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소수를 많이 만들라

by 이재섭 posted Jun 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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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작품 「헨리 5세」에서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를 앞두고 프랑스군에게 포위당한 영국군 부대를 독려하며 그들을 ‘전우들 … 소수의 우리, 행복한 소수’라고 불렀다.











행복한 소수는 죽음도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동료, 이웃, 같은 교회에서 예배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들과의 관계는 금세 사라지는 바다 물결처럼 되기 쉽다. 생활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황량함 한가운데도 무덤까지 함께 걸어가고픈 행복한 소수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슬퍼하면서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분과 함께 있게’ 하시고자 제자들을 부르셨다. 바로 ‘함께 뭉그적거리고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씀하셨다. 리더십과 인간관계의 기술도 가르치셨다. 하지만 사도 생활에 필요한 훈련과 준비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주님은 그들이 행복한 소수, 행복한 전우가 되길 바라셨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요구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불행한 소수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서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전우이자 행복한 소수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신 일에 못지않은 기적이다.











「영적 성장의 길」/ 고든 맥도날드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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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 특성상 불과 몇 사람의 선교사 또는 한국인 크리스챤이 있을 뿐이다. 이 적은 수 가운데 뺄 사람이 있을까- 한국 교회가 보낸 신학교 출신 선교사는 둘뿐 지역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만 남는다.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15년 정도 연상의 목사와 오랫동안 거리를 두고 있는 젊은 자와 이런 구조 속에서 부득이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






이왕이면 자기들을 선교사로 인정해 주는 폭넓은 아량(?)을 지닌 젊은 쪽를 택하겠다고 한쪽에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결국 나이든 선교사는 혼자 남게 되었다. 이른바 왕따가 된 셈- 먼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바로 이 도시에서 발생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시키고자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가 불화를 일으킨 주인공인 양 몰고가다가(이 지역에 사는 청년을 선교사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해서-) 급기야 카작 이야기까지 동원하고 있다. 카작에 우리와 같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뚜렷한 근거가 있는 말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이야기다.

둘 가운데 한 쪽을 밀어내면 자신의 독무대(?)가 된다고 본 탓일까.  그래서 새로 오는 젊은이들에게까지 열심히 자신의 사상을 주입해 높은 벽을 형성하고 있다.




최근에 온 한 후보생은 태어난지 한 달된 첫 아이와 아내를 한국에 둔 채 언어 연수를 왔다고 한다. 얼마나 사명감이 깊었으면 이렇듯 생이별까지 감행해야 했을까-


낯선 땅에 오자마자 젊은 자에게 들은 대로 카작에서 어떻고 하면서 사방에 우리를 문제삼고 있어 이해를 어렵게 한다. 젊은 나이답게 직접 본인을 찾아와 전후 상황을 물어보지도 않고~


심지어 수신거부를 해 놓기도 한다. 까페나 메일에 접속이 안 되도록 아예 거부 등록을 해 놓은 것이다. 얼굴을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꼭 이래야 할까. 


예수님께서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 25:46)고 질책하셨는데 과연 이래도 되는 건지.


여러 차례 해 바뀌고 성탄절이 지나고 대소 행사가 있었지만 전화조차 없이 지내고 있다. 누군가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할 것같아 천사홈에 잠시 피력하게 된 점 독자 제위의 양해를 구한다. 




예수님에겐 12명의 행복한 소수가 있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땐 그 수가 셋으로 줄어든다. 바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다.


진리는 수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노아, 아브라함, 야곱, 엘리야 등 고독한 가운데 주님과 동행했던 신앙의 위인들이 많이 있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뜻을 품고 와서 같은 도시에 살면서 얼굴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일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다. <행복한 소수>에 만족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길 기대한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롬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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