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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 12사도들의 사역

사도(使徒, Apostolus)라는 말은 '파견된 자', '사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샬리아(shaliach)에서 유래하고 그리스어의 아포스톨로스(apostolos)의 동의어입니다. 사도의 자격은 성육신하여 역사적이고 완전한 인간으로 살아간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났고, 그 분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이기 때문에, 4대복음서 에서는 예수의 제자 12명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마가복음3:16-19) 그러나 그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가룟유다가 자살하여 사도직을 버리자, 사도들은 '예수께서 활동하실때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중 하나인 맛디아에게 사도직을 맡겼다(사도행전1:21-26) 이후 성령강림주일에 탄생한 교회(사도행전 2:1-47)를 탄압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말하여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였으며 기독교에서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고린도전서15:10)

12명으로 구성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그리고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와 야고보(알패오와 마리아의 아들), 유다(야고보의 아들, 다대오), 시몬, 가룟유다 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면서 특별하게 정한 규정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모습의 평범한 삶을 살았던 동시대의 보통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특별히 예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최측근의 제자들이었지만 그 관계가 오늘날의 오너와의 관계와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1. 베드로(가버나훔지역 어부출신, 안드레의 형제)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베드로전후서를 기록한 최고의 사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가버나훔지역 사람으로 그의 직업은 어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한 보통의 사람보다도 낮은 직업을 가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생애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베드로 또는 페트로스(Πέτρος, petros), 페트루스(? ~64년)는 사도,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였던 사람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와 형제 관계로서, 안드레에 의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름은 시몬(Simon)이라 하며(마태복음 4:18, 요한복음 1:4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어 준 새로운 이름으로서, 그 뜻은 바위라는 의미의 아람어 케파(kefa)를 고대 그리스어로 Κηφας(kephas)로 소리나는 대로 적은 후, 낱말 뜻을 고대 그리스어 페트로스(πέτρος, Petros; 라틴어 Petrus)로 풀이한 것입니다(요한복음 1:41).

예수님은 왜 베드로를 제자로 선택하였을까요? 관상을 보고 선택하였을까요? 아니면 그의 학벌과 문벌, 그리고 집안 배경을 보고 그랬을까요? 한낱 어부에 지나지 않는 베드로가 당시 어떤 괄목할 만한 학력과 지식을 섭렵하였을까요? 그렇다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베드로를 예수님은 왜 무슨 이유로 선택하였을까요? (그 해답은 지금 바로 당신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 북쪽지역의 벳새다에서 성장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친구 빌립 등과 함께 어업에 종사 하였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을때 밤새도록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못한 베드로가 실망하여 고개를 떨구고 있을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5:1~2)

복음에 무관심한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란 보통의 선생님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고기가 많은 곳을 가르쳐 주시며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를 만선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로 그 사건을 계기로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베드로는(요한복음1:35~42) 예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되어 그의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대역사의 시작을 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장 측근에서 보좌하며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예수님의 죽음앞에서는 모든 사람앞에서 세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과오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한 삶의 모양과 생각과 행동들을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온 예수님의 바른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앞장서서 전파하고 수많은 기적과 죽은자를 살려내었으며 예수님을 따라 물위를 걸어간 첫 번째 사도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적 기독교회의 모교회로 등장할 때, 베드로는 항상 지도적 입장에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가이사랴와 안디옥 지방으로 선교여행을 다녔으며(갈라디아서2:11~14), 전설에 의하면 주후 67년 말년에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고 순교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역사적으로 증명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후 43년에 유대왕인 헤로데 아그리파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탈출을 하였습니다. 주후 49년에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예루살렘 공의회를 주재하여 이방인들을 굳이 유대교의 강제 규정에 따른 할례를 요구하지 않고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후 그는 안디옥으로 가서 스스로 최초의 사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로마로 갔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 부분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지만 초대 교회 시절의 서술가들은 그가 로마에서 사역을 하다 순교했다고 하나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베드로가 64년경 로마황제인 네로의 치세에 처형되었다고 전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로마 여행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바울의 서신 가운데에서도 베드로를 언급하지 않은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에 베드로의 로마선교 여행은 아주 미미했거나 실제로는 이루어 지지 않은 것으로 판단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운 첫 감독으로 보는 견해또한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바울의 로마 선교정책에 비추어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 예언된 베드로의 순교 기사에는 장소가 언급되어 있지 않고 십자가 처형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부터 부름을 받은 후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며, 더 나아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고, 그의 설교에 감동된 청중들이 하루에 3,000명이나 세례를 받은 기적같은 일들이 4대복음을 통하여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후 64년~66년경,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베드로전후서는 "소망의 서신"(the Epistle of Hope)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 전서는 환난중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곧 닥쳐올 대 박해를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어떠한 고난과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도록 촉구하는 "격려의 서신"(Epistle of Courage)으로 불리워 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외부의 박해에 대하여 거짓교사와 방종한 생활 등 교회내부의 문제에 대하여도 베드로 후서를 통하여 정확한 지침과 경고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때 갈릴리 한 지방의 어부에 지나지 않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로 기독교사의 가장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교회가 서 있는 세계 모든 나라와 지역과 가정에서 그의 행적과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전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위대하고 광대한 이름으로 존귀하게 여기게 되고, 아무리 뛰어난 지략과 전략을 가진 사람일 지라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수 없는 어둠에 서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서의 저자이며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는 야곱의 헬라어 번역이며 영어 성경에서는 제임스(James)라는 이름으로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는 제자입니다 예수님께는 네명의 형제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마가복음6:3, 마태복음13:55) 이들은 예수님과 한 가족으로서 30년을 함께 살면서도 정작 그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혀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그의 삶은 전환되었고 그의 서신인 야고보서에서 그는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라고 소개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설명함으로서 그의 신앙적 가치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는(Saint James the Just) 그리스어:Iάκωβος), ( 주후 62년 사망)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 예루살렘의 야고보(James of Jerusalem), 하나님의 형제 야고보(James Adelphotheos)[1], 또는 야고보, 주의 형제(James, the Brother of the Lord)라고도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일반적으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일시 되는 인물입니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첫 번째 예루살렘의 주교이고, 신약성경 누가복음10:1-20에 언급된 칠십 인의 사도중 첫 번째 사람입니다. 주후 62년, 네로 황제의 박해로 총독 안나스의 손에 순교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에루살렘 교회를 지도한 사도로서(갈라디아서2:9)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가 선교여행을 떠난 후 실질적인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부재중인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모범적 설교와 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한 야고보를 사도 바울이 제일 먼저 만나기를 원한 사람이었으며(갈라디아서1:19) 베드로도 그에게는 겸손한 언행으로 대하였습니다(사도행전12:17) 유대인 크리스챤 헤게시푸스(Hegesippus, 170년경) 에 의하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항상 양떼를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에 힘써서 그의 무릎이 약대 무릎같이 굳어졌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서신 야고보서는 그의 신앙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당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신앙하면서도 유대교의 식사법과 금식법등 율법을 병행하여 준수하고 있었는데 야고보도 이러한 행위적 신앙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습니다 차이점은 모세의 율법이 아닌 자유의 율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야고보서2:12)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에게 있어서 죽은 믿음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서2:17)

야고보는 다윗 혈통 계승자로서 유대인의 율법의 한구절도 소홀이 하지 않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경건 생활로 인하여 의인(Zadik)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으며, 예루살렘교회의 확장을 두려워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온갖 유혹과 심문을 획책하였지만 끝끝내 신앙을 지킴으로서 돌에 맞아죽는 처형을 당하고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3. 요한(세배대와 살로메의 아들이며 야고보의 형제로서 어업에 종사)

사도 요한(히브리어: יוחנן,그리스어: Ιωάννης, ?~100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야고보와 형제 관계에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제자로 활동하였습니다(요한복음1:35~40) 요한의 아버지는 세배대(마태복음4:21), 어머니는 살로메(마태복음27:56)로 요한복음 19장 25절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요한의 모친 살로메는 자매였으며, 그러므로 예수님과 요한은 이종사촌관계인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의 형제들과 가족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한 최초의 제자그룹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 부터 "우뢰의 아들"(막복음3:17)이라는 별명을 받을 만큼 강직하고 강렬했던 사람이었습니다(마가복음9:38, 10:37, 누가복음9:54) 사도 요한의 가정은 삯군을 두고 어업을 경영할 만큼 부자였으며(마가복음1:20), 대제사장과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습니다(요한복음18;15~16)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변화산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동행하였으며 특별히 4대복음 속에는 예수님으로 부터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라는 언급이 5회에 걸쳐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만찬에서 주를 팔자가 누구냐고 질문한 사람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요한복음13:23~25) 그는 예수님이 끌려가시는 행적을 따라 가야바의 집에까지 이르렀으며, 모친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의 마지막가는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인 마리아의 노후부양의 부탁을 받고 그 책임을 다하는 제자였습니다 (요한복음19:26~27)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빈무덤을 가장 먼저본 제자였습니다(요한복음20:1~10)

사도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다가 언제 떠났는지는 잔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후 58년 사도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때 야고보외에 다른 사도들은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일부 견해로는 주후 50년 경 사도 요한은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성전문앞의 앉은뱅이를 고치고(사도행전3:1~10),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으며(사도행전4:1~22), 예루살렘 총회에서 사마리아로 전도단을 파송할 때에도 베드로와 같이 파송되어 아름다운 결과를 맺었습니다(사도행전8:14~25)

주후 64~67년, 네로 황제의 박해와 그후로 밧모섬에 유배되기 직전인 주후 85~90년사이에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으며 요한복음은 이러한 관점에서 헬라사고에 익숙한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복음들이 다소 객관적인 성격을 띤 것과는 대조적으로 주관적인 해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함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행적을 실재화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후 사도 요한은 주후 85~86년 도미시안 황제의 박해를 거치면서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으며(요한계시록1:9), 이곳에서 바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노경에 소아시아 지역 에베소에서 오래동안 교회를 지도하였으며, 이곳은 예루살렘이 무너진 후로 한때 초대교회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주후 98년, 트라얀 황제의 박해가 있었으며 90여년의 세월동안 수많은 박해를 이기며 기독교의 산증인이며 계승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에베소 교회를 감독하다가 자연사 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순교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어서 순교한 것이란 소수의 견해도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 요한을 일컬어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지도자들 중의 한사람"(갈라디아서2:9)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신성을 강조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이라는 엄청난 비밀의 키워드를 우리들에게 남겨 줌으로서 희망과 새로운 천국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한 것이었습니다


4. 안드레(벳세다 출신의 어부, 요한의 아들)

안드레(그리스어: Ανδρέας, ? - ?)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베드로의 동생입니다. 안드레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형과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러시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벳세다 출신의 어부로 요한의 아들이며 예수님께 베드로를 소개한 세례요한의 제자이었습니다(요한복음1:40) 요한복음 1장 35절에는 그의 첫번째 스승이신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지칭하여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는 말씀을 전해듣고,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좇아가서 그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후 세례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에 의해 소명되었다는 짧은 기록이 있습니다(마태복음4:18)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께로 안내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스승이셨던 세례 요한은 약대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분리된 삶을 선택한 세례 요한의 청빈한 생활이었으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념과 신념으로 살아가는 참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이러한 스승을 둔 안드레에게 있어서 세례 요한이 가르키는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궁금점과 의문점은 기대로 발전하였고 그는 이것을 계기로 제자의 삶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외경인 안드레 행전에는 그의 행적에 관하여 소아시아 지역 에베소를 중심으로 사역하였으며, 그 후 러시아 남부 스타키아 지역에 이르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숱한 고난과 역경이 있었으나 사도 안드레는 굴복하지 않는 신앙의 생활을 지켜 나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교활동의 영역확장으로 나아갔다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희랍 아가야 지방의 페투테에 이르러 행정 최고책임자인 지사의 부인과 동생들을 전도하여 영접하게 하였고, 흑해연안 지역을 두루 섭렵하며 선교하다가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5. 도마(갈릴리 출신, 디두모)

도마(Thomas, St Thomas the Apostle, Judas Thomas, Didymus)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아람어로 ‘쌍둥이’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그는 갈릴리 출신으로 어부로 생활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디두모라 불리는 갈릴리 출신의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손에 있는 못자국을 확인한 제자로 널리 알려 졌으며 동방으로 선교 여행을 떠나 인도에 까지 이르러 활동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인도에 노예로 팔려간 도마는 군다포루스 왕의 궁전을 건축하는데 도움을 주어 신임을 얻었으며 그후로 복음을 전하다가 힌두교 사제들이 던진 창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인도에는 도마의 이름을 딴 성 도마교단이 있는데 그들은 교단의 기원을 인도에서 순교한 도마의 선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베다니로 들어가려고 할때에 다른 제자들이 바리새파의 음모에 의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도마는 예수님과 함께 가야한다고 고백한 제자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의 길에 대하여 도마는 잘 이해하지 못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도마와 앉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말슴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체포되시자 도마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3일만에 부활하신 후 제자들앞에 나타나셨을때 도마는 믿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모습을 보였을때에도 손에 못자국을 보고 확인한 후에야 믿음을 보이는 현실주의자와 같은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과 성격은 어떤면에서는 거짓없는 마음의 표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의 모양과 삶들은 이와같이 다양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마처럼 의심하며 살았던 제자도 있었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을 팔아버린 비 양심적인 가룟유다와 같은 제자도 함께 있었으니 예수님의 이러한 섬김과 마음은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알수 없을 것 같습니다


6. 빌립(벳세다출신 어부)

빌립(Philppus)은 갈릴리 벳세다 출신으로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증거한 사람으로 주로 소아시아 내륙지방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성경속에서 만날 수 있는 빌립에 대한 흔적은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벳세다에서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즉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생선을 가지고 5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려고 할 때 자신을 따라온 수많은 군중들을 보고 빌립에게 “이 사람들이 먹을 만한 빵과 물고기를 어디에서 사면 좋겠느냐?” 하고 시험하자 그는 “2백 데나리온의 빵과 물고기를 사서 조금씩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도저히 당할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후 빌립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날에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최후의 만찬에서 성찬예식이 있은 후 예수께서 “너희가 나를 알았으니 나의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 분을 알게 되었다. 아니, 이미 만났다” 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빌립은“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만족하겠습니다” 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빌립에게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라고 답하며 책망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빌립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이 있는 당일까지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예수님 체포이후의 삶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안타까운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0세기, 나그함마디 사본 에서는 마리아 복음, 도마 복음, 빌립 복음, 가롯유다 복음 등이 발견되었으나 명확하지 않은 여러 현상과 진실성의 결여로 인하여 정경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빌립에 대한 많은 전설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있는 자료들은 더이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십자가 순교에 관한 이의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들은 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의 순교를 향한 복음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7.바돌로매(요한복음의 나다나엘과 동일인으로 가나출신 갈릴리 사람)

바돌로메(아람어: ברתולומאוס הקדוש, 그리스어: Βαρθολομαίος, ? - ?)는 가나출신으로 예수께서 그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고 만나게 되었으며 그후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톨로메오의 아들(바르)’이란 뜻이며, 신약성경에서는 그저 사도들의 명단에만 언급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서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기록에도 별로 기록된 바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그를 빌립에 의해예수에게 부름을 받았던 갈릴리에 있는 가나의 나다나엘(Nathanael: 하나님의 선물)과 동일 인물로 보고 있으며 나다나엘이 그의 본명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빌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실에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빌립은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 묵상에 잠겨 있던 나타나엘에게 다가가 말하기를 “나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이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나사렛이란 작은 마을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라고 의심하였으나 빌립의 소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로부터 “보라!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사람이다. 그에게는 조금도 거짓이 없다” , “빌립이 너를 찾아가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너를 보았다. 그때 이미 너를 알고 있었다” 라는 메세지를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감동한 나다나엘은 예수에게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더욱 큰일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돌로매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났을 때 예수님을 직접 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돌로매는 예수께서 승천한 후 소아시아 지방인 프리기아와 리카오니아 등지를 거쳐 아르메니아에 도달해 그 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이교 사제들의 선동을 받은 아스티아제스라는 왕에 의하여 참수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르메니아에서 산 채로 칼에 의해 전신의 살가죽이 벗겨지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머리가 잘려 나가는 등 온갖 혹형을 당하며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유해는 알바노 시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메소포타미아의 다라 지방으로 옮겨졌고, 6세기에 시칠리아 섬 근처에 있는 리파리 섬에 이송되었다가, 주후 839년에는 사라센의 침략을 피해 베네벤토에, 983년에는 로마로 운반되었고, 오늘날에는 티베르 강 가운데 있는 한 섬에 건축된 성 바르톨로메오 성당에 보관되고 있습니다.


8. 마태(알패오의 아들, 세리)

마태(히브리어: מתי, 그리스어: Ματθαίος 맛싸이오스)는 알패오의 아들이며 세리 마태는 레위라고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마태복음의 저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마태는 갈릴리태생으로, 마가복음 2장 14절과 누가복음 5장 27절에서 그를 레위(Levi)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완전한 성명은 ‘레위 마태’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후손인 알패오의 아들(마가복음 2:14)로서, 처음에는 가버나훔에서 로마제국을 위해 같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걷는 세리로 일하였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특별히 강했던 그는 선민으로서의 긍지를 갖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살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창녀외 죄인과 같이 천대받는 부류였던 세리가 되어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걷어들여 모으기에 급급했던 마태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한 그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어 인생이 180도 전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전까지 그가 믿던 가치관이 예수를 만나게 되면서 새롭게 변화되자 세상의 재물에 쏟았던 그의 마음은 예수님께로 전이되었습니다. 로마의 하수인으로 일하면서 불의하게 모은 재물로 큰 잔치를 벌여 자기 죄를 회개하였고, 자신과 동일한 처지에 놓여있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구원을 증거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의 선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며 같이 생활하면서 사도로서의 훈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자 다른 제자들과 같이 자신의 스승을 버리고 도망치는 한계를 드러기도 하였습니다. 그후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를 다시 만나고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사도로서의 직분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마태는 유대를 순회하며 전도하다가 동방으로 갔으며,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 지역에서 순교했다고도 하는 등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그가 북쪽으로 선교여행을 떠나 흑해연안 지역에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또한 전설일 뿐 정확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 에티오피아로부터 페스툼으로, 다시 10세기에 이탈리아의 살레르노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마태복음은 예언과 성취를 이어주는 구약과 신약의 교량역할을 하는 중요한 경전이 되고 있습니다 주후 50~70년 사이에 기록되어진 것으로 알려진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으며,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메시야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통일성과 보편성을 강조하여 유대기독교인과 이방기독교인을 하나되게 하려는 공동체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보를 중심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였으며, 신학적인 체계와 구조를 완성하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계보를 이어나가는 가장 신뢰할 만한 가치를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9. 시몬(알패오와 클레오파스의 마리아의 아들, 소야고보의 형제)

시몬(히브리어: שמעון)은 "응답하셨다" 또는 "들으심"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주의 정당인 혁명당원(zelotes)이었습니다

시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알패오와 클레오파스의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소야고보와 형제관계라는 것입니다. 시몬은 가나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마태복음 10:4), 사도가 되기 전에는 바리새파로 구성된 극단적인 유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열심당의 일원이었으며, 마카베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로마제국으로부터의 유대인 해방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과 그들에게 순종하는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서 동료들과 함께 약탈과 살인 등 테러와 비슷한 공격을 자행하였습니다. 또한 열심당은 장차 예언에 따라 메시야가 이 땅 위에 강림하면 군대를 이끌고 로마 제국을 몰아내 조국을 해방시켜 주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초라한 행색을 한 예수를 결코 자신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두 세력은 극과 극으로서 충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과 동료였던 시몬은 예수의 설교와 기적을 듣고 본 후 감화되어 열심당에서 탈퇴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또한 성실하거나 피동적으로 순종만 하는 사람들만 제자로 맞아들이기보다는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들을 포섭하고자 했기에 자신에게 오는 시몬을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로마 제국에 순종했던 과거를 가진 마태와 로마 제국에 반대했던 극단주의자 시몬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맞아들임을 통해서 서로 상반된 이념으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하고자 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시몬은 이집트에서 선교를 한 후, 유다 타데오와 함께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벌였는데, 예수님에 대하여 설교한 후 그 곳의 신상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격분한 이교도들은 그를 포박한 후 죽였는데, 시몬은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사타구니에서부터 머리까지 톱으로 육신이 두 동강이 나는 형벌을 당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0.유다(야고보의 아들, 다대오)

유다(Θαδδαῖος, ? -62년?)는 ‘존경받는’ 또는 ‘찬미하리’라는 뜻을 지닌 예수님의 제자로서, 야고보의 아들이며 다대오(마음이 크고 넓다라는 의미의 이름)라고도 불려지는 사도입니다 소(小)야고보와는 형제 관계이며, 예수를 팔아넘긴 가룟유다와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그를 유다라고 부르고 있지만(누가복음6:16, 사도행전 1:13),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그를 다대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그에 관한 언급은 유일하게 사도들의 이름을 나열할 때 뿐인데, 전체적으로도 4번밖에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당시 유다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저희에게만 나타내 보이시려고 하십니까?” 라고 질문하기도 하였습니다(요한복음 14:22).

전설에 의하면, 성령 강림 이후 유다는 시몬과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페르시아제국 지역으로 가서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그곳의 신상을 우상제물이라 하여 파괴한 까닭으로 현지인들의 폭력으로 사망하였는데, 어떻게 순교하였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전설의 내용이 함께 사역을 한 시몬과 유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아 순교하였다는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11. 야고보(알패와 마리아의 아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히브리어: יעקב, 그리스어: Ιάκωβος, 라틴어: Iacobus, ? ※62년)는 알패오와 마리아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다른 사도인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동명이인이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흔히 ‘소(小)야고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야고보들 사이에서 진실을 찾아내기가 무척 어렵고 전해내려져 오는 전설 또한 중복되거나 유사한 경향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서 야고보의 행적은 찾기가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른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사도와 마찬가지로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위하여 헌신을 다하였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결같은 삶을 살았고 그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그의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었으며 복음의 영향력 또한 적지 않았음을 비추어 볼때 아무런 흔적없는 삶을 살며 세상으로 돌아간 것은 결코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그를 시기하고 경계하던 바리새파에 의해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부활절, 야고보를 강제로 예루살렘 성전에 끌고 가 각종 감언이설로 배교할 것을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가 끝끝내 배교를 거부하며 저항하자 화가 난 바리새파는 그를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린 다음 돌로 쳐 죽임으로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2. 가룟유다(유다출신으로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

가룟유다(히브리어: יהודה איש קריות) 또는 가룟 사람 유다는 유대 출신으로 가룟 시몬의 아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예수를 배반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대의 죄인이자 사탄의 하수인이요, 배신자의 대명사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가룟'이란 말에는 '가룟(남부 유대의 지명) 사람' 외에 '암살자', '가짜', '위선자', '거짓말장이', '단검'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가룟 시몬의 아들이며,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받은 12사도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수학적 재능이 우수하여 사도단의 회개와 재정을 맡으면서, 자기 호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공금을 횡령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기록에는 베다니 지역의 마리아의 집에서 그녀가 값비싼 삼백데나리온(노동자 1년연봉) 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는 헌신을 하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됩니다 이것을 본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비싸게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라고 하며 마리아를 책망하였는데 그것은 실제로 가룟유다의 가난한자에 대한 진실된 마음이 아니라 횡령을 마음에 둔 발언으로 위선적인 태도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도리어 가룟유다를 책망하며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이 여자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들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들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오히려 마음에 심히 격분하여 당시 유대교의 대사제(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제가 예수를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여러분은 제게 무엇을 주실 수 있습니까?”하고 예수를 그들에게 팔아 넘길 것을 제의하는 결코 돌이킬수 없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천금과 같은 제의를 받은 제사장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가룟유다에게 은 30개를 보상금으로 제의했습니다 당시의 시세로 은 30은 로마의 노예가 황소에게 받혀죽었을때 주인에게 지불하던 보상금액으로 가룟 유다의 스승에 대한 사고와 가치관이 어떠했슴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교절이 시작되는 첫날이자 목요일 밤에 일어난 최후의 성만찬에서 예수는 자신의 죽을 때가 임박해 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여러 암시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사도들이 식사를 하던 도중에 “내가 진실로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는 폭탄선언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에 사도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 떨며 부인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연이어 “나와 함께 접시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 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다음 빵 한 조각을 들어 가룟 유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에 가룟 유다가 그 빵을 받자마자 사탄이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갔고 가룟유는 회개의 기회마져 잃어버린채 망언의 행위를 향하여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의 이러한 마지막 경고의 메세지를 뒤로한채 너의 일을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악행에 동참하였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난후 예수께서는 11명의 사도들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마지막 눈물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가 다 끝났을 때 가룟 유다는 제사장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가 입맞춤을 하였고 바로 그자리에서 예수는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에 의해 체포된 예수에 대한 형 집행은 신속하게 처리되었고, 산헤드린 의회는 최고형인 십자가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를 데려가 집행을 보다 빠르게 마무리 하여 줄것을 유다백성들과 함께 선동하며 강력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때늦은 후회를 하며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면서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개를 돌려 주며 “내가 죄 없는 사람을 팔아넘겨 죽게 만든 죄를 범하였다”라고 간청하며 석방을 요청했지만 “그게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라는 돌이킬수 없는 반응만 돌아왔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가롯 유다는 그 은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나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고, 대사제들은 이것을 주워다가 나그네들을 위한 묘지용 토지를 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대제사장들이 구입한 묘지용 토지에서 가룟 유다가 자살했다고 하지만, 사도행전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자살한 피밭이라고 불리게 된 곳은 나그네들이 객사하면 묻어주려고 산 땅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회계를 맡고 있을 3년동안 횡령한 돈으로 산 대 농장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증거로 대사제들이 산 나그네 묘지용 토지는 작은 밭(헬라어로 아그로스)이었고, 가룟 유다가 죽은 피밭은 대농장{헬라어로 코리온)이었습니다 가난한 예수공동체 일원이었던 가룟 유다가 대농장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누가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사용한 생활비는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재산을 들여서 예수의 복음증거에 봉헌을 했기 때문이다.

2006년 복원된 영지주의자들의 복음서인 가룟유다복음에 의하면 가룟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비밀에 붙여진 요구에 의한 것이었고 이러한 가룟유다의 행위는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스토리라는 억측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가치한 복음서들의 출현은 당시 여러곳에서 수없이 복사되고 미화된 사례들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복음이라는 이름이 더렵혀지는 사악한 서적이라는 것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택하셨고 그를 제자로 불러 쓰신 엄청난 축복의 기회자였지만, 그것을 한순간에 팽개쳐 버리고 세상의 몰락과 유흥을 좇아갔던 최악의 인간형이라는 데서 우리는 우리안에도 이러한 사악한 생각이 없는지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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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감사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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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데스크칼럼] 가을서정

  20. 기성이와 어제 아침 채팅한 내용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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