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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공중전화 박스에서 수첩을 하나 발견했다. 내용을 보니 미국 교포 같았다.주로 교회 쪽 주소가 많았다. 한국까지 왔는데 연락처가 없어지게 되면 곤란할 것 같아서  수첩에 나온 몇 군데 연락을 취하자 수첩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수첩의 주인은 미국 한인 교회에 나가는 강 전도사라는 분이었다. 만나보니 건장하게 생긴 분으로 나보다 나이가 더 많았다. 미국에 가신 지 벌써 오래 되었다고 했다.
(그 후 여러모로 나를 많이 도와주셨다. 후일 이분이 목회하는  LA 가나안교회가 선교 후원 교회의 가운데 하나로 참여해 우리 가족 주식비를 맡아주어 감사했다. 정작 한국 교회로부터 후원이 잘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강 목사님 교회가 큰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이  무렵 내 결혼 문제가 자주 거론되었다. 언제나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온데다 하시라도 기회가 주어지면 선교지에 나가야겠다는 입장이었던 만큼 자연히 결혼 문제를 등한히 해 왔다. 그 동안 주위에서 내게 관심을 많이 가진 자매들도 있었다. 특히 선배 목사님들 가운데 자기 측근자와 지속적인 관계가 맺어지기 바라는 분들이 더러 있었다. 목회 협력 차원에서라도 자신의 처제나 딸과 연관을 갖기 원하는 분도 있었다. 정작 나이가 들어가는 나 자신보다 주위에서 내게 관심을 보이고 계신 분들이 많았다. 
   
  나는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상담자로서 신앙과 생활을 복돋워 주기도 하고 교제를 갖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누구나 그러하듯이 결혼 문제 만큼은 보다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평소 생각해 온 이상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이 마저도 내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한 자매가 가까이 있었는데 그 동안 내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여러 가지 면에서 결혼까지 성립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자매에게 반드시 내가 필요해 보였다.
  결국  일생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평소 모든 것을 양보하다 보니 일생이 걸린 문제까지도 끝내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없었던지 모른다(이 말이 다소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타의적으로 살아가던 삶이 나은 결과라고 해야 적절한 표현일 듯- ).

  이  무렵 나는 7년 간 어려운 신학 과정을 마치고 목사 임직을 받은 지도 2년이 경과한 터였다. 아마 내가 좀더 화려하고 안정적인 배경을 가진 대상을 원한다면 지난날의 모든 아픔과 수고들을 결혼을 통해서라도 어느 정도 보상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한 영혼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이 또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대신 자매 또한 순수한 마음과 깊은 신뢰 그리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모든 것을 잘 극복해 나가리라 생각되었다(특히 선교지의 열악한 환경을 헤쳐 나갈 때 잘 견뎌주었다).

  1987년 9월말 결혼을 결정한 지 약 한달 후 마침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이때 가진 것이 별로 없어 둘째 형이 결혼 자금으로 60만원을 남짓 빌려 주었다. 이 돈은 당일 부조를 정산할 때 다시 갚았다. 결국 스스로 시작하는 출발이었다).
  축하객 가운데 P목사님을 비롯하여 30여 분의 목사님들이 참석했다. 주례는 은사이신 장국원 박사님께서 맡아주셨다. 초졸한 결혼식이었지만 이 또한 필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이제 나는 고독했던 지난 날에 비해 동반자와 함께 앞으로의 삶을 지내게 되었다.이 무렵 나는 야간 신학교에 다니는 한 후배 전도사를 집에 데리고 있었다. 학부 때부터 알게 된 후배인데 이때도 한동안 사당동 집에서 같이 지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고향을 다녀 온 후배가 평소 낙천적인 성격에 비해 슬픈 표정을 지어 이상했다. “집에 갔더니 그 동안 자기 학비와 생활비를 뒷감당하느라 소도 밭도 팔았더라.”며 괴로워 하는 것이었다. 주의 종을 만든다는 것이 큰 희생이 따르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진 돈이 부족해 따로 2칸짜리 방을 구하지 못하고 단지 큰 방 한쪽에 쪽방이 딸린 곳을 구했다. 후배가 당장 갈 곳이 없어 신혼 집이지만 쪽방에 살게 했다.

  후배가 밤 중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부득이 우리가 있는 큰 방을 통과해야 됐다. 그래서 신부는 후배가 같이 있는 동안 잠옷 한 번 못 입고 조심스럽게 지내야 했다.이해심이 깊은 자매라 잘 감내해 주었다. 어차피 남을 위해 살기로 한 가정이 아닌가.
  후배가 야간 신학교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이때 신부는 또 하나의 남자를 위해 식사를 차리곤 했다. 결혼한 지 두 달 째 접어들 무렵 비로소 후배가 입주할 교회가 나서서 옮겨 가게 되었다. 모두가 불편을 감내해야 했던 순간들이었다. 

  늦은 결혼이었음에도 나는 자녀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보다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이 곧 오실 것 같으면 자식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래야 선교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대신 좀 더 있다가 오시게 될 것 같으면 아들을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어릴 때부터 주의 종으로 훈련시켜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 대비하겠습니다.”  하고 기도 했다.

  첫째 아이를 낳자 아들이었다. 기도가 떠 올랐다. ‘주님이 좀더 있다가 오시려나 -’  인척 중에 신자가 아직 없는 집안이라 후대에 기억이 남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돌림 자에 맞춰 ‘기은’(基恩)이라고 지었다. 또 주님과 약속한 대로 어려서부터 주의 일군으로 훈련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본인이 ‘아빠의 뜻을 이해해 주어야 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둘 째 아이로 딸이 태어났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찬미’로 지었다. 나는 본래 산아제한을 위한 수술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내 신앙으로 볼 때 이는 일종의 자해 행위라고 보았다.  모든 일에 있어서 주님의 뜻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이로 인해 아이 엄마가 몸이 아파도 약을 제대로 못 먹을 때가 많았다. 사실 아이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가임기 여성으로서 혹시 몰라 자연적으로 극복해야 할 것 같아서-).  

  어느 날 꿈에 우리가 셋째 아이를 가지는 것을 보고 주위에서 놀리는 장면이 비쳤다. ‘배가 부른 아이 엄마를 둘러싸고 늦게 결혼하더니 왠 애가 셋이냐 ’ 하는 것이었다.그래서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인데, 함께 축하하지 못하고 이 무슨 태도냐’ 하고 생각했다. 혹 임신이 되었더라도 가능한 주변의 띄지 않게 지낸 다음 낳을 생각이었다.
  꿈을 꾼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병원을 찾아가자 의사가 오히려 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알고 왔나요. 혹시 낙태하러 온 게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아뇨 앞으로 나을 예정인데요.” 하자, 의사가 “그럼 교회 나가세요?” 하고 물었다. “사실 애기 아빠가 목사예요.” 라고 말하자 의사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무언가 반성하는 듯 했다.  “사실 나도 의사로서 아이 낳은 일을 도와주고 싶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낙태하러 병원을 찾아오지요. 안 된 일입니다.” 하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열 달 후 태어난 아이가 기성이다. 기성이는 날 때부터 건강하고 인물도 원출해 보였다. 기성이는 자라나면서 일찍부터 신앙에 접어들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라 생각된다. 
 (나중에 선교지에서도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어린 선교사로서의 몫을 잘 감당해 하나님의 사람께서 친히 이 땅에 보낸 하나님의 아들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왜 주어진 복을 피하는가. 잠시 편하게 지내려고 아이를 줄이려 들고 대신 편리하게 정욕을 도모하고자 의학의 힘을 빌리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 아닌가. 과연 주님의 뜻일까.
  이슬람과 카톨릭 인구가 증가하는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의 다산에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인은 아이 낳는 일을 꺼리고 있어 그만큼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전도라도 하던가- 

위의 글은 미리 써둔 글이다. 그런데 신혼 초(그전부터 같이 살고 있었지만)에 한 집에서 지냈던 C전도사 후일 러시아에서 만난 P의 선배였다. 같은 고향 교회 출신이고 고교 대학 모두 선배인데 미국으로 이민 간 상태인 것을 10년 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메일을 보냈다. 니 후배로 인해 우리 삶과 사역에 여러 가지 사역 지장이 많으니 니가 좀 나서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글을 받고 우리와 교류를 끊어 어이가 없었다. 한국에 이 후배의 형이 서울에서 목회 중이고 우리와 오랜 만남이 있었지만 후배 이야기를 꺼내자 슬그머니 피하는 것이었다(이런 모습은 선교지에 살면서도 자주 경험한바 있다).
생을 살아오면서 세상이 좁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이 있다. 천국에 가게 되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살아가야 두고두고 후회한는 일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사진설명> 어린 세 자녀를 선교지에서 양육하고 사역에 동행한 사라 선교사- 시베리아 겨울 여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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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무디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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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보릿고개를 넘어(7) - 주님의 부르심과 순종

  20. 보릿고개를 넘어(6)- 나어린 사회 초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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