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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살 소년이 끄는 리어카는 서울 쪽으로 향했다.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는 것 같았다. 꿈과 희망이 실린 리어카는 비록 느리지만 조금씩 서울 쪽으로 향했다.
  30리 길 떨어진 장호원 가까이 이르자 저녁이 되었다.  일행 중 아직 두 살배기 갓난아기인 막내 동생까지  있었던 만큼 일단 하룻밤을 자기 위해서라도 임시로 살 집을 지어야 밤을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이 일단 만들어지자 부모님은 그 자리에 안주하려 들었다.
  더 이상 서울로 가자고 우길 수도 없어 한동안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서울로 가는 것을 피하려 드는 부모님에겐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맞아, 돈이 없기 때문이다.  돈 한 푼 없이 서울로 가서는 우리 모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자 나또한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과 12살 난 어린 소년의 힘으로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고물을 주워 파는 일을 시작했다.  고물상을 자주 드나드는 동안 고물 시세에도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강변에서 모래를 파 내어 쇠붙이를 찾기도 했다.

  하루는 예수님 십자가를 주웠다. 길이가 약 20cm가 되는 제법 큰 편이었다. 장호원은 아주 오래 된 큰 천주교회가 있고 천주교가 세운 학교도 있다.  아마 천주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사용하던 것 같았다. 벽에 걸어놓고 날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왜 가시관을 쓰셨을까- ’
 ‘누가 이처럼 손에 못을 박았을까- ’
 ‘너무 좋으신 분 같은데 왜 고초를 당하고 있을까-’

  자연히 어린 동생이 혼자 집을 지킬 때가 많아 이따금 지나다가 들려 보곤 했다.  
어느 날 동생이 자꾸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열이 자꾸 오르는데도 병원에 갈 돈이 없었다. 이미 더운 날씨인데도 춥다며 햇볕이 쪼이는 곳으로 나와 이불을 둘러쓰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동생을 지켜보면서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다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형이 가까이 있자 애써 미소를 짓는 동생의 상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이 바보야, 아프면 어떡해. 우리 같이 가난한 집에서 아프면 잘못하단 죽는단 말이야.’
며칠동안 끙끙 앓던 동생은 다행히 병이 가라앉았다. 다시 동생과 자주 놀아 주었다.
주위에서 무슨 신고를 했는지 면사무소 사람들이 나와서 살던 곳에서 떠나라고 했다.
  가난하다 해서 사람들이 너무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장호원 쪽으로 집(?)을 조금 옮겼다.

  ‘그래, 저금을 하자. 그 길 만이 최선책이다.’  
하루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 도장을 몰래 가져다가 장호원 우체국을 찾아가서 아버지 이름으로 저금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매일같이 우체국을 드나드는 동안 자연히 우체국 사람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우체국 직원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저금하러 오는 소년에 대해 흥미가 많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통장에 적힌 이름을 본 듯 “0 0 아” 하고 크게 부르는 것이었다.
“아니 아저씨, 그건 우리 아버지 이름이에요” 하고 대답하자,
“어이쿠 큰 실례를 했군 그래.  미안하다.”
  “그런데 왜 너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지 않았니” 하고 물었다.
“아저씨 도장 만들 돈 있으면 그 돈도 저금해야죠” 하자,
  “그것도 참,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그럼 너 진짜 이름은 뭐냐”
  “베드로라고 해요” 라고 대답했다.
“음 베드로라. 그런데 집은 어디냐?”
  “저기 있는데 말 안 할래요.”
“그래, 그런데 학교는 안 다니는가 보구나”.
  “예”
  “.....”
  어린 나이에 애써 저금하러 드나드는 모습이 대견해 보인 듯 자꾸 물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은 강변에 임시로 지은 판잣집이라 주소조차 모르고, 학교를 다니려 해도 사는 곳이 분명치 않았던 만큼 학교조차 갈 수 없는 형편에 대해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오직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한번 저금한 돈은 절대로 찾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온 동네를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지만 수입에 한계가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아이스케키를 파는 일도 좋은 수입원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무렵 시골 아이들은 거의 돈이 없는 경우가 많아 자연히 장사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고물을 받고 아이스케키를 주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마침 고물 시세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고무신이나 병, 심지어 긴 머리카락을 가져와도 적당히 값을 계산해 아이스케키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수익을 더 많이 올리기 위해서는 장호원 읍내보다 아예 아이스케키를 근처에서 볼 수 조차 없는 아주 시골로 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시외버스에 올라타고 먼 동네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차장 누나들도 나중에 얼굴을 알아보고 선뜻 무임승차를 시켜 주었다. 차비 대신 아이스케키 한 개를 주면 굳이 안 받겠다며 돈을 내고 사먹는 누나도 있었다.

‘너무 힘없이 이대로 살아갈 수만은 없지 않나.’ 나는 이러한 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한다며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일하기로 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요.  이렇게 살아가면 사람들이 우리를 거지로 봐요.”
 “얘는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자기 부모를 거지라고 함부로 부르다니-”
 “우리가 아무리 아니라 해도 남들이 그렇게 보는 데 어떡해요.” 
 “사람이 살아가려면 일을 해야 돼요. 그리고 돈이 있어야 살아가잖아요.” 하고 말했다.
“얘는.... 누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준다던....”
 하고 어머니가 선뜻 동의를 않는 것이었다.
“혹시 지나다니시다가 친절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혹 어디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지 알아요” 하고 말했다.

얼마 후 어머니는 어느 부잣집에서 파출부로 와달라는 말에 자주 가서 집안 일을 거들기로 하셨다. 아버지는 산을 깍아내는 사방공사장에 나가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이따금 편찮을 때가 있고 그나마 집에 돈이 없을 때가 많았다.때론 일이 없어 전혀 수익을 올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일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을 깊이 느꼈다.
  그래서 주로 내가 구해 오는 양식으로 온 식구가 연명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저금하기 위해 나는 그날 벌은 돈으로 약간의 식량을 구해 죽을 끓일 때가 많았다.
  나중에는 쌀가게 주인도 단골손님이 된 소년을 위해 되를 깍지 않고 여유 있게 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사거리 옆에 있는 쌀 가게를 들리자 주인 아저씨가 먼저 반겼다.
“어이쿠 단골손님 오셨네...  오늘은 뭐로 사갈 거지.”
“아저씨 오늘은 쌀로 한 되 주세요.  맨날 좁쌀죽만 먹었더니 입이 까칠까칠 해요.”
 “ 자, 쌀 한 되라.”
 쌀 집 아저씨는 됫박에 수북이 담아 주는 것이었다.
 “아저씨, 장사를 그렇게 하면 뭐가 남아요.” 하자, “얘, 니 한테 남겨서 뭘 하겠니. 자 됐다. 가져 가.” 하시는 것이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대신 많이 파세요.”
(중략)

이 해 여름 긴 장마가 와서 나또한 장사가 잘 안 되었던 탓에 그만 집에 양식이 떨어지고 말았다. 부모님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얼 얻으러 나가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틀째 굶게 되자 어린 동생은 끝내 배고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엄마, 나 배고파.” 평소 먹는 것을 좋아해 별명을 ‘돼지’로 붙인 동생이 배가 고프다고 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저금통장을 만지작거리며 돈을 약간 찾을까 하고 생각했다.
‘안돼, 이것만은......’  일단 한번 결심한 것이 흐트러지게 되면 정작 서울로 가려던 계획 자체가 어려워질 것만 같아 꾹 참고 버텼다.
 ‘미안하다 동생아,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에 가야 한단다.’

   비가 잠깐 개이자 얼른 내 사업장이기도 한 <감미당> 아이스케키 집으로 달려갔다.  “아니, 오늘 같은 날에도 팔러 나갈거니.” 주인  아주머니가 놀라며 물었다.
“서른 개만 주세요.” 하고 조금만 챙겨 이따금 가랑비가 내리는 장호원 거리를 쏘다녔다.     비를 피해 가게 사이를 이곳 저곳 다니는 동안 약간의 수입이 생기자 아이스케키통을 맨 채 찐빵 집으로 갔다.   동생을 위해 뜨거운 찐빵 몇 개를 사기로 한 것이다.  
  “아주머니 100원어치만 주세요.” 따뜻한 진빵을 봉투 째 주자, 동생은 너무도 반가워 싱글벙글하며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찐빵을 들고 좋아는 동생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말했다. “얘, 형도 하나 줘야지. 형도 벌써 오랫동안 밥을 안 먹었다.” 하고 말하자,   동생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찐빵 한 개를 꺼내 내게로 내미는 것이었다.
“응, 형도 하나 먹어”  찐빵을 건네주는 동생의 손에 아이스케키를 하나 들려주었다.  찐빵이 입속에서 녹아내리듯이 감미로운 맛을 내는 동안 다시 거리를 쏘다녔다.
‘조금만 참아라.  동생아, 내가 꼭 널 서울로 데리고 가서 학교에 보내 줄게,’
소년 가장처럼 살아가는 아직 어린 아들이 대견해 보였을까. 어머니 눈에는 나또한 아직 어린 아이였을텐데-

  평소 동생을 위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에 더욱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저금통장은 연일 빨갛게 물들어 새 통장으로 갈아야 할만큼 자리를 메워 나갔다. 하지만 저금을 하는 사실은 누구도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었다.  저금통장은 나의 희망이자 우리 가족의 운명을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추석이 다가오자, 동네에 서커스단이 찾아와서 요란스럽게 광고하고 다녔다.하루는 동생을 데리고 가서 서커스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다. 책에서만 보던 동물들이 많이 와 있었다. 커다란 낙타가 주인을 등에 태우자 갑자기 일어서지 않고 차례차례 단계별로 일어서는 모습이 신기해 보였다. 

  하루는 아이스케키 주인 아주머니가 녹아 붙어 못쓰게 되었다며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이었다. 돈을 절약하느라 평소 잘 안 먹던 것이 생각나서 얼마나 많이 먹었던지 그만 배탈이 나고 말았다. 나중에는 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약을 사 먹자니 돈이 아까왔다. 무슨 일이던지 적당히 해야 하는 것인데 그만 무리했던 것이다. 다행히 얼마 후 증세가 가라앉았다. 무엇이든지 욕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종점에 있던 구두닦기 형들과도 친했다. 형들이 자꾸 나보고 구두 닦는 걸 배우라고 권했다. 내가 계속 싫다고 거절하자, “야, 그것보다 훨씬 수입이 좋다”고 하기에,
 “난, 여자 구두를 닦을 자신이 없어요.” 라고 말했다.형제 중에 여자가 없어서 인지 여자들과는 아예 거리를 두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가을에 접어들자 점점 마음이 조급해져 왔다. 장호원에서 그만 너무 지체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향해 다시 서울로 떠날 것을 졸랐다.
“엄마, 우리 다시 서울로 가요. 이번 추석은 꼭 서울에서 보내고 싶어요.” 하고 말했다.
  겨우내 어머니에게 글을 가르친 탓인지 더욱 내게 사랑을 베푸시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독촉에 할 수 없이 또 길을 떠나기로 하셨다.
“그래 가자꾸나. 어딜 간들 산 입에 거미줄 치겠니.”
“그렇지만 아버지가 그동안 일하신 돈을 빨리 받았으면 좋겠는데.....”
“고맙습니다. 어머니.” 그날부터 시간이 되는 대로 읍사무소로 가서 아버지가 사방공사하신 품삯을 받기 위해 기다렸다.  밀가루가  아직 안 오고 있다며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나중에는 담당아저씨가 내가 자꾸 찾아오는 것이 보기가 안됐던지 새 방안을 제시했다.
 “본래 밀가루로 주기로 되어 있지만 대신 보리쌀로 주면 어떻겠니” 하기에, “그래요, 좋아요.” 하고 리어카를 끌고 가서 보리쌀 자루를 싣고 집으로 가져왔다.

추석 하루 전, 드디어 서울로 출발하기로 했다. 때마침 장날이라 조용하던 시장 터가 온통 사람들로 법석을 떨었다.  보신탕을 하는 주인집으로 우리 식구 모두 인사를 가자 뚱뚱한 주인 아주머니가 무척 서운한 듯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 동안 고생이 많았제.  서울로 가거들랑 부디 잘 살으래이.”
“예, 아주머니 정말 고마왔어요.”
주인  아주머니는 아버지께 보신탕을 한 그릇 드리며 옆에 서있던 내게 물었다.
 “얘, 너도 한 그릇 먹겠니” 하기에 깜짝 놀라 거절했다.  
 “난 개고기 같은 거 안 먹여요” 하고 고개를 흔들자. 
“야, 보신탕이 어떻다고 그러냐. 몸에 좋은 거란다.” 하며 나무랐다.
어머니는 파출부로 일하던 주인집에 인사를 다녀오셨다.

‘드디어 저금을 찾는 거다.’
비장의 결심을 하고 살그머니 도장과 통장을 챙긴 후 어머니께 말했다. “어디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고 집을 나섰다.
우체국으로 달려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우체국으로 뛰어 들어가 소리쳤다.
“아저씨 저금 찾으러 왔어요.”  모든 직원들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저금을 찾는다고- 얼마큼이나?”  담당 아저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전부다요.”   숨이 찬 채 대답하자, “뭐 전부....  어디다 쓰려고.... ”
  담당 아저씨는 무척 놀란 듯 아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이었다.

“예 아저씨, 우리 서울가요. 그래서 저금한 거 모두 찾으러 왔어요.” 우체국 아저씨는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안돼” 하고 거절했다. “아니, 왜 안돼요. 내 돈 내가 찾는데....”.
“그래도 안돼.” “서울간단 말이예요. 이 돈이 꼭 필요해요.”
“야 이놈아, 그동안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건데 그렇게 불쑥 와서 다 찾는단 말이냐,”
 “안돼, 절대 못 내준다.” 담당아저씨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왜요 ,아저씨, 내꺼 잖아요. 아저씨, 서울 갈 때 쓸려구 모은 거란 말예요.”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울어 버렸다.
“그럼 가서 네 엄마 불러와.”

할 수 없이 힘없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울먹였다. “엄마, 우체국에서 저금 한 거 안 준대요.” “아니, 왠 저금을...”.
  어머니는 영문을 모르는 일이라 물었다.
“서울 갈 때 쓸려고 몰래 모아 둔 게 있단 말이예요.  엄마랑 같이 오래요.”
 
  “............”
어머니 역시 말이 없는 듯했다.  열두 살 어린 아들의 기지에 너무 놀라셨나 보다. 어머니와 함께 우체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담당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아, 이 아이 어머니 되십니까.  제발 부탁인데 이 저금만은 찾지 말아 주십시오.” 아저씨는 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선 얘가 이 돈을 어떻게 모은 건 지 아십니까?” 어머니는 할 말이 없으신 듯 계속 듣고만 있었다.
“대신 서울로 가시게 되면 그쪽 우체국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우린 주소도 없이 그냥 길을 떠나는거라......”
 “얘도 아마 이때 쓸려구 저금한 모양인데.......”
“아, 그러세요. 그럼 드려야죠.  저축상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건데 그만 갑자기 와서....”

  우체국 모든 직원이 우체국 마당으로 나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서울가면 꼭 편지해.”  우체국 급사 누나가 손을 쳐들고 흔들며 말했다.
“부디 잘 살아야 해.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담당 아저씨도 눈시울을 붉혔다.
“학교도 다시 가고....”
“예,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누나 잘 있어요.”

돈을 모두 어머니께 드리고 다시 짐이 있는 시장으로 돌아왔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중간에 머물지 않고 서울까지 곧장 가는 거다’.
 동생을 리어카 위에 태우고 손잡이를 힘 있게 붙잡으면서 다짐했다.
 ‘가자. 서울로-’
 코스모스가 길가를 수놓은 가을 길을 가는 동안 간혹 차들이 먼지를 피우며 지나갔다. 아버지와 교대로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오르막을 만나면 남은 식구가 뒤에서 밀었다.     동생은 자기 힘으로 걷다가 다리가 아파오면 다시 리어카 위에 올라탔다. 

  우린 그저 서울 쪽으로만 향했다.  비포장 길이어서인지 흙냄새가 풍겨 났다. 삼십 리 길을 더 가자 이태리란 곳에 다다랐다.  날이 저물어 농업협동조합 창고 추녀 밑에서 밤을 맞기로 했다. 어머니는 흰 천으로 둘러 임시로 잘 곳을 만들고 아기를 내려놓았다.
결국 추석을 그만 길가에서 맞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우리 가족은 얼마후면 꿈에도 그리던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추석 아침에 여학생 두 명이 도시락을 들고 찾아왔다.  도시락을 열자 금방 찐듯 송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이었다.
“어저께 밤에 여기서 주무시는 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직접 송편을 만들어 가지고 왔으니 드세요.”  여학생들이 어머니께 공손히 말했다.
“그래, 고맙구나. 어느 학교를 다니지.”  하고 어머니가 묻자,
 “이태리 국민학교 5학년이어요.” 라고 했다. 
  어머니가 나를 보며 여학생들에게 말했다.

“얘도 학교에 다니면 5학년이 됐을텐데..... 학교 다닐 땐 공부도 열심히 잘 했는데-”
  하시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돌아간 다음에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얘, 너는 왜 이름도 안 물어보니?”  하시기에 마음속으로 말했다.
‘어머니는 모르실거예요. 저도 학교에 다니고 싶고 쟤네들처럼 잘 지내고 싶은 것을.....’
이 무렵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이 내게는 왕자와 공주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가 걱정을 할까봐 듣기 곤란한 말은 않기로 했다.  결코 누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 만큼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헤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무엇보다 어린 동생을 위해 서둘러 새 삶을 찾기로 했다.

(보릿고개 시절 거리에서 추석을 맞은 지 47년이 흘렀습니다. 한국이 가난의 고통을 당할 때와 달리 이제는 세계 각국에서 무수한 젊은이들이 일하러 오고, 한국인 남녀와 결혼을 해 다문화 가정을 이룰 만큼 변모했습니다.
이제는 어려운 나라를 위해 구호물자를 보내고 이웃 사랑을 위해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들고 여러 나라를 찾아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희 가족 또한 15년 동안 선교지에서 지냈는데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릿고개를 통한 연단이 있었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뜻깊은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우리 민족이 조상숭배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복받길 소망합니다.

<사진설명> 지난 여름 대부분 주민들이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브리야트 종족 보한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가난한 원주민 성도 세 분이 모였는데 한국인 선교사 가족과 미하일 목사님 방문에 큰 힘을 얻은 듯 했습니다. 이날 긴 겨울 동안 따뜻하게 잘 지내라고 장작 한 트럭 분량을 헌금하자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달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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