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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9 11:27

율법과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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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개신교회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주장되는 것은 그가 그의 서신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즉 이신득의를 강조해서 가르치는 사도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 칭의 교리는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요 그 원리였다.
이에 비해 로마 교회는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획득한다고 가르쳤다. 이 선행교리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적 은혜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으로 본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바른 구원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출발점은 바울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신학이었다.

특히 바울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해 자세히 다룬 바 있다. 바울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구원서정을 포함시키고 종교개혁사의 후손들처럼 구원 서정에 구원사를 포함내지 축소하지 않았다. 바울은 구원사적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이해하고 전개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칭의 교리에 과도히 집척하므로 바울처럼 구원사의 관점에 구원서정을 배치하고 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에 착안하지 못했다.
바울은 구약을 비롯하여 그리스도가 오시기 까지 모든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의 준비라는 진리를 바울은 간파하였다.

1. 바울의 가르침
버울은 로마서에서 이방인과 유다인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길이 왜 필요한 지를 보편적으로 밝힌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킨이라 하나 롬 2:17-3;18과 같이 그들 또한 율법은 받았으나 지킬 수 없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는 동일하다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의의 길을 믿음으로 받든 것 뿐이라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갈라디아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에 빠져 구원 이후 할례를 다시 행할 것을 주장한 데 대해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의의 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율법을 지킬 수 있고 구원의 길로서 지켜야 함을 굳게 믿었으나 바울은 이와 정반대로 율법은 지킬 수 없고, 또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며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에게만 있고 그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주신 것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더 하시므로 범죄가 더하게 하여 온전한 구속주 곧 자기들을 대신하여 율법을 온전히 지켜 주실 율법의 완성자이신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길은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뿐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갈 3장). 율법 시대에도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구속을 이룬 것은 아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자는 모세를 내세우나 모세는 율법을 받은 자 일뿐 구 원의 표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아브라함을 내세워 믿음의 표상으로 세우셨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나 무슨 행함이 아니고, 씨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
바울이 율법을 논할 때, 모세를 들지 않고 아브라함을 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 믿음에 있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어떤 차별이 없이 무조건 지킬 것을 요구한다. 연약한 인간은 이 율법 준수의 요구 앞에 준수보다는 걸려 넘어지기가 통상이다. 율법은 지킬수록 더 범하게 되는 특징이 있다. 율법을 통해서는 양심의 평안조차 얻기 어렵다.
율법이 해야 할 일이란 바로 백성들을 이 절망의 상황에로 이끌어 율법의 완성자 곧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내산 언약은 행위언약의 복귀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을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이라고 보고 있다. 이 몽학선생은 노예 중에서 선발해 일정 기간동안 주인의 아들을 가르키나 일단 교육이 끝나면 다시 종의 신분으로 돌아간다. 이처럼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서 자신의 역활을 다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 십자가로 율법의 기능을 종결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보이신 것이다.

2. 히브리서의 가르침
바울이 구원의 길 혹은 방편으로서 율법을 시비하듯이,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 아론의 제사직의 관점에서 율법과 제시직의 효능을 시비한다. 히브리서는 이 제사직이 근본적으로 사죄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 데 비해 그리스도는 단번에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구약의 희생 제사는 제사장이 죽을 때마다 바뀐 것으로 보아 불완전하고, 또 황소와 염소의 피로 제사하였으니 불완하다. 이것은 오직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오실 것에 대한 예표였던 것이다. 이에 비해 그리스도는 완전한 제사를 이루시므로 율법을 폐하셨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에 대해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예를 들어 기술했다(히 5:6;6:20). 그리스도는 이 멜기세덱 처럼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또한 모세와 그리스도를 비교할 수 없는 것은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와 피조물인 모세를 비교할 수 없다는 데 두었다. 모세의 일생은 결국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세의 법을 그리스도가 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 이후 실제로 제사장 제도가 의미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제사장이 될 신분이었음에도 그리스도의 예비자로 머물렀던 것이다.

3. 종교개혁 신경들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바른 이해는 곧 초대교회에 이어졌다. 그러나 영지주의와 로마 교회에 의해 이 구원관이 심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초대교회의 율법 이해가 종교개혁에 의해 계승되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교회의 선행의 공로 교리에 대항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칭의교리를 바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 <이신득의>로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서을 바로 세우며 그리스도의 공로의 충족성을 재확인하였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그 선물이며, 이에 대해 인간의 협력이 필요치 않음을 밝혔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종교개혁의 이해가 종교개혁의 신경들에 표현되었는데 우리 한국 장로교회가 신앙고백서롤 채택한 <웨스터민스터 신아고백> 제11장 1조에 칭의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지고 믿음의 행위를 전가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6조는 구약의 신자들도 칭의에 있어서는 신약 신자들과 모든 면에서 동이하다고 하였다.
19장 4조는 진술하기를 의식법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셔서 그리스도를 예시하게 하셨는데 이 모든 의식법들은 신약에서 폐기되었다고 하였고 4조는 여러 재판법들도 이스라엘 국가와 함께 종결되었다고 진술한다.
6조에서는 참 신자들이 율법 아래 살지 않는데, 즉 율법으로써 칭의나 정죄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의 규칙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그들의 의무를 알려 주어 그들로 합당하게 살도록 지시하고 구속한다고 하였다.
7조에서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의 뜻을 종속시키고 능력있게 하여 울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고 기쁘게 행하게 한다고 진술하므로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고 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을 얽매이지 않으나, 생활의 규칙으로 역사함을 말했다.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최초의 신앙고백서로 1530년애 작성되었다. 여기서는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일치공식 - 1576년 작성된 일치공식 혹은 일치 협약은 제3조 1항에서 그리스도는 신인 위격으로서 우리의 의라고 가르치고서, 2항에서는 우리가 죄를 용서받는 것은 순전한 은헤요,우리의 공로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를 전가한 것이라 가르치고, 제4조 5항에서는 중생한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순종을 해도 법의 강제로가 아니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고, 제 5조 2항에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죄를 다 속량했으니 복음은 율법을 만족시키지 못한 자를 공로없이 칭의한다. 6항에서는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요, 7항에서는 복음은 그리스도만 보보게 하는데 율법으로는 죄의 지식에 바로 이르게 하지 못한다. 복음으로 죄를 깨닫게 한다. 6조에서 율법은 세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주어졌는데 그중 세째 이유는, 율법은 중생인의 생활을 규제할 규칙이라고 하였다.

루터와 같이 활동한 멜랑톤은 자기 저서 Loci에서 이신득의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것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교리사에도 그의 의의가 크다. 그는 자기의 Loci를 로마서의 가르침에 기초해서 전개하였고, 따라서 죄의 용서 곧 칭의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율법을 죄의 인식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복음없이 율법은 인간을 절망에로 빠뜨린다.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와 죄의 권능이고, 번개요, 천둥이기 때문이다. 멜랑톤은 신약에서 십계명 혹은 윤리적 십계명이라고 하는 율법의 부분이 지양, 즉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율법 중 의식법만 폐지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완전히 가치가 없게 되어 노예 상태보다 더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도 폐지되었다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율법은 사람을 칭의하지도 못하고 성취될 수도 없기 때문에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 유일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멜랑톤의 핵심은 율법은 의롭다고 하지 못하기 때문에 폐지되었다는 것을 반복한다.
그는 율법의 효능에 대해 말하기를, 율법은 죄를 적발하고 또 죄에로 넘겨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로 향하게 되어졌다는 것이 율법 수여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된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이다. 오직 이 믿음 곧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영 자신이 육신에 남아 있는 죄를 죽이다.
그러나 메랑톤은 십계명에 대해 역설적으로 그 존속을 말한다. 그 이유인즉, 십계명은 마음의 의없이 장소와 때와 사물과 사람들 간에 아무런 구분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밝은 빛 안에서 성도가 성취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에 십계명의 존속을 주장한다.
그밖에 서서의 제1,2 신앙고백서가 있다. 여기서도 그리스도가 모든 율법의 규례를 이루셨음을 밝히고 있는데,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이 됨을 덧붙였다.

1559년에 칼빈에 의해 기초된 불란서 신앙고백 23조는 율법의 규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끝났다. 17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으로 우리가 칭의되었고, 20조에는 이 칭의에 우리는 믿음으로만 동참한다고 하였다.
칼빈도 율법의 기능 종결과 무위하를 가르치고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며 율법은 생활 법칙으로만 역사한다고 가르쳤다.
화란 신앙고백서 1559년에 채택된 불란서 신앙고백서에 기초해서 1561년에 작성되었다. 제22조에서 가르치기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이고 신앙은 우리가 은혜를 입는 도구라고 가르쳤고, 23조에서는 행위없이 하나님이 위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셨다고 가르치고 25조에서 율법의 의식들과 규례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쳤고 모든 그림자들은 성취되었다. 반면 우리는 아직도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복음의 도리를 확증하고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기 위해 증거를 가져온다고 가르친다.

1560년에 채택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15조는, 율법은 의롭고 공평하고 완잔하다. 그것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은 타락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의 마침과 완성인 그리스도를 그의 의와 만족으로서 우리가 파지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율법을 도저히 연약해서 지킬 수 없으니 율법의 마침이요 완성이신 그리스도만을 그의 의와 만족 혹은 구속의 배상으로 파지해야 한다.
영국교회 39개조는 1562년 작성되고 1571년에 공포되었는데, 7조는 신.구약에서 영생이 그리스도에 의해 인류에 재시도이었는데 그만이 신인간의 유일한 중보로서 하나님과 사람이시다.
이 신경에 의하면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지 의식과 예법들을 관계하는 율법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 구속력이 없으나 도덕법까지 지킬 것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바울과 히브리서의 가르침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율법의 권세에 너무 눌려 있는 일면이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진리가 신경에 표현되었다. 즉 종교개혁은 신경들과 신약의 가르침의 빛 아래 서 있다.

율법 = 언약 배성들의 생활 규법(롬 6장 ;8:1-4; 행 15:1-21)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끝이 났다.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으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가감없이 엄한 하나님의 권위로 서 있다.
통상적으로 율법은 의식법, 시민법, 윤리법으로 나눈다. 모든 율법들이 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성취되었지만, 성취되므로 그 기능이 정지되지 않는 법은 곧 윤리법이다. 윤리법 또는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더 강화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실현되기를 요구한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지배 아래는 새 언약의 백성이 있지 않아도 율법이 언약 백성의 생활 규범으로서 역사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의 구별없이 언약 백성의 의무였다.
저들이 율법을 법하면 한낱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을 헐음이었다. 옛 언약 백성들의 멸망은 언약의 훼손에 있었다. 언약의 주가 거룩하시니 그 언약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

신약 시대에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로 인해 율법과 믿음의 정의가 내려졌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음으로 언약의 백성 삼으신 것을 말했다(행 15:8). 야고보는 그가 쓴 야고보서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율법은 언약 백성의 생활 법칙”이라고 밝혔다.
바울도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 법칙과 규범임을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롬 6:14-23; 81-4). 바울은 죄에 매이는 것은 곧 사망에 이르게 되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가 그리스도인에게 이루어진다(롬 8:1-4)고 했다.
율법 가운데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성에 있다. 오늘날 미국을 비롯하여 신속히 타락하는 대상을 보면 주일성수가 사회적으로 이탈해 갈 때 쉽게 도덕적으로 타락해 갔다고 볼 것이다.
시민법의 정신은 “국가 생활의 규범성”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국가의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바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율법 중에 사랑의 계명이 가장 규제력이 강한 생활의 법칙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랑을 실재화하고 구체화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울법을 사랑으로 요약하여, “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또한 모든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 랑으로 요약하셨다. 그리스도가 주신 새 계명 또한 사랑이었다(요 13:34).
바울은 이 사랑의 실천 대상으로서 부부 관계를 들었다. 특히 형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필연적 귀결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계명으로 그의 모든 생을 살도록 작정된 자들이다. 그들이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주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을 반복하는 자이다.

결 론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의 예비 단계였고, 복음이 온 후에는 파괴 세력으로서 율법의 지배는 구원사적 -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러나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지금도 항상 율법과 복음을 동시에 상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율법에 의해 사망의 위협으로부터 불러내어 복음의 신앙에로 인도되어야 한다. 루터의 이 복음 이해에 의하면 율법은 아직도 구원의 길로서 작용한다.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 먼저 율버 아래 있고 따라서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면 곧 사망이라는 뜻을 내세워 불러내는 단계를 거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논리는 바울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생과 부활 사건 이후에는 율법의 기능이 더 이상 구원의 길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복음의 선포만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 즉 복음 선포에 율법이 개입하지 않는다.
율법 준수를 구원에 당연한 것처럼 다루게 된 데는 오랜 카톨릭의 영향과 종교심리가 작용한 탓이라고 생각된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 곧 값없이 주신 선물이므로 인간의 공로가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개입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지 못해 하나님의 주권성이 파괴된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고 예수가 구원의 길이다.
전적 타락 때문에 인간은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죄만을 증가시켜 결국 절망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의 기능을 폐하셨기에 이 사건을 통해 구약의 제사 제도를 폐하셨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폐하신 후 하나님은 그리스도위 제사만을 영원히 기뻐하사 그 제사만이 유효하게 하셨다.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바울이 전개한 구원사적 관점에서만 바로 이해된다. 이 관점에서 이해할 때만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는다.
율법은 예수 믿는 자들이 살아갈 표준이 된다. 즉 율법은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이 의거해서 살아가야 할 생활 규범이다.
우리 모두 바울과 함께 합창하는 것은 구원은 예수 믿음뿐이요, 구원얻은 자는 율법을 그 생활의 규범으로 삼는다.

평 가
서철원 박사의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유교의 전통 아래 법을 고수하려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 적절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신앙의 본질적 요소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편이다. 따라서 어떤 특이한 범죄를 짓는 것이 알려질 경우 회개할 기회도 없이 축출하려 드는 경우도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히 <믿음>을 근거로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보다 보이는 행위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의식과 위선에 과감히 도전하여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히 든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종교개혁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된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설교들이 대부분 신자들의 율법적인 삶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율법이 거듭난 신자들에게 있어서 생활의 규범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오히려 법의 해방보다 법의 올무에 얽매려는 인상을 자주 풍기고 있다.

율법을 구원 얻음에 결부한다면 혼란은 가중되고 그리스도인의 마음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신약과 사도들에 의하면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자리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준거해서 살 규범으로서 몫을 가진다.
율법과 복음의 위치를 혼동할 경우 마음이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고 자칫하면 구원과 멀어질 수도 있다. 성경의 율법 또한 궁극적인 면에서 볼 때 일반 윤리와 규범 등과 유사한 면이 있다. 또한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어 나름대로 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러한 기준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율법을 자세히 보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는 법이다(약 2:10 참조). 일반적으로 율법주의자들은 상대적인 면이 있다. 누구도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으면서도 자신이 남보다 조금 낫게 살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만 거치면 범죄자로 남게 된다.
본서에서는 이 율법을 몽학 선생으로 보고 율법의 길이 아닌 복음의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어떠한 풍파에도 넘어지지 않는 배가 있는데 미련하게 바다를 헤엄쳐 건너려는 노력이 곧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지하고 주님 앞에 두 손을 든다면 주님의 구원의 팔을 내미실 것이다.
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를 위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사망의 법은 그 범법자를 멸망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친히 감당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예수의 속죄를 통한 구속 즉 자유를 얻게 된다.
하지만 율법은 필요하다. 그것은 범죄하는 자에게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이 백성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니, 거기에 풍성과 자유가 있다.
복음을 통해 은혜를 입은 자에게 율법은 과거 지킬 수 없었던 생활 규범의 표준을 제시해 준다. 이때 성령께서 그 마음 판에 규범을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보다 사랑을 지녀야 한다. 율법에 매이는 대신 사랑의 법으로 모든 것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억지에 이끌려 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혹 형제가 율법의 사슬에 매여 고통 중에 있으면 그가 죄를 고백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도리이다. 그가 또한 은혜 가운데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전날의 잘못된 부분들을 잊어버리고 자유함을 누려야 할 것이다. 마치 육법전서를 펴 놓고 재판을 하듯이 성경책 아닌 율법책을 듣고 재판관 노릇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죄인 하나를 어렵게 전도해 놓고 율법의 사슬을 거미줄 마냥 꽁꽁 묶어 숨쉴 틈도 주지 않는 식의 목회는 지향되어야 할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다.
율법은 거듭난 자들의 생활 규범이자 믿지 않는 자에게 경종이 된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한국교회도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여유를 지녀야 하겠다. 그것이 마귀의 궤계를 몰아내고 복음으로 승리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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