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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 교회

저메인 토마스(1839~1866)


 


영국 웨일즈의 작은 마을 클라노바. 인구 1백 50여 명 가량의 이 작은 마을에


1866년 대동강에서 복음을 전하려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자라고, 안수받고,


또 파송받은 곳, 하노버교회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교회에서 저메인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가 목회(1847~1884)를 했습니다.


 


 올해로 창립 3백58년이 되는 하노버교회는 50여 가구가 사는 교회로

주일에는 11명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정도로 작은 교회입니다.
제가 갔을때 교회 수리가 한창이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은 교회 바로 아래 있는 건물인데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사택으로

사용되어지며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들이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가 하노버교회에서 목회 할 동안 사택으로 사용되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저메인 토마스가 이 건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겠지요.....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옛날에 사용 되어졌던 교회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다른 문으로 바뀌어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으로 강대상이 있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강대상 뒤로 교회에서 사역했던 역대 목회자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저메인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가 목회(1847~1884)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것은 예배 순서상에 나오는 찬송가 입니다.

그 주간의 찬송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메인 토마스의 출생 증명서 입니다.

1839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 증명서 입니다.

오른쪽 끝에 보면 토마스 아버지의 직업이 목회자로 나와 있고

저메인 토마스의 아내가 되는 캐롤라인 고드프리의 아버지인

존 고드프리의 직업은 농부로 나와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본당에 들어서며 오른쪽 벽면에 걸려있는 한국의 국기와 지도가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본당에 들어서며 왼쪽 벽면에 저메인 토마스 목사의 기념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에는 그가 두번째 아들이며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한것을 알수가 있고

한국에 두번째 방문 했을때인 1866년에 그가 27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초상화입니다.

교회 안 한쪽 면에 있었으며 아래에는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적혀 있으며

1866년 27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교회 바로 앞에 있는 토마스 선교사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1810~1884)의 무덤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분들은 지난 12년 동안 하노버교회에서 비서관으로 섬기고 있는 수석 장로 낸시 윌슨과

그의 남편 데이빗 윌슨이 우리를 반겨주고 토마스 선교사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사순절에 읽을 순교이야기/토마스 선교사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에서 '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된 토마스 선교사가 그 분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케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 데다가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스코트렌드 성서공회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 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로 한국선교여행을 계확하였습니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2개월 반동안 한국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 있었습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 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어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땅에 도착...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것입니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제너렬 셔먼호와
한국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 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여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는데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 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사진 : 토마스 선교사 부부 / 성결교회역사연구소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됬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땅을 밞아보지도 못한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권 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 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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