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異國)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산을 좋아하고 고향의 산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릴 때부터 산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저의 살던 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마을입니다. 고향의 산은 언제 보아도 포근해서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안기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멀리 보이는 그대로 포근하고, 가까이 다가가 산에 오르면 또 그대로 편안함을 느낍니다.
산울타리 교회
한국에서 12년간 부교역자 생활을 마치고 아가페교회를 개척을 할 때에 매일 밤 서울의 우면동 청계산 꼭대기를 찾아 기도했습니다. 목회자가 달리 운동할 시간도 없고, 여건도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땀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산에 올라가면서 진실한 기도를 할 수 있었고, 기도 중에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에 올라 기도하고 새벽에 교회에서 새우잠을 자다가 새벽 기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 왔습니다. 그 때의 감격과 기쁨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는 신학교에 가기 전에 아예 앞으로 개척할 교회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목사는 남의 교회를 기웃거리기 보다는 당연히 개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의 교회와 교인을 탐내는 것은 바로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십계명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작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그 이름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그 때 지은 이름이 ‘산울타리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당연히 산 위의 동네로서(마 5:14), 어둔 세상을 비취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교회는 마지막 때에 가장 완벽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산울타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는 여호와의 산이 되어서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곳은 시내 산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곳은 모리아 산입니다. 그 산에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습니다. 엘리야가 불로 응답을 받은 곳이 갈멜 산입니다.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만나 영광스럽게 변화한 곳도 변화 산입니다. 주님도 낮에는 성전과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오후에는 각색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밤에는 언제나 감람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지만, 이스라엘이 산당을 만들어서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行淫)한 곳도 역시 산입니다. 산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악령의 세력도 강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이 산에 올라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했다는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저들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이 이를 바로 잡고자했지만, 끝까지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대하 20:33).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는 말씀처럼 산에 오르면 하나님을 만나고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산은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해야하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의 산에는 어김없이 절간이 들어서 있고, 전국의 명산(名山)에는 무당의 세력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산위 동네인 교회
이곳 조지아에 와서 가장 큰 아쉬움은 산이 없음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할 산이 없어서 무척 답답했습니다. 밤마다 기도하던 고향의 산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산이 없기 때문에 주는 유익도 있습니다. 석양에 지는 해가 마치 바다에서 보는 것처럼 커 보이고, 밤의 보름달은 더욱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산을 찾지 않아도 어디서나 밤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고향은 산은 갈 수 없지만, 기도할 때마다 고향의 밤하늘을 그대로 볼 수 있어서 더욱 좋습니다.
매일 밤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심정으로 교회를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산당을 부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교회는 산위의 동네로서 숨길 수 없습니다. 어둔 세상은 지금 산위의 동네인 교회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세상과 다른 가치와 질서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산당을 버리지 못하고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한 것처럼,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산당을 버리는 것이 여전히 어렵습니다. 산당을 부수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 6:24). 산당을 부수는 교회가 되어야 세상에 희망을 주고 세상과 다른 가치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The Atlanta Times 강진구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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