 제 2부를 삶으로 드린다는 의미에서 축도시 교인들을 모두 돌아서게 하는 교회의 모습은 교인들을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점에 있어서 의식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예배의 다양화를 통한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예배가 주일 낮예배와 같이 정형화된 예배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통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열려진 예배를 드릴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교회의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상을 예배와 연관지어 손종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전에 있는 어느 교회의 학생회 수련회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는 보기 드문 쾌적한 시설의 장소에서 열린 수련회였다. 그 교회의 장년 출 석은 2~3천명 정도였으나 막상 수련회장에 도착해 보니 학생들은 중고등부 합쳐 고작 7~80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런데 고작 30분의 예배시간을 참지 못해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장난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그런 학생들의 반응과는 아랑곳없이 예배는 장년부 예배 스타일로 대단히 엄숙하고 전통적 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 순간 일년 동안에 교회를 이탈하는 교인 들 중 40대 이상의 장년층에 비해 청소년과 청년 그룹이 4배에 달한다는 충 격적인 보고를 거기서 실감있게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통계가 가리키는 것은 앞으로 10~20년 사이에 한국교회가 젊은이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문화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에 젖어 있고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 일반적인 교회들은 장년부 중심으로 거의 수십년간 똑같은 스일로 예배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자 수가 장년에 비해 4배에 달한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신세대라고 불리우는 청소년들에게 신앙적 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예배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2. 교육 패러다임 전환
한국교회의 교육의 모습은 어떠한가? 교육과 선교는 분리된 별개의 영역인가? 그렇치 않다. 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 철저한 개인주의적인 교육을 행하였다는데 문제점이 있다.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복음을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나 자신의 복’이 교인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도록 교육하였다. 이렇게 ‘나 자신의 복’에만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어 선교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교육은 그 공동체 전체가 하는 행위다. 따라서 그 공동체 안에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냐 하는데 의존한다. 그리고 그 멤버의 교육이란 그 공동체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시말해 선교 교육이란 선교하는 공동체에서만 이루어진다. 그 선교 교육이 어느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은 그 공동체가 어느만큼 활발하게 선교하느냐 하는 것과 교인을 어느만큼 이 공동체의 삶에 깊이 참여 시키느냐 하는 데 달린 것이다.
선교와 교육은 불가피하게 서로 연관되어 있다. 기독교교육이 하는 노력의 전부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교에 참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을 향하고 있으며 선교 프로그램은 가르침의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교육은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선교를 위한 교육은 교회의 교육적인 과업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안에서 그 자신의 자리를 발견한다.
이처럼 교회는 교육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이것은 자체의 성장과 발달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돕는 것이다. 이일을 우리는 교육선교라고 할 수 있다. 선교는 주님이 분부하신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교육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선교는 선교의 일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교육을 수단으로 하여 가능케 하자는 것이다. 물론 교육만이 선교의 모든 수단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선교의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 말씀의 선포나 개인전도의 과정을 통해 모인 공동체를 교육을 통하여 변화를 가져오게 하고 전인으로 성장하며 평생토록 성장하게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구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교육을 통해 선교를 더욱 효과있게 하는 일이다.
주일학교의 원형으로서의 처음 교회는 전도(Kerygma), 교육(Didache), 교제(Koinonia), 봉사(Diakonia)를 통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갔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초대교회의 교육은 전도, 교제, 봉사로부터 독립된 혹은 이탈된 교육이 아니라 전도에 의해 회개한 자들의 교육이었으며, 그 교육은 말씀의 나눔(Koinonia)으로 이어진 교육이었으며 그것은 다시 세상을 향한 봉사로 이어진 교육이었다는 사실이다. 처음 교회의 교육은 전 회중이 참여한 구조적 연결 속에서 이루어진 전 회중의 교육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의 교육을 비로소 “교회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전도, 교제, 그리고 봉사와의 신앙적, 구조적 연계속에서 이루어졌던 전 회중의 교육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교회의 모델을 교회교육 모델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의 신앙적 구조의 표현속에서 교회의 존재이유와 표현양식을 되참음으로 디다케를 전 교회회중의 삶 속에서 찾도록 그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핸드릭 크레머가 지적한것처럼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교에 ‘안수받은 교역자나 종교적인 교역자’등 그 소수의 사람만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 되기 위해서는 10퍼센트에 의해서 90센트가 훈련되고 용기를 얻고 도움과 지도를 받아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든 성도들을 훈련시켜 전세계를 향해 전교회가 온전한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이 가진 놀라운 잠재력을 일깨워 주도록 하는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와야 겠다.
아울러 선교사나 목사가 되는 것이 위대하고 성스러운 소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소명들이 “세속적”이라는 것을 시사하지 않아야 겠다. 한국교회는 기독 청년들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전문 직업에 있어, 산업과 상업에 있어,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의 공직에 있어 그리고 매스 미디어에 있어 하나님의 요청에 반응하도록 교육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본거지에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이것은 우리를 다시 복음 전도에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위리의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으로서 그곳에 침투할 수 있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보내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또 그들을 제자로 훈련하도록 교육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겠다.
3. 봉사 패러다임 전환
한국교회는 개인영혼 구원을 중시해온 반면 개인의 삶의 터전이 되는 사회의 구조적인 현실을 복음화하는 데에는 침체되었던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가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역사를 통해 실천한 사회봉사의 유형으로는 첫째로 가난한 자와 약한 자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고, 둘째로는 한국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인권옹호에 대한 선교적 관심이고 셋째로는 교육, 의료, 자선, 문화사업등을 통한 민족사회의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선교적 관심이었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 즉 해당지역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파악하고 이를 함께 해결해보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다시말해 선교의 현장으로서 지역사회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이처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보다는 개교회의 위상을 높이려는 차원에서 사회봉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가 함께 지고 가야할 아픔들을 외면한 채로 물러서 있는 교회들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사역이 교회의 핵심적인 본질을 나타내는 데 꼭 있어야 하는 사역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라도 예수님이 주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섬기는 봉사의 사역은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말한다. 봉사는 예수님의 주권하에서 평화, 정의, 자비등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하는 데 교회가 참여하고 공헌하라는 부르심이다. 봉사는 단순히 선행 정도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돕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누구나를 섬겨야 하는 교회의 핵심적인 본질인 것이다.
이처럼 봉사를 통해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으로 빈핍한 자들을 돌보시며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또 주린 자들에게 식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아울러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소경의 눈을 여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의인을 사랑하시며 객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시 146:5~9).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하나님 아버지의 이 사랑과 친절을 친히 나타내 보이셨다. 그는 굶주린 자들, 병든 자들, 빼앗긴 자들, 버림 받은 자들에게 동정을 가지셨으며 언제나 그의 동정은 적정한 행동을 유발하셨음을 볼 수 있다. 아울러 성령 하나님의 첫 열매는 사랑이다(갈 5:22). 그러므로 그의 백성에게 온유한 사회적 양심을 주시고 또 그들을 박애주의적 구제와 발전과 정의를 위한 추구에 몰두하도록 강권하시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함으로 우리의 예배를 이러한 행동들 가운데 표현해야만 할 것이다.
선교하는 교회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변화시키는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지역 교회는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제도화된 기관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제도적인 교회를 문화적인 또는 정치적인 운동으로 변질시키는 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구분선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적. 정치적 정의를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확실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부르심은 결코 개인적인 영적 범주로 제한되거나 경제-사회적인 자유의 범주로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선교 지향적인 교회의 봉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모든 삶의 부분을 하나로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도록 변화시키는 패러다임 전환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선교지향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모든 지체들과 그들이 가진 은사를 모두가 세상을 향해 선교하는 일에 도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선교 사역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한 것이지 선택된 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교회의 목표를 설정할 때 하나님의 백성 한사람, 한사람이 함께 참여하고 후원하고 사명을 감당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활동 계획은 확실하고 가능한 일로 기간을 정하고 기도하며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늘 이곳 이 시대 안에서 참된 ‘이 땅의 소금’이 될 수 있도록 실제적 이어야 하겠다. 아울러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봉사가 복음 전도나 회심의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므로 복음 전도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책임도 교회의 가르치는 사역에 포함되어야 하겠다.
4. 교제 패러다임 전환
교회 공동체의 교제는 별도의 항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바른 유기체적 공동체라면 교제는 자연스럽게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증거를 하는 가운데 되어지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사랑하는 교제 가운데 새롭게 임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신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없으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가지는 교제는 예배와 교육과 봉사와 증거의 기초가 된다.
교회 공동체의 교제에 있어서 선교지향적 교회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한국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피터 와그너가 ‘교제병(koinonitis)'이라고 부르는 병든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교회 공동체의 교제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교제는 인간 관계들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알고 서로를 좋 아하게 되고 서로를 아끼게 될 때 이 교제는 이루어 진다. 그러나 병이 들 면 교제는 교제병이 되고 이런 서로 좋아하는 관계에만 너무 깊이 빠져 들 어 교회의 거의 모든 활동들의 초점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교회 내의 활동 들과 인간 관계는 내향적으로 되고 만다.
성도들의 교제가 존재하는 이유를 상실했을 때 교제는 교제병이 되고 만다. 교회는 왜 교육을 하고, 왜 기도를 하는가에 대한 목적 의식을 잃게 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밖으로 퍼져 나가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교회안에서만 서로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제 교회안에서만 안주하려는 교제의 모습을 벗어 버리고 초대교회처럼 참된 교제가 밖으로 뻗어 나가는 힘이 되며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이 교제를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 공동체로 이끄는 동력이 되도록 그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야 겠다.
5. 증거 패러다임 전환
초대교회가 철저한 구원관에 입각한 복음의 전달이 이룩되었던 점에 반하여 한국교회의 60년대와 70년대의 복음은 구원이라는 차원을 축복이라는 차원으로 개념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시말해 복음전파의 양태가 말씀 0위주에서 주정주의적 신앙의 방향으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교회가 설교와 성례, 권징등 교회의 특징들을 내향적으로 해석하여 교회 내에서만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잘못을, 선포하는 증거를 통해 교회의 특징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교회는 변혁된다. 다시말해 그 본질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교량이 되게 하는 생활을 통해 교회가 밖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현대는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따라서 언어의 위력은 사라지고 불신의 현상이 계속되고 있음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오웬(D. Owen)이 지적한 바 대로 기독교의 진리는 거의 언어위주의 소유물로 전락되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의 복음 전달의 방법이 언어만을 가지고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언어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증거에서 교회의 행동과 참여를 통해 복음을 전달하는 행동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증거가 필요하다. 오늘의 시대에 증거의 가장 살아있는 방법은 행동하는 참여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함께 묶여진 전달자를 추종하고 거기서 나오는 복음에 더 많은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증거는 오로지 말로만 되어져서는 안된다. 생활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게 하심같이(요 17:6) 우리가 위탁받은 것도 생활의 모범적 형태에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과거에도 증거하였고 또 현재도 증거하는 것이다.
선교지향적 교회는 주일에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교육과 음악, 설교, 성례, 의식 등을 통하여 선교적이며 신학적인 관점을 가지며 자의식을 갖게 된다. 이렇게 모였던 교회가 월요일이면 사회 각 곳으로 흩어져 있다. 성도들은 사회 각계 각층으로 스며들어가 있다. 그곳으로 보냄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교하며 사회에 영향을 끼치게 됨으로서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이처럼 세상에서 성취되는 기독교의 증거는 매일 자기가 하는 일상적인 일을 소명 받은 그리스도인의 일로 생각하고 일하는 교회 평신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신도들이야말로 교회의 최전방 병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피동적으로 설교를 듣고 성례전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며 세속 생활의 초점에 분산된 참 교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도의 자격과 성례전에서 행한 서약을 통하여 선교와 교역을 위임맡은 자로서 세속 생활 속에서 모일 수 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들 평신도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어 증거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각자는 새로운 공동체에 의한 낡은 공동체로의 침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빛은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라거나 또는 세상에 동화됨으로써 그들의 거룩함을 상실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세상에 침투하면서 그들의 하나님의 나라의 독특성을 보존할 것을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복음을 신빙성있게 나눌 수 있고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위한 효과적인 대리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안에서만 주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우주와 우주적 권세자들에까지 주가 되심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은 “주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라면 교회를 온 민족들에게로 나아가 증거하는 선교지향적인 모습으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증거는 선교와 분리된 별개의 항목이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선교와 매우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증거를 선교와 무관한 별개의 항목으로 여겼던 패러다임을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전환시켜야 할지에 대해서 예배 패러다임으로 시작하여 교육, 봉사, 교제, 증거 패러다임에 이르기까지 살펴 보았다. 이러한 모든 패러다임들이 선교 정신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그리하여 성도들이 선교하는 하나님의 백성(God's Missionary People)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V. 결 론
1. 요 약
지금까지 본 논문은 성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들의 선교지향적인 모습과 비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 고찰하고 이것을 통해 얻어진 교훈들과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하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먼저 초대교회에 대해 다루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시작된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지향적인 측면과 예루살렘에 다가온 핍박을 통해 안디옥에까지 확장된 교회,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했던 안디옥 교회의 선교지향성, 데살로니가교회의 선교지향적인 모습에 대해 살펴 보았다. 아울러 위의 교회들이 교제를 바탕으로해서 전도와 교육, 그리고 봉사를 실천했던 통전적인 선교의 모습을 보여주었음을 밝혔다.
이어서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종교개혁교회가 선교지향적이지 못했던 신학적인, 상황적인 요인들을 살펴 보았고 경건주의운동을 통해 독일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던 슈패너, 프랑케와 할레의 선교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모라비안교회를 통해 선교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던 진젠도르프와 선교에 대해 살펴 보았다. 아울러 윌리암 케리의 각성된 선교 정신을 통해 본격적인 선교운동이 선교단체들을 통해 전개되어 근대 개신교 선교운동을 일으켰음을 살펴 보았다.
끝으로 어떻게 한국교회가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예배, 교육, 봉사, 교제가 선교와 무관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선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선교 정신을 통해 재조명되고 그 패러다임을 전환함으로써 한국교회가 다가오는 21세기의 선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음을 살펴 보았다.
지금까지의 선교지향적인 교회로 패러다임을 전환하기 위해 검토, 분석한 결과들을 통시적인 조망을 통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루살렘교회를 시작으로하여 안디옥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모라비안교회는 전도와 더불어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통전적인 모습으로 그 선교지향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편견과 선입견으로 선교를 지역적인 한계안에 가두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핍박이라는 방법을 통해 선교의 범위를 확장시키셨다.
아울러 종교개혁교회와 영국 교회를 통해 교회 지도자들이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적으로 선교를 사도시대에 국한지음으로서 선교정신과 선교열을 갖지 못하여 종교개혁교회가 비 선교지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영국 교회에 있어서도 윌리암 케리의 선교 운동을 영국 교회 지도자들이 같은 선교 정신과 선교열을 갖고 호응하고 후원하지 못함으로 결국 선교가 교회 중심이 아닌 선교회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바른 선교정신과 선교열을 갖도록 하는 것은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어 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여겨진다.
끝으로 한국교회가 통전적 선교의 모습으로 21세기 선교의 주역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증거를 선교정신과 선교열의 프리즘을 통해 새롭게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한다는 긴급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2. 평가와 전망
성경에 나타난 교회들 그리고 종교개혁이후의 개혁교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선교 정신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의 교회들을 통해서 선교지향적인 교회를 이루시고 그 교회들을 통해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케 하시는 선교운동을 일으키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한국교회,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주목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멈출 줄 모르고 치솟던 교회성장이란 꺾은선 그래프가 갑자기 마이너스 현상을 나타내면서 상향 직선 화살표에서 하향 곡선으로 방향을 바꿔서 선을 긋기 시작함으로 너무 빨리 성장 둔화 현상이 오고 말았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들의 거룩한 교회 의식들이 세속 행사의 영향을 받아 물질 위주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바로 직시해야 겠다. 18세기만 해도 부흥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유럽 교회가 날이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