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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간 계속되어 온 근로청소년 사역도 90년대 초에 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그래서 앞으로 진로를 모색할 겸 해서 회사에서 미국 비자를 만들어 준 비자로 미국을 갔다. 솔직히 K처럼 한국인의 이기적인 태도로 인해 늘 피곤하게 살아온 터였다.
  마침 한 달간 델타 항공을 비교적 싸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티켓이 있다 해서 이를 구입해 가지고 처음으로 미국으로 향했다. 태평양을 건너 10시간 이상 비행했다.
  미국의 첫 관문인 입국 심사에서 이것 저것 묻다가 돌연히 엉뚱한 질문을 해 왔다.
 “지금 달러를 얼마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평소 거짓말 못하는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는 질문이라 생각됐다. 물론 입국 심사하는 자가 선뜻 방문객 주머니를 뒤질 수는 없을 것이다. 더러는 이런  경우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신앙인이 되어가지고 위기를 벗어나 보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지 않는가. 무언가 지혜가 필요했다. 먼 길을 떠나면서도 수중에는 사실 400불 정도 밖에 없었다. 질문의 의도로 보아 있는 그대로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마침 신용카드가 아직 살아 있었다.
  현금  서비스로 3,000불 정도 인출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3000불-” 하고 말하자 입국 심사관이 선뜻 들여보내 주었다. 한국이 가난한 나라로 보여서인지 이런 것 까지 묻는 태도가 영 기분이 안 좋았다.

  LA에 있을 때 강 전도사님을 찾아가자 여러모로 잘 보살펴 주었다. 또 부친이신 장로님 댁을 숙소로 정해 주어 감사했다(강 전도사님 부친은 전직 차관이셨다 한다).
  LA에서 목회하고 계신 선배 목사님은(그 사모님이 한동안 나와 같이 신학 공부하던 분이기도 하다) 내가 인사를 드리자, 절대 이곳에 사역하러 오지 말라며 당부하셨다. 사람이 신학을 했으면 뜻을 펴야 하는데 제한된 교인들에 비해 교회만 많아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계실 때는 목회를 잘 하시던 분이라 이 말이 더욱 의미 있게 들렸다. ‘그래, 우리가 이왕 헌신하려 들었다면 안일한 태도보다 주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휴스턴에도 가 보았다. 남부 지역이라 맑고 더웠다. 버스를 타고 나사에 들려 보기도 했다. 다음엔 좀 떨어진 멕시코만 근처에서 목회하시는 선배 분 교회도 가 보았다.
  이어 시카고로 향했다. 학부 1년 후배인 목사님 댁에 머물며 시어즈 타워와 몇 곳을 살펴 보았다. 미국 교회를 빌려 목회할 수 있는 풍토가 보기 좋았다.
  다음엔 뉴욕으로 갔다. 뉴욕에 며칠 머물며 주위를 돌아보는 동안 대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 정말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유학 중인 얼라이언스 신학교를 방문해 보았다. 우리보다 더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것 같았다.

  시내에 혼자 나갔다가 친구를 집을 찾는다는 것이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뉴욕은 범죄 사고가 많아서 인지 낮에도 중무장한 경찰이 여러 명  떼 지어 다니는 것이 보였다. 
  밤 길이라 그런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마치 전쟁터처럼 적막이 감돌았다. 친구 집을 찾다가 잘 안되어 누구에게 물어보려 해도 아예 피해가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이리 저리 다니며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 봉고차가 다가오더니, 
 “어디로 가십니까?” 하는 한국말이 들렸다. 마침 인근을 지나가시던 한인교회 목사님께서 나를 발견하고 친구 집을 찾아주셨다. 
 출가한 따님을 찾아가는 길이라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로 기던지 동행하신다. 혹 도움이 필요할 때는 그 손을 펴서 잡아주신다.

  우리 교회를 출석하는 집사님 동생이 뉴욕에 있는 섬에서 목회하고 있다 해서  찾아가 보았다. 아주 인품이 좋은 목사님이셨다. 섬을 오고 가는 길에 자유의 여신상이 보였다.     진정한 자유는 복음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기독교 나라란 곳에 왠 자유의 여신상일까. 
  말로만 듣던 마천루에도 올라가 뉴욕 풍경을 내려다 보았다. 이번엔 캐나다로 가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캐나다 근접 공항을 살펴보니 시라쿠스 공항이 있었다. 그래서 뉴욕에 있는 동안 그곳에서 캐나다를 가는 비행기표를 구했다.
  델타 항공은 한달 간 대기 상태에서 빈 자리가 나면 무조건 비행기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비행기에 탔다.  좌석에 앉아 돈을 살펴보니 현금이 50불 밖에 없었다. 자칫하다간 LA까지 제대로 돌아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언제나 모험으로 살아왔다지만-

  공항에 내리자 연결 비행기가 없어 지금 당장 없어 이튿날 아침에야 떠난다는 것이다. 광활한 들판에 비행장만 덜렁 있어 걸어서는 도저히 인가를 찾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남의 나라 외진 곳에 와서 어디 아무 곳에서나 잘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쏟아지는 별빛을 받으며 길가에 서 있자 택시들이 손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시내까지 요금을 물으니 40불이라는 것이었다. 금액을 정해 놓고 아예 미터기는 꺼 놓고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선뜻 차도 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 여기 와 있습니다. 돈도 부족하고 어디 잘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조금 후 어떤 미국인 할아버지가 택시를 옆에 대며 왜 안 타냐고 물었다. 그래서 “요금이 너무 비싼 것 같다. 왜들 미터기로는 가지 않느냐.” 고 되물었다. 할아버지 기사는, “그럼 자기가 12.5불에 가주겠으니 그러면 됐냐.” 고 물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택시를 타자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자기도 한국에 갔다 온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반가워서 언제 다녀 가셨냐고 묻자 1950년 겨울에 왔다가 1953년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참전용사 할아버지셨던 것이다.

  자기는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공산군 포로가 되어 줄곧 평양 형무소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겨울에 동상에 걸려 고생한 포로가 많았다면서 공산당이 아주 나쁘다는 말을 강조했다. 결국 포로교환 때 풀려났다는 말에 한국인을 대신해 감사 드린다고 했다.
  서울이 어떠냐고 묻기에 지금 1000만 명이 살만큼 크고 건물이 잘 지어져 있다 모두 할아버지 같은 분 은혜다 라고 감사를 표했다.
  싼 여관을 잡아 준다며 숙소로 데려다 주기에 내일 다시 올 수 있냐고 묻자, “자기는 쉬지만 대신 친구를 보내주겠다. 요금도 자기와 똑같이 주면 된다.” 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팁까지 15불을 요금으로 주고 여관으로 가서 카드로 결재했다.
  이튿날 약속 시간에 다른 할아버지가 왔다. 자기도 한국전쟁 참전용사라 했다.
 
  캐나다를 건너가 학부 때 같이 공부한 적이 있는 서 목사님께 전화를 하자 지금 심방 가는 길인데 한 시간 후에 데리러 오겠다는 것이다.  만나 보니 목회를 잘 하고 있었다. 
  그 목사님 차로  말로만 듣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할 수 있었다. 실로 장관이었다.
  왜 미리 연락 안 했냐고 묻기에 나는 특별한 이유없이 여기 저기 둘러 보는 중이고 목사님은 목회하고 있는 중이니 괜히 누가 될까봐 도착한 다음 시간이 되면 만나보려 했다고 말했다. 자기는 늘 바쁜 편인데 마침 전화를 받게 되어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목회를 하다 보니 혼자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올 기회는 없고 어쩌다가 손님이 오게 되면 그 김에 한번 들려 본다.” 고 했다. 이튿날 새벽기도회를 참석하자 성도들이 많았다.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하자 회사가 부도 처리되어 곧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먼 길을 가고도 그냥 서둘러 한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경영자가 바뀌면서 새로 사주가 된 분도 사내 선교를 인정했으나 부도 직전의 다른 관련 회사를 인수하다가 끝내 본사까지 도산하기에 이르고  만 것이다.
  모두 흩어지기 전에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캐나다에 더 머물지 못한 채 이튿날 바로 한국으로 향했다. 캐나다에서 LA 까지 오는데 만도 무려 14시간이나 걸렸다.다시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서울까지 도착했다.

  청소년 사역 지원이 줄어든 데다 교회 이전 때(뜻하지 않은 요구로-) 생각지 않은 카드 빚까지 갚아나가야 하는 어려움 속에 끝내 목회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 이러한 경제적 난제로 인해 향후 수년 간 가정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 접어들고 말았다. 남을 도우려 들다가 이렇듯 생각지 않은 일에 몇 차례 빠져들게 되자 심신이 지치기까지 했다. 
  남이 어렵다면 발벗고 나섰다가 일이 마무리 되고 나면 이번엔 반대로 나를 문제를 삼거나 거짓으로 몰아 세우는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왜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목회를 중단하게 되면서 이따금 다른 교회를 일시적으로 대신 맡아 목회를 하기도 했다.
신학교 강의를 계속할 수 있어 위로가 되고 보람도 있었다. 삼십 대 중반이어서 신학생들 나이가 나와 비슷하거나 더 많았다. 가르칠만한 자격도 못갖추었으면서도 여러 신학교 강의를 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선교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사진설명> 가난한 이웃과 함께- 지난해 여름 노숙자 행사인 사랑나라에 참여한 이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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