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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7 00:52

보릿고개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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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중에서 발췌---- 부산 피난민 가정에서 4남으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끝내 가세가 기울어 4학년이 되던 11살 때 우리 가족은 부산을 떠나기로 했다. 이때까지 한번도 학교를 결석한 적이 없었지만 그동안 살던 터전을 갑자기 떠나게 된 것이다.이날이 1964년 6월 7일이다. 지금부터 거의 48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처음엔 어머니 외가인 영주를 찾아갔으나 정착이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찍 외할머니를 여의고 계모 손에 자라난 탓인지 외삼촌과 이모들이 가난한 가족을 피하고 만 것이다.
  얼마 후 둘째 형과 자치하면서 중학교 공부를 마저 하라고 남겨 둔 셋째 형마저 학교를 중퇴한 채 올라오고 말았다. 아주 공부를 잘한 형이었는데 그만 환경이 허락지 않았던 것이다. 남은 돈을 따로 떼 주느라 나머지 식구만 더 힘들게 지내야 했음에도 -
  하루는 땔감마저 떨어지자 형은 자기가 공부하던 시험지로 밥을 하는 것이다. 이를 지켜 본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점차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몇 달 간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결국 이곳마저 포기하고 말았다.


  뒤늦게 전학 간 영주 동부초등학교 가을 소풍 날이었음에도 나는 아예 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기약도 없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번에는 어머니, 셋째 형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고향을 찾아갔다. 아버지는 고향에 있는 삼촌 가족 성향을 아신 탓인지 함께 고향으로 가지 않는 대신 살 길을 알아보겠다며 군을 막 제대한 큰 형과 같이 어디론가 길을 떠났다.
  막상 고향산천을 찾았지만 전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다 환영해 주는 친척도 없었다.
작은 집에서는 유일한 형제의 가족이 고향을 찾아왔음에도 처음부터 외면하기 시작했다.   형수요 어린 조카들이 갈 곳이 없어 찾아왔는데도 당장 잠잘 방 한 칸조차 제공하지 않는 것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이런 때는 안 통하는 것 같았다.

  이리 저리 당장 머물 곳을 찾고 있자니 먼 일가 집에서 보기에 안됐던지 자기들 외양간이 비워 있다며 와서 보고 괜찮으면 살아도 좋다고 했다. 
  예수님처럼 잠시 동물의 우리 속에 살게 되었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가장 손위이고 막 추수가 끝날 때였음에도 누구 하나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형과 룻처럼 이삭을 주우러 나갔지만 막상 거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보아스 같이 친절한 사람 또한 만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주로 먹을 수 있는 풀뿌리에다 주어 온 이삭을 넣어 죽을 끓이셨다. 
 ‘아무리 모두 어렵다지만 열심히 탈곡을 하고 이것저것 추수하면서 이처럼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면 불을 켤 수 없어 좋아하는 독서조차 못하게 되자 하루는 가까이 있는 작은아버지 댁에 석유를 얻으러 갔다. 병을 가져갔다가는 욕을 들을 것 같아 일부러 호롱을 들고 갔다.  삼촌 집 마당에 들어서자 저만치 삼촌이 보였다.
“작은 아버지, 이 호롱에 석유 좀 담아 가도 돼요.” 하자,
 지게막대기를 흔들면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야 이놈아, 땅을 한 길 파 바라. 석유 한 방울이 나오나.....”
 마치 놀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끝내 그냥 돌아와야 했다.
  불이 없는 방이라 형과 오랫동안 이야기 하다가 자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길 기다렸다. 희망은 이제 고향을 떠나 새롭게 살 길을 찾는 것 뿐인 듯 했다.
아버지를 만나고 오신 어머니는 이사를 서둘렀다.  그러면서도 굳이 큰 동생을 그 무서운(?) 삼촌 집에 떼 놓고 젖먹이 동생과 형 그리고 나와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도 짐 가운데 그릇 한 상자와 그 동안 해 놓은 땔나무들은 모두 삼촌 집에 주었다.

 40리 떨어진 안동에 이르자 어머니는 잘 알지도 못하는 중국집에 형을 종업원으로 일하게 맡겨 두고 오신 것이다. 아직 형도 어린 나이인데 왜 따로 살게 하는 것일까.
  이상했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놓는 이유가 언뜻 이해가 안 갔다. 뭔가 모를 불안이 엄습했다. 남은 셋이서 기차를 타자 기차는 제천을 지나 충북 음성 역에 다다랐다.
  버스로 갈아타려는데 한 고등학생이 친절히 우리 짐을 버스에 실어 주었다. 버스는 농촌 마을을 달리다가 어느 한적한 시골 동네 다리 위에 섰다. 목적지까지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어머니는 왠지 더 이상 길을 가지 않는 것이었다.  사방을 살펴보아도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어 어느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인가 생각하며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마침내 어머니가 무언가 결심한 듯 강둑 아래 개울 쪽으로 가시는 것이었다.

  나는 신기하게 생각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곳엔 돌무더기로 만든 허술한 움집이 눈에 들어왔다.  인기척을 느꼈던지 가마니로 된 문(?)을 열고 아버지와 형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 살아 오면서 이렇게 놀란 것은 처음이었다.
  “베드로 왔냐” 하는 말에 나는 그만 기절할 듯이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만나기 원했던 아버지와 큰형이 끝내 이렇게 변해 연명해 나가고 있었다니......
  “싫어,  싫어. ” 하며 논길을 달아나다가 그만 뒤쫓아 온 큰형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미안하다.  조금만 참아라.”
형은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 연신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집(?)으로 오자, 어머니에게 파묻혀 눈물을 삼켜야 했다.   
  “참 너 밥 안 먹었지, 내가 밥해 줄게. 이제 마음대로 이밥(쌀밥)을 먹으렴”
 하시는 어머니 말씀을 들으며 나로서도 어쩔 수 없이 변모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모님은 이 어려운 보릿고개 시절에 단지 가족 모두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듯 끝내 인생의 맨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야, 내 너한테 보여줄게 있다.”  밥을 먹고 나자 형은 좀 떨어진 들판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거기엔 뗏장을 수없이 쌓아올려 집을 만들고 있었다.
  벽이 중간쯤 올라가 어느 정도 집의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너 오기 전에 다 지을려고 했는데 이 괭이로만 뗏장을 뜯느라 그만 늦어지고 말았다.
  삽만 한 자루 있었어도 금방 끝났을텐데....”.  주위를 살펴보니 온통 뗏장을 뜯은 자국들이었다.  조그만 괭이로 저만큼 뗏장을 뜯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튿날부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그만 괭이로 뗏장을 뜯는 것이었다.  저 쥐가 들끓는 돌무더기 집(?)을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속히 새 집을 완성해야 했다.
  형은 그 사이 주로 뱀을 잡으러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뱀을 무서워해서 인지 그것도 그만 두고 말았다. 집 주위에 모아두었던 뱀들도 다 처분한 듯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옆에는 또 다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왠 아저씨가 내 또래 아이 둘을 데리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툭 하면 아이들을 두둘겨 패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아버지라고 안 부른다고 때리고 밥을 제대로 얻어오지 않는다고 때리는 등 아이들이 많이 시달리는 것 같았다.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 왜 툭하면 때릴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냥 ‘왕초’라고 했다. 진짜 아버지냐 하고 묻자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들을 보면서 내가 더 행복한 것을 느꼈다.
  “니네 진짜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몰라. 한번도 본 적이 없어.”
  “그럼 너 그 동안 어디 살았니.”
  “고아원에서- 그렇지만 도망 나왔어.”
  “아니 왜, 고아원이 그렇게도 나쁜 데니-”
  “넌 몰라서 그래, 툭하면 사람 때리고 벌주고- ”
  “마음대로 뭘 할려구 해두 할 수도 없어. 감옥 같아-”
  “고아원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니.”
  “응, 그래서 몰래 도망 나왔어.‘
  “그럼, 저 아저씨는 누구야.‘
 “그냥 우연히 만났어. 그래도 우리끼리 사는 것보다 낫잖아.”
  하긴 고아는 까닥하면 아무에게나 붙들려 갈 수도 있다는 말에 누군가 필요할 것 같았다.
 “야, 넌 좋겠다.”
 “왜?”
 “넌 엄마, 아빠랑 같이 살잖아.”
 “응-, 그래.”
 ‘그래, 난 분명히 저 아이들 보다 난 행복한거야. 비록 학교는 못 다니게 되었지만- ’ ’ 
 고아들을 지켜보면서 세상에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도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 아이들 앞에서 그만 할 말이 없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음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고아들을 바라보며 부모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지 알 것 같았다.
얼마후 뗏장 집이 완성되어 이사를 했다. 정말 오랜만에 아늑한 집에 살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어디서 커다란 괘종시계를 하나 주워 오셨다. 낡은 것이었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것이다. 그래서 벽에 걸어 놓자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벽에 걸려 있던 괘종시계를 바라보시면서 지금 몇 시냐고 물으셨다.
“엄마 저 글씨가 안 보여요. 저렇게 큰데-” 하고 묻자,
 어머니는 무안하셨던지 한참 망설이더니 대답하셨다.
“글세..... 난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서 아직도 글자를 모르지 뭐니.”
“엄마 그럼 답답해서 어떻게 살아요. 제가 가르쳐 드릴테니 오늘부터 글자 공부해요.”
“그럼 그러자꾸나.”
이때부터 나는 어머니의 선생님이 되어 밤마다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학습 진도가 빨라 얼마 지나지 않아 읽는 것은 물론 발음대로 글을 쓰기까지 하셨다. 배움이라는 것은 이처럼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게 하나 보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한자 책을 한권 주어 왔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이 책으로 한자 공부를 시작했지만 정작 집에는 글을 쓸 연필도 종이도 제대로 없었다. 그래서 아궁이에서 숯을 꺼내다가 다리 벽으로 가지고 가서 숯덩이로 한자를 쓰고 물을 끼얹으면 다음날 다시 쓸 수가 있었다. 다리 위를 지나던 한 아저씨가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야, 한석봉이가 다시 나왔구나.” 하며 격려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나뭇가지로 땅에다 글을 쓰고 나서 발로 부벼 지우곤 했다.  큰 형은 서당을 다닌 적이 있어 한자를 많이 알았는데 이따금 도와주기도 했다. 그래서 점차 한자 실력이 늘어갔다.  이번에 큰형이 영어를 조금씩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며칠 후 둘째 형이 와서 가진 돈 다 털어놓고 큰 형과 함께 걸어서 서울로 갔다.

봄이 다가와 들판이 점차 푸르러 갈 무렵, 개학날이 되었는지 멀리 충청도 시골 아이들이 학교를 향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책가방을 가진 아이들은 거의 없고 보자기에 책을 싼 채 허리에 메거나 등으로 비켜 맨 채 학교를 향해 뛰어가는 학생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여기 저기 치이며 살아오던 마치 미운오리새끼가 어느 날 백조들이 노니는 모습을 바라보듯이 부러운 눈으로 시골 아이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동생 생각이 났다.
‘쟤가 벌써 일곱 살이라 내년이면 학교를 입학해야 될텐데....’
동생의 앞날에 먹구름이 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자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게 된 나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동생이 더욱 걱정스러웠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 서울로 가자, 그것만이 최선책이다.’  
  일단 서울로 가야만 무슨 수가 생길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졸라서라도 반드시 서울로 가야만 해결책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엄마 우리 서울가요.”  저녁에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시는 것이었다.
“얘야,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서울에서 누가 우릴 오라던.”
“동생이 내년에 학교에 입학해야 한단 말이에요.  올해 꼭 서울로 가야 내년에 동생을 학교에 보낼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 서울 가요.”
 “하지만 얘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 거란다. 우리 같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불쑥 서울로 가면 큰 일 난단다.  형들로부터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꾸나.”
하며 계속 거절하셨다.  나는 동생의 장래를 위해 서울로 꼭 가야 한다며 길을 재촉했다.
“..............”    
  한동안 말이 없던 어머니는 한글 선생님(?)이기도 한 어린 아들의 청을 못 이겨 결심을   굳힌 듯-   “그래 가자. 어디든  가면 못살겠니.  가자.  어디로든지....” 하고 말했다.
어렵게 집을 지은 지 넉 달이 못되어 모처럼 터를 잡고 살아가던 고장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땅 주인 아저씨께 인사드리고 이사 갈 차비를 챙겼다.
 부산서부터 가지고 온 비교적 큰 리어카에 한 가족 살림을 싣고 동생을 그 위에 태웠다. 애굽을 나와 가나안을 향해 떠나듯 나는 희망에 찬 손으로 리어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제 서울로 가는 거다. 걸어서라도-’
-(서울에 도착한 나는 동생과 함께 교회 천막학교 성경구락부에 다니면서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인근에 생긴 초등학교 졸업반에 편입해 우등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주경야독 끝에 중고교 과정 모두 검정고시로 마치고 오랜 신학 수업을 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선교사로 있으면서 사이버대학 수업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복지학 학위까지 받고 내킨 김에 평생교육사 자격마저 취득하기 위해 남은 과목 수업을 마친 상태입니다.

11살 겨울 어머니를 상대로 문해 교육을 직접 시도한 적이 있었던 만큼 평생교육사(?) 경험을 일찍부터 쌓은 셈입니다. 나는 말이나 글, 평소 삶 가운데 거짓말하거나 부풀려 말하는 것을 아주 실어한답니다. 자신의 위장된 삶, 부분별한 판단이 드러날까봐 두려워 나이든 목사를 상대로 함부로 말해 온 자들이 언젠가 돌이켜 정직한 삶을 살아가기 바라고 있답니다.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시편 107: 42,43).

지난 삶을 돌아 보니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 되고 나아가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준비시킨 것이라 생각됩니다. 고난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생의 코스이기도 합니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편 119:71).

26일(주일) 서울역 뒤에 위치한 민족사랑교회(노숙자 쉼터)에서 설교했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매주 수요일 낮에 설교한 터라 아는 얼굴들이 많았습니다. 찬양 팀의 생기있는 찬양 리더에 힘입어 아름답고 힘찬 찬양이 가득 찼습니다. 예배 후 담임이신 유 목사님 과 사모님 그리고 유목사 친구 집사님과 함께 식사와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진설명> 보릿고개를 넘어 성장한 소년이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어 딸 찬미와 함께 엘란츠 마을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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