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 언제나 큰소리를 치고 대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 병실에서 가장 오래되고 위중한 상태에 있는 중환자일 것입니다. 이 사람이 소위 말하는 방장(房長)입니다. 방장이 ‘시끄러우니 TV좀 끕시다’ 하면 다른 사람들은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방장이 ‘찬바람 들어오니 문 좀 닫읍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그의 뜻을 존중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교도소에서도 방장 노릇을 하는 사람은 무기수나 사형수 혹은 수인(囚人)들 중에서 별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교도소에서는 전과가 많은 사람을 별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누가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동안자연스러운 질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병실에서나 교도소에서 방장들의 횡포를 미워하지 않고,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이 땅에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사는 날 동안에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마 9:13).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을 가까이 하시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병자들이 몰려들었고, 주님은 병자들과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 주변에 여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돈 많은 복부인이나 귀부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물의를 빚은 영화의 내용처럼 주님이 미인들을 가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세상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사 53:2). 만약 주님에게 그런 아름다움 모양과 풍채가 있었다면, 주님 주변은 잘난 여자와 귀부인들 차지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인들은 언제나 가난하고 죄 많은 여인들과 주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런 행보(行步)를 보면 오늘날 교회의 할 일이 분명해 집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과 고통당하는 환자들을 배려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건강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찾는 곳이 아니라, 환자들과 죄인들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권리와 교회의 의무
교회에서 행세하고 대접받는 사람들은 의외에도 부자들과 잘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교회에서조차도 환자들과 가난한 자들이 대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저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저들을 위한 배려가 없습니다. 오히려 잘나고 똑똑한 분들이 선생되어 저들을 정죄하고, 실족시키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병원에서 환자는 정당한 대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환자는 병원에서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병원 측에서도 당연히 환자를 위해 정확한 검진과 처방을 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수술도 병행합니다. 병원에는 환자를 위한 입원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전담 의사와 간호사가 배치됩니다. 병원은 환자들 때문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저들을 위한 적절한 배려와 보살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의 친구들이 주님의 교회에서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상처 입은 영혼들이 교회에 와서 치료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힘을 잃고 낙심한 영혼들이 소망을 발견하고 새 힘을 얻는 은혜의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강진구 목사 1월 27일자 애틀란타 타임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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