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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책을 읽을 때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집중해서 읽기보다는
읽고 싶은 부분 아무데서나 읽기 시작했다가 아무데서나 덮고
다음 날은 또 전혀 엉뚱한 곳부터 읽기 시작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이렇게 요약을 해 놓으면 아주 반갑습니다.
물론 두 번을 집중을 해서 읽었는데도 깊은 이해는 못했습니다.
이런 건 요즘 말로 아마 엑기스라고 할겁니다.

**************************************
<답변>

<계약신학과 그리스도>는
간단히 정리하면 구약의 율법적 계약은 죽음으로 맺어지는 계약입니다. 제물을 잡아 갈라놓고 그 사이를 지나간다는 것은 자기 대신 제물이 죽으므로 용감하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성립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시대를 초월해 모두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한 가족이죠. 신약시대에서는 예수님이 영원한 구속주로 오심으로 더욱 확실한 새 계약이 맺어진 것입니다. 이 계약은 성만찬을 통해 기념되고 기쁨의 축제를 나눕니다.
계약은 결국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약속입니다.

계시록 21:1-7에 승리의 장면이 나옵니다.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은 자들의 승리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결과가 있기까지 성도는 지상 생활 동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답니다. 아래 말씀은 우리의 출신과 현 주소를 확실히 보여 주는 말씀이랍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예수님의 구속의 피가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다운 신분 유지가 가능하답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살전 5:5).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존재이기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답니다. "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빌 1:28)

어떤 단어나 문장 해석보다 마음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신앙은 결국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성립되어 있다면(결국 계약을 통한 약속 성취)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시각으로 만물을 바라보고 모든 글이나 마음 상태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쉽게 가까워지듯이 하나님의 세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단어는 보석처럼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답니다.


히브리어 외에 어떤 나라 말도 하나님과 직접 연관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약 헬라어만 해도 전형적인 이방 문화에서 사용하던 공용어였습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조심스럽게 분석해서 분류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등 많은 노력이 필요했답니다.

단어의 의미를 부여할 때 가장 최상의 표현을 택해 "하나님"을 향해 표기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보입니다. 가장 높고 가장 귀하신 분이니까요. “보좌” 가 불교 전용 용어가 아니라면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문자로 표현하기 앞서 마음상태가 더 중요하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 있었다면 귀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대개 그 나라 “신”의 명칭을 그냥 도입해 쓰기도 한답니다.중국어 성경에서 상재는 본래 옥황상재를 가리키던 말인 듯-
한국 교회는 회개, 중생, 구원, 믿음, 칭의, 성찬, 계시, 계약 등 기독교 전용 용어를 많이 갖추고 있어 감사할 따름이랍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대화중에 너무 “하나님”을 많이 쓰는 태도가 더 문제같답니다. 하나님이란 용어를 꼭 하나님과 연관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심지어 반말 투로 인용하기도 하고 가까운 친구(?) 다루듯이 하는 예도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 "주"란 말은 본래 노예가 주인을 칭할 때도 쓰고 높은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도 쓰였지만 예수님을 의미할 때는 단 한분 주님으로 의미가 고정되었습니다. 점차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요(행 9:20) 그리스도이심(행 9:20)이라는 고백과 재림"주"로 받들게 되었습니다. 대신 이런 해석은 신앙인들에게만 국한됩니다. 특별한 의미는 특별한 사람 몫입니다.

지난번 쓸 글 가운데 죄의 의미를 해석할 때“to miss the mark" 이라고 했는데,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뜻(계획과 섭리)에서 비켜간 것이 죄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이건 좀 넌센스같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 “죄”란 단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포츠 용어를 도입(실제로 성경에 이런 예가 많음)해서 본래 “실수”를 의미하던 단어가 점차 “죄”로 자리매김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일단 성경 용어로 정착하게 되면 세상에서 사용하는 뜻과 구별해야 합니다. “에클레시아”만 해도 당신 민회를 의미하는 말이었지만 성경에 와서 “교회”로 사용되고 결국 하나님의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제 교회 밖에서 어떻게 해석하던지 관계없이 기독교 고유의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단어의 시작 단계나 이방에서의 의미로 거슬러 올라가 보는 태도가 단어의 역사를 이해하는데는 필요하지만 자칫하면 성경에서의 의미 또는 기독교 사회에서 통용되는 뜻을 상실(?)할 우려도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의미를 찾고 음미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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