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를 넘어(7) - 주님의 부르심과 순종

by 이재섭 posted Nov 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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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무 살이 될  무렵,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보다 확실히 알고 싶었다.  
 “주님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을 더 잘 알고 싶습니다. 아직 내 의지로 주님을 믿고 있사오니  주님을 잘 더 알게 해 주시고 친히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봉천동에 대형 천막을 치고 부흥회를 하기에 수일 동안 그곳에서 침식을 하며 참석했다.  
  하루는 야산에서 기도하다가 무전 치는 소리를 듣고 무언가 이상해서 신고하러 산을 내려 왔다가 그만 지나가던 방범대원들에게 통금 위반 혐의로 붙잡히기도 했다.
  마침 다니던 교회에 밤마다 기도하고 계신 집사님들이 몇 분 있었다. 이분들을 통해 관악산 건너 편 야산에 있는 등대교회 기도실을 알게 되어 자주 찾아갔다.

  아카시아  꽃 냄새가 온 산을 메우고 있던 어느 봄날, 친구와 집사님 그리고 권사님이 1평 남짓 조그만 이 기도실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주님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기도를 시작한 지 약 두 시간 지나자 갑자기 눈앞에 번개가 번쩍 비취는 것은 같이 느껴졌다. 순간 그토록 막힌 것처럼 느껴졌던 하나님의 세계가 열렸다. 새날을 맞은 것이다.
  순간 천국 기운에 싸이는 것 같았다. 생각지 않았던 은사가 온 몸을 휘몰아쳤다.
  드디어 주님과의 만남이 확실히 이루어진 것이다. 할렐루야.
  “너는 내가 택한 나의 종이다. 내가 너를 지금까지 지키고 이끌어 왔다.
  나의 빛을 이 어두운 땅에 드러내거라. 내가 너와 언제나 함께 하겠다.”
  기도회를 주관하시던 집사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이분은 내게 신앙의 어머니 같은 분이시다. 후일 인사를 가자 지금도 본래 있던 교회에 계속 나가시고 있었다.

  산상기도회가 있었던 다음 주일 주일학교 예배시간에 찾아갔다. 그동안 주일학교 교사로 오라고 몇 차례 부탁해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며 미루어 왔었는데 이제 내발로 찾아간 것이었다. 부장 장로님께서 내가 온 것을 보고 바로 교사 겸 부장 대리를 맡기셨다. 이제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때부터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독교 교육에 관한 책도 구할 수 있는 대로 빌려다 읽었다.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자체가 기쁨이었다. 교회에서 매일 철야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 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이 말씀이 내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어떤 은사보다 주님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 집사님이 장차 주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기도해 준 내용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많은 수고들은 결국 주님께서 종을 삼기 위함이었을까.

  가을이 되자 교육 전도사님이 내게 신학을 해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본래 나는 자선사업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그래, 신학이 좋겠다.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역시 뜻 깊은 일’ 이라 생각되었다. 이는 물론 주님의 부르심과 응답 즉 소명이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을 보다 확실히 안 후에 받겠다며 그 동안 미루어 왔던 세례도 서둘러 받았다.

  1974년 교회 전도사님이 졸업반으로 있었던 성결교신학교(현 안양성결신대)를 입학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연단을 많이 받아서인지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학교 교정을 울려 퍼지는 찬송가 소리, 교수님들의 강의가 새롭게 나를 사로 잡았다.그 동안 비교적 일찍이 사회를 경험하고도 주초를 멀리할 만큼 훈련된 터였다.
 
 1학년 봄 야외예배를 갔다가 그만 비가 왔다. 보물찾기를 하려던 것을 대의원이 아이디어를 내어 그냥 추첨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내겐 주어진 쪽지를 펴보니 ‘예수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바로 그날의 1등을 의미했다. 상으로 커다란 예수님 얼굴이 들어있는 액자를 받았다.
  집에다 걸어 놓으니 비록 하나의 그림이지만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자야, 난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었단다’ 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목회자로 사역보다 선교사가 더욱 마음이 끌렸다. 또 미지의 땅에 복음을 심기 위해서는 자신이 충실한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나 자신이 다시 현지 지도자 양성을 위해 가르쳐야 할지 모른다는 부담을 안고 공부해 나갔다.
  ‘분명히 어딘가 복음이 잘 닿지 않은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할지 모른다.’

  “주님, 먼저 한 알의 잘 여문 밀알이 되게 하소서. 그래서  혹 자갈 밭에 심기더라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신학을 수업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자주 나오던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중국이나 미지의 나라 선교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복음의 수원지가 되고 싶었다.
  ‘만일 그곳에 단 한 사람의 신자도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날 이런 부담이 엄습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하다면 기독교에 관계된 것은 모두 조금씩이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신학 수업을 받으면서도 나중에 이 과목들을 다시 미지의 땅에 있는 영혼들에게 가르쳐야 될지 모른다는 부담이 왔다.
  도서관을 비롯해서 책을 구할 수 있는 대로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며 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을 대비했다. 오랫동안 혼자 공부해 온 습관이 있어서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내게 직접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심취하기도 했다. 
  학교를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성경종합고사’가 있었다. 이 시험은 신약 100문제와 구약 100문제를 내어 60분 안에 풀어야 하는데 졸업 전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1학년이면서도 시험에 참여해 제일 먼저 답안지를 냈음에도 합격이 됐다. 
  지난 한 해 동안 성경을 열심히 읽은 탓인 듯-  어떤 신학 과목보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길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2학기가 다가오자 도저히 등록금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머니, 제가 좀 무리했나 봐요. 아무래도 학교를 그만 두어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못내 아쉬우신 듯 안타까워 했다. 이때 마침 어머니는 반지 계를 통해 석 돈 짜리 금반지가 하나 있었다. 아마 처음 이런 반지를 끼게 되셨을 것이다.
  빨래할 때면 따로 빼 놓을 정도로 아끼시던 것이다. 잠시 후 어머니가 돈을 구해와 내게 주시면서 말했다.  “이 돈으로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겠니” 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돈을 건네주시는 손에 금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새 나가서 팔고 오신 것 같았다.‘어머니 고마워요. 나중에 반지는 꼭 다시 사 드릴께요.’ 하고 속으로 말했다.

  학교에 분납으로 등록을 하고 2학기를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54세를 일기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 많은 고생을 하시고 반지도 아직 채 갚아드리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고향 산에 묻혔다. 어려서 계모 손에 자라나느라 갖은 구박을 받으시고 시집 또한 가난한 집으로 와 한 생을 어렵게 보냈지만 참으로 자상하신 분이었다.
  그래도 가문에도 아직 없는 목사 아들이 태어난 것이 길이 남길 바랐다. 
  나는 이때 기도하며 다짐했다.  이웃을 사랑하는 종이 될 것을-  
  또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을 주님께 인도하겠노라고 -

  1975년 신학교 졸업반 선배 분이 개척한 남부성결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오라고 했다. 그래서 주일학교 지도교사로  있던 정든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로 나가 봉사하게 되었다. 집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거리인 방배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회로 격리되었던 광야에서 어린 동생을 초등학교에 보내려고 부모를 졸라 서울로 가자고 한 지 10년 만에 부분적인 사역이지만 교회 일군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조그만 가정 집에서 시작된 이 교회는 나중에 비교적 큰 규모의 교회가 되었다. 마침 이 교회에서 구입한 올겐으로 조금씩  반주 연습을 하면서 마땅히 다룰 사람이 없어 단음으로라도 반주를 시작했다. 이 또한 선교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종일토록 교회 일을 하다가 밤에 집으로 걸어올 때면 허리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1년 이상 계속된 교회 봉사가 신학 수업과 아울러 사역의 기초를 놓게 했다.

  전에 출석하던 교회 학생회 부회장은 중학교 3학년 학생으로 착한 편이었는데 자녀가 아주 많은 집 소녀였다. 이 집에서는 형편상 여자는 무조건 중학교만 졸업하면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던 탓에 진학이 안 되는 것을 알고 아예 공부조차 안 하려 들었다.나는 학생을 많이 가르친 탓에 얼굴만 보아도 학습 상태를 대강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얘, 왜 너 공부 안 하니” 하고 묻자, “하면 뭘 해요. 고등학교도 못갈텐데-”  “만일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해도 성적이 안 되어 못 가면 어쩔래.” 하고 묻자, “아마,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제 형편을 너무 잘 알아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단다. 내가 가르쳐 줄테니 혹 집에서 반대할 것 같으면 몰래 배우렴. 앞으로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하고 말했다. 진학을 않기로 한 여학생을 가르치려 들다 보면 주위로부터 오해를 살 수도 있었던 탓에 몰래 가르쳐야 했다.

  이 학생은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자기는 진학을 안하는 만큼 보충 수업을 안 받겠다고 말하고 대신 그 시간 만큼 내가 가르치는 과외 그룹에 합류했다. 역시 그 동안 공부를 포기해 온  탓인지 기초조차 거의 잊은 상태였다.  내가 1학년 과정부터 수업을 돌봐주자 빨리 회복되어 갔다. 몇 달이 지나는 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나는 군에 입대하기로 되어 있었다. 부득이 학생들과도 헤어져야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돌보신단다. 꼭 공부하고 있으렴. 약속하지.” 하고 말하자, “전 선생님 처럼 독학으로 공부할 자신은 없어요. 그렇지만 열심히 노력할께요.”
  라고 말하는 동안 소녀의 꿈이라 할 수 있는 고등학교에 못 가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임할 것을 믿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기도해 주었다.

  군 생활을 막 시작할  무렵 뜻밖의 편지가 왔다. 바로 얼마 전 가르치던 여학생이었다. “선생님, 전 지금 고등학교에 잘 다니고 있어요. 고모가 어느 날 우리 집에 왔다가 제가 진학을 못하는 걸 보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사촌동생을 돌보며 공부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그곳 학교로 가서 입학 시험을 쳤더니 제가 2등을 했지 뭐예요. 고모님도 아주 좋아하셨어요. 이런 애를 그냥 썩힐 뻔 했다면서-.  모두 선생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주산 시간이라 옆에는 콩 볶듯이 주판 알 소리가 나고 있지만 나는 이 시간 선생님께 위문편지를 쓰기로 했답니다.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이 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기 직접에 등록금을 못 내어 애를 태우고 있었는데 마침 동생이 학생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모금 운동을 펴 학교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고 한다(나중에 여학생 부모가 그 돈을 낸 학생들에게 전해 주라며 모두 돌려주었다고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는 말씀처럼 사랑이 오가는 아름다운 일들이라 생각된다.

<사진설명>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시베리아 원주민 마을을 수없이 드나들던 동역자이자 친구인 미하일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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