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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평소 잘 알고 있는 선배 분이신  G목사님 교회를  출석하기로 했다(G목사님은 비교적 알려진 E선교회 회장으로 한국 교회 선교지도자의 한 분이시다).
  며칠 후 G목사님께서 내개 태국 선교지에 동행할 것을 제의하셨다. 평소 내가 컴퓨터 하드웨어를 많이 다루어 본 것을 알고 계셨던 만큼 마침 몇 대의 컴퓨터를 현지로 가지고 가서 설치해야 하는데 컴퓨터 기술자 자격으로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나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하신 듯 모든 경비를 선교회가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이때 총회장 목사님을 비롯하여 선교를 도와오신 중진 목사님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태국 방콕을 거쳐  북부 치앙마이 산족 마을까지 두루 살펴 볼 기회가 있었다.  
  나는 N으로부터 받은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 521장 찬송을 속으로 자주 불렀다.
  평소 생각해 오던 선교지를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자 감회가 남달랐다. 방콕의 화려한 배경 뒤에 우상의 터가 굳어 있었다. 이어 장거리 버스로 북부 지역으로 갔다.

  산족들 틈바구니에 식사를 하면서 정작 선교사는 아무도 살 지 않는 게 잘 이해가 안 갔다. 여러 가지 위험한 요소와 불편이 있었던 탓인지 몰라도 선교사들은 대개 잘 지어진 본부 건물에 모여 살고 있었다. 제자를 삼으려면 동거동락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모두 관광을 나간 사이 컴퓨터를 설치하고 점검한 후 낮잠이 들었는데  그새 뜨거운 폭염에 열병이 들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한동안 고생해야 했다. 역시 더운 나라라 생각됐다.
  마침 선교 센터 준공식이 있어서 여러 부족들이 참석했다. 네 명의 부족어 통역자들이 열심히 통역하고 있었음에도 현지 선교사로 나가 있는 목사님은 청중 가운데  아직 1/3정도는 자기 부족 통역이 없어 못 알고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태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 E선교회장이신 G목사님께 어떻게 우리 가족이 선교사로 나가는 길이 없겠냐고 물었다. G목사님은 여러 해 동안 노회  및 교회를 통해 누구보다도 나의 입장을 잘 아시는 분이었다. 내게 필요하다고 보셨던지 상황을 설명해 주셨다.
 “선교란 결국 선교비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한국은 아무래도 혈연, 지연, 학연 등 무언가 닿아야 지원을 받기 용이하다. 그런데 이 목사는 어디를 봐도 선교 지원 가능성이 희박하다. 일단 마이너스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선교회 또한 금방 빚이 누적되고 감당하기 어렵다.” 는 것이었다. 이처럼 논리적으로 선교사 자격이 부적절하다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외국에서는 평신도 선교사도 많이 선교지로 나간다는데 어떻게 7년 간 신학 수업을 받은 젊은 목사가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신학교 시절 특히 중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많은 인구에 비해 기독교가 아직 약해 보였다. 또 남미 대륙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어느 곳이던 부르면 달려갈 생각이었다.
  하루는 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I선교회 간판을 보고 찾아갔다. 이곳은 사단법인체이긴 해도 아직 활동이 뜸했다. 그래서 부설 선교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면서 나또한 수업을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면 이 단체가 더욱 쓰임을 받기 위해 협조할 마음도 있었다.

  나는 앞으로 선교사로 사역하게 될 것을 대비해 틈틈이 준비해 나갔다. 
  세계침술선교회에서 4개월에 걸친 침술 훈련을 받았다. 아무래도 선교지에서 생기는 급작스런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 최소한의 상식을 갖추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또 기아봉사단 훈련도 1기로 받은 바 있다. 이 훈련을 참석하는 동안 구제가 필요하긴 해도 역시 직접적인 선교와 다소 거리가 있음을 느꼈다. 개인의 달란트도 중요하고 현지 구제도 필요하겠지만 성경 교육이나  교회 사역이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보다 구체적인 훈련을 위해 타문화권 선교훈련원을 찾아가 선교훈련을 받았다.    이곳은 1년 간에 걸쳐 종일 선교훈련을 받는 코오스였다. 이 기간 동안 현지 선교사들과 선교사 경력을 지닌 강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희망 선교지로 러시아를 택했다. 하지만 생활 여건이 안 좋아 많지 않은 훈련비를 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학기 동안 훈련받다가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주위에서나 또는 선교단체가 선교지원자에게 좀더 깊이 관심을 쏟았다면 더욱 효과적인 시간들이 되었을지 모른다. 

  1995년 5월, 타문화권 선교훈련원에서 훈련받는 중이었다. 이 무렵 우연히 만나게 된 K목사는 자신이 러시아 극동 지역을 잘 알고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신분에 비해 그리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지만 현지 고려국민대학교 기획실장이란 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학교에 관한 자료를 보이며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가 청구한 돈이 좀 많아 보여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연로하신 부친께서 어렵게 마련해 준 돈으로 요청한 경비를 지불하고 다른 목사님 한 분과 함께 K를 따라나섰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좀 떨어진 아르쫌이란 곳에 있는 한민족 대학교와 교회들을 방문한다고 했다. 특히 학교 강사로 초빙되었는데 앞으로 학교 일에 관여해 달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나는 러시아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사실 그 동안 지구본을 놓고 이리 저리 돌려가며 여러 나라를 놓고 기도할 때도 많았다.
  과연 어느 나라로 선교를 가게 될런지 나 자신도 궁금한 터였다.
  러시아를 처음 접하는 순간, 신앙과 다소 거리가 먼 자연 그대로의 땅 처럼 보였다. 정교회는 일종의 상징적인 교회로 화려한 모습 그 아래는 마치 죽은 듯이 보였다.
   이제 복음의 자유가 어느 정도 주어진 지금 그 어느 곳보다 선교가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현지 교회에서 설교도 한 차례 하고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강의할 기회를 갖기도 했다. 대개 고려인 학생들이었다.

  주로 한글을 가르치던 중국 조선족 자매가 비자 연장이 안 되어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중소 국경 분쟁이 있어 잘 연장을 안 해주고 있는 모양이다. 숙소로 여자 경찰들이 자주 찾아왔다. 나중에는 자신해서 출두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득이 자매가 경찰서를 찾아가기로 했다. 자칫하면 유치장에 갇힐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온 분들 앞에서, “우리 이 자매를 위해 기도하자”고  제의했다. 그러자 대뜸, “어, 기도하는 목사가 다 왔네. 기도는 혼자 조용히 하지 그래.” 하고 그대로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매에게 살짝 귀띔했다.

  “내가 널 위해 기도할테니 잘 견디고 있어라.” 하자, “고마워요.”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 자매는 바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고 말았다. 얼마 후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한 주간 있는 동안 함께 예배도 기도도 한번 없이 지내느라 좀 어색했다. 아무리  하나님을 많이 안다고 해서(이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기도와 예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을 여기 저기 돌아보는 순간 한국 상품이 생각보다 많은데 놀랐다.  이때 한 가지 안타까웠던 사실은 안내한 K란 자가 일종의 선교지 안내 브로커였다. 어려운 형편에 적지 않은 경비를 지불했음에도 알고 보니 터무니 없는 금액을 제시해 자신의 사욕을 채우려 든 것이다. 
호사다마라던가. 선교지를 빙자한 사기극이 많다고 들었지만 첫 러시아 방문부터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불필요한 소모까지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로 안내한 자가 터무니 없는 요구를 해 오므로 생각지 않은 소모가 많았다. 하지만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일대를 한 주간 살펴본 것이 유난히 마음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비록 정교회가 있다지만 아무리 보아도 복음과 무관한 자연인 그대로의 모습 같았다.
  조그만 임대아파트 15층 베란다, 이곳은 내가 자주 기도하던 골방이었다.
  “내가 너를 선교지로 안내할 사람을 보낼테니 무조건 따라 가라.”
   는 기도 응답이 자주 왔다. 무언가 일이 곧 생길 것 같았다.
  이제서야 선교지로 갈 때가 되었나 보다.
  “조금 있으면 한국에 큰 환난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는 응답도 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IMF라는 엄청난 경제 환란이 한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러시아 교회 성찬식 장면- 포도주가 담긴 커다란 잔을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참여합니다. 사진의 주인공은 젊은 날 공산당 지도자로 큰 사업체를 맡았다가 숙청대상으로 지목되어 위태로울 때 신앙에 귀의했다고 합니다. 예배시간에 기타를 치며 특송하기도 합니다. 이 선교사 또래인데 손자 나이가 열 살이나 된 할어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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