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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입대하기로 한 해 봄에 어느 중학생 집에 가정교사로 입주했다. 처음으로 경험삼아 다른 집에 입주해 본 것이었다.
  하루는 자정이 다가올  무렵 누군가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가는 기척이 들리지 않아  내가 나가서 문을 열었더니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전에 있던 가정교사인데 통금 시간이 다 되어 학교 기숙사에 못 가게 되었다며 하룻밤 자고 갈 수 없겠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묵고 있던 방으로 안내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앙인으로 명문대인 S대 사대를 다닌다고 했다. 사실 이곳은 지내는데 많이 불편하고 대우도 썩 안 좋은 편이었다. 그 학생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이때 잠시 가정교사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후일 청소년 사역할 때와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주님께서 만남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그는 본래 S대 법대로 가려다가 고교 시절 앓은 적이 있어 1년 휴학하느라 사대로 진학했는데 고시가 목표였던 만큼 이를 후회하고 있었다. 워낙 재원이라  학업을 중단하고 몇 개월 다시 입시 준비를 하더니 S대 법대에 무난히 합격하여 본격적인 고시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이따금 노점을 하며 수고하시는 친구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친구 어머니는 신앙이 아주 깊은 분으로 자녀들 모두 공부를 잘 했다(두 아들 모두 S대에 다니고 있었다).
  법대 4학년 때 친구는 사시를 패스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본래 검사가 되기 원했지만 5공 때라 자칫하다간 신앙인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과제가 주어질 것이 우려된다며 바로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친구는 영어가 아주 뛰어났던 탓에 국제 변호사 업무에 종사하다가 나중에 호주로 가서 그곳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 오랫동안 거주했다. 우리가 러시아 선교사로 갈 무렵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로 있으면서 12년째 후원을 해 오고 있다. 사역과 아울러 목회자인 우리 가정을 돕기 위해 헌신인 해 온만큼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보답하고 있다).

  성결교신학교 3년 때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비교적 몸이 약했던 편이라 다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첫 겨울이 다가오면서 더욱 무리가 왔다. 
  어느 날 구보 중에 목으로 피가 조금 올라오기에  공부할 때  생겼던 이상이  생각나서 군 병원으로 가서 진단을 받았더니 입원을 하라고 했다. 얼마후 괜찮다는 판정이 났다.군 병원교회에서 예배 반주하느라 알게 된 간호장교들이 다른 데 아픈데 있냐고 묻기에 코 상태가 안 좋은 것 같다고 말하자 ‘건강이 약한 편인데 다시 부대로 돌아가면 지내기 힘들지 모른다며 이비인후과 병동으로 옮겨 치료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만들어 주었다. 후송병원을 거쳐 통합병원까지 갔다. 가는 곳마다 교회를 돕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교제를 가졌다.
  군 병원에서 만난 하사와 친분을 갖게 되었다. 자신은 안양 출신이라 했다. 나를 보고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짜 신학 수업을 하다가 왔냐” 며 여러 차례 물었다. 
  “그렇다. 바로 안양에 있는 성결교신학교(성결신대)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 왔다”고 하자, “대개 신학을 한 사람은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데 너무 평범해 보여 믿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 하사 부친은 장로님이셨는데 땅이 많아 안양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휴가차 나갔다가 막 전역한 하사 집을 방문했더니 그 사이 결혼해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집 뒷산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자신이 서 있는 곳도 자기들 거라고 말하면서 자못 심각하게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자기에게 여동생이 있는데 나와 서로 결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집안에 땅이 많으니 살집으로 2층 정도지어 주고 가게도 하나 내어 동생더러 내가 신학 수업하는 동안  뒷바라지를 하도록 하겠다. 그러면 힘들지 않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지 않겠냐” 고 말했다.
  그래서 “내겐 과분한 것 같다. 사실 난 결혼에 대해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며 거절했다. 이 친구는 그 후 신학을 시작해 나보다 먼저 목사가 되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군에서 한동안 군종사병으로 있으면서 군인교회를 맡아 목회하기도 했다. 신입 사병들의 신상 기록부를 살피던 중에 종교 난에 ‘기독교’ 란 말보다 아예 ‘장로교’ 라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이미 자신을 장로교 신자라 지칭하는 신자들은 타 교단 교회 출석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장로교 신학 과정이 다소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마침내 군을 전역하자 학부 때 선배와 함께 수업하던 분 가운데 장로교로 옮긴 분들이 더러 있었다. 또 이웃에 있는 동생이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께서 지금 사당동에 새로이 좋은 장로교 신학교가 생겼으니 이리 옮겨 신학수업을 받고 졸업하는 게 좋을 거라며 권유했다.
  함께 수업을 받던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중도에 바꾸는 것이 사실 썩 내키지 않았다. 지난 3년 간 성결교신학교를 통해 여러 가지 학문을 배우고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던 것이다. 겸허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분들 또한 많았다.
 
  ‘무슨 불상사가 주위에 생긴 모양이다. 누군가 측근자 중 안 좋은 일이 생겼나 보다’  
  어느 날 불현듯이 슬픔이 몰려 왔다. 친구 집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나도 모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마 나의 영이 슬픔을 노래하자 그 기운이 온 몸을 감싸게 된 듯-.
  가까이에 있는 셋째 형 집을 들리자 막내 동생이 고향에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돌아  오던 중에 열차에서 추락해 죽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분신처럼 업고 다니던 동생이 아닌가. 그 동안 제대로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만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먼저 평소 자주 가던 등대교회 기도실로 가서 오랫동안 기도했다. 
 ‘이 땅에 남은 자로서 얼마나 할 일이 많은가. 대신 모든 이웃을 사랑해야지.’

  신학교 시절 대부분 개척교회에서 무급으로 봉사하고 대신 학생들에게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등 과외지도를 통해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따라서 주위 신학생들과 교제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시일이 많이 지난 후에는 잘 몰라보는 사람도 있다. 학부를 졸업할 무렵 마지막 등록금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외출했다가 들어왔더니 아버지가 집을 팔기 위해 계약했다는 말에 놀랐다. 얼마후 지하철도 근처에 생기고 아파트를 짓는다는 말도 있는데 복덕방 주인이 좀 있으면 이 돈도 못 건지게 된다며 유혹해 그만 아주 싼 값에 집을 계약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집을 사기로 한 사람 집에 가 보았더니 한때 큰형과도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부인은 집을 사게 된 것이 너무 좋았는지 아예 짐까지 싸 놓고 있었다. 계약을 파기하려다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양보하기로 했다. 정말 어이없는 결과였지만 이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우리는 또다시 집이 없이 이리 저리 옮겨 다녀야 했다.

  학부에 마지막 등록금을 냈지만 얼마 안 있어 신학교가 분열 양상을 보이더니 자꾸 혼선에 빠져 학업에 부담이 컸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왜 자꾸 서로 부딪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시시각각 환경이 바뀌고 여러 가지 혼돈이 와서  잠시 신학 수업을 잠시 중단하고 수도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강원도에 있는 예수원이 좋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토레이 신부님 안식년이라며 이해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다시 학업에 정진하기로 했다. 함께 수업을 하던 분이 장국원 박사님이란 분이 독일에서 막 귀국하셨는데 성경원어를 비롯해 언어에 능하신 만큼내게 유익할 것이라 알려주었다.
  그래서 장국원 박사님을 뵙게 되자 인격과 학문의 세계에 존경이 저절로 갔다. 그분을 통해 평소 관심이 많았던 성경 원어를 비롯하여 여러 학문을 배울 기회가 있어 위로가 되었다. 또 신사훈 박사님을 통해 여러 학문과 원어 문법을 기초부터 다시 정리할 수 있었다.

  장국원 박사님께서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직접 제자들을 양성하던 연구소에서 몇몇 학생들과 2년 간 성경 원어를 수업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때 함께 수업을 받던 분 가운데 미국이나 독일로 유학 갔다 온 후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중이다. 또 국내에서 학문을 익혀 교수를 하거나 목회자의 길을 택해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원어 수업을 받던 중 만나게 된 신 목사님은 뛰어난 학식과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후일 선교지에서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주님께서 만남을 주신 것이다.원어 수업이 계기가 되어 나중에 여러 소규모 신학교에서 강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 온 집이 사라지자 세를 얻느라 여기 저기 옮겨 다니게 되었다.  가난한 자, 나보다 약해 보이거나 어려움을 당한 자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부딪힐 틈도 없이 미리 나 자신이 물러서다 보니 그만 살던 집마저 내주고 이렇듯 유리하게 된 것이다(얼마 후 우리가 살던 집은 재건축을 하느라 전날에 판 값에 비해 엄청나게  올랐다고 했다. 가난을 자초하며 살아온 탓에 육십을 목전에 둔 지금까지 자가용을 소유해 본 적이 없다. 선교지에서는 현지인 목사님이 멀리 선교여행을 갈 때마다 우리를 실으러 왔다).

군을 전역한 수년 후 어느 날 동생이 어느 날 동생이 내게 불쑥 말했다.  “형, 너무 기분이 안 좋아. 정말 살아가기 힘들어. 대학에 못 갔다고 날 무시하다니- ”
  동생은 내가 군에 가 있는 사이에 대학에 합격하고도 그만 진학을 못하고 말았다. 그 또한 군을 전역한 후 주로 형들 일을 거들며 지냈는데 어릴 때 자신의 실력과 비교도 안 되던 애들이 이제 와서 자기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공부가 필요하면 그냥 해 보렴.” 하자 “그 많은 학원비를 어떻게 감당하지.” 하기에, “괜찮아 실력이 안 되면 시험지에 그리기라도 해. 하나의 과정을 밝아야 다음이 열리지”  하고 충고 했다. 그래서 예비고사 원서를 접수해 놓고 공부할 여유도 없이 건축 일을 하는 형과 함께 지방으로 가서 공사장 인부로 있다가 시험 전날에야 다시 내게로 왔다.

  “형, 내일이 시험이라 오긴 왔는데 갈 마음이 없어. 공부를 하나도 안 했으니-”  “아냐, 괜찮아. 내말대로 아무렇게나 그리고라도 와야 해. 갔다 오려무나” 했다. 예전 같으면 어느 정도 성적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없어진 것 같았다.
  시험 결과를 가지고 서울 주변에 있는 전문대학을 가려고 해도  모두 성적이 모자랐다. 마침 시험을 보러 간 전문대학 중 하나가 지방에 있는 계열 대학에서 미달이 생겼다며 원서를 가지고 왔다. “잘됐다. 일단 문을 넘어서야 하니 그곳에라도 지원하라” 고 권했다. 

  모든 환경이 안 좋았지만 동생은 지방에 자치하면서 전문대를 다니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어차피 세를 살게 된 만큼 집을 옮기면서 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다.
  동생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주위 친구들이 간간히 도와주기도 했지만 지내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공부를 잘 했던 만큼 성적은 단연 수위였다.
  학보 편집장을 맡기도 하고 전체 학생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 그대로 있었으면 수석 졸업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전문대 가운데 결원이 생기는 곳이 눈에 띄었다. 입학 당시 같으면 쳐다보기도 힘든 곳이었지만 지금 성적으로 편입이 가능해 보였다.
  동생이 망설이고 있기에, “뱀 대가리 보다 용 꼬리가 되라 했다. 서울로 편입 하렴.”하고 말했다. 그래서 K대 병설 전문대를 편입해 무사히 졸업하게 되었다. 이어 전공과 관계된 면허증도 따고 취업도 하게 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근무하게 된 직장에서 만난 자매와 결혼해 딸 둘을 둔 가장이 되었다. 
  평소 국어를 잘한 탓에 통신대 국문과에 편입을 권하자 이 또한 졸업하게 되었다. 그 옛날 불과 열 두 살의 나이로 단지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겠다며 리어카에 실은 채 서울로 향했던 동생이 아닌가. 이제 대학교까지 졸업하게 되어 누구보다 감격스러웠다. 
  동생은 다시 노력을 기해 다소 분야가 다른 1급 기사 자격을 두 개나 따낸 끝에 주로 건축 분야 관리자로 일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연세가 높으신 부친을 모시고 있다.  그가 형의 수고를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동생을 돌보는 것은 나의 의무라 생각되었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모두 감사한 일뿐입니다. K변호사님을 비롯해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2012년 추수감사절을 맞아 천사홈 방문자들과 함께 주님께 감사와 찬양 드립니다. 할렐루야!
<다음부터는 주제를 바꾸어 셀프스토리(주님과 동행하는 삶, 선교지 이야기 등) 기록을 계속하겠습니다.>

<사진설명>수년전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릴 때 모습- 기은이가 기타치고 기성이는 바이올린으로 찬양 반주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모임이지만 중국 조선족, 한족, 한국인, 그리고 이날 이반 목사님 부부까지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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