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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디선가 두부 종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마치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베드로야, 빨리 오너라. 내가 너를 이곳으로 인도했단다.’  예수님이 부르고 계신 듯-
윗동네에 생긴 천막교회에서 글을 가르쳐 준다고 하기에 이웃에 사는 친구에게 우리 저기 가보자며 함께 달려갔다.  바로 “남성성경구락부”란 곳으로 남성 교회 안에 있었다.
  평소 교회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으로 생각했다. 남루한 차림으로 찾아갔더니 얼굴이 환한 분들이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주님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고난은 바로 교회로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후일 들으니 ‘남성성경구락부’는 남대문교회 배봉오 집사님을 비롯해 몇몇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가난한 사당동 철거민 주민들을 위해 세운 것이라고 했다.
  특히 권세율 박사님이 창시한 성경구락부는 반드시 교회를 모체로 설치할 수 있다는 말에 따라 배 선생님은 먼저 남성교회 설립을 위해 앞장섰다고 들었다.  자연히 남대문 교회 청년들이 많이 합세했다. 나중에는 이 지역 성도 교적을 옮기도록 했다는 말도 들렸다.
  꿈에도 그리던 동생의 학교 입학은 비록 천막학교였지만 소원을 성취하게 된 셈이다.
 배 선생님은 나또한 학교에 다니라고 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학생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동생은 입학을 시키고 나 또한 이 학교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성경구락부는 아침마다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울 수 있어 어린 영혼을 일깨웠다. 특히 찬송가는 대개 어른 찬송을 불렀다. 비록 정규 선생님은 한 분도 없는 대신 할아버지 선생님을 비롯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구성되어 우리를 가르쳤다.
  금방 학생들이 400여명을 넘어섰다.  자연히 주일엔 교회 나오는 학생들도 많았다.
  천막학교라 바람이 불면 학교 건물(?)이 그만 넘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힘이 센 아이들이 천막 기둥을 잡고 수업을 하기도 하고 무너진 교실을 다시 세우기도 했다.
주일학교 예배 때면 아이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분반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따라 산으로 들로 흩어지곤 했다.
  나중에 남성교회 건물을 짓기로 결정하자 아이들이 돌맹이를 날라 기초를 판 곳이 금방  메워졌다. 어느 주일 예배 시간에는 교회 벽만 완성되고 지붕이 없는데 그만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예배를 드리는 동안 영혼의 안식처가 주는 의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어린 영혼을 받으시기 원하셨던 것 같다.

  처음에는 여 전도사님이 맡으셨는데 얼굴에 점이 있어 우리끼리 ‘점박이 전도사님’이로 불렀다. 얼마 후 오원식 목사님께서 이 교회 담임을 맡으시면서 영적으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곳은 나의 영혼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배 선생님 댁을 들릴 때면 너무 감동을 받을 때가 많았다. 이제 갓 결혼해 불과 돌 정도된 딸을 두시고 있었음에도 아무 대가 없이 학교 일만 하시느라 사모님이 광주리  장사를 하시고 계신 것이었다.  그나마 얼마를 벌어오면 학교 애들 시험 봐야 한다며 배 선생님이 시험지 값으로 챙겨가곤 하시는 것이었다. 사모님 또한 아무런 불만이 없으신 듯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천사 같은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식사도 대개 죽을 끓여 드셨는데 날더러 같이 먹자고 해서 가끔 같이 식사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나중에 고기도 먹을 수 있다면서 구김 없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을 어려서부터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때 이러한 천막학교 선생님들을 대하면서 굳게 다짐한 것이 있다.
‘혹 여기 모인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두 선생님의 은혜를 잊을지라도 나 혼자 400여명 이상의 불우한 아이들을 돌보므로 그 빚을 갚겠노라고.......’
배 선생님은 기도에 대해 자주 훈련을 시키셨는데 감사, 회개, 자복, 간구 나아가 도고까지 할 것을 가르치면서 기도할 땐 벌이 와서 쏘아도 가만히 기도만 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찬송가도 대부분 어른 찬송을 불렀다.
실제로 하루는 새벽기도에 갔다가 기도회가 끝난 지 오래 됐음에도 배 선생님이 계속 기도를 하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본래 코가 좀 크신 편이기도 했지만 그날따라 콧물이 계속 쏟아져 내린 듯 마룻바닥이 흥건히 젖어들 정도였다. 그래서 종이를 구해다가 바닥에 깔아드리면서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 다시금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이따금 성경구락부 학생들을 위해 학용품을 보내주기도 하고, 권세열 박사님 일행인 듯 학교를 찾아오기도 했다.  이때 즉석  카메라라는 것을 처음 보았다.
  우리를 모아 놓고 찍는데 금방 현상되어 나오는 것이 신기했다.
  ‘KA파견단’ 또는 ‘미국 친구들이 보내는 선물’을 받으면서 새삼스럽게 먼 나라에서 우리를 돕는 데 대해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더욱 이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어느 주일 성경암송대회가 있었다. 나는 사랑장인 고전 13장을 외우기로 했다. 교회에서 마침 필름이 떨어졌다며 내가 심부름으로 멀리 흑석동까지 필름을 사러 보냈다.
  그래서 맨 마지막으로 순서를 바꾸고 암송을 하자 1등으로 뽑혔다.
  이처럼 천막학교와 교회 모두 눈에 띄게 활동하는 동안 신앙과 몸이 자라나고 있었다.
  성경구락부에서 주일학교 새벽기도 운동을 편 탓에 한 해 동안 빠짐없이 열심히 출석했다  해서 상을 받기도 했다. 어린이 새벽기도회는 매일 6시에 있었다.
 이때 새벽기도 깨우기 운동을 벌여 먼저 일어난 학생이 주변 친구 집을 가서 깨워 데리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벽에 이웃에 살고 있던 친구 집을 찾아갔다.
한동안 문을 두드려도 대답을 않는 대신 식구들의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무언가 심상치 않아 계속 두드리자 누군가 힘겹게 일어나다가 바로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을 밀치고 들어가 보니 모두 연탄가스에 질식되어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즉시 문을 다 열어 놓고 이웃 사람들에게 알리자 모두 밖으로 꺼내어 땅에 엎드려 놓았습니다. 김칫국물을 따라서 마시게 하는 등 간호하는 동안 하나, 둘 깨어나는 것이었다.
새벽기도 깨우기 운동이 한 식구를 죽음으로부터 살려냈던 것이다.

  어느 날 천막학교 운동회가 있었다. 기마전을 하는 동안 대장기의 축을 이루고 있던 나는 팔을 잡고 있는 친구가 계속 붙들고 있는 바람에 그만 왼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천막학교라 아무도 치료비를 댈 형편이 안 되었다. 한 선생님이 나를 업고 집에 데리고 가려 하기에, “엄마가 걱정해요. 집으로 안 갈래요.” 하고 말했지만 그대로 집에 데려다 놓 것이 전부였다. 정형외과에 갈 형편이 안 되어 아마추어 접골하는 사람에게 대강 치료를 받고 그냥 두었더니 나중에는 팔이 파랗게 썩어 들어가고 고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 어디서 돈을 구해 뒤늦게 노량진에 있는 접골원에 가서 뼈를 맞추자 고름이 한동안 흘러 내렸다.  의사 선생님이 몇 차례 더 와야 한다고 말했지만 더 이상 갈 형편이 못되었다.  붕대로 대충 감아 놓고 낫기를 기다렸지만  점차 온 몸이 아파오더니 끝내 거동조차 못하게 되었다.  끝내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다친 팔은 이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가족들 가운데 ‘쟤 저러다가 팔 병신 되는 게 아니냐’ 며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천막학교 생활을 원망하지 않았다. 1년가량 불편한 삶을 살아오던 중 어느 날 밤 그 동안 미동도 안 하던 왼쪽 손가락 하나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엄마, 손가락이 하나 움직었어요.” 하고 소리치자 어머니가 불을 켜고 살펴보시더니,
  “정말이구나. 아마 나을 모양이다.”며 기뻐했다.  나는 몇 차례 더 움직여 보였다.
  시일이 흐르자 점차 팔이 좋아져 거의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주님이 도우신 듯-.
  그래서 성경구락부를 다시 찾아가자 배 선생님이 잘 왔다며 빨리 학교를 다시 나오라는 것이었다.  결국 공부가 한 해 늦어졌지만 다시 열심히 수업에 임했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인근에 정규 초등학교가 생겨나 교회 천막학교에 다니던 학생들도 실력에 따라 정규 학교로 편입할 수 있다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또 이를 계기로 그 동안 어려운 땅을 지켜오던 천막학교 또한 폐교된다는 것이다.
  그 사이 동생은 멀리 신중 초등학교로 다니게 한 터였다. 흑석동 은로초등학교와 양재동 신중초등학교 그리고 더 먼 곳에 있던 정규학교를 오가던 학생들과 교회 천막학교 두 곳 학생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편입을 위한 실력 평가 겸 반 편성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정규 학교와 비정규 학교를 동시에 평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편입 시험을 치는 날 커다란 칠판 앞에는 진짜 선생님(천막학교 아이들은 정규학교  선생님을 이렇게 불렀다)이 서 계셨다.  초겨울에 치러진 시험이라 나는 당시 최고 학년인 5학년에 지원했다. 담임이셨던 배 집사님이 시험장까지 따라 오셔서 내게 당부하셨다.
 “너밖에 믿을 애가 없다. 우리 교회 천막학교 실력이 어떤가 보여 주라.”
  그 결과 내가 전체 1등으로 밝혀졌고 인근 은로에서 임원을 하고 공부도 잘했다는 아이가 2등을 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비정규 천막학교의 승리였다.
  처음에는 200여명의 5학년 전체 학생이 한 교실에 모여 수업을 받았다. 
  책상과 걸상이 모자라 마루에 앉아 수업을 받는 학생들도 많았다. 반 편성 시험 성적 결과 때문에 쉽게 내 얼굴이 널리 알려져서인지 통합반 반장으로 뽑혔다. 
  얼마 후 반이 셋으로 나누어졌고 3반 반장 겸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불과 수년 전 학교조차 못 다니던 내가 아니었던가. 동생도 이 학교로 전학이 되어 같이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전교 회장 선거가 있었다. 4학년 이상 학생회 임원들이 거의 모두 참석했는데 천막학교 출신은 나 혼자였다. 주위에서 회장 후보의 한 사람으로 나를 선발해 주었다.
  마침내 내게도 한 표가 주어졌고 이 순간 나는 누구를 찍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빠졌다.

어린 마음이지만 내가 나를 찍는 것은 비양심적인 태도라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가장 강력한 경쟁자를 찍는 것은 자칫하면 내가 탈락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순간 회장 가망이 없는 후보를 찍어 기권표 처럼 만들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역시 비겁한 태도로 보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가장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쟁자에게 우정의 한 표를 선사했다.
  그 결과 14:15 즉 한 표 차이로 내가 지고 말았다. 아마 내가 날 찍었다면 오히려 한 표가 앞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는 과연 누구를 찍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후 감독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자 시간상 재 투표를 않고 차점자를 부회장으로 한다.” 고 선언하셨다. 결국 전교부회장이 되었다. 천막학교에서 배운 신앙 훈련은 결국  희생과 사랑이었다.  이때 나는 내 양심을 지켜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동생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소원하던 나는 결국 동생과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더욱이 둘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형이 6학년 학력고사에 전체 1 등을 할 때 동생은 자기 학년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서 상급반에서 영향력 있는 학생의 동생임을 알아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지난 날의 일들이 엊그제 같은데-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주임 교사라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았다. 날 더러 대신 학생들을 좀 가르치고 있으라고 할 때가 많았다. 나는 때때로 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은 내가 어디서 그렇게 많은 한자를 알게 되었는지 놀라는 것이었다. 불과 수년 전 다리 밑 벽에 숯덩이로 한자를 써 가며 익힌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의 인도로 이루어진 것임을 믿는다.

  하지만 가난한 생활은 시일이 지나도 변하기 않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도시락을 싸가 본 기억이 없을 정도였다. 때로는 공책도 연필도 없었다. 그래서 숙제를 해 갈 수도 없었다. 따라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신문 배달을 하기도 하고 여름엔 아이스케키 통을 매고 한강변을 다니기도 했다.  
  사당동에서 신문을 들고 국립묘지를 지나 방배동을 거쳐 양재동(농협)까지 돌리자면 2시간이나 걸렸다. 돌아올 때는 버스 차장에게 신문을 하나 주고 버스로 타고 돌아왔다. 나중에 그 화려하게 변한 강남에 신문지국이 하나 제대로 없는 시절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을 여러모로 돌보는 것이 반장인 나의 직무였다. 이중에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도 많았다. 머리를 빡빡 깎기  때문에 금방 구별이 되었다. 누가 머리를 깎냐고 물었더니 아버지(고아원 원장님)가 깎는다고 했다. 어떤 고아를 분단장으로 임명하자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없이 자라는 아이들에게 동정이 갔다. 나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자들에게 유난히 관심을 많이 갔다. 인생관이 점차 싹트기 시작한 것 같다.

<사진설명> 삼손 집사 안수식 때 여러 원주민 마을에서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오른쪽 두번째와 세번째 자매는 브리야트 원주민 모녀로 보한교회에서 왔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 치료하느라 20만원 정도(한달 급료에 해당) 진 빚을 오랫동안 못갚아 마음 고생이 많다는 말을 듣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후원자들을 대신해 이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원주민 마을 사람들은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보한교회 성도는 이 모녀와 다른 자매 성도 한분 모두 셋뿐입니다. 금년 여름에 보한교회를 방문해 예배를 인도하고 겨울 연료용 통나무 한 차 분량 값을 헌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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