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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앞에 두 개의 선택이 놓이게 될 때 대개 안 좋은  쪽을 택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란 말씀처럼 소자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믿어 온 것이다. 
  자연히 유리해 보이는 일에는 관심을 덜 갖게 되고 희생과 봉사하는 일에 마음이 쏠렸다.

  강남의 한 선배 목사님 교회 강도사로 있을 때였다. 이때 나는 주로 다른 일을 통해 수입을 얻고 교회는 거의 무급으로 봉사하고 있었다(비교적 힘든 시절이었다).
  주일 밤 예배를 끝내고 교회 교육 전도사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강도사님 0번 버스 오면 알려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아니, 눈은 뒀다 어디 쓸려구 글씨가 안 보이나?” 하자,
  “전 밤에 잘 안 보여요. 그나마 안경이 깨져서 더욱 안 보이네요.”
  목사의 자녀로 태어나 열심히 신학 수업을 쌓고 있는 최 전도사가 안경이 없어 밤길을 잘 못가는 상황에 빠졌는데도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래, 저 친구를 어떻게 하던지 돌봐야겠다. 혹 취직이 되면 안경이라도 사 주어야지’    그래서 혹 조그만 것이라도 생기면 최 전도사에게 반을 덜어주었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는데 아이 엄마  영양 상태가 안 좋아서인지 이따금 유산이 되기도 하고 임신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부자 동네라는 강남을 출입하는 전도사의 삶이 너무 힘들어 보였다.

  마침 기독지혜사에서 편집부 사원을 뽑는다고 해서 입사시험을 거쳐 근무하기 시작했다.
  편집 팀에 있게 되면서 교정, 교열 그리고 문서 편집에 대해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종일 매여 지내는 게 다소 힘들기는 했어도 모처럼 생활이 많이 안정되었다.
  때로는 어려운 친구를 조금씩 도울 수도 있었다.  마침내 월급을 받게 되어 최 전도사의 안경을 사주려고 하자 며칠 전에 누가 하나 사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미 약속한 돈이라 최 전도사에게 안경 값 만큼 주었다.
  며칠 후 최 전도사가 내게 인사를 했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을 듯-
 “강도사님 사실 우리 집 딸 애가 손이 한쪽이 튀어나와 혹시 육손이가 될까봐 고민 중이었답니다. 강도사님 준 돈으로 X-ray를 찍었는데 괜찮다나 봐요. 이제 좀 마음이 놓여요. 고마워요.”  부모의 심정은 마찬가지 아닌가. 단지 돈이 없어 그만큼 어려울 따름이다.
  그래서 이따금 무엇이 생기면 절반을 그의 집에 덜어주곤 했다. 교회에서 내 몫으로 성미를 주기에 나야 혼자였던 이 또한 절반을 그 가정에 덜어주었다. 
  가난한 신학생의 삶을 위해 우리네 교회가 좀더 관심을 갖고 돌보아 주었으면 한다.
 
  어느 날 최 전도사 집을 찾아가자 부부 싸움을 한 듯 표정들이 안 좋았다.
  모두 착하고 인물도 좋은 편이었는데 왜 이날 싸우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아니, 사이좋게 잘 지내지 않구”  하자, 최 전도사가 부인을 나무라는 것이었다.
 “십일조를 떼 두었는데 그만 아이 엄마가 연탄을 샀지 뭐예요.
  그래서  교회가기가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럼 애기가 얼어 죽게 되었는데 불도 안 피고 살란 말예요.”
  최 전도사 부인의 말을 듣고 보니 나 또한 할 말이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도 분명히 한 어린 아이를 둔 부모가 아닌가- 
  주님을 위해 이처럼 고난을 감내해야 하다니-

  ‘교회가 십일조를 받는 것은 본래 레위족을 위한 것이 아닌가. 레위 족의 십일조는 아론 족 몫이라 했다. 그런데 십일조를 가져다가 다른 용도로 쓰고 정작 신학생은 이렇게 살아가야 하다니 -’  이 또한 큰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최 전도사 사례는 9만원 책정 되어 있는데 멀리 가난한 동네로 가서 방을 얻었음에도 월 임대료가 6만원이나 나간다고 했다.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더욱이 최 전도사가 재학 중인 개혁신학연구원은 주간이라 아르바이트도 쉽지 않았다.
  교회까지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데도 그의 혹 부인이 교회를 안 나가게 되면, 핀잔을 듣기도 했다. 사실 교회까지 갈 차비도 제대로 없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리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더라도 사람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수년 후 최 전도사가 지방으로 목회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한번 찾아가 보았다. 
  부인이 아주 건강해 보였다. 그 사이 아들이 태어나 벌써 많이 자랐다.
 “모두 건강이 넘치네.” 하자, 최 목사 부인이 전날을 상기하며 말했다.
 “전에는 못 먹어서 몸이 안 좋았나 봐요. 지금은 괜찮아요.” 
  시골 교회를 지켜 온 최 목사 부부는 주위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다. 
  농촌 교회 예배를 참석하자 마치 경로당에 온 것 같았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나갔다는 것이다. 농사일이 쉽지 않음에도 이 어른들이 우리 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농촌 청소년들을 비롯해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로 진출하고 있었다.
  
  십 수 년 전에 최 전도사 부친이신 최 목사님을 이따금 만나 보았다. 목사님은 일제 시대 때 독립군으로 전도사로 나중에 목사로 활동하신 분이었다. 심지어 해방될 때까지 결혼도 안하고 주로 만주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가 해방 후에야 뒤늦게 결혼하셨다고 한다.
(일제에 아부하면서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해방을 맞자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채 다시 자리를 잡아 이 땅의 지도자인 양 자처해 온 기회주의자들과 대조가 되는 분으로 보였다. 사람들은 대개 거대한 교회를 짓거나 높은 자리에 있으면 이를 성공으로 보고 있으니-).
  최 목사님은 한국이 어려운 시절 꿋꿋이 신앙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살아온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나를 만날 때면 자신이 지켜 온 땅에서 자라나 신학교까지 졸업한 것이 대견스러운 듯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만주에서 있었던 일인데, 교회 종탑에 이따금 줄이 걸린다고 하셨다. 아마 종이 움직이다가 그만 줄이 감겨 버리는 모양이었다. 교회 한 청년이 이 줄을 풀려고 높이 달린 종까지 올라갔다가 그만 추락하고 말았다. 이럴 때는 떨어지는 사람을 향해 힘껏 머리로 부딪혀야 살아난다는 것이다. 물론 밑에 있는 사람도 위험할 수 있겠지만 내려오는 중력을 완충시키기 위해 힘껏 부딪히자  추락하던 형제가 무사했다고 한다.
   어느 미국 선교사님이 한국에서 전도하러 다니실 때 자신은 조사(전도사)였다 고 한다. 그런데 미국 선교사님이 다른 건 잘 적응하시는데 침대가 없이는 잠을 못 주무셨다.

   요즈음과 같이 접는 군용침대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에 구할 수 없었던 탓에 평상(마루 처럼 생긴 바닥)을 침대처럼 만들어 지게에 지고 따라다녔다고 하셨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선교사님 뒤를 따라 다니다가 여기서 주무시겠다고 하면 천막을 치고 평상을 놓아 편히 주무시도록 하고 옆에서 대충 자리잡고 주무셨다는 말에 숙연해졌다.
  이땅의 복음화를 위해 민족의 짐을 등에 지고 다니신 고귀한 분이시다 라는 생각되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신 분이다.

  최 목사님께서 만주에 계실 때 일이 있어  한국에 잠시 나왔다고 한다. 한 교회 주일 예배를 참석했는데 예배가 좀 길어졌던지 12시가 되자 신사참배 하라는 사이렌이 울렸다.
  그러자 단상에 있는 목사부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성도가 동방요배를 하는 것이었다.     최 목사님이 그대로 가만 있자 뒤에서 지키고 있던 일본 순사들이 대뜸 붙잡아다가 당신 어디서 왔어 하고 물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중국인 신분증을 보이자, 한국에 왔으면 한국 법을 지켜야 할 것 아닌가 하고 내 보내주었다 한다.
  이 무렵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앙인은 대부분 순교를 당하거나 옥에 들어가 있었고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라도  신사참배를 병행하느라 영적으로 무딘 상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뿌리가 깊지 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린다고 했다. 누가 과연 이 땅의 뿌리였을까. 하지만 해방 후 진리를 수호하던 출옥 성도들에 비해 숫자가 월등이 많았던 신사참배자들은 자신들이 회개했다는 미명으로 다시 한국 교계를 좌우하게 된 일은 아이러니한 일이라 생각된다. 물론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기회주의자들도 적지 않았을 듯-
  결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라 해서 진리가 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다.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난과 순교까지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후일 선교지에서 이처럼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최 목사님 같은 분들이 이 땅의 밑거름이 되었기에 우리 나라와 교회가 이만큼 발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이와 반대로 이기적이고 거짓되게 살아간 가인의 후예 또한 이어져 나가 자신의 명예와 사욕에 빠지는 자들 또한 생겨난 것이 아닐까.
  진정한 회개와 반성이 없을 통해 뿌리가 변모하기 전에는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려울 듯-
  한국 땅이 아직 복음을 잘 접하지 못하고 있을  무렵 이런 분들의 수고로 우상의 터가 개간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권에 매이거나 자기 교회 위주의 이기적인 태도로 지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오늘의 현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최 목사님은 은퇴하시기까지 네 교회를 세웠다 한다. 한 교회를 세워놓고 이를 근거로 다소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에 교회가 너무 없는 현실이 안타까워 60세에도 교회개척에 나섰다는 것이다. 최 전도사는 위로 누나들이 있고 자신은 막내라 했다.
  최 목사님께서 은퇴를 하시는 날 자식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너희들에게 아무 유산도 못 남겨주어  미안하다. 모두 잘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제 난 목사를 그만 두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집사가 된 것이다.”
  그분의 소박한 모습을 대변하는 말씀이라 생각되었다.  최 목사님은 은퇴 후 약간의 남은 것을 정리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논밭을 조금 구해 농사를 짓고 계셨다. 동네에서는 최 목사님을 가리켜 집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목사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마 교인이 아닌 분 가운데 집사님으로 들어서 그런 듯-

  마침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신 탓에 이따금 최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최 목사님은 언제나 힘이 넘쳐보였다. 하루는 최 목사님께  다른 질문을 하나 했다.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독립 운동을 하셨으니 국가유공자라도 되셔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당시 우리 독립군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정규군이었다. 정규군이 유공자가 되는 것을 보았나. 혹 다친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이나 혜택을 입으면 되지.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를 내세워 나라에 자꾸 부담을 주는 것은 좋지 않아. 스스로 살아가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진정한 애국자요 신앙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더 계셨으면 가끔 인사를 드렸을텐데 오래 전에 미국에 있는 따님 집으로 가셔서 뵙기 어렵게 되었다(후배도 미국으로 이민가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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