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어왔던 이야기- 선교지 상황 이해-

by 이재섭 posted May 1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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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통해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러시아 선교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곳 가운데 하나가 미국 LA에 있는 대형한인교회라 생각됩니다. . 이 교회가 모스크바에 세운 신학교가 19923월부터 시작되면서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학교의 설립 동기와 학제는, K 목사님이 미국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비행기에서 구상되었다고 합니다. 관련 글을 책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1991년 11월, 소련행 비행기안에서 김00목사는 펜을 들었다. 신학교 커리큘럼과 학사일정 등을 짜기 위해서이다"(박희성저 가라 간다,서울:광야:2001),p.77. "1992년 3월 드디어 모스크바 은혜신학교가 설립되었다".p.77.

"신학과정은 현지 실정에 맞게 맞도록 모두 1년에 마치도록 커리큘럼을 짲는데 8개월은 성경과 학문, 그리고 기도를 중심한 영성개발에 집중하고, 4개월은 전도실습기간이다."앞의 책,p.78. 과연 신학교 과정이 8개월이면 현지 실정(?) 맞도록 잘 짲는지 독자의 판단에 맡깁니다. 

누군가 러시아는 신학교가 없고 평신도가 모든 것을 맡고 있다고 말했을까요. 아니면 빨리 신학교 졸업생을 많이 배출해 사방에 보내기 위한 열정에서 비롯되었을까요. 한국인이 모스크바 속성 과정을 통해 목사(?)가 되어도 이 도시 온 한국인 크리스챤 젊은이들처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2009년에 기록된 글에 의하면, 개교 7년 만에 무려 21기가 입학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신학교 과정보다 10배 가까이 빠른 고속 배양 신학교인 셈입니다.


19923-20094월까지 1-21기까지 2,200여 명이 입학하여, 2,100여 명이 졸업하여, 그들을 통하여 구소련 전역에 수많은 교회가 개척되었다고 합니다(그야말로 물량주의를 시도한 셈입니다. 신학 훈련까지 납득하더라도 목사직을 남발한 휴유증을 어떻게 감당할 지 의문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들어와서 2일간의 Warming Up 기간이 끝나고 정식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는 제 1기였기 때문에 구 소련지역의 우리 선교사님들이 모두 참석을 했습니다. 금요일, 선교사 회의를 열고 제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앞으로 5개월 동안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 이발도 해야 하고 내의도 사 입어야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학생 1인당 월 350 루불을 용돈으로 지급하기 원합니다위의 책 p.19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음.


참고로 러시아 침례교신학교는 4년제가 원칙이고 이 과정을 3년으로 압축해 수업하는 옴스크 신학교 같은 곳도 있습니다. 오순절측 신학교는 대개 2년제로 되어 있으며 4년제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 본교 신학교는 4년제로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선교지 학제를 이처럼 짧게 해야 했는지 의문이 갑니다. 러시아를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좀더 수준높은 지도자를 배출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199451일 러시아로 온 다음 사람들은 대개 평신도였던 것 같습니다(낯익은 이름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김병복, 서용복, 박상순, 한성우, 이정곤, 스뻬따나, 선주광, 조경호, 백승환, 최윤섭, 전정휘, 최정진, 이수봉


이들 가운데 8개월 모스크바 신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목사(?) 타이틀을 획득한 사람도 있습니다. 학부 4년, 신학부 3년 모두 7년 신학 과정을 마친 P와 명문대와 정통 장로교 신학교 3년 과정을 졸업한 자매, 보수 정통성을 부르짖는 고려신학교 출신인 K강도사(선교후보생)이 짧은 학업 과정과 베뢰아 사상에 심취한 자를 연합회장으로 추대하고 잘 받들고 있으니 겸손으로 보아야 할지-


자비량 선교사로 온 S자매가 한국 선교사로서는 가장 먼저 왔던 것 같습니다. 자매는 선교지에서 혼자 지내다가 결혼을 하게 되어 남편과 함께 자비량 사역에 들어갔습니다. 자기보다 늦게 현지에 온 평신도 선교사가 어느 날 갑자기 목사 신분이 되어 의아했다고 합니다(다른 내용도 많이 알고 있지만 일부분만 소개했습니다).


신실한 자비량 선교사 부부였는데 누군가의 고발로 인해 수년 전 러시아를 떠나고 말았습니다(법대를 나온 남편이 법무사 자격을 획득해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수일 전 제니스 목사 집을 방문했을 때 전기밥통이 있어 신기했습니다. 바로 이 가정이 러시아를 떠나면서 선물했다고 합니다.


열정적으로 선교하는 사람을 비판할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더 부족할 수 있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될 수도 있으니까요. 짧은 신학 과정을 보완해 주기 위해 주석을 한 권 선물하면서 필요하다면 좋은 책을 구해 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교류를 갖는 것을 원치 않아 그만 멀어지고 말았습니다(이땅에 사는 십 수년 젊은이와 달리 군에 갔다 온 탓인지 세 살 정도 적은데도 어쩌다 마주치면 예를 갖춥니다).   

일찍이 신학 수업할 기회가 주어져 10년 이상 학업을 쌓고 여러 신학교 강의를 하기도 했지만 선교지에서 효과적인 사역을 하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적절한 후원도 따라야 하지만 협력 관계도 중요합니다. 한 젊은이의 끈질긴 방해를 시작으로 주위에서 합세해 사역에 많은 지장을 받아왔습니다.


십 수년 나이가 적은 이 젊은이 또한 좋은 지도자가 되길 바랐습니다. “러시아 선교가 쉽지 않은 걸 모두 알고 있다. 솔직하게 말해도 얼마든지 이해할테니 거짓말하는 습관을 버리라고 충고했지만 성향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은가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온 크리스챤들을 환영하고 잘 대접하는 것을 사명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결혼하자마자 이 도시에 온 새댁(젊은이 아내)를 환영하기 위해 식사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장로 딸이기도 한 새댁은  목사님 가정이 있어 정말 좋네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만남이 계속 유지되었다면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우리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는 것을 싫어해 온 젊은이의 끊질길 노력으로 인해 얼굴조차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국 하나 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가장 자기를 믿고 따라야 할 가족부터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다음 차례는 누가 될는지 더 늦기 전에 회개와 반성의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요즈음 이런 내용의 글을 자주 쓰는 것은 토양이 변화기를 기대해서입니다. 오래 전부터 안 사실이지만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피력함을 양지바랍니다. 굳은 땅도 김매고 거름 주면 점차 좋은 토질로 변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몇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선교지 영혼들을 포기하거나 선교사 전체를 의혹의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도시는 사실 한국인이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은 환경입니다. 한국인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국제적인 도시도 아닙니다. 더욱이 저기압이 심해 건강관리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인 줄 알면서 나이든 목사를 오랫동안 고립시켜온 우리네 젊은이들의 양심이 그리 맑아 보이지 않습니다.


선교지에 살고 있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진설명> 수년전 이반 목사님과 부랴트 종족 지역 중심 도시를 뜻하는 우스띠 오르진스키를 상징하는 조형물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반 목사님은 침례교 신학교 4년과 대학원 2년을 나온 엘리트 목사님입니다. 한국 교회(또는 해외 한인교회)가 현지에 신학교를 세울 때 현지인 신학교 수준에 버금가거나 이보다 나온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