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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6 03:18

영원한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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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옛날 러시아 학교 교실을 재현한 모습- 바이칼 호수 인근 딸찌<민속촌>에서 볼 수 있음

(오늘은 성장 배경부터 자신의 소개글을 대강 썼습니다. 한국이 몹시 어려울 때였던 만큼 누구나 당한 고통일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주님의 손길이 늘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무자격 교사였지만 무상으로 가난한 학생들을 돌보아 주신 은사님들의 은혜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6.25로 인해 경북 안동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가셨던 부모님이 고향이 전답이 적어 부산에 정착을 시도하신 탓에 종전 이듬해 여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오랜 유교를 바탕으로 한 배경 가문이었지만 부모님께서 고향 영역을 벗어난 탓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큰 형을 따라 다섯 살 남짓 어린 나이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학생이었던 큰 형은 자신이 몹시 아픈데도 교회에서 심방을 안 오는데 불만을 갖고 교회 출석을 포기함에 따라 저또한 중도에 멈췄습니다. 피난민 가정에 아이들이 줄줄이(제가 넷째인데 동생이 둘 더 태어남) 늘어나 결국 파산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초여름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이 부산을 떠나 외가가 있는 영주로 갔습니다. 하지만 일찍 친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탓에 어머니 동생들이 배다른 형제라고(더욱이 망해서 왔으니) 상대를 해 주지 않아 잠시 전학을 해서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이번엔 아버지 고향인 안동으로 향했습니다. 아버지와 군에서 막 제대한 큰형이 동행하지 않아 이상했습니다. 어머니가 저와 두 동생만 데리고 왔음에도 첫날부터 냉대를 받다가 결국 두 달도 못살고 쫓겨나듯 떠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이 가장 높은 편 임에도 가난한 자들을 고향에서조차 대접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와 큰 형이 살 길을 마련해 놓았다는 말에 희망을 가지고 충청도 한 시골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큰 동생을 우리를 박대하던 삼촌 집에 맡겨두고 안동 시내를 지날 때 막내 형을 중국집에 취직을 시킨 후 저와 막내 동생만 데리고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왜 우리 땅에 이산가족이 그토록 많았는지 이런 우리의 현실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희망에 찬 아버지와의 만남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인생의 마지막까지 내려가 아무도 돌보지 않은 위기 속에 오직 가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 환경을 벗어나기에는 11살이란 나이가 너무도 힘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동생을 만나러 고향에 갔다가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고 합니다. 어린 조카가 밥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갖는 눈치를 주고 이발조차 집에 있는 가위로 대충 잘라 자기 목을 자르는 위협을 느꼈나 봅니다. 동생은 머니를 보는 순간 달려나와 “엄마 나 살려줘. 무서워”하는 말을 듣고 “오냐 이놈들아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냐. 내 새끼는 내가 키운다” 하고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동생은 우리 집(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음- 조그만 다리 밑)이 그 위로 오고가는 사람들마다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인생 낙오자의 모습임에도 여섯살 난 탓인지 천국(?)처럼 느껴졌나 봅니다. 쉬지않고 밥을 먹는 동생의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넷째 형이랑 매일 지내는 동안 동생의 초췌한 모습이 점차 안정되어 갔습니다.


인심좋은 충청도 사람들의 돌봄으로 자칫하면 위기에 몰릴 뻔했던 남은 가족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자 책을 하나 주어왔기에 열심히 한자를 익혔습니다. 종이와 연필이 없는 탓에 막내기로 땅에 쓰기고 하고 다리밑 벽으로 가서 숯덩이로 쓰기도 했습니다. 지나가던 어른이 “야 여기 한석봉이 태어났구나” 하며 격려 했습니다(이때 익힌 한자 실력이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큰 괘종시계를 하나 주어왔습니다. 저녁에 어머니가 “지금 몇 시냐?”고 물으시기에 “저 글자가 안 보이세요. 저렇게 큰데-” 하고 물었습니다. 난 학교를 안 다녀 글자를 모른단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혹독한 계모(외할머니)가 학교조차 아예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 그래 가지고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오늘부터 나한테 배우세요.” 하고 “가겨거겨”부터 시작해서 겨우내 어머니를 가르쳤더니 대부분 한글을 다 읽고 소리나는 대로 쓰기까지 하셨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은사가 있었는지 어릴 때부터 선생님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어느 날 둘째 형이 찾아와서 큰 형에게 나무랐습니다. “형 계속 이렇게 살거요. 우리가 빨리 자리를 잡아야 애들 학교라도 보낼 거 아니요. 나랑 서울 갑시다.” 하더니 둘이 걸어서 서울로 향했습니다.

3월 초 개학 일이 되어 충청도 시골 아이들이 책보를 끼고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가방을 든 아이는 찾아볼 수 없고 허리에 매거나 보자기에 싸서 안고 가는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멀리 외딴집에서(뗏장을 뜯어 만들었음) 학교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자니 마치 백조의 호수를 보는 미운오리새끼 같았습니다.

“동생이 일곱 살이라 내년이면 학교에 가야 하는데- 여기 살다가는 학교도 못가고 말거야”그래서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우리 서울 가요.” 하고 말하자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서울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갔다가는 굶어죽기 딱 맞다.” “그래도 동생 학교를 보내야 할 거 아니예요. 사람이 죽기라도 하겠어요. 저도 일할께요. 우리 서울가요.” 어머니는 자신의 한글 교사이기도 한 제 말을 못이기고 서울로 향해 떠나기로 했습니다.

집안 재산 1호인 리어카가 하나 있었는데 여기에 짐을 싣고 무작정 서울 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불과 30리 이동하고는 더 이상 못가겠다고 주저앉은 어머니로 인해 장호원에서 6개월 동안 발이 묶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울로 안 가겠다는 이유가 돈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고물을 주어 팔고 여름에는 아이스케키를 팔아 부모님 몰래 비상금을 마련했습니다.

다시 날을 잡아 “우리 추석 전엔 꼭 서울가요.” 하고 졸랐습니다. 분명히 겨울이 되면 더 안 움직일테니 가을까지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서울로 가기로 하고 우체국에 저금한 돈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학교조차 다니지 않고 저금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우체국 직원은 처음에 돈을 못내준다고 우겼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 해서 같이 갔더니 저축상이라도 올려야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으러 와서 놀랐습니다. 혹 서울에 가더라도 그쪽 우체국으로 보내드릴 수 있는데 조금 더 맡겨두면 안되겠습니까" 하고 부탁하자 "우리는 주소도 없이 무작정 간답니다."하고 대답하자 돈을 내주었습니다.

30리씩 이동하다가 용인에 이르러서부터 가족이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리어카를 비롯해서 팔 수 있는 것은 모두 팔아 돈으로 바꾸고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다가오자 고층 건물들이 보이고 사람들 옷차림도 달랐습니다.

영등포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자 지겟꾼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어디로 갈꺼요. 싸게 할테니 갑시다.” 저녁이 다되었는데 어머니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지게꾼 아저씨가 다시 물었습니다. “제가 잘해 드릴테니 갑시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가 “우린 갈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저씨는 “그럼 오늘 어디서 잘 거요. 보아하니 애기까지 있는데-”

“서울은 아무데서나 잘 수가 없답니다. 내말 잘 듣고 꼭 그대로 따라하세요. 요 길로 죽 가면 철길이 보입니다. 철길 옆에 다리가 있는데 무조건 거기로 가서 판잣집을 지으세요. 누가 뭐라 하면 아이들이 어려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 하고 무조건 집을 지으세요.”


지게꾼 아저씨가 하늘이 보낸 천사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준비해 둔 비상금으로 나무와 루핑을 사가지고 다리 쪽으로 갔습니다. 먼저 살던 사람들이 말렸지만 지게꾼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아이들이 어려서 그러니 좀 봐 달라고 말하고 판잣집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주위에 신길역이 생겼습니다.

두 달이 못되어 판잣집이 철거되어 사당동 철거 단지에 입주하게 되고 내 소원대로 동생과 함께 교회 천막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성경구락부여서 매일 예배를 드리고 성경과 찬송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가족들도 한 곳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열두 살 소년이 기지로 새로운 정착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주님의 섭리가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고향에 머물렀다면 유교 배경에서 어린 나이에 교회 가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듬해 동생을 정규학교로 보내느라 사당동에서 양재동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길을 어린 동생과 걸어다녔는데 인근에 정규 초등학교가 생기면서 편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천막학교 운동회 때 팔을 다쳐 일 년 동안 학교를 쉬었다가 돌아왔더니 우리 모두 편입을 받아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교회 천막학교와 여러 정규 학교 출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반 편성 시험을 치게 되었습니다.

정규학교에 갔더니 진짜 선생님들이 있었습니다(당시 천막학교 선생님 가운데 진짜 선생님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집사님)이 시험 보는 교실 문 앞에까지 따라 오셨습니다. “믿을 애는 너밖에 없다. 우리 학교(?) 실력을 보여주라”며 당부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은로 초등학교에서 1,2등을 다투는 아이도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반 편성시험 결과 제가 1등이고 은로초등학교 아이가 2등으로 밝혀졌습니다. 아직 학교 공사가 덜 끝난 탓에 합반수업을 하느라 교실 가득 학생들로 메워졌습니다. 1등을 했다 해서 금방 반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나중에 반이 셋으로 나누어졌는데 저는 3반 반장이었고 졸업 때까지 줄곧 전교 1등이었습니다.

이듬해 봄 제가 6학년 가운데 1등이고 동생이 2학년 전체에서 1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학교 가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거리의 천사들이었는데 그 사이 학생의 대열에 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졸업실 날 어머니가 처음으로 학교에 왔습니다. 다른 엄마들이 모두 “반장 엄마”라고 부르고 우등상 상품이 뭔지 풀어보라며 둘러싸는 것이었습니다.
중고교 진학 대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했습니다. 조금씩 인생길을 개척해 나가던 중에 스무 살 들면서 신학교에 입학하여 오랜 수업 끝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오랜 시일이 흐른 후 어린 시절 무상 교육을 통해 저를 가르쳤던 배봉오 집사님(남대문교회) 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어려운 시절 갓 결혼한 젊은 시절 젊음을 바쳐 가르치고 돌보던 학생 중에 목사가 되어 인사 온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나 봅니다.
"참 그때 자네 덕에 대접 많이 받았지. 처음엔 학교에서 천막학교 선생이이라고 무시하더니 나중엔 찾아가면 교장 선생님이 반기며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지-"
“잘 커줘 고맙구먼. 조금 더 빨리 오지 그랬나. 내가 지금 정년퇴직을 해서 제대로 대접을 못해 아쉽네. 먼 나라까지 가서 선교하느라 고생이 많겠네. ”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배봉오 선생님” 당신은 나의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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